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楊士彦(양사언)의 어머니 이야기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금강산에 아름다움이 다 들어 있는 아름다운 골짜기이다
조선의 명필 양사언. 많은 시인 묵객들이 금강산을 자주 들렀으나 그만큼 금강산을 사랑한 이도 드믈다. 양사언 출생 설화도 신비스럽고 죽음의 이야기도 신비스럽다. 그는 일생 산수를 즐기며 세상을 초연하게 살았다. 참으로 멋스럽게 산 신선 같은 시인, 묵객이었으며 또한 도인이기도 했다.
저서로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읊은 ‘미인별곡’, 을묘왜란 시 남정군 종군을 읊은 ‘남정가’ 등이 있으며 유묵으로는 그가 지은 ‘미인별곡’과 허강의 ‘서호별곡’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품집으로 ‘봉래시집’이 있다.
양희수.양사언 야사(野史)
지나치게 터무니없거나 말초적이어서 읽고나면 남는 것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 기인기사록의 장점이다.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野史)를 읽는 이유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 속에 은근슬쩍 드러나는 그 시대의 맨 얼굴을 엿보는 재미 때문이다.
청주양씨(淸州楊氏)
조선 전기의 4대명필(四大名筆) 양사언(楊士彦)
泰山歌(태산가) 양사언(楊士彦)
.
泰山雖高是亦山(태산수고시역산)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登登不已有何難(등등불이유하난)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世人不肯勞身力(세인불긍노신력)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只道山高不可攀(지도산고불가반)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는 우리가 알기로는 양사언이 모든 일에 노력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교훈 조 詩(시)로만 알고 있었는데
깊은 내력을 살펴 보니, 처절하게 살다간 어머니를 그리는 시라는 해석이
kbs 역사 이야기에서 밝혀졌다.
"楊士彦(양사언)과 그의 어머니"
우리 선조들로부터 현세에 이르기 까지 위대한 인물들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대부분 그들 어머니의 恩功(은공)이 뒤에 숨어 있고,
이러한 모성애의 恩功(은공)으로 훌륭한 인물은 더욱 훌륭한 인물로 재 탄생 되어질 수 있었다.
우리들도 익히 알고 있는 栗谷(율곡)과 신사임당.
만호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 모르는 분들이 없을 것이다. 아들을 훌륭하게 키운 대표적 한민족의 어머니이리라.
그러나 "양사언과 그의 어머니"에 대하여 아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 민'이)? 사언의 아버지 '양 희수[陽希洙:돈녕주부]가 전라도 영광 전라도 영광의 사또로 부임해 내려가는
꽃 피는 삼월의 어느날 어느 촌 고을을 지날 즈음,
(10여년간 홀아비로 지내며 산천유람을 하던 단정한 선비 양희수는 함경도 안변지방을 지나다)?
전날 부임 축하연으로 술에 쩔어 밥을 먹지 못해 배가 무척 고파서 밥을 먹고 가기로 했단다. 그러나 농번기에 사람들이 없었다.
이 집 저 집 둘러 보는 중에 어느 한 집에서 한 소녀가 공손하게 나와 식사 대접을 하겠노라고 아뢴다.
그리고는 신관 사또가 거리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겠냐고 하며
안으로 모시고 부지런히 진지를 지어 올린다. 하는 태도나 말솜씨가 어찌나 어른스러우며 예의 바른지 사또는 너무나 기특하게 여긴다.
조반을 잘 얻어 먹은 젊은 신관 사또 '양 민'은 고마움에 보답을 하게 되는데... 신관 사또 '양 민'은 소매에서 부채 靑扇(청성)과 紅扇(홍선) 두 자루를 꺼내 소녀에게 준다. 그냥 전달하기는 멋쩍어 농담을 섞어
"이는 고마움으로 내가 너에게 채단 대신 주는 것이니 어서 받으라..."
`채단'이라 함은 결혼 전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청색홍색의 옷감들이 아닌가...깜짝 놀란 소녀는 안방으로 뛰어가
장롱을 뒤져 급히 홍보를 가져와서 바닥에 깔고 靑扇(청선), 紅扇(홍선)을 내려 놓으라고 한다. 어리둥절한 사또는 왜 그러냐고 묻는다.
"폐백에 바치는 채단을 어찌 맨손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두 자루의 부채는 홍보 위에 놓여졌고 소녀는 잘 싸서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세월이 흘렀다.
사또 '양 민'이 이런 저런 업무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한 노인이 사또를 뵙자고 찾아 왔다.
"몇 년 전 부임할 때 시골집에 들려 아침 식사를 하고 어느 소녀에게
靑扇(청선), 紅扇(홍선) 두 자루를 주고 간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사또는 조금 생각하다가 "그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하며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노인은 이제서야 의문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말한다.
"그러셨군요.. 그 여식이 과년한 제 딸년인데 그 이후로 시집을 보내려 해도 어느 곳으로도 시집을 안가겠다고 해서 영문을 몰라 이렇게 찾아 뵙게 됬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또의 머리 속엔 어떤 느낌이 스쳐 지났는지 모두 느끼리라.
"그 정성이 지극하거늘 내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소.
날짜를 잡아 아내로 맞겠소" 식사 한끼 얻어 먹고 대가로 부채 두 자루 선물했으면 밥값으로 충분할텐데, 졸지에 아내로까지 맞이하게 되었으니 운명의 장난인가, 신의 축복인가!~
어디 삼류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이다.
이 소녀가 바로 후에 楊士彦의 어머니가 된다.
중요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사또는 정실부인이 있었고 이 부인과의 사이에 '양사준'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후처, 즉 소실인 이 소녀와의 사이에 士彦(사언)과 사기, 두 아들이 탄생한다. 사준, 사언, 사기 , 이 삼형제는 자라며 매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 났으며
풍체도 좋아 주변으로부터 칭송이 끊이질 않았다고 하며, 형제애가 깊어
중국의 '소순, 소식, 소철' 삼형제와 비교되기도 했다고 한다.
정실부인이 죽고 모든 살림살이를 후처인 사언의 어머니가 도맡아 하게 되고 아들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그러나 아들들이 아무리 훌륭하면 뭣하냐 서자들인데...이 소실부인의 서러움과 한탄은 적자가 아닌 서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실부인의 꿈은 자기 아들들의 머리에서 서자의 딱지를 떼 내는 일이었다.
남편 '양 민'이 죽고 장례 날에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눈물 흘리며 말한다. "양씨 가문에 들어와 아들을 낳았으며, 아들들이 재주있고 총명하며 풍체도 있거늘 첩이 낳았다 하여 나라 풍습은 그들에게서 서자의 너울을 벗겨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장손인 적자 양사준에게 울면서 부탁한다.
"첩이 또한 이 다음에 서모의 누를 가지고 죽은 후라도 우리 큰 아드님께서는 석 달 복밖에 입지 않으실 터이니,이리되면 그때 가서 내가 낳은 두 아들은 서자 소리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영감님 성복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복제가 혼돈하여 사람이 모르게 될 것입니다. 服制복제: 상복(喪服)에 관(關)한 다섯 가지 제도(制度). 신분(身分)이나 직업(職業) 등(等)에 맞추어 만든 의복(衣服)의 규정(規定)
내 이미 마음을 다진 몸, 무엇을 주저 하오리까 만은 내가 죽은 뒤 사언, 사기 두 형제한테 서자란 말로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죽어서도 기꺼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양사언의 어머니는 가슴에 품고 있던 단검을 꺼내 자결을 하고 만다. 아들들이 그녀를 부둥켜 안았을 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아들을 서자의 멍에를 풀어주고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가게 하고 싶었던 여인, 죽음으로써 부조리한 인간 차별화를 타파하고 싶었었던 선구자적인 新女性(신여성) 이 어머니의 죽음은 楊士彦(양사언)이 더욱 훌륭한 文人(문인)이 되는데 자양분이 되었으리라.
楊士彦은 후에 장원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된다.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楊士彦(양사언)은 만호 한석봉과 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3대 名書藝家(명서예가)이자 文人이다. 士彦의 호가 蓬萊(봉래)인데 士彦(사언)이 관직에 올라 지금의 철원 사또로 부임하게 되고, 자연히 지척에 있는 금강산을 자주 찾아 금강산의 매력에 흠뻑 젖어 살게 되었다.
여름 금강산을 蓬萊山(봉래산)이라 함은 모두 알 터 그래서 호를 蓬萊(봉래)라 하였다. 금강산을 노래하고 금강산을 그린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만은 얼마나 금강산을 사랑했으면 자기의 호를 蓬萊(봉래)라 했겠는가...
이 작품은 그의 장기인 초서가 유감없이 드러난 것으로 활달 분방한 필세가 잘 나타나 있다 하며, [봉래산인(蓬萊散人)].[양사언인(楊士彦印)]의
도장 2과(顆)가 찍혀 있다.
霜餘水反壑 (상여수반학) 서리 녹아 내린 물 계곡으로 흘러가고
風落木歸山 (풍락목귀산) 바람에 진 나무잎도 산으로 돌아가네
염염歲華晩 (염염세화만) 어느덧 세월흘러 한 해가 저물어 가니
昆蟲皆閉關 (곤충개폐관) 벌레도 모두 다 숨어 움추리네
■ 양사언 (조선 문인·서예가) [楊士彦] 1517(중종 12)~1584(선조 17).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돈녕주부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동생 사준(士俊)·사기(士奇)와 더불어 문명을 날려 당대인이 3형제를 중국의 소순·소식·소철에 비유했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56년을 전후로 대동현감을 지냈으며 그 이후 삼등·함흥·평창·회양 등지를 다니며 역임했다. 회양에 나간 것은 금강산을 따라 스스로 택한 것으로 이때 금강산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만폭동 입구에 "봉래풍악 원화동천"(逢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8자를 새기기도 했다. 1564년에 고성군의 구선봉 밑 감호(鑑湖)가에 정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풍류를 벗삼으며 은거했다. 1582년(선조 15) 다시 안변군수로 나갔으나 다음해 번호(蕃胡) 변란을 당해 수사(守士)의 책임을 지고 해서에 귀양가서 1584년 68세로 죽었다. 그는 문명을 날리면서 허균·이달 등과 교유했다. 허균은 〈성수시화 性叟詩話〉에서 금강산에 관한 그의 시를 유선지흥(游仙之興)에 젖어 있다고 평했다. 점복(占卜)에 능하여 임진왜란을 예고했다고 하는데 양사언에 관한 도술적 설화가 지금까지 전한다. 조선 전기 4대가로 일컬어질 만큼 서예를 잘해 초서와 해서에 능했다. 자신의 〈미인별곡〉과 허강의 〈서호별곡〉 및 한시 등을 쓴 〈봉래유묵 逢萊遺墨〉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가사로 〈미인별곡〉이 있으며 문집으로 〈봉래집〉이 전한다.
*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평촌리 흥정계곡에는 여덟 개의 바위, `팔석정'(八石亭)이 있다.
강릉 부사 부임 당시, 봉평면 평촌리에 이르러 정무도 잊은 채 여드레 동안 시상을 다듬으며 지낸 곳이다. 그가 고성 부사로 부임하게 되자 이별의 정표로 여덟 군데 바위에 글씨를 새겨놓았다. 삼신산을 가리키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 석대투간(石臺投竿; 낚시하기 좋은 바위), 석지청련(石池淸蓮; 푸른 연꽃이 피어있는 듯한 바위), 석실한수(石室閑睡; 낮잠을 즐기기 좋은 바위), 석요도약(石搖跳躍; 뛰어 오르기 좋은 바위), 석평위기(石坪圍碁; 장기 두기 좋은 바위)이다
* 내금강 만폭동, 오선봉 아래에 길이 200m, 너비 15m의 너럭바위, 반석이 있다. 양사언이 회양 군수 재직시 금강산을 드나들며 쓴 ‘蓬萊楓岳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 여덟글자이다. “봉래, 풍악 금강산은 으뜸의 조화를 이룬 동천이다”
한국 서예사의 불멸의 금석 글발이다.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만폭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百川쳔洞동 겨 두고 萬만瀑폭洞동 드러가니, 銀은 무지게, 玉옥 龍룡의 초리, 섯 돌며 소十십里리의 자시니, 들을 제 우레러니 보니 눈이로다.
백천동 옆에 두고 만폭동으로 들어가니, 은 같은 무지개, 옥 같은 용의 꼬리, 섞여 돌며 뿜는 소 리 십리 밖에까지 퍼졌으니, 먼 데서 들을 때는 우레 소리와 같더니, 가까이 보니 눈 같은 포말이 구나.
* 사대명필[ 四大名筆 ] 조선 초기에서 중기 사이에 배출된 4인의 명필.
석봉(石峰) 한호(韓濩),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1517(중종 12) ∼ 1584(선조) 17,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809년(순조9) 를 일컫는다.
* 삼대명필 - 조선시대에 글씨가 특출하였던 세 사람의 서가 삼대명필/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28년(세종 10), 자암(自庵) 김구(金絿) ,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석봉(石峯) 한호(韓濩)1567년(명종 22) 이다.
안평대군은 조맹부체(趙孟홰體)를 체득하여 활달하고 넉넉한 품(品)을 따를 이가 없었고, 김구는 종왕(鍾王)의 서체를 익혀 인수체 (仁壽體)라는 독창적인 서체를 개척하였으며, 양사언은 진체(晉體)의 대가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모두 뛰어났고, 한호는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서법을 익혀 각 체에 모두 뛰어나, 후기의 대가인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었다.
* 금강산은 암석산인데다 경관이 좋아 암석에 글씨를 써서 각자한 것이 많다. 내금강 만폭동에는 양사언이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고 쓴 초서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속설에 '만폭동 경관의 값이 천냥이라면, 그 중 오백냥은 양사언의 글씨 값'이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다. 글씨 크기로는 외금강 구룡폭 절벽에 새겨진 '미륵불' 글씨가 가장 크다고 한다. 이외에도 바위 곳곳에 멋지게 새겨진 글씨들은 금강산 절경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들어 주는데, 분단의 역사를 거치며 공산주의 사상의 글씨들도 더러 새겨져 우리 정서와는 조금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 회양부사였던 양사언은 금강산 중 특히 만폭동을 사랑하여 틈만 나면 찾았다고 한다.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든 나머지 숱한 일화를 남긴 것. 호 '봉래'와 별호 '원화'도 모두 금강산에서 연유한 것이다. 만폭동에 남아 있는 필획은 날아 움직이는 듯한 기세로 그곳의 장엄한 경관과 잘 어울린다.
양사언[楊士彦] 1517(중종 12)~1584(선조 17).
조선 전기의 문인·서예가.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돈녕주부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동생 사준(士俊)·사기(士奇)와 더불어 문명을 날려
당대인이 3형제를 중국의 소순·소식·소철에 비유했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56년을 전후로 대동현감을 지냈으며
그 이후 삼등·함흥·평창·회양 등지를 다니며 역임했다.
회양에 나간 것은 금강산을 따라 스스로 택한 것으로
이때 금강산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만폭동 입구에 "봉래풍악 원화동천"
(逢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8자를 새기기도 했다.
1564년에 고성군의 구선봉 밑 감호(鑑湖)가에
정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풍류를 벗삼으며 은거했다.
1582년(선조 15) 다시 안변군수로 나갔으나
다음해 번호(蕃胡) 변란을 당해 수사(守士)의 책임을 지고
해서에 귀양가서 1584년 68세로 죽었다.
그는 문명을 날리면서 허균·이달 등과 교유했다.
허균은 〈성수시화 性詩話〉에서 금강산에 관한 그의 시를
유선지흥(游仙之興)에 젖어 있다고 평했다.
점복(占卜)에 능하여 임진왜란을 예고했다고 하는데
양사언에 관한 도술적 설화가 지금까지 전한다.
조선 전기 4대가로 일컬어질 만큼 서예를 잘해 초서와 해서에 능했다.
자신의 〈미인별곡〉과 허강의 〈서호별곡〉 및 한시 등을 쓴
<봉래유묵 逢萊遺墨〉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가사로 〈미인별곡〉이 있으며 문집으로 〈봉래집〉이 전한다.
강원도 동해시 청옥산 과 두타산 입구 삼화사 개울 반석에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글을 초서로 새겨놓았다.
* 그의 출생담이 ‘계필담’에 전해오고 있다.
양사언 아버지가 영광군수로 부임하는 길이었다. 텅 빈 객사에서 12살가량의 딸아이만이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여기서 점심을 먹으려하니 너는 빨리 가서 네 부모를 데려오너라”
“제 부모님은 모를 심고 계시니 불러올 수 없습니다. 제가 점심을 준비할 것이오니 사람은 몇 명쯤이며 말은 몇 필이나 되옵니까? ”
“네가 능히 점심을 준비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있사옵니다.”
사람과 말의 숫자를 말해준대로 딸아이는 일사천리로 순식간에 밥상을 차려냈다.
공이 사람과 말의 식비를 후한 가격으로 쳐주었으나 딸은 원 가격 외에는 조금도 받지 않았다.
양공은 감탄했다.
“이 부채는 내가 너를 예로서 맞겠다는 패물이다.”
딸아이는 상자에 붉은 보자기를 펴들고 나와 두 손으로 부채를 받았다.
“부채 하나 주는데 어찌하여 이같이 공경을 다하느냐?”
“결혼하는 패물이라면 물건이 비록 작다 해도 어찌 공경하지 않으리이까? ”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의 아내가 상처했다. 임기를 마치고 공은 고향에서 홀아비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누가 뵙기를 청했다.
“공께서는 영광 군수로 부임하시는 길에 어린 딸에게 부채를 주신 적이 계십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
“그 아이가 제 딸입니다. 지금은 이미 시집갈 때가 지났으나 다른 곳에는 맹세코 시집을 가지 않았습니다. 공께 패물을 받았다고 하기에 이제와 말씀을 드립니다.”
공은 크게 기뻐하여 아내로 맞이했다. 몇 년 후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양사언이었다.
양사언이 회양군수 때 금강산 만폭동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8자를 새겼다. 평자는 ‘ 최치원의 쌍계석문(雙溪石門) 글씨가 이에 못 미친다’고 말하였다. 지금도 그 글씨가 남아 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초서와 큰 글씨를 잘 썼다. 안평대군·김구·한호 등과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이다. 한시는 작위성이 없고 자연스러웠으며 천의무봉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그는 격암 남사고에게 역술을 배워 1583년 여진란, 1592년 임진왜란, 1607년 누루하치난을 정확히 예언하기도 했다.
봉래 양사언은 40년 간 관직에 있으면서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는 한 푼도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飛來亭(배래정)
‘하늘에서 날아온 정자’라는
1564년 양사언은 금강산을 찾았다. 그는 구선봉 아래 집 한 채를 그 뒤편에는 ‘비래정’ 정자를 세웠다. ‘하늘에서 날아온 정자’라는 뜻이다.
화창한 어느날 양사언은 정자에 ‘飛來亭’ 편액을 썼는데 ‘비’자는 마음에 들었지만 ‘래’ 자와 ‘정’ 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번을 고쳐 썼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 날 ‘비’자만 족자로 만들어 서재에 걸어놓았다.
세월이 흘러 안변 군수로 임명을 받았으나 재임 중 지릉의 화재사건으로 황해도로 귀양을 갔다. 그가 2년 뒤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가 신선처럼 살고 싶어 지어 놓았던 비래정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닥쳤다. 한바탕 바람은 방안에 있었던 책이며 병풍, 족자들을 사정없이 공중으로 날려 버렸다.
다른 것은 잃은 것이 없었으나 날 ’비’ 자를 쓴 족자만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까지 뛰어가며 샅샅이 찾았으나 양사언이 애지중지 하던 날 ’비’ 자의 족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양사언 벗이 족자가 없어진 날짜와 시간을 따져보니 그가 귀양살이 하다 돌아오던 길에 세상을 떠난 때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이 일이 있기 전 한 진사가에 비래정을 찾았다. 그는 ‘날 비’ 자가 마음에 들어 모사해 두었는데 임진왜란의 난리 통에도 그 글자만은 잘 보관해 두었다. 양사언의 맏아들 양만고가 그를 찾아가 모사한 ‘날 비’ 자를 보면서 파란만장했던 부친의 삶을 되새겨 보았다.
양봉래(楊蓬萊)가 금강산 만폭동 동벽(洞壁)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고 동명(洞名)을 붙여 쓴것이 있어 이 글씨를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쓴 글씨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실은 상주 개운리 출신인 개운화상이 19세(1790년)에 쓴것이라고 한다.
개운화상은 속성(俗姓)이 김씨요, 모친의 성은 양씨인데 글씨가 양봉래(楊蓬萊)의 것과 흡사 하였다고 하며, 저서로는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瑜伽心印正本首능嚴經)의 초록이 있다.
힘차게 일필휘지(一筆揮之)한 명필(名筆)은 불후의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