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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4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자연스럽게 이 일의 증인이 되어
본문 : 사도행전 3장 15절, 사도행전 4장 19~20절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사도행전 3장 15절, 새번역>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9~20절, 새번역>
샬롬! 부활 후 첫 번째 주간도 은혜 가운데 보내셨습니까? 아직은 6일 정도 남아 있긴 하지만 어느덧 4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4월도 이제 우리의 곁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5월이 다가옵니다. 세월이 흘러감과 동시에 우리의 신앙도 차곡차곡 성숙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오늘 4월 마지막 주일, 저희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3장 15절과 사도행전 4장 19~20절을 본문으로 하는, ‘자연스럽게 이 일의 증인이 되어’라는 제목의 말씀입니다. 부활 그 후,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시리라 믿고 기대하며 오늘도 함께 말씀에 청종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새번역으로 준비된 본문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사도행전 3장 15절, 새번역>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9~20절, 새번역>
운전을 하다가 신호에 걸려 잠깐 정차했을 때 가끔씩 보게 되는 현수막이 있습니다. 바로 ‘목격자’를 찾는 현수막입니다. 어떤 사고가 일어났는데 사고에 대해서 도무지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것인지 애타게 목격자를 찾고 있다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었습니다. 읽어보니 단 한 명의 목격자라도 있다면 쉽게 풀릴 수 있는 일인 것 같은데 꼭 목격자가 나타나기를 바라며 그곳을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1달 후, 같은 곳을 지날 때에도 같은 현수막이 있으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고를 해결하지 못한 당사자들은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현장에서 직접 보았어도, 그 누구보다 생생하게 두 눈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냥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두려움 때문에 외면하고 싶은 것이며, 애써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목격을 했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찾아오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이 신경 쓰이고 두려워서 말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목격자라고 밝히는 순간부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을 귀찮아하거나 싫어해서 말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을 보다보면 누가 봐도 분명한 목격자이지만, 목격자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 자연스럽게 증인이 되었지만 증인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4복음서 모두에 등장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3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동고동락(同苦同樂)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모두 스승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된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하였다. <마태복음 26장 31절, 새번역>
가장 확실했던 12명의 목격자들, 12명의 가장 확실한 증인들은 안타깝게도 목격자가 되거나, 증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12명 중 1명은 스승을 팔아 버리기까지 합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예수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자신들의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없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당장이라도 반역자로 몰려 십자가에 예수님과 같이 달려 죽을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아등바등 그래도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미 하셨던 이 말씀을 완전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39절, 새번역>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떵떵거리며 다녔을지 몰라도, 예수님이 잡히시니 이제 영광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은 이 잡히심을 시작으로 앞으로 있을 일련의 사건들이 자신들을 향한 놀라운 계획이라는 것을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자연스럽게 목격자가 되고, 증인이 되어야 할 12명의 제자들은 당시에는 아직 준비되지 못한 모습으로 그렇게 오히려 침묵한 채 숨고야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12명의 제자들을 손가락질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걸음아 날 살려라’ 제가 제일 먼저 도망쳤을지도 모릅니다. 목격자가 되어 주기를 바랐지만, 증인이 되어주기를 바랬지만 우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12명의 제자를 보면서 기대하며 바라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보면서 기대하고 바라고 계시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증인이 되고, 자연스럽게 목격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음으로 선포해 나가야 할 우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날 그 때의 12명의 제자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돌아보게 되는 순간입니다. 부활 그 후에도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삶으로 말하고 있지 못하는 무기력한 목격자이며, 그저 외면하며 사는 증인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4복음서가 끝나고 ‘사도행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4복음서만 기록되어 있다면, 4복음서에 등장하는 12제자에 대해서 그저 실망밖에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2제자와 같은 내 모습에 내내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으셨고, 예수님의 약속이 있었으며, 성령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무기력하고, 침묵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완전히 180도 달라진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도망치거나 침묵하거나 숨지 않고 ‘능력을 행하는 목격자’, ‘믿음으로 선포하는 증인’이 되고자 시작하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이 선포를 방해할 수 있는 두려움은 없음을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현수막에서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 중 베드로와 요한이 그 목격자가 되고, 증인이 되자 일어나게 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로 하나님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을 아름다운 문이라고 불리는 성전 문 곁에 내려놓고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렇게 홀로 성전 문 곁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구걸을 하기 시작합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 중에 혹여나 긍휼의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 날은 아주 운이 좋은 날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날들이 꽤나 배고픈 날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계속해서 구걸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의 기도 시간이 되었기에 그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곧바로 베드로와 요한을 향해 소리치며 구걸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4복음서를 통해 알던 베드로와 요한답게 귀찮아하며 모른척하며 지나쳐 버릴까요? 다행히 아닙니다. 우리가 알던 베드로와 요한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베드로와 요한은 4복음서에 등장하는 그들과 사뭇 다른 이들입니다. 완전히 다른 언어와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보고, 그에게 말하였다. "우리를 보시오!" <사도행전 3장 4절, 새번역>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깡마른 몸매, 새까맣게 타있으며 희망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 기대감 없는 표정, 힘없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서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라고 말하자 이윽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못 걷는 사람은 무엇을 얻으려니 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도행전 3장 5절, 새번역>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보았겠습니까? 분명히 자신들을 보라고 했으니 응당한 무엇인가가 주어질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의 말에 힘이 쭉 빠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돈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3장 6절A, 공동번역>
아니 돈도 없는 사람이 뭣 하러 자신들을 보라고 하는 것인지 짜증이 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안 그래도 힘든데 사람을 놀리는 것이냐고 따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돈은 없다며 말한 베드로는 계속해서 확신에 찬 얼굴로 이렇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 하며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사도행전 3장 6B~7절A, 공동번역>
물론 ‘예수’라는 이름은 그 못 걷는 사람도 들어본 적이 있던 이름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예수에 대해서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특별히 몸이 아픈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특별한 이름이었습니다. 주변에 수많은 이들이 고침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번쯤은 꼭 만나고 싶은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니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는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고 분명히 들었기 때문입니다. 소란이 생겨 시신을 빼돌렸다느니, 진짜 부활하고 승천했다느니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사람들에게 잊혀 진 이가 바로 ‘예수’였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바로 그 예수를 베드로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그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순간 그 못 걷던 사람이 얼마나 황당했을지 충분히 예상이 되지 않으십니까? 만약에 제가 그 사람이었다면 진심으로 화가 났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향해 험한 말을 쏟아 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예수? 뭐? 그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지금 장난 하는 거야?’ 소리 소리를 지르며 베드로와 요한을 부끄럽게 만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가 황당해 하고 있을 그 사람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더니 이 못 걷는 사람의 오른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못 걷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닙니까? 정말 이건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자신감이 넘친다고 해도 어떻게 일으켜 세울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40년 동안이나 걸어본 적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일어설 수조차 있겠습니까? 그의 스승 예수가 현장에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무기력했던 목격자였고, 침묵했던 증인, 예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과 같은 능력을 가졌단 말입니까? 예수 그 이름을 의지하면 무슨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예수 그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에게 잡힌 오른손이 점점 공중으로 들려 올려 집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손이 슬슬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자신의 힘으로 서야 하기에 몹시도 당황하고 있을 그 찰나, 그 못 걷던 사람은, 생생하게 아주 생생하게 체험을 시작합니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사도행전 3장 7B~8절A, 새번역>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실 저는 모릅니다. 단 한 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다리와 발목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 반대의 경험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마치 에스겔서 37장에 나오는 마른 뼈들이 큰 군대가 되었던 그 때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생기를 받은 것일까요? 다리와 발목에 힘이 들어가자 그 사람은 일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놀라운 사건은 일어나자마자 바로 걸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걷는 것을 넘어 뛰기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일어서는 법도, 걷는 법도, 달리는 법도 배운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어섰고, 걸었고, 뛰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행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사도행전 3장 8절B, 새번역>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자신에게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곤 베드로와 요한에게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하며 힘껏 포옹을 했을 것입니다. 서로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못 걷던 사람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 있던 모든 이들이 목격자이고, 증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걸어 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또 그가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고서, 그에게 일어난 일로 몹시 놀랐으며, 이상하게 여겼다. <사도행전 3장 10절, 새번역>
이 반응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일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당장 그 사람과 베드로와 요한을 따라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곁에 머물러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서, 솔로몬 행각이라고 하는 곳으로 달려와서, 그들에게로 모여들었다. <사도행전 3장 11절, 새번역>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의 주옥같은 설교가 이어집니다. 자신들의 모습은 철저히 감춘 채, 이 순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행하는 목격자로서, 믿음으로 선포하는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선포하는 베드로입니다.
근데 혹시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반겼던 이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사람들, 지금 솔로몬 행각에 몰려든 사람들, 이들은 모두 다 같은 무리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을 향해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선포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베드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작정하였을 때에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거절하고, 살인자를 놓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사도행전 3장 13~15절, 새번역>
베드로와 요한은 바로 자신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증인’이기에 침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증인이기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증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자신들이 도망치고, 숨고, 외면했던 시간의 아까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40년을 못 걷던 사람이 일어나 걸으며 뛰며 찬양하는 모습을 본 모든 이들이, 자신들과 같은 증인이 되기를, 그래서 당장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수가 하나 발생합니다. 베드로의 선포와 설교가 무르익어 갈 때쯤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온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설교하던 그 때처럼 또 그 자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파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가두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발 늦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5천명이나 되는 남자 어른들이 믿음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통쾌하고 기분 좋은 기록입니까?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전하고 있는 것에 격분해서, 사도들을 붙잡았으나,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다음 날까지 가두어 두었다. 그런데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믿는 사람이 많으니, 남자 어른의 수가 약 오천 명이나 되었다. <사도행전 4장 2~4절, 새번역>
그리고 다음 날 이제 목격자와 증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바로 자신들을 위협하는 ‘권력’ 앞에서 사실대로 목격한 그대로 ‘증언’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때 두려움을 느껴 위증을 하거나 모른 체하거나 침묵하게 됩니다. 과연 베드로와 요한도 마찬가지일까요? 못 걷는 사람이 일어나 걸으며 뛰는 것을 함께 본 이들에게는 그 믿음의 선포가 통했지만 과연 그 어떤 경험도 없는 유대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 앞에서도 가능할까요? 무엇보다 대제사장 안나스를 포함하여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까지 모인 자리에서 말입니다. 자신들보다 훨씬 똑똑하고,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이들 앞에서 성경 말씀에 대해서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 모든 의문에서 저를 한방에 해소 시켜 준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이 한 구절로 인해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에 대해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사도행전 4장 8절A, 새번역>
성령 하나님이 베드로와 함께 하셨습니다. 충만히 임재 하셔서 베드로로 하여금 담대하게 말씀을,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담대함에는 어떠한 꾸밈도, 만들어낸 이야기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경험한 그대로, 베드로가 본 사실 그대로 선포합니다. 오히려 절호의 찬스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든 장본인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약’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시편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저 말씀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성경 박사들 앞에서 진짜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이 살아 있는 말씀이 무엇인지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베드로가 말을 할 때 모든 사람이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새번역>
당연히 모인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에 배운 것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가를 보면서 놀라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흠집을 내기에도 방법이 없었던 이유는 베드로와 요한이 그 예수와 동행했던 제자들이었기 때문이었고, 40년을 못 걷던 이도 두려워하지 않고 베드로와 요한 곁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이 사람에게 이 자리에 서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 스스로가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선 것입니다.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직접 체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트집을 잡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산 증인’이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상상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며 살아나 살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3명의 능력 있는 목격자요, 믿음의 선포를 하는 증인들은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을 잠잠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을 포함한 모든 이들은 ‘멘붕(멘탈붕괴)’ 상황에 빠졌습니다. 오로지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짧은 회의 끝에 이렇게 이야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그 두 사람을 불러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다. <사도행전 4장 18절, 새번역>
이 말을 듣고 난 후 베드로와 요한의 답변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앎이, 베드로와 요한의 고백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 구절이 바로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9~20절, 새번역>
부활 그 이후를 살아갈 우리들의 이름은 바로 ‘목격자’입니다. ‘증인’입니다. 그런데 모른척하고 외면하는 목격자가 아닙니다. 침묵하는 증인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내가 경험한 그대로를 ‘말하며 살아내는’ 목격자와 증인입니다. 능력 있는 목격자로, 믿음의 선포를 하는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한 번 잘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까?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까?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입니까? 그리고 그 판단이 끝난 후에는 우리의 삶이 꼭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자연스럽게 증인이 되겠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증인을 통하여 언제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미궁에 빠진 모든 믿음의 문제들을 해결할 목격자가 되도록, 우리 모두 이제 자연스럽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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