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포 金萬英(1624-71)의 남포집 [ 南圃集 ]
16권, 부록 2권 합 6책. 403판. 활자본. 1831년 간행.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圖書番號:고4B1-남845ㄱ), 경인문화사 영인본, 이화여자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圖書番號:고서 811.085 김41) 조선후기의 학자 김만영의 시문집. 저자의 자는 영숙(英叔), 호는 남포(南圃). 본관은 당악(棠岳). 1698년 나만성(羅晩成)의 편집을 거쳐 1831년(순조 31) 5세손 양국(亮國)이 간행. 권1∼6에 시 567수, 권7에 부(賦) 2편, 사(辭) 2편, 권8에 소 2편, 권9에 서(書) 17편, 권10에 서(序) 11편, 기 9편, 발 3편, 권11에 경의설(經義說) 17편, 권12에 찬(贊) 3편, 명(銘) 3편, 송(頌) 1편, 잠(箴) 8편, 상량문 1편, 제문 7편, 묘지명 2편, 권13에 논(論) 2편, 전(傳) 3편, 격(檄) 2편, 의(義) 1편, 권14·15에 일기, 권16에 경세통전(經世通典), 부록의 권1·2에 가장·행장·묘지명·서술(敍述)·제문·축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500개에 달하는 시(詩)는 각 체의 시가 구비되어 있는데, 주로 춘하추동 사계절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 많으며, 또한 「증학도(贈學徒)」 등 교육적인 작품도 상당수에 달한다. 시의 흐름은 온후하고 담아하면서 질직(質直)하고 간결해 조금도 꾸미거나 고답적인 구석이 없다고 평가된다. 소 가운데 「만언소(萬言疏)」는 1657년(효종 8)에 올린 글로, 임금의 도리를 다할 것과 백성의 시폐를 언급했는데, 특히 부역(賦役)·산성(山城)·치병(治兵)에 대한 개혁문제를 중점적으로 강조하였다. 이 소는 6,620자에 달하는 장편의 명문이다. 서신에는 이수인(李壽仁)·문사고(文師古) 등과 이기설·사단칠정에 관한 의견을 교류한 것이 있는데, 이는 경의설에서 구체화되어〈원리기설(原理氣說)〉〈중용역상소결(中庸易象小訣)〉등 경전의 의문나는 부분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 것이다. <중용>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고 덕성(德性)·인심(人心)·도심(道心) 등 구체적인 항목을 들어 고찰하고, 그 이해를 돕고자 〈인구태극도(人具太極圖)〉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 등 6개의 도식을 제시하였다. (書)의 별지는 주로 『심경(心經)』에 대한 질의·문답과 예설에 관한 논술이다. 그 가운데 「우산질의서」에서는 안방준(安邦俊)의 「우산답문서(牛山答問書)」에서 절의(節義)를 도학(道學)보다 앞세운 점을 비판하고, 저자는 절의와 도학의 일치를 강조하고 있다. 경의설(經義說) 가운데 「인구태극도(人具太極圖)」·「역상소결(易象小訣)」·「중용수장지도(中庸首章之圖)」·「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 등에서는 경전의 심오한 부분을 이해하기 쉽게 도식을 붙여 설명하고 있다. 격 가운데 「광나양읍전예격(光羅兩邑戰藝檄)」은 영광·나주 두 고을 선비들에게 돌린 격문인데, 음력 2월 15일을 기해 백일장을 열어 두 고을이 대결하자는 내용이다. 일기의「남교일기(南郊日記)」는 저자가 남평(南平)에서 살고 있을 때인 1659년부터 1665년(현종 6)까지의 일기이다.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남인·서인 사이에 있었던 예설 논쟁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당쟁사를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경세통전」은 사농공상병승(士農工商兵僧)의 6과로 나누어 그 전례와 직분을, 〈논내관제전례(論內官制典例)〉에서 중앙관직의 연혁과 개혁의 경위를 기록했는데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과 대조가 되고 있다.
남포 김만영은 숙종 35년 무오년에 풍산사우(楓山祠宇)에 제향됨祭享.
金萬英(號南圃 洗馬 本棠岳 (당악). 鄭遵一(號向北堂 贈直提學 本晉州). 鄭 晛(號草心堂 參奉 本晉 州). 任世復(號日新齋 贈持平 本豊川).
“남포(南圃) 김만영(金萬英)의 『중용(中庸)』 해석과 그 의미”
(출처: 최석기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남명학연구소장) <한문학보> 23권, 2010년)
17세기 전라도 나주에서 활동한 재야 학자 金萬英(1624-1671)의 『중용』 해석에 초점을 맞추어 특징과 그 의미를 살핀 것이다. 김만영은 居敬·窮理를 두 축으로 하는 退溪學을 존신하여 致知와 力行을 모두 강조하였으며, 萬殊의 각기 다름을 극복하고 一本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여 天地를 인간의 부모로 보는 천지오부모론(天地吾父母論)을 주장하였다. 김만영의 경학에 관한 설은 『중용』 해석에 관한 分節說과 圖說이 돋보인다. 김만영은 朱子의 4분대절설, 饒魯의 6분대절설, 「讀中庸法」의 6분대절설을 모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5분대절을 주장하였다. 『중용』에 관한 圖說에도 그의 독자적인 해석이 드러난다. 「中庸首章之圖」는 性·道·敎를 주제어로 파악해 도표화한 것이며, 「人心道心圖」는 王白의 「人心道心圖」에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독자적인 시각으로 새롭게 그린 것이다. 이 두 도표는 주자의 설에 근거한 것이지만, 주자 및 왕백의 해석과 일정하게 변별되는 독자성을 갖는다. 그는 또 『중용장구』 제1장의 존양·성찰에 해당하는 부분을 중시하여 「中庸首章存養省察之圖」를 별도로 그렸는데 존양공부와 성찰공부를 통해 至靜·至動에 이르러 致中和함을 도표화한 것이며, 『중용장구』 제27장의 尊德性·道問學을 存心과 致知로 나누어 「德性問學圖」를 그렸다. 이 두 그림은 주자의 설에 따라 그린 것으로, 독자적인 성격보다는 『중용』의 해심적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한 것으로, 그의 학문성향을 드러내주는 그림이다.
금사정 [錦社亭]과 [금강11인계(錦江契)]
조선 중기 중종 명종 시기에 직장 벼슬을 지낸 나일손(羅逸孫), 승지를 지낸 임붕(林鵬), 생원 정문손(鄭文孫), 진사 김두(金斗), 생원 김식(金軾), 김기(金曁), 등 11인이 '금강계(錦江契)'라는 계를 조직하여 세운 정자이다. 금강계는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던 나일손 등 나주 지역 출신 유생들이 중중 14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관한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여 금강(錦江, 지금의 榮山江) 승지를 찾아 은둔한 명현(名賢)들의 결사였으므로 이 계의 성격은 가히 짐작이 된다. 금사정에서 계원들은 불계지회(祓禊之會)를 약속하는 모임을 가졌다고 하니, 이는 상원절(上元節)에 행하였던 세시행사(歲時行事)의 계회였으며, 또 난정계회(蘭亭契會)를 이루었다고 하니, 문명(文名)이 높은 그들의 교양으로 보아 일종의 시계(詩契)의 모임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65년 (현종 6) 김기의 후손되는 김만영(金萬英)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나기(羅棋), 김이상(金履相)등 11계원의 후손들이 다시 수계하여 11계원의 후예들은 다시 수계하여 금란(金蘭)의 우의를 다지게 되었다. 1869년(고종 6) 중수하였으며, 1973년 새로 세워 오늘에 이른다.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로, 대청형 구조이다. (출처: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호남문화연구>24집 1994, “전라도 누정 연구”).
錦江重修禊序(금강중수계서)
(출처:金萬英,, [南圃集] 全南大, 湖南文化硏究所 소장) 錦江古有十一人禊。盖修蘭亭舊事也。以時世較之。當我中仁明三聖代。太平文明二百年餘。南中形勝。我州爲最。時則我高王父伯仲氏曁林正字鵬,羅主簿逸孫諸彥。約爲祓禊之會。鸞翔鳳翥則有朴銀臺筆。竹淸松心則有羅諫院詩。一代風韻。于可想矣。繼此之後。烟波,思庵二老先生耕釣之暇。公退之隙。相携父老。克修前事。久益敦厚。不幸島夷之變六載兵燹。盖自萬曆丁酉。修睦之信廢而未講。往在某年間。我大父公慨然囑鄕黨老少。略述古意。繼修其事。前修後昆雖未克盡會一席。而和厚之風。動曜州里。崇禎末時事艱憂。而先進父兄踵武而逝後。無有繼而述之者有年矣。皇明南渡後二十一年乙巳。萬英自永平還鄕。鄕黨諸老袖一冊子來叩。余目之。卽我季父公與鄭上庠國賢重修舊禊券也。再拜敬閱。愴然久之。且諗于諸公曰社禊之會。盖祖于成周祓禊之禮。洛邑流觴之儀。魏晉之後。會稽之勝。雄鳴千古。而夷考其實則淸談而已。詩酒而已。安足爲名敎道哉。惟我錦江之禊。特以桃花爛春爲戒。則當日諸君子敦本尙義。講磨以仁之實可見矣。是以從遊長老之間。揖讓樽俎之列者。出而爲聖代羽儀則有二養相國。超而爲鳳翔千仞則有淸心高士。其薰陶德性。奬掖輔導於旅酬登降之際者。爲如何哉。今諸公刱百年之業。遵前賢之事。可謂美矣。抑未知春秋令日。把盃臨高。漂蕩風流而已耶。將揖遜進退。冬禮夏詩。克修古轍之能 一作務 爲耶。冠昏喪祭。慶吊之盡其情。勖善補過。出入而一乃心。釀出吾鄕黨禮讓之風。毋得罪於吾古先父兄諸君子之責。其不在吾社中諸公耶。抑有一說。惟古禊一十一員之子孫。居吾鄕者何限。而何故忘祖先一心交契之如金蘭。而相視之如秦越哉。此尤吾禊中所相誡者也。僉曰敬服吾子規。仍錄其語。弁諸卷首云。(글/南圃 金萬英 번역/羅千洙)
錦江古有十一人禊。(금강고유십일인계)/금강에는 예전에 11인 禊가 있어
盖修蘭亭舊事也。(개수란정구사야)/대체로 蘭亭의 옛 일처럼 행하는 것이니
以時世較之。(이시세교지)/세속과는 비교되는 것이다.
當我中仁明三聖代。(당아중인명삼성대)/우리 중종, 인조, 명종 세 어진 임금의 세상에서
太平文明二百年餘。(태평문명이백년여)/문명이 태평하기를 2백여 년
南中形勝。(남중형승)/남방의 형승이 我州爲最。(아주위최)/우리 고을이 가장 성대하였다.
時則我高王父伯仲氏曁林正字鵬,羅主簿逸孫諸彥。(시칙아고왕부백중씨기림정자붕,나주부일손
제언)/이때에 나의 고조부 伯仲씨와 함께 정자 林鵬, 주부 羅逸孫과 여러 선비들이
約爲祓禊之會。(약위불계지회)/禊祭의 모임으로 부정을 없애자고 약속하여
鸞翔鳳翥則有朴銀臺筆。(란상봉저칙유박은대필)/난새와 봉새가 나는 듯하다고 승정원의 朴公(朴
祐)이 썼으며 竹淸松心則有羅諫院詩。(죽청송심칙유나간원시)/맑은 대나무와 소나무의 마음이라
고 사간원의 羅公(羅逸孫)이 시를 지었으니
一代風韻。(일대풍운)/한 시대의 風采와 韻致을 于可想矣。(우가상의)/상상 할 수 있다.
繼此之後。(계차지후)/이 다음부터는 烟波,思庵二老先生耕釣之暇。(연파,사암이로선생경조지
가)/연파와 사암 두 늙은 선생이 여유롭게 밭을 갈며 낚시질하였는데
公退之隙。(공퇴지극)/공직에서 물러나 여가로 相携父老。(상휴부로)/부로들과 손을 맞잡고
克修前事。(극수전사)/능히 앞일을 닦아서 久益敦厚。(구익돈후)/갈수록 돈후하여졌다.
不幸島夷之變六載兵燹。(불행도이지변륙재병선)/불행히도 섬 오랑캐들이 변란을 일으켜 6년간
兵火가 있어 盖自萬曆丁酉。(개자만력정유)/대체로 만력 정유년(1597년)부터
修睦之信廢而未講。(수목지신폐이미강)/친목을 도모하는 신의가 폐하고 아직 시행되지 않았다.
往在某年間。(왕재모년간)/지난 어느 해에 我大父公慨然囑鄕黨老少。(아대부공개연촉향당로소)/
나의 대부공께서 개탄하는 모습으로 향당의 노소들에게 부탁하면서
略述古意。(약술고의)/옛 뜻을 간략히 기술하고 繼修其事。(계수기사)/修禊의 일을 계속하도록
前修後昆雖未克盡會一席。(전수후곤수미극진회일석)/앞에서 修禊한 후손들이 모두 다 한 자리에
모이지 못하였지만 而和厚之風。(이화후지풍)/온화하고 돈후한 풍치로
動曜州里。(동요주리)/고을과 마을이 빛나도록 움직였다.
崇禎末時事艱憂。(숭정말시사간우)/숭정년 말(1644년)에 時事가 어렵고 근심되고
而先進父兄踵武而逝後。(이선진부형종무이서후)/앞선 부형들이 차례대로 돌아가신 뒤
無有繼而述之者有年矣。(무유계이술지자유년의)/그것을 계승하는 것이 없이 몇 해가 되었는데 皇
明南渡後二十一年乙巳。(황명남도후이십일년을사)/명나라가 남쪽으로 옮겨간 뒤 21년 을사년
(1665년)에 萬英自永平還鄕。(만영자영평환향)/萬英 스스로 영평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자료제공 김성례 교수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