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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삼국지 131
(소설 삼국지 )
제1권 천하대란 제8장 산동기의
3) 산동기의(山東起義)
초평(初平) 원년(190년) 봄 정월,후장군(后將軍) 원술(袁術),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 예주자사(豫州刺史) 공주(孔伷), 연주자사(兗州刺史) 유대(劉岱), 하내태수(河內太守) 왕광(王匡), 발해태수(勃海太守) 원소(袁紹), 진류태수(陳留太守) 장막(張邈), 동군태수(東郡太守) 교모(橋瑁), 산양태수(山陽太守) 원유(袁遺), 제북상(濟北相) 포신(鮑信), 광릉태수(廣陵太守) 장초(張超) 등 10여명의 주목과 자사, 태수들의 무리가 각기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서로 연결해 동맹을 맺고 ‘타도 동탁’을 기치로 내세웠다. 오경과 주비 등이 구상한 바대로 된 것이다.
교모의 위서를 받고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것은 조조와 장막이었다.
진류태수(陳留太守) 장막(張邈)은 자를 맹탁(孟卓)이라 했고 동평(東平) 군 수장(壽張) 현 출신이었다. 소싯적에 협행으로 소문이 났다. 궁박하거나 위급에 빠진 사람들을 돕고 구원하는 일에 가산이 기울어질 정도로 재물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많은 선비들이 그에게 귀의했다. 팔주(八廚)의 한 사람으로 이름난 명사이기도 했다. 조조와 원소도 소싯적부터 장막과 친구로 지냈다. 장막은 삼공부의 부름을 받아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었다가 주비, 오경등의 천거로 진류태수가 되었다.
이 때 조조는 진류에 머무르고 있었다. 조조는 고향인 패국 초현으로 돌아가 의병을 모집할 계획이었으나 때마침 평소에 교분이 두터웠던 장막이 진류태수로 부임했고 또 진류에서 만난 위자(衛茲)라는 사람과 의기가 통했기 때문이었다. 위자는 집안 대대로 진류군 양읍(襄邑)에 거주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 그는 지조가 있어 삼공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진류군 관리로 봉직하고 있었다. 위자가 처음 조조를 만나 본 후 감탄을 하며 말했다.
“천하를 평안하게 할 자는 바로 이 사람이다.”
조조 또한 위자를 뛰어난 인물로 여겨 서로 맹약을 맺고 수차례 천하의 대사를 논했다.
위자가 조조에게 말했다.
“세상이 어지러워진 지 오래 되었으니 무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정리할 수가 없습니다. 병사를 일으킬 때는 지금이 적기입니다.”
조조는 장막과 위자의 도움을 받아 진류 기오(己吾) 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위자와 함께 가재를 흩어 병사를 모집하고 장막에게서 병사를 빌리니 병력이 오천 명에 달했다.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등도 수하의 무리들을 이끌고 속속 조조의 군에 합류했다.
조조와 장막이 진류에서 기병하자 원소를 비롯한 각지의 주와 군도 일제히 의병을 일으켰다. 먼저 연주자사 유대와 공주자사 공주, 진류태수 장막과 그의 아우 광릉태수 장초, 동군태수 교모가 진류군 산조(酸棗)에서 회맹했다. 산조에서 회맹하게 된 것은 연주 소속인 진류군이 여러 주군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류태수 장막의 아우 장초(張超)와 그의 공조인 장홍(臧洪)의 역할이 컸다.
장초는 그의 형 장막과 더불어 젊어서 협행으로 유명했다. 장홍은 자를 자원(子源)이라 하고 서주 광릉(廣陵) 군 사양(射陽) 현 출신이었다. 부친 장민(臧旻)은 흉노중랑장(匈奴中郎將), 중산(中山) 군과 태원(太原) 군의 태수를 역임했던 유명 인사였다. 장홍은 체격이 장대하고 생김새가 특이해 일반인들과는 쉽게 구별되었다. 아마도 부친 장민이 서역에 근무할 적에 현지인과의 사이에서 나은 혼혈일 가능성이 있다.
장홍은 효렴으로 천거되어 랑(郎)이 되었다가 삼공부의 랑들 중에서 사람을 선발해 현장(縣長)으로 내보낼 때, 낭야(琅邪) 사람 조욱(趙昱), 동래(東萊) 사람 유요(劉繇), 동해(東海) 사람 왕랑(王朗) 등과 함께 발령을 받았다. 장홍은 낭야군 즉구(即丘) 현장이 되었다. 조욱, 왕랑, 유요 등이 다 이름난 명사였던 점으로 보아 장홍 역시 상당한 이름을 얻었던 것 같다.
장홍은 영제 말년에 정치가 어지러워 현장이 백성을 수탈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했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집으로 돌아갔었다. 고향인 광릉으로 돌아가자 광릉태수 장초가 장홍을 초빙해 공조(功曹)로 삼았다.
동탁이 황제를 시해하고 사직(社稷)을 뒤엎을 음모를 추진하자 장홍이 장초를 설득했다.
“명부께서는 여러 대에 걸쳐 한나라 황실로부터 은혜를 받아왔으며, 형제가 각각 큰 군(郡)에 웅거하고 있습니다. 장차 왕실이 위험에 빠질 지경입니다. 적신(賊臣)들이 아직 사납고 날래지 못한 지금 참으로 천하의 의롭고 굳센 선비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때입니다. 지금 광릉군은 경내가 잘 보전되어 있고 관리와 백성들도 풍족하니 만약 북채를 두드려 병력을 동원한다면 이만 명은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을 데리고 나라의 적을 죽여 없애면 이는 앞장서서 천하를 위해 큰 의를 행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장초는 이 말에 따라 장홍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류를 향해 진군했다. 진류에서 그의 형 장막을 만나 여러 의병들을 하나로 결집시킬 방안을 의논했다. 장막 역시 이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으므로 주변 주군의 수령들을 초청해 산조에서 회맹하고자 했다.
회맹이 이루어지기 전 장막이 장초에게 물었다.
“듣자니 아우가 광릉군수가 되고 통치와 교화에 위엄과 은혜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자네에게서 나온 것 같지는 않네. 장홍을 임용했다고 들었는데 그는 어떤 사람인가?”
장초가 대답했다.
“장홍은 재능과 책략, 지혜에 있어서 저보다 몇 배나 뛰어납니다. 제가 심히 아끼는 천하의 뛰어난 선비입니다.”
장막이 즉시 장홍을 불러서 만나 얘기를 나누어 보고 대단히 기이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연주자사 유대, 예주자사 공주 등이 속속 병력을 이끌고 산조에 도착했다. 이들은 장초의 소개로 다 장홍과 친교를 맺었다.
산조에 모인 각지의 군대들은 회맹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제단을 높이 쌓았다. 바야흐로 공동으로 맹서하고자 할 때 아직 맹주를 정하지 않았으므로 임시로 의식을 진행할 맹주를 정할 필요가 있었다. 함께 모인 자사와 태수들은 서로 자리를 양보하며 임시 맹주를 맡지 않으려 했다. 겸양하는 마음도 있었지만은 아직 형세가 정해지지 않은 형국에서 우두머리로 지목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일찍이 진(秦) 나라 말기 항량(項梁)이 팔천 명의 병력으로 강동에서 기병했을 때, 이미 강서에서 이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던 진영(陳嬰)이 오히려 항량에게 의탁한 적이 있었다. 당초 진영은 동양(東陽) 현의 현리였는데 인품이 좋아 반란을 일으킨 소년배들에게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모친이 이 말을 듣고 진영이 왕이 되는 것에 극렬히 반대했다.
“내가 너희 진씨네 집에 시집온 이래 너희 조상 중에 귀한 자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갑자기 큰 이름을 얻으면 좋지 않다. 남의 밑에 들어가는 것만 못하다. 일이 성공하면 제후에 봉해질 수 있고, 일이 실패해도 도망치기가 쉽다. 세상에서 그를 수괴로 지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영은 모친의 말을 듣고 감히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며 항량이 강을 건너 진격하자 부하들을 설득해 그의 휘하로 들어갔다.
임시로 맹주를 맡기를 거부한 자사와 태수들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결국 산조에 모인 자사와 태수들이 공동으로 장홍을 추대해 회맹의식을 거행하게 했다.
장홍은 제단 위로 올라가 피를 담은 쟁반을 손에 쥐고 피를 입술에 찍어 맹세했다. 장홍이 피를 담은 쟁반을 손으로 잡고 삽혈의식을 마치고 하늘을 우러러 서약문을 읽었다.
“한나라 황실이 불행을 만나 황실의 질서가 어지럽혀졌습니다. 역적 동탁이 그 틈을 노려 국가에 해악을 끼쳐 위로는 황제 폐하까지 화를 당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잔학함이 미치니 장차 사직(社稷)이 망하고 세상이 뒤집혀질까 몹시 두렵습니다. 연주자사 유대, 예주자사 공주, 진류태수 장막, 동군태수 교모, 광릉태수 장초 등은 병사들을 합쳐 의병을 일으켜 나란히 국난을 구하러 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함께 동맹을 맺어 국가를 위해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하고자 합니다. 국가원수의 죽음에 머리 숙여 애도를 표함으로써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키고 결단코 두 마음을 품지 않겠습니다. 이 맹세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그 목숨을 앗아갈 것이오, 그 자손의 씨도 마르게 하옵소서. 하늘과 땅의 신들이시여, 조상의 신령들이시여! 우리 모두를 굽어 살피소서!”
장홍이 비분강개한 어조로 제문을 읽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니 그 말을 듣는 자들은 일개 병졸이나 종들도 격앙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다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하고자 마음먹었다. 이때까지 폐위된 홍농왕 유변은 죽지 않고 있었으나 관동지방에는 그가 이미 동탁에게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의식을 마치고 산조에 모인 제후들은 의병에 가담의사를 표시하였으나, 아직 회맹하지 않은 산양태수 원유, 남양태수 장자, 제북상 포신 등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발해태수 원소를 전체 의군의 맹주로 추대했다.
내심 맹주 자리를 탐내고 있던 후장군 원술은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았다. 기의한 제후와 호걸들이 모두 원소를 맹주로 추대했다는 소식을 듣자 화를 내며 말했다.
“더러운 놈들 같으니라고! 나를 두고 종놈의 자식을 따르다니!”
원래 원소가 원술의 형이긴 하지만 서출이었던 점을 늘 폄하했다. 원소는 원술과는 배다른 형제였지만, 백부의 양자로 입적되어 후사를 잇게 됨으로써 서출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원소를 맹주로 추대하는 데 반대한 사람은 원술만은 아니었다. 남들은 다 원소를 추종했으나 제북상 포신만은 조조가 맹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조에게 나설 것을 권유했다.
“그대는 불세출의 지략을 지니고 있소. 능히 영웅들을 이끌고 난을 다스려 세상을 바로잡을 이는 바로 당신이오. 진실로 그대가 아니면 지금 비록 의병들이 강성하다 해도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오. 그대는 바로 하늘이 내려준 사람이 아닌가 싶소!”
비록 다수의 호걸들이 따르는 원소가 맹주가 되었지만, 이 일로 조조와 포신은 서로 결맹하여 의지하게 되었다.
조조는 포신을 특별히 친근하게 대우했다.
맹주로 추대된 원소는 스스로 거기장군을 칭하며 이름뿐이었지만 사례교위를 겸직했다. 원소는 자신의 병력과 하내태수 왕광의 군대를 하내에 진주시키고 기주목 한복에게는 업성에 주둔하면서 식량 등 군수물자를 보급하게 했다. 예주자사 공주는 영천에 주둔했고, 나머지 부대는 모두 산조(酸棗)에 그대로 주둔했다.
조조 역시 산조에서 여러 군대들과 함께 주둔하고 있었는데 공식적인 직함이 없는 것은 그 뿐이었다. 원소가 조조를 분무장군(奮武將軍)에 임명했다.
후장군 원술은 남양군 노양(魯陽) 현에 머무르고 있었다.
의병을 일으킨 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원소나 원술, 조조와 장막은 이미 수차례 등장했으므로 별도로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주 목 한복은 자가 문절(文節)로 영천(潁川) 사람이었다.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지냈고 주비, 오경 등의 추천에 의해 기주목(冀州牧)으로 임명된 것과 교모의 위서가 도달했을 때 유자혜의 의견을 따랐다는 사실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원소에게 먼저 기병하도록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복은 내심 원소를 의심하고 시기했다. 매번 군량을 부족하게 공급하면서 이로 인해 군사가 흩어지기를 바랐다. 이에 격분한 연주자사 유대가 한복에게 편지를 보내 위협했다.
“동탁이 하늘의 도리를 거역하기에 천하가 모두 함께 그를 공격하려는 바이오. 삶과 죽음은 조석간의 일이니 겁낼 것이 없다고 생각하오. 다만, 동탁을 죽인 후에는 돌아와 마땅히 한문절(韓文節)을 토벌하고야 말겠소. 강병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역적을 편안하게 내버려 두고 있으니 그대 또한 어찌 흉악한 역도라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편지를 받아 읽은 한복은 몹시 두려웠다. 강한 병사와 군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앞장서서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을 다 유자혜(劉子惠)가 관망하도록 권유한 탓으로 돌렸다. 모든 죄를 유자혜(劉子惠)에게 뒤집어 씌워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내심은 여러 부하들 앞에서 면박을 준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별가종사 경무(耿武) 등이 다 유자혜의 몸 위에 엎드려 함께 죽여 달라 하자 할 수 없이 죽음만 면해 주었다. 유자혜에게 죄수복을 입혀 관부의 문 안팎을 청소하는 종으로 만들었다. 한복의 마음 씀씀이가 이러했다.
예주자사 공주의 자는 공서(公緒)이고 진류(陳留) 출신이었다.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한 청담사상에 영향을 받아 고담준론하기를 좋아했다. 말재주가 매우 뛰어나 그가 입을 열면 ‘고목나무에도 꽃이 피어나게 할 수 있다.’는 평판을 얻었다.
왕광은 자가 공절(公節)이고 젊어서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베푸는 것을 좋아해 입협(任俠)으로 이름이 높았다. 대장군 하진의 밑에서 부사(符使)로 일하다가 서주에 파견되었다. 왕광은 태산군에서 강노군 오백 명을 징발하여 경사로 향하던 중 하진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왕광은 병사를 이끌고 귀향하던 중 의병에 가담했다. 원소에 의해 그는 하내태수에 임명되었다.
유대는 후일 양주자사가 되는 유요(劉繇)와 형제지간이었다. 유언이 주목을 설치하고 조정의 고관들을 임명할 것을 건의함에 따라 유대는 종친의 신분으로 연주목에 임명되었다. 그의 집안은 전한 시절 제(齊) 나라 효왕(孝王)의 작은 아들이 모평후(牟平侯)에 봉해진 것에서 시작되었다. 백부 유총(劉寵)은 태위를 지냈다.
교모는 자가 원위(元偉)고 교현의 집안 조카였다. 유대에 앞서 연주자사를 지냈다. 그가 자사로 있었을 때 위엄과 은혜가 깊이 베풀어 백성들이 심복했다. 산양태수 원유는 자가 백업(伯業)이고 원소의 종형이었다. 장안령(長安令)을 지냈으며 장성한 후에도 학문에 열심이었던 학자였다.
산동의 여러 의병들은 이렇듯 동탁을 타도하고 조정을 바로잡는 것을 명분으로 내걸었다. 의병들 대개가 사심이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