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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광교산(詩山會 제165회 산행)
산 : 광교산(582미터)
코스 : 경기대 후문-정상(하산은 정상에서 결정)
소요시간 : 4시간
일시 : 2011년 8월 13일(토) 10시
모이는 곳 : 수원시 연무동 경기대 후문(동문)-교통편은 박 총장 문자메시지 참고
준비물 : 막걸리, 안주, 과일, 카메라(하산 후 뒤풀이)
연락 : 박형채(011-250-5382)
사진 : blog.daum.net/sisan20
산행기 : blog.daum.net/yc012175
카페 : cafe.daum.net/K-20
1.詩를 통한 時論
입추 - 조운(1900~?)
봄가고
여름도 가고 이제는 또 가을이다 누구라 하나곱다는 이 없것만은
철없는 이 마음은
오는 철 가는 철에
무엇을 이리도 기다리노?
지는 꽃을
지는 꽃을
어떻게 합니까
꾀꼬리가 운대도
모르는 척하고
저 혼자 지는 꽃을
어떻게 합니까.
여름 가면 가을 꽃 피어난다. 지난 계절에 피었던 꽃이 자리를 내줄 시간이다. 찌는 볕 아래 울타리를 타고 환장하리만큼 화려하게 피었던 으아리 꽃이 소리 없이 시들었다. 여름의 끝자락을 붙들고 기억 저편으로 떠날 채비다. 꽃 울타리 따라 분주히 오가는 청설모의 법석도, 꾀꼬리의 지저귐도 모른 척하고 고요히 떨어지는 꽃 따라 여름의 꼬리가 간당인다. 잔인했던 비바람 흩어지고 가을 향한 그리움이 하냥 깊어졌다. 가을이 우뚝 서는 입추다. 그러나 아직 한낮 햇살을 받아내는 맨 얼굴은 쓰라리다. 가을 기다리는 여름 아침의 철없는 마음은 하릴없다. <고규홍·나무칼럼니스트>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입추에 이르렀으니 가을의 길목에 서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세월이 빨라지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맥박이나, 숨 등 인체의 리듬과 반응이 느려지면 반대로 세월은 빨리 간다고 느껴지며, 정신적으로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미 가보고 겪은 일들이기에 현명하고 신중하게 대처하다보니 크게 별 볼 일이 없으므로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껴진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하여 우리는 시간이 더디 가게 느끼고 싶으면 무슨 일인가를 꾸미고 끊임없이 자극을 받고 치열하게 살면 빠르게 흐르는 세월을 조금은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여생이 길어졌으니 안주하지 말고 계속 치열하게 전진하며 열정적으로 사랑하자.<도봉별곡>
2.산행 후기
고창 선운산과 장성 축령산 치유의 숲(2011. 7. 23-24)
참석 : 임용복, 이경식, 박형채, 신원우, 조문형, 남기인, 고갑무, 임삼환, 전작, 김용우, 이재웅, 김정남(12인의 산사나이들)
임 수석이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지 산우들을 고향의 산에 초대한다는 의사표시를 이 회장님에게 제안한 것이 두 달은 됐을 것이다. 구체화된 것은 안양 수리산에 올랐을 때 결정됐다. 그날 참석한 10명 중 8명이 참석의사를 나타냈으며 차편은 집행부의 고민이었으나 남기인 이사장이 흔쾌히 12인승 승합차를 내줘 집행부의 고민은 봄눈 녹 듯 사라졌으니 지금 생각해도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25인승 버스 대절료가 75만원이니 회비가 얼마 남지 않은 집행부의 고민은 적지 않았다.
12인이 넘을 경우 회원 중에서 승용차 한 대를 징발해야 하는데 도움쇠의 차는 년식이 오래되어 기름값이 만만치 않고 나는 운전이 싫은 사람이라 내심 고민이 많았는데 ‘하늘은 스스로 고민(?)한 자를 돕는다’고 12명이 딱 맞았으니 참석하지 못한 산우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시산회처럼 건전한 산사람들이니 그런 복(?)도 따라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앞으로 남기인 산우에게 다시 빌리는 것은 부담스럽고 미안한 일이다.
출발하는 날, 정시에 12인의 사나이들이 사당동에 모였다. 짐과 자리 정리를 하느라고 25분 정도 늦게 우리의 고향 남녘땅으로 당당하게 힘찬 출발. 뒷자리는 모르겠고 앞자리는 길을 인도해야 하는 임 수석이 타야하므로 한 자리는 그 중 그와 가까운 내 차지다. 타고 보니 발을 뻗을 곳이 없다. 말이야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하고 간다고 했지만 오고 가는 내내 쉬운(?) 일은 아니었음을 산행기에서 고백한다. 왼쪽 엉덩이 부근에는 안전벨트 암컷이 불쑥 나와 있어 점잖은 처지에 거기에 대고 갈 수 없어 피하려고 엉덩이를 임 수석 쪽으로 붙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몸이 조문형 산우 쪽으로 몰렸으니 뒤에서 보면서 내가 조문형 산우를 좋아해 몸이 그쪽으로 쏠린다고 난리다. 이것도 여행 내내 즐거웠던 해프닝이다. 하하! 여행 내내 참선 한 번 잘하고 왔다. 임 수석과 나 사이에 오고간 선문답 한 마디.
나-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임-서쪽에서 왔기 때문이다.
나-임수석의 등짝을 팼다.
이처럼 선(禪)이란 부처님의 말씀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니(불립문자) 말씀과 경전에 얽매이지 말고(교외별전) 몸과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온갖 번뇌와 망상을 끊고 버려(직지인심) 참 ‘나’를 찾아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남으로서 열반에 이르는(견성성불) 방편의 하나다. 세상은 모든 게 원인과 결과가 있는 괴로움의 바다와 같은 것이니 윤회의 굴레를 끊고 열반에 들면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일까. 깨치는 방편으로 위빠사나(명상)를 권하고 싶지만 깊이 들어가면 한 없이 복잡한 것이 불교니 지식과 신심이 깊은 사람도 아니므로 이 정도의 상식적인 얘기로 끝낸다.
내친 김에 1박2일의 일정이라 산행기가 길 것 같고 마음이 설레는 여정에 내가 쓰겠다는 마음이 일어 내가 기자를 자청하니 모두 애들처럼 웃으며 환영한다. 이 또한 즐거운 일이다. 참으로 순순한 사람들이다. 다만 나의 문장이 너무 길어 읽기가 불편하니 줄을 자주 끊어주면 좋겠다는 주문이 들어와서 그러자고 했으나 오랜 습관이 돼서 쉬운 일은 아니다. 참고로 문장은 장르에 따라 달라지지만 일반적으로 장문-단문-장문을 번갈아 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하니 알아두기 바란다. 이번 산행기는 기행문이라 해도 맞을 것이다.
승용차는 막히고 밀리는데 우리는 전용차선으로 당당하게 달린다. 오늘의 기사님은 항상 우리를 위해 수고해주는 조문형 산우다. 30분이 절약된다는 천안-공주 간 고속도로를 타는데 내가 처음 가본 길이라 하니 신원우 청장을 필두로 모두 믿지 않는 눈치다. 생각해보니 고향 영광을 갈 때는 집이 도봉구라 중부고속도를 타고, 올라올 때는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니 갈 일이 없었다. 광주를 갈 때는 항상 혼자였으므로 고속버스를 타고 가니 그 길을 모를 수밖에 없다. 하여 모두 수긍.
안전하고 점잖은 운전솜씨로 10시 40분에 고창에 도착하여 예정대로 시성(詩聖 : 이론이 있을 수 있으나 문학관에서 그렇게 부른다. 시문학이 꽃을 피웠던 당나라 시대에 이백을 詩仙, 두보를 시성, 왕유를 詩佛이라 했는데 미당도 그렇게 불러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미당의 생가와 외가가 있는 미당 서정주 시인 문학관에 들렀다. 임 수석이 사무실에 들러 안내를 청하였고 우리 또래의 관장으로 보이는 직원이 안내를 한다. 첫인사가 점잖고 사업과 공직의 고위층에 있는 분들에 틀림이 없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산우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누구 한 사람 빠지지 않고 잘 생긴 얼굴들임을 자신한다. 어느 모임에 우리만큼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광주고 20회 출신 동창들이며 시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모임인 ‘시산회’ 회원들이라 소개하니 ‘역시나’하며 자기가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하다며 놀라는 눈치가 역력하게 보인다. 후에 들으니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줄로 생각했다는데 그것은 틀렸다. 내가 봐도 모두 동안들이다. 우리들의 마음이 순수하니 남보다 더니 늙어 간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문학관 전체를 들러보고 설명을 들으려면 2시간도 부족한데 얼마의 시간여유가 있느냐고 묻기에 임 수석이 30분이라고 하자 그러면 자신은 인사말만 하고 자유롭게 들러보라고 하면서, 미당이 친일에 가까운 시 및 전두환을 칭송하는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한편으로 수긍이 간다. 원래 순진하고 순수한 분이라 조금 치켜 세워주면 별 생각 없이 써준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신부(新婦)라는 시를 낭송하고 간단히 끝내는데 그 시가 마음에 와 닫는지 이재웅 산우와 전작 산우는 계속 읊조린다. 두 사람 공히 순수한 사람들이란 점에서 시인과 닮은 점이 있다는 것에 후에 우리는 모두 공감했다. 나는 그의 친일시가 무엇이며 전두환을 칭송하는 시가 무엇인 가에 관심을 갖다보니 홀로 다니게 됐다. 액자에 쓰인 그의 이력 중에 학력이 고 중퇴인 것을 보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작지만 중요한 수확이다. 광주학생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을 보면서 수긍이 갔다. 그의 친일은 노회한 사람들에게 그의 순수함이 이용당한 것이다. 화가들이 그림을 치면서 부탁한 사람들의 인격까지 생각하고 그림을 그려주지 않는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이해가 갈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순수함을 악용하는 위정자들이야 정상배나 간상배, 모리배에 지나지 않는다.
실내에서 사진을 계속 찍다보니 후레시를 자주 사용하게 돼 밧데리가 벌써 약해지고 앞으로 찍을 사진이 많을 것 같아 고민이 됐지만 그것은 다음의 일이다. ‘고민의 95%는 일어나지 않는데 사람들은 미리 쓸데없이 걱정한다’는 것을 강조해온 신원우 청장도 옆에 있는데 밧데리가 닳아 나중에 못 찍더라도 지금 찍고 싶을 때는 찍어야지. 옛날에 금으로 끝나는 세 가지 보물이 있었다고 하던데 소금, 황금, 지금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지금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하여 내가 올리는 사진의 70%는 그곳에서 찍은 시들이다. 마침 남 이사장이 좋은 사진기를 가져왔으니 인증이나 기록에 관한 걱정은 접어도 되겠다. 임 수석은 내게 그 유명한 길마재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옥상으로 올라가면 신화로 유명한 길마재가 보인다며 오르자 했지만 미안하게도 옥상에 올라가서 내려온 터라 간절한 마음을 무시(?)하고 일층의 창을 통해 길마재를 봤다. 관람이 끝나고 무료였으니 우리의 모임이 명색이 시산회인데 입장료를 대신한다는 생각으로 시집을 사니 이재웅 산우도 함께 산다. 여러 제목의 시집이 있었는데 직원이 권하는 시집 ‘길마재로 돌아가다’를 8천원에 구입했다. 훌륭한 시인의 일대기를 30분 만에 볼 수는 없는 일이니 다음에 올 때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와야겠다.
다음 여정은 선운산인데 직원에게 점심을 먹을 만한 맛집을 물었더니 풍천장어는 가격에 비해 실속이 없고 ‘서해안집’이라는 시래기국집을 소개한다. 모두 동의하고 그곳에서 복분자 막걸리를 곁들여 맛나게 먹었다. 요즘 상업성 파워 블로거를 조사한다니 음식점 이름을 거명하는 것이 꺼려지지만 우리야 순수한 사람들이니 관계가 없는 일. 어제 학원이 방학을 하여 직원들과 3차까지 가서 과음을 했다는 남 이사장이 특히 반긴다. 피곤할 텐데 화성에서 사당까지 운전하고 와준 그와 그의 책임감에게 다시 감사를 드린다. 힘들었겠지만 끝까지 낙오를 하지 않고 따라와 줬다.
선운산에 오르는 길에 내가 30 여 년 전에 공부를 했던 참당암과 도솔암의 갈림길이 나오자 산우들 일부가 내려오는 길에 내가 공부했던 참당암에 한 번 들르자고 한다. 이정표를 보니 700미터. 고맙지만 ‘자취도 없을 텐데 가면 뭐하나’는 생각이 든다. 옛날 참당암으로 가는 길은 돌이 많아 뱀들이 숨기 좋아서인지 무척 많아 고기생각이 나면 떼로 몰려나가 뱀을 잡아먹었던 기억이 난다. 절에서는 육식이 금지됐으니 한창 때 배는 고프고 절의 식사는 어김없이 정시에 하루 세 끼니 돈은 없어 고기로 배를 채우기 어려워 애꿎은 뱀들만 희생이 됐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공부가 될 만하면 휴일 때는 사하촌(寺下村. 절 아래 동네)의 처자들이 놀러 와서 젊은 청년들의 혼을 빼놓고 가니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하산하여 사람들이 오기 어려운 곳으로 옮기게 됐다. 고향인 영광과 고창은 지척이어서 이곳으로 왔으나 그때는 처녀들뿐만 아니라 젊은 아줌마들도 눈에 어른거리면 정신이 흐려졌음을 뒤늦게 고백한다. 나무관세음보살. 혈기방장한 시기에 절에 틀어박혀 딱딱한 공부만 했으니 그 마음을 이해하시라. 어쨌든 두어 번의 실패 끝에 집중력에 문제가 있어 공부로는 성공을 못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하산하여 국방과학연구소에 취직을 하기에 이른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류의 공부란 수십 권의 법학책을 보통 10회독을 한다. 그러므로 이해를 하지 못한다거나 생각이 나지 않거나 하지 않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집중하느냐가 합격의 열쇠가 된다. 훗날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이 만나 ‘실패한 젊은 날의 초상’이라거나 ‘젊은 날의 만행(卍行)’이라 하여 자조 섞인 마음으로 웃기도 했지만 살면서 기름진 밑거름이 되었으니 결코 헛된 공부는 아니었다.
행장은 배낭 없이 물 한 병씩을 허리에 차고 이런저런 한담을 하면서 너른 길을 따라 오르며 도솔암에 도착하니 옛날의 쇠락했던 암자는 어디 가고 크고 깨끗한 건물들이 보인다. 옆으로 난 가파른 계단에 오르니 바위 위에 내원궁이 나타나는데 10여 명의 보살님들이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리고 있다. 아마 자식들의 대학 합격을 기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기도도량으로는 손색이 없는 곳이다. 임 수석이 선운산 전역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며 부르기에 가보니 과연 1,000미터 급의 명산이다. 이런 산을 누가 300미터 급이라 하겠는가. 공부가 높고 신심이 깊은 불교도인 임삼환 산우가 이런 기도도량을 놓칠 리가 없다. 그도 등산화를 벗고 복전을 내며 부처님 앞에 몸과 마음을 낮추고 삼 배를 한다. 우리의 여정이 무사하기를 빌었을 것이다. 목적지인 천마봉에 오르는 길에 마애석불을 지나면서 설명을 보니 조금은 황당하지만 신화에 가까운 얘기니 지나친다. 대장금을 촬영했던 용문굴에서 휴식을 취하며 설명을 보니 그것도 황당하여 지나친다. 하지만 바위와 굴의 모양은 참으로 기묘하게 이루어졌다. 1시간 반의 등산 끝에 낙조대를 거쳐 드디어 천마봉에 도착.
서쪽을 보니 구름이 잔뜩 끼어 서해안 낙조는 언감생심. 7명의 산우가 봉우리에 오르고 나는 어깨가 아파 5명의 산우들과 아래에 있는데 어떤 산우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투로 나의 고소공포증을 얘기한다. 여보게, 아픈 곳이 아니고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처럼 불편할 뿐이니 걱정마시게. 시를 낭송해야지. 소월 김정식의 ‘님과 벗’이다. 오늘의 기자로서 낭송의 자격이 있는 내가 운전하느라 고생한 조문형 산우에게 청량제를 삼아 권하니 흔쾌히 읽는다. 시 낭송에 적합한 목소리를 가진 산우 중의 한 사람이다. 탁 트인 서해를 바라보는 조망이 좋았던지 시가 좋았던지 흥에 겨웠던지 박 총장의 선창으로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동반시의 뒷면에 쓰여 있어 3절까지 완창. 이런 산우들과 건강이 허락하는 날의 끝까지 함께 산에 오르고 시를 읊으면 좋겠다는 감정이 가슴 밑에서 북받쳐 오른다. 하산 길에도 ‘내 고향 남쪽 바다’로 시작하는, 이은상이 시를 짓고 김동진이 곡을 붙인 가곡 ‘가고파’를 부르며 내려가는데 세상에 이렇게 건실한 모임이 어디 있는가. 산에 올라 시 낭송을 하고 하산하면서 가곡을 부르는 이런 모임 말이다. 참으로 존경할 만한 친구들이다. 하여 내가 세상에 나와 가장 잘 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광주고를 나온 것, 산행을 평생의 취미로 한 것, 마지막으로 시산회에 가입한 것이라고 말 한 적이 있다.
도솔암으로 회귀하니 불교용품 등을 파는 노점이 보이고 한 쪽에서 조 산우는 향낭을, 임삼환 산우는 종을 산다. 법당 옆을 보니 배롱나무, 일명 백일홍의 꽃색이 보라빛이다. 대개는 약간 붉은 빛을 띠는데 변종인가 보다. 옆을 보니 단정한 노란 소나무 같은 것이 있어 물어보니 금송이란다. 자연의 동식물에 해박한 신원우 청장의 설명이다. 그는 동식물에 대하여 우리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자연보존이사를 역임했다고 하나 지적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니 별도로 많은 공부를 했을 것이다. 시쳇말로 모르는 동식물이 없으니 ‘걸어 다니는 자연생물도감’이다. 다음 여정이 바쁜지 임 수석의 걸음이 빨라진다. 참당암 방문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선운산 계곡을 끼고 하산하는 길의 양옆이 온통 단풍나무로 덮여 있다. 고향이 가까우므로 전에 온 적이 있어 가을에 오면 이 길이 단풍으로 빨갛게 물든다는 것을 잘 안다. 단정하고 너른 선운사 경내에서 나도 시주를 하려는데 법당에 템플스테이(절에 일정 시간을 머무는 행사)팀들이 담당 스님의 설명을 듣고 있다. 도량 한 복판에 핀 배롱나무의 자태는 당당하면서 안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수 백 년은 되어 보인다. 선운사는 4-5월에 피는 동백 아니 춘백으로 유명한 절이다. 임 수석의 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보니 일정이 바쁜가보다. 나는 옛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으며 미당 시비를 찾는데 옛길에 있다. ‘선운사 동구’라는 시다. 짧으나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짜-안한 마음이 생기니 읽어보라. 그 짠한 육자배기는 남도의 노래이니 들어보면 남의 소리 같지 않아 가슴에 푹 안긴다.
선운사 동구(원문)/서정주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다음 여정은 고인돌공원으로 가는 도중 임 수석의 간단한 설명이 있었는데 그의 설명에 의하면 세계의 고인돌 중 80%가 한국에 있으며 그중 80%가 고창에 있다니 그 규모와 숫자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곳에 도착하니 날은 덥고 선운산 산행을 하고 내려온 터라 피곤했는지 입장료가 너무 비싸서 그랬는지 모두 비용을 아끼자는데 의견을 모은다. 멀리 산기슭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고인돌들의 사진을 올리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하여 박물관 입장은 생략하고 쉬는 동안 지적 호기심이 충만한 이재웅, 전작, 임삼환 등 3명의 산우만 갔다 오기로 하고 남은 9명은 정자 밑에서 달콤한 오수를 즐겼다. 아침 동네 노인이 있어 공원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었더니 노인의 장황한 설명이 있었는데 나는 오수를 즐기느라 별로 듣지 못했으나 들은 부분은 이렇다. 돌의 크기나 강도가 이 동네의 돌이 아니다. 쉽게 깨지는 이 동네의 돌이라면 일정시대에 방죽 쌓기에 동원되어 씨가 말랐을 것인데 강한 돌들을 누군가가 특별한 목적으로 이곳으로 옮겼을 것이라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선사시대에 그 무거운 돌들을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옮겼을 것인가? 다만 이곳이 들은 넓고 강이 인접해 있어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는 좋다하나 왜 이곳만 고인돌이 그렇게 많을까? 몇 가지 의심은 풀 길이 없으나 고고학자들의 몫이니 그냥 넘어간다.
다음 여정은 고창읍성 일명 모양성이다. 모양성까지 가는데 15분이 걸린다. 모양성은 잘 정돈되어 보기에 좋았다. 자세하게 탐사를 하려면 4시간이 걸린다는데 30분 정도 할애해서 동헌과 객사 주변만 돌았다. 시간이 없어도 세 번을 밟으면 무병장수 한다니 성 밟기는 뺄 수 없는 일. 역시 옛 것은 옛 것대로 좋다. 입구에 동리(桐里) 신재효의 생가가 있어 그곳을 오래 들러봤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오고가는 차 안에서 남기인 이사장이 내 뒤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창을 틀고 듣기에 물었더니 3-4년 판소리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니 새로운 사실이다. 그는 신재효의 생가에 특히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신재효는 이방을 지낸 중인으로 천석꾼 부자였으니 넉넉한 재산을 바탕으로 소리꾼을 양성하고 열 두 마당의 판소리 중 여섯 마당을 골라 사설을 개작, 정착시킨 인물이다. 그가 여섯 마당을 정리하였다니 그가 없었더라면 훌륭하고 중요한 무형문화재를 오늘에 이르러서 알지 못했을 수 있다. 생가는 옛사람의 집으로서 큰 편이니 풍족하게 살았으므로 판소리에 신경을 쓸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판소리박물관은 오후 6시가 넘어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다음 기회에 올 곳이 많다.
시래기국으로 점심을 때워서인지 배가 슬슬 고프기 시작한다. 농협 하나로마트에 들러 내일 아침 요깃거리와 간식, 과일, 술을 사는데 남 이사장이 복숭아 한 상자를 덥석 들어올린다. 역시 학원 이사장이라 손이 크다. 아이스크림을 사오라는 산우들의 부탁을 무시했더니 그에 대한 푸념을 계속 들으면서 임 수석의 별장으로 향한다. 임 수석은 식사 전에 단 것을 먹으면 밥맛이 떨어지니 사지 말자고 했고, 그의 카리스마에 눌린(?) 우리는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으니 사려 깊은 그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지금도 오해가 남아 있으면 해서하시라. 연작이 봉황의 깊고 큰 뜻을 어찌 알리오.
별장에 도착하니 광주에 계시는 누님과 동생분이 식사 준비를 미리 해놓으셨다. 이름 하여 ‘날아다니는 촌닭’ 4마리. 처음에는 우리가 닭을 잡고 식사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으나 마음이 안 놓였는지 멀리 광주에서 누님까지 초빙하여 젓가락과 술잔만 들면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준비하였으니 그의 깊은 사려는 언제나 나를 감동시킨다. 배가 고팠는지 임 수석의 배려 탓인지 모두 맛있게 먹는다. 졸깃졸깃한 그 맛을 어찌 필설로 다하랴! 고창 막걸리와 더불어 함포고복한 성찬이었다. 누님은 광주에서 열무김치를 가져오셨는데 나는 ‘날아다니는 촌닭’죽과 함께 먹었던 그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날의 푸짐한 만찬에 대해 임 수석에게 다시 감사를 드린다.
후식을 먹는 시간에 따뜻하고 넉넉한 식사 준비를 해주신 누님에게 따뜻한 박수소리를 곁들인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 옆의 너른 대청에 모여 수박을 쪼개 반을 주최 측에 드리고, 반은 썰어놓고 둘러 앉아 시 낭송을 하는데 오늘의 호스트인 임 수석에게 권하니 그가 기꺼이 응하고 시인보다 더 시인답게 그간 아껴뒀던 안도현의 ‘접시꽃 당신’을 읊는다. 그의 맑은 목소리는 날을 잡아 시 낭송의 밤을 가져도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회의 시간에 박 총장의 설명을 통하여 그간의 회비 집행에 대해 추인을 받고 집행부에서 잠정적으로 결정했던 안건을 이경식 회장님이 발의한다. 경조사비에 대한 건이다. 회의는 평화롭게 진행되었으며 여러 산우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듣고 만장일치의 결론을 내렸으니 앞으로는 차질이 없을 것이다. 내가 약간의 설명을 덧붙인다.
1.회원의 부모님과 장인장모님의 애사 및 자식의 혼인에 대하여 조화나 화환, 부조금을 포함하여 이십 만원을 제공한다. 기존에 이십 만원을 제공해주지 못한 회원에게 소급 적용하여 불공평의 불만을 해소한다. 위의 경우에 해당하는 회원은 뒤풀이 때 식사를 대접했는데 앞으로는 참석인원에 따라 식사비의 차이가 나는 경우를 예방하기 위하여 15만원을 현금으로 시산회에 찬조한다.
2.년 회비는 10만원으로 정하며 총장은 통신비, 복사비 등의 명목으로 년 회비를 면제한다.
3.입회비는 전반기에 입회하는 경우는 10만원, 후반기에 입회하는 경우는 5만원으로 정하되 본인의 희망 및 회원들의 합의에 따라 뒤풀이를 한 번 제공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4.해당 산행에 소요되는 경비는 사용 및 수익자 부담의 원칙에 따라 참석하는 회원이 부담하며 가능하면 년 회비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5.‘산과 시’ 같은 회지를 발간하는 경우에는 년 회비의 잔고를 감안하여 특별회비를 징수할 수 있다.
취침시간에 샤워를 마치고 편하게 돌아다니는데 고갑무 산우의 몸매가 역삼각형으로 보통의 수준을 훨씬 넘는다. 부러운 마음에 슬쩍 물어보니 헬스클럽에서 꾸준하게 가꾸었다니 부지런한 사람은 어디 가도 티가 난다. 임 수석이 편하게 제공한 잠자리에 불구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산우들이 있었으나 잠자리가 바뀌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조문형 산우는 죽부인과 동침을 해도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주변의 시선이 부담이 된 것 같다. 여복이 많은 사람은 하다못해 죽부인이라도 기다린다. 오늘 운전이 걱정됐지만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 시킨다. 올라오는 차 안에서 죽부인과 관련한 음담이 있었는데 점잖은 체면에 쓰기가 민망하여 생략한다.
임 수석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산우들의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았는지 보고 간 흔적이 있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난 그가 끓여준 라면으로 끼니를 간단히 때운 후, 설거지를 마치고 처음 일정인 문수사 단풍나무들을 보러 간다. 가보니 임 수석 별장의 뒷산이다. 임 수석의 별장에서 4km의 거리니 자당께서 기도를 드리려고 걸어 다니셨을 만한 거리다. 자당의 기도 덕에 임 수석 같이 훌륭한 아들을 얻으셨음이 틀림없다. 입구에 서있는 단풍나무의 위용이 과연 천연기념물 수준이다. 더위에 초록이 지치면 빨갛게 물이 든다는 가을에 오면 단풍의 진수를 볼 수 있을 것을 확신한다. 오르는 길옆에 서있는 아름드리 단풍나무들이 우리를 반기는데 숲의 향이 맑고 그윽하다. 축령산 중턱에 고즈넉이 자리를 잡은 천년 고찰의 모습이 한가롭고 평화롭다. 절의 벽에 벽화처럼 시화가 그려져 있는데 시의 내용이나 그림의 솜씨가 만만치 않다. 남 이사장이 찍어 K-20 카페에 올려놓았으니 들어가 보시라. 절에 오면 마셔야 하는 샘물가에 수국이 흐드러졌다. 누군가 불두화(佛頭花)를 얘기하던데 불두화는 수국과 비슷하나 꽃의 윗부분이 부처님 머리처럼 위쪽이 혹처럼 튀어나왔으니 참고하시라. 불타는 가을의 한복판에 축령산에 다시 오시라는 단풍나무들의 마중을 받으며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축령산 자연 치유의 숲으로 가자.
축령산 휴양림, 일명 ‘장성 치유의 숲’에 도착하니 하늘을 향해 날씬하게 쭉 뻗은 나무들로 가득 차 있는데 입구부터 숲향이 만만치 않다. 숲 가운데 텐트가 있어 가까이 가보니 사람들이 누워있는데 지독한 암을 고치기도 한다는 피톤치드의 효능을 믿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참석하지 못한 산우들을 위해 먼저 ‘장성 치유의 숲’에 관한 설명을 하겠다. 피톤치드가 난치병인 아토피성 피부염, 대상포진, 알러지성 천식, 알러지성 비염 등에 의학적 치유 기능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나아가 암에도 효능이 있다는 보고도 있다. 피톤치드는 향균성 음이온 방향제라고도 하는데 특히 침엽수에서 많이 발산하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가장 많이 발산한다. 침엽수 중 발산량은 편백나무, 구상나무(덕유산 능선 등반 중 많이 보았으며, 지리산 종주 산행 때 세석평전에 많았음을 기억한다), 삼나무의 순이다.
최초의 조림자는 고 춘원 임종국 선생으로 2005년 11월에 이곳에 잘 생긴 느티나무 밑에 수목장으로 안장했다. 그분이 살아 생전에는 피톤치드를 알지 못하셨을 것으로 미루어 선견지명이 대단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1956년부터 1976년까지 21년간에 걸쳐 720,000평(편백 459,000평 삼나무 111,000평 낙엽송 등 150,000평)을 조림하셨다. 국내 최대 난대 수종 조림 성공지임에도 임종국 선생 타계 후 산주의 경영의지 부족 등으로 숲가꾸기를 실시하지 않아 불량림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자 학계·지역사회 등에서 국가관리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비등하여 산림청에서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편백나무숲으로 육성하고 대내외적인 산림경영 교육장으로 활용코자 매입한 후 654,000평을 더해 총 1,374,000평의 조림 및 숲가꾸기를 실행하고 있다.
임 수석의 선도로 옛길을 따라 1시간을 오르고 내려와 안내센터에서 가벼운 설명을 들었다. 나는 아직까지 편백이나 측백 등에 관하여 구별을 하지 못했으나 그 방면에 해박한 신원우 청장의 설명을 듣고 확실하게 알았다. 편안한 임도와 돌아가는 숲길을 두고 갈등이 있었으나 임 수석의 과감한 결정으로 숲길로 돌진. 아무리 피곤해도 여기까지 와서 임도로 가다니 말이 안 된다. 피톤치드의 향이 흠뻑 피어나는 숲길을 따라 걷는데 피부에 닿는 느낌은 숨 막히는 첫 키스의 경험보다 더 상큼하고 향긋했다 해도 가지 않은 산우들은 지나치다 하지 말라. 늪지에 우뚝 솟은 벽오동을 처음 접하기도 했으니 그날의 감흥을 언제 다시 느끼랴. 신 청장은 이렇게 좋은 선경을 두고 근처의 금곡 영화마을에 잠시 들러놓고는 축령산 휴양림이 별 볼일 없다고 했다며 수차례에 걸쳐 안도의 말을 되새김질 한다. 이곳에 오지 못한 산우들은 꼭 한 번은 들러 숲의 향기에 푹 빠져볼 것을 자신 있게 권한다. 3시간을 들러본 후,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12시가 되니 어김없이 배가 고프다. 오는 길에 예약한 콩국수집을 지나칠 수 없는 일. 도착하니 콩을 삶고 있다. 장성이 고향인 전작 산우와 동향인 아주머니의 극진한 대우에 오늘도 즐겁다. 직접 농사를 지은 콩에 서리태까지 섞어 내놓은 콩국수는 막걸리 안주에도 좋더라. 집에서 기른 돼지고기 삶은 것을 그냥 내놓는다. 아니, 시골인심은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어디 가지 않더라. 아주머니 고맙소. 고향에 왔다고 점심을 흔쾌하게 대접한 전작 산우도 맛있게 잘 먹었소.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축령산을 향해 손을 흔들며 서울로 향했다.
편하고 무사하게 운전해준 조문형 산우! 서울의 복판인 신당동 떡볶이 동네에 싸고 맛있는 고기집이 있으니 오소, 내 맛난 소고기 안창살과 토시살을 대접하겠소. 아끼는 차를 기꺼이 내준 남 이사장도 먼 길이지만 한 번 오소. 애를 많이 쓴 임 수석도 오소. 내가 북쪽의 끝 동네인 도봉산 근처에 살지만 산우들이 온다면 내 기꺼이 신당까지 나와 기다릴 테니 언제든지 연락들 하소. 신당동에서 내가 술과 고기를 대접할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할 산우 어디 없소! 이번 1박2일의 여정을 돌아보면서 시산회원들의 진면목을 다시 봤다. 어느 한 사람 뺄 것 없이 훌륭한 인격을 가진 좋은 사람들이다. 긴 여정이었지만 조금도 지루한 적 없이 맛있게 먹고 잘 놀았고 많이 즐겼다.
시산회여 영원하라, 파이팅!
2011년 8월 8일 입추 새벽에
시산회 도움쇠 김정남 올림
3.산행지
이번 산행은 내가 가보지 못한 산이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2009. 3. 28. 106회 산행 때 올랐던 산으로 네티즌이 선호하는 명산 중 34번째로 좋아하는 산이라니 가볼 만하다. 고창 선운산-장성 축령산을 오르고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결정했다. 남기인 이사장의 집이 화성이라 서울의 북쪽 산은 오기 어렵다고 배려해서 정한 산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은 우리의 기후가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장마가 아니고 우기란다. 하여 회원의 대부분이 비를 몰고 다닌다는 용띠들 모임인데도 산행 때 비를 피해 다니는 것을 보면 우리들의 기가 세서 하느님도 잠시 피해가는 가싶다. 자주 내리는 비에 우울해질 수 있으니 한 달에 두 번 가는 산행에 적극 동참하면 좋지 않겠는가. 모두 모여 반가운 얼굴들을 보자. 한 교장이 중국 연태의 한국학교 책임자로 2년간 부임하여 가게 되어 우리와 잠시 떨어진다니 가는 길에 인사라도 나누면 좋을 일이다.
4.동반시
상선암(上仙岩)은 국립공원 월악산의 주변에 있으며 중선암, 하선암과 더불어 단양팔경 중의 하나로 우리가 도락산에 다녀오면서 길가에 있어 잠시 지나친 곳이다. 상선암을 지나면서 한문은 다르지만 임 수석이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한 말이 생각난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로 도덕경의 진수라 할 수 있다. 도덕경은 신선들이 주고받는 얘기라 범인들이 이해하기는 지극히 난해하다. 한편으로 물은 만물의 근원이니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물질이며, 온갖 더러운 것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이므로 그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며, 물은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가는 성질이 있어 결국은 편평해지므로 사람도 이 같은 자세를 가지면 도인이 되고 세상은 평등하고 평화롭게 된다는 뜻이다. 하여 물이야 말로 최고의 선(善)이며 도(道)라는 뜻일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BC 3~6세기를 일컬어 차축시대라 한다. 석가모니, 공자, 노자, 장자, 맹자,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조로아스터 등 종교의 원조가 되고 후세에 성인 혹은 현자, 도인이라는 사람들이 태어나 활동했던 시대를 말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선과 악은 모두의 관심사였고 세상의 양축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시인은 그렇게도 사랑하는 부인을 잃고 아득한 절망 끝에 시름에 잠겼을 때 이곳에서 바위 틈새에 자라는 소나무를 보며 마음을 다잡으면서 희망을 읊었을 것이다. 세상을 보면 온갖 악으로 넘치는 것 같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선이 있어 인간들을 지탱해준다. 하여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 더 많아 희망이 있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 진흙 속에서 환한 연꽃이 피어나듯 그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희망이 절망의 다른 몸인 것처럼 생각하고서.
상선암에서/도종환
차가운 하늘을 한없이 날아와
결국은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흙 한톨 없고 물 한방울 없는 곳에
생명의 실핏줄을 벋어내릴 때의 그 아득함처럼
우리도 끝없이 아득하기만 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바위 틈새로 줄기를 올리고 가지를 뻗어세운
나무들의 모습을 보라
벼랑끝에서도 희망은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희망은 있는 것이다
불빛은 아득하고
하늘과 땅이 뒤엉킨 채 어둠에 덮여
우리 서 있는 곳에서 불빛까지의 거리 막막하기만 하여도
어둠보다 더 고통스러이 눈을 뜨고
어둠보다 더 깊은 걸음으로 가는 동안
길은 어디에라도 있는 것이다
가장 험한 곳에 목숨을 던져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있는 것이다.
2011년 8월 10일
詩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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