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영되는 TV드라마 중에 ‘엄마가 뿔났다’라는 것이 있다. 심심한 날 쳐다보고 있으면 하나씩은 건진다. 김수현작가의 드라마가 아닌가.
김수현의 드라마에는 모든 등장인물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녀는, 내가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재벌가 왕비병 마나님캐릭터에도 수긍이 가게 만든다.
‘맞아, 저런 사람도 있을 거야’ 를 넘어, 자기자신도 어쩔 수 없는 ‘기질’이라는 것에 머리를 내두르게 만든다. 김수현의 탄탄한 대본과 완벽주의에 촉발된 연기자의 투혼이 맞물린 결과이다.
한 번은 무심히 ‘엄마가 뿔났다’를 보고 있었다. 마침 할아버지의 러브스토리가 펼쳐지고 있었다. 70대인 이순재의 사실적인 연기가 돋보였다. 그리곤 이 사건을 둘러싼 가족들의 온갖 반응이 펼쳐졌다. ‘아하, 드라마가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는 역지사지의 훈련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TV 앞에서는 뇌가 작동하지 않는다해도, 35년간 드라마를 주름잡아온 김수현이라면 말이다. 저 빼어난 리얼리티와 심층적인 심리묘사를 자랑하는 김수현의 드라마라면, ‘모의체험’이나 ‘대리만족’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1943년생, 66세
1968년 라디오 연속극 “저 눈밭에 사슴이”로 데뷔
1972년 TV드라마로 옮겨 “새엄마” 이후 쉴 틈없는 작품활동
1984년 “사랑과 진실”로 76% 시청률 기록, 당시만 해도 파격적이었던 1억 고료 받아.
1987년 “사랑과 야망” 역시 70%대 시청률 기록.
1991년 “사랑이 뭐길래” 1995년 “목욕탕집 남자들” 로 전성시대 계속. ‘대발이 아버지’는 아직도 가부장적인 남자를 표현하는 말로 쓰일 정도. 8,90년대 그녀의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이면, 수돗물 사용량이 줄어들고 영업용 택시가 텅텅 비었다는 전설.
1999년 “청춘의 덫” 리메이크
2004년 “부모님 전상서”
2007년 “내 남자의 여자”
2008년 “엄마가 뿔났다”
사진출처 http://kimdooho.interview365.com/233 김두호의 별들의 고향
대충 내가 들어본 드라마 위주로 뽑아본 것이다. 이처럼 그녀는 무려 35년간, 대한민국 드라마를 완벽하게 장악해 왔다. 어느 장면 하나, 어느 캐릭터 하나를 허술하게 다루지 않는 깐깐함을 가지고, 자신의 왕국을 건립한 것이다.
“부모님 전상서”에서 그녀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재주’를 앞세우기보다 인생에 대한 성찰이 돋보였다. KBS에서 좋은 드라마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했단다. 이에 김수현이 맘먹고 차분한 드라마를 쓴 것 같다. 출연자에게 “시청률은 잊어라. 대신 이 작품에 출연하는 게 창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니 말이다.
아주 정갈한 드라마였다. 송재호가 저녁마다 부모님께 쓰는 편지 나레이션은 많은 시청자를 가르쳤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자신의 부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내 남자의 여자”에서 다시 한 번 변신한다 “왜 불륜을 집어넣었는지도 모르겠는 무늬만 불륜인 드라마가 깝깝해서 시작해보는 ‘이야기’” 라고 했다. 과연 진부한 주제라도 김수현이 쓰니 달랐다. 그녀는 자극적인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불륜이 아닌 인생이야기까지 파고 들어갔다. 김희애의 신들린 연기 또한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사랑의 덧없음에 치를 떨며 떠나는 김희애를 공항으로 태워다주며 동생이 한 말을 기억한다.
“일을 해요, 일은 배신을 안하잖아요.”
어디선가 보니, 김수현은 현실보다 드라마 속을 더 현실처럼 느낀다고 한다. 자기 안에 들어있는 많은 인물들을 끄집어내면 드라마가 된다고도 한다. 그러니 그녀가 자신의 드라마와 인물에게 쏟는 애정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간다. 김수현의 공식사이트에서 자료를 훑다보니, 1년에 한 편 꼴로 숨가쁘게 드라마가 쏟아지는 가운데, “2001년 휴식”이라는 구절이 딱 한 번 눈에 띄었다. 거의 신기에 가까운 생산력과 집념에 감탄할 뿐이다.
그녀는 단순한 상업주의 작가가 아니다. 김수현이라는 통속적 이름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주철환, 이대 언론홍보 영상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