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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인가. 남북국시대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흔히 사용해온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라는 용어는 발해의 존재를 제외하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발해사 또한 우리역사의 한 부분이므로 발해와 통일신라 모두를 균등하게 취급해야 한다. 이런 취지에서 나온 것이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라는 용어이다. 즉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양립하였음을 말한다. 발해사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발해 유민을 적극 수용하였지만 만주지역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였다. 이런 경향은 조선초기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유학자들은 삼국에서 통일신라로 그리고 고려로 이어지는 신라 중심적인 국가계통론이 자리잡혀 있었다. 발해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조선후기 일부 실학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신라와 발해가 양립한 시기를 '남북국사'로 합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김정호도 [대동지지]에서 유득공과 비슷한 생각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발해사에 대한 논의는 점점 줄어들어갔다. 이유는 발해사에 관해 알려진 사실 자체가 너무 적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신라의 삼국통일이 갖는 의미에 관한것으로서 신라의 삼국통일로 말미암아 우리역사가 하나의 영토. 국민으로 이루어진 단일 민족국가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이점을 너무 크게 부각시키다보니 자연스럽게 발해사에 대한 기록은 적었던 것이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발해사에 대해 남한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즉 신라의 통일을 국토남부의 통합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여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다시 발해로 그리고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를 전통으로 보고 있다. 이와같이 남한은 신라를 북한은 발해를 우위에 보았기에 양립하는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는 사용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던중 1970년대에 이우성이라는 학자가 남부국시대라고 부를 것을 적극 제안했다. 이것은 통일신라에 편중된 역사인식의 교정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그에 대한 비판 또한 많았다. 비판중에 하나가 신라와 발해가 하나의 통일체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당시 신라와 발해상에 동족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사용되는 남북국시대라는 개념은 하나의 통일체에서 갈라진 것을 상정하고 사용한 것이 아니며 당시 삼국시대에는 아직까지 민족의식이 아주 단초적으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당대인의 관념에서 나타나는 행동을 보면 발해건국 직후인 700년에 대조영은 신라로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의 압력에 대응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하였다. 신라에서도 반겨 대조영에게 신라관등 제5관등에 해당하는 대아찬의 벼슬을 내려 호의를 배풀었다. 이로서 형식적으로나마 신라는 발해를 신라의 영향력안에 두려는 의도를 보였다. 무왕이 직위하면서 발해는 급격히 팽창하였고 그에따라 발해를 견제하는 당과 신라와의 관계또한 냉각되었다. 서로간에 차가운 냉전은 발해에 문왕에 즉위하면서 서서히 가라앉게되고 활발한 교류를 가진다. 신라의 국경도시인 천정군(泉井郡)에서 발해의 동경 용원부(東京 龍原府) 사이에 39개의 역(驛)을 갖춘 교통로가 있었다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발해는 스스로 '고려'라 칭하며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고 신라도 이를 인정하였다. 신라말기 최치원은 '저 고구려가 오늘의 발해가 되었다.'고 말해 당시 지식인들의 생각을 대변하였다.
고려역시 발해와 마찬가지고 고구려계승을 표방하였다. 그들은 발해에 대해서는 같이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동류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발해를 흡수. 계승한 것은 아니기에 발해사에 대해서는 기록된 역사가 없다는 이유로 역사로 정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신라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200여년 동안 두왕조는 병존하였지만 그 길을 달리하였다. 신라는 왕조교체로 이어져 나아갔지만 발해는 계승국없이 멸망하였다. 이제 단지 발해역사의 소유권만을 주장할것이 아니라 발해사에 대한 체계적인 복원작업과 정당한 역사의 자리매김으로 우리역사의 한 부분으로서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대조영은 말갈인인가.
발해사를 연구하는 주된자료로는 중국의 역사책인 [구당서] 발해 말갈전과 [신당서] 발해전이다. 두 역사서가 모두 발해를 '말갈의 나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서로 다르게 쓰고 있어 논란이된다. 즉 [구당서]는 대조영이 본래 고구려의 별종임을 밝히려는 태도이고 [신당서]는 대조영이 속말말갈(粟末靺鞨)출신으로 걸사비우가 이끌던 말갈은 아닐지라도 말갈의 한 부족 출신인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말해 [구당서]가 '발해는 말갈의 나라이나, 건국자는 고구려계'라는 식으로 사실에 충실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있고 [신당서]는 '발해는 말갈의 나라이며 건국자 대조영도 말갈계'라는 계통의 일관성을 중시하는 듯한 인상은 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역사사서가 모두 대조영이 처음부터 고구려 유민을 이끌었으며, 이 집단을 중심으로 발해가 건국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 유민이란 예맥 계통의 원래의 고구려인외에도 고구려화된 말갈인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걸사비우가 다스렸던 말갈인은 고구려의 영향은 받았으나 멸망할때까지 고구려화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구려인과 함께 수. 당과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고구려가 멸망후에 고구려인과 함께 영주일대로 강제이민된 존재들이다. 말갈인들은 요서로 옮겨진 후에도 고구려인들과는 구별되어 걸사비우와 같은 말갈인 지도자의 휘하에 있었다. 그렇다면 고구려 유민을 이끈 대조영은 원래 고구려인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고구려화된 말갈인이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사서에서도 대조영의 출신을 설명하고 있는데 가장 오랜기록이 [삼국유사]이다. 여기에서 대조영이 고구려의 장군이었음을 밝힘으로써, 그의 종족계통을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대조영이 고구려의 옛장군인 한 그가 원(原)고구려인이든 고구려화된 말갈인이든 이것은 큰 문제가 되지않는다. 발해인들의 자신의 왕실의 출신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면 일본 역사책 [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 발해가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였으며. 일본또한 이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발해의 제3대 문왕은 자신을 '고려천왕'으로 칭하였고 과거 고구려왕실이 주장하였던 '천손(天孫)'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이것으로서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며 발해 왕실은 고구려 왕실과 한 계통이라는 인식이 발해인에게 있었음을알 수 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영웅인가.
영웅이란 한 인물이 자신의 능력으로 한 시대의 과제를 역사의 올바른 진행방향과 일치하게 성공적으로 수행해냈을때와 고결한 정신과 굳센의지를 가지고 역류하는 역사에 저항할 때 부르는 칭호이다. 김춘추는 귀족들에 의해 쫓겨난 제29대 진지왕의 손자였고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김구해의 증손자였다. 폐위된 왕손인 김춘추는 비록 큰 야망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중앙세력에서 소외되어 있었기에 펼칠수가 없었다. 그리고 김유신은 비록 진골출신이었으나 금관가야의 왕족출신이었으므로 배타성이 강한 토착귀족세력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런 두 사람 김춘추와 김유신 집안은 김춘추와 김유신 작은누나와의 결혼으로 인하여 결합하게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 군사원조를 요청하려고 갔으나 한강유역의 반환을 요구하는 고구려의 요구를 거절하자 고구려는 김춘추 강금하였다. 겨우 목숨만 건져나온 김춘추는 외국으로 건너갔다. 결국에는 당나라에까지 들어갔다. 김춘추는 당에게 원산만이북의 영토를 준다는 약속을 하고 나. 당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당과의 연합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당은 서서히 한반도를 전부 차지하려는 야욕를 드러내었다. 그로인해 나. 당전쟁은 일어났다. 신라군 총사령관 김유신은 백제 계백장군의 결사대를 무찔렀으며 당나라의 도움을 받아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 후 김유신은 8여년의 나. 당전쟁도 참전해 노령에도 불구하고 많은 업적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즉 김춘추는 외교적인 부분에서 그리고 김유신은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활약하였다. 그 둘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세력을 몰아내어 신라를 승자로 만든 주역이었다. 그러므로 그 둘은 당시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숭배되었다. 후대로 오면서 그들이 외세를 끌여들인 것을 비판하며 그들을 외세의존적인 사대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도 현재 우리와 같은 민족의식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지나친 발상이다. 그리고 당시 삼국은 서로를 적국으로 여겼기에 다른 국가와 연합하여 공격하는 것은 지극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나. 당전쟁을 어렵게 치루고 난 후 신라. 백제. 고구려 유민들 사이에 동족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통일신라는 역사진행의 방향을 고려해 볼 때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넘어가는 기반이 되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김춘추와 김유신의 당대활동은 올바른 역사진행방향도 역류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원효와 의상은 어떤 인물이가.
원효는 617년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고 의상은 625년 진골가문에서 태어났다. 서로의 나이와 신분의 차이가 있었지만 서로 친분을 쌓아갔다. 당시 중국에서는 인도유학을 마치고 온 삼장법사 현장(玄濱)이 있었다. 원효와 의상은 중국유학을 결심하게된다. 중국으로 가던도중 원효는 직산에서 모든 것은 마음 먹기 달렸다는 진리(一切唯心造)를 깨닿고 경주로 돌아오게된다. 하지만 의상은 처음 의지를 굽히지 않고 중국유학길을 떠난다. 이때부터 원효와 의상은 다른 구도의 길을 걷게된다. 돌아온 원효는 불교의 대중화에 적극 힘쓰게된다. 당시 중고기(中古期)(514 - 654)의 신라는 불교를 이용한 국가 경영정책을 실시하였기에 불교는 체제적 성겨으로 점점 짙어져만 가고 있었다. 진골출신의 승려들은 국가의식에 고취되었었고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불교는 일부계층의 신앙이 되어지자 혜공(惠空)이나 대안(大安)과 같은 승려는 원효가 대중화에 앞장서기 전부터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원효 또한 지배층의 이념으로 인해 소외되어가는 민중들을 구도의 길로 인도하길 원했다. 그는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 그들의 생활속으로 파고들아가야 한다고 여겨 민중의 생활로 들어가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 힘썼다. 당시 654년에는 진덕여왕이 물러나고 김춘추(태종 무열왕)에 의해 중대왕실이 개창된다. 중대왕실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불교교단을 세속적인 권력과 제도에 더욱 예속시키며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 정책으로 일부 고위승려들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을 사로잡을 승려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효는 그의 자유분방한 교화활동으로 인해 그를 경제적 뒷받침을 해줄 후원자가 없었다. 그로인하여 그의 모든 대중에게 불교사상을 환원하겠다는 목표는 쉽게 달성되지 못하였다. 그때 만난 것이 요석공주였다. 공주와의 인연으로 설총이라는 인물이 태어나기도 했지만 이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은 원효가 이제 안정된 경제적 후원자인 무열왕 즉 중대왕실을 두게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안정된 후원으로 원효는 90여부 2백여권의 서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는 '한마음(一心)'을 불교 핵심으로 보았다. 원효는 모든 사람들이 이 한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모든사람이 그곳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비록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었지만 원효는 끝까지 자신의 사상을 스스로 실천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그의 후원자였던 왕실이 있었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의 불교를 공감하는 다수의 일반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의상은 결국 중국으로갔고 중국 화엄종의 지엄(智儼)에게서 화엄학을 배웠다. 의상은 그곳에서 10년을 공부하고 [화엄종]의 사상을 시로 요약한[화엄일승법계도](華儼一乘法界圖)를 썼다. 의상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당시정세는 신라가 고구려, 백제 사람들까지도 신라인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고 통일사회의 건설에 동참시킬 필요를 느끼고 있을때였다. 이때 의상도 모든 것들이 불교 앞에서 평등하다는 평등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의상은 그의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일반인을 중심으로한 평등사회의 건설을 꿈꾸었다. 이런 그의 관념은 노비출신 이었던 지통(智通)과 빈민출신인 진정(眞定)이 그의 10대 제자로 성장하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평등은 교단내에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 큰 사회적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걸식으로 생활하여 일반민과 더욱더 가까워 지려고했고 불교계가 보여주던 지배층 중심의 계급적 편향성을 상당히 극복하고 있었다. 또 의상은 영주 부석사와 양양 낙산사교화의 중심지로 두어 당시 기성불교계가 가지고 있던 경주 중심의 비역적 불균등성을 극복하고 불교를 지방사회로 나아가게 하였다. 원효와 의상은 둘다 일흔이 넘어서 입적하였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비록 다른 방법이었지만 서로 함께하였다. 이는 그들이 모두 궁극적으로는 통일신라를 불교적 이상국가화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