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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서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지식을 주어서 무지를 깨우칠 목적으로 쓰인 책입니다.
잠언서는 인간에게 마땅히 알 것을 알려주려고 쓰신 책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사는 것이 기본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큰 발견은 하나님을 발견한 일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믿고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발견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마 22:34절을 보면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되면 눈이 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몇 가지 눈을 뜨게 됩니다.
하나는 “자신을 보는 눈” 이 뜨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깊이 알 때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나의 값을 알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소중함을 알고 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면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진가를 깨달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회자와 선교사, 신학교 교수, 신학생들이 무너집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유혹이 강해서도 아니고 그 사람이 악해서도 아닙니다.
마음에 임하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출 17: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지금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도와주시고 인도하셨는데, 물 때문에 좀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고 모세와 다투며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했습니다.
마음에 임하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역자들 안에는 영적인 공허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미혹을 쉽게 받는 것입니다. 성령 역사인 것 처럼 거짓으로 꾸미거나 돈이나 명예, 권력에 집착하게 되거나, 도박이나 음란 등 은밀한 죄에 빠져 드는 것입니다.
이런 사역자를 본다면 원인은 하나입니다. 만 왕의 왕이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역자일수록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정직해야 합니다.
요 15:5 말씀처럼 자신이 정말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자신 안에 거하시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영적 공허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하면 큰 일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은 세상 그 어떤 것 보다 놀라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얻고 주님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정말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과 하나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훈련을 개인이 혼자서 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신앙 공동체를 주신 것입니다.
공동체의 유익은 서로 서로 도와서 주님과 동행하게 세워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어진 값은 얼마입니까. 나라는 존재는 참 소중한 값을 지닌 존재입니다. 소중함을 아니까 사람이 품위를 지키고 절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비하하고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못생겼다는 생각도 알고 보면 남들이 일방적으로 쳐놓은 조건으로 자신을 보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땅히 사랑해야 할 자신을 구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지입니다. 내 몸이나 내 자신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 주겠습니까. 나는 이 세상 6,70억 되는 인구 가운데 오직 하나뿐인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선물입니까. 그런 나를 구박하고 업신여기고 비관하는 것은 마땅히 죄입니다. 나를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내 몸은 내가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자신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나의 모습, 나의 값, 나의 은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인간의 무지입니다.
여러분은 남들과 같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각자에게 분량대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사용할 때 기쁘고, 즐겁고, 행복함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은사대로 일하면 밤을 새워 일해도 피곤하지 않은데 하기 싫은 일을 하면 피곤해서 못합니다. 나는 나의 몫이 있고 값이 있고 은사가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인애와 사랑을 받는 대상입니다. 사람은 이점을 알아야 나를 사랑할 줄 알게 됩니다.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을 알게 되면 이렇게 나 자신을 보는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뿌리도 알게 되고 미래도 알게 되고 나의 운명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이웃을 아는 눈”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신을 보는 눈만 뜨이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이웃을 보는 눈도 뜨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나의 값도 알게 되지만 동시에 너의 값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데 그 하나님의 뜻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면 내가 우선이고 내가 목적이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이 그런 시대입니다. 오늘은 내 마음속에 네가 없는 지극히 나 위주의 이기주의적인 시대입니다. 이기주의는 나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삶이고 이웃을 불행하게 하는 삶이고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삶이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웃간이나 세대간 그리고 부자간에도 교류하고 마음을 나누는 삶이 아주 적은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을 가리켜서 단절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생각이 단절되고 이식이 단절되고 문화가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대의 특징은 대부분 자신에 대해서는 강한데 너를 생각하는 성향이 아주 약한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사회는 앞으로 가면 갈수록 이 “너를 생각하는 성향”이 점점 더 약화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이것이 오늘 문화의 특징입니다. 오늘 문화의 특징 속에는 네가 없습니다. 너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나 자신 뿐입니다. 내가 좋으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불행한 생각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이런 시를 쓰셨습니다.
"공원묘지를 걷는다. 수많은 무덤이 줄을 지어 가지런히 앉아있다.
각 무덤마다 비석 하나 석상 하나. 그들의 살림살이는 하나같이 조출하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도 아마 사링하고 미워했겠지. 바쁘게 쫓기고 화내고 그리워하고 후회하고 그렇게 살아갔겠지.
그들은 얼마나 사랑했을까.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혹은 욕심내며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살았을까.
많이 소유하기 위하여, 성공하기 위하여 밤늦게까지 일을 했을까.
자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인가. 한 개의 비석 한 개의 이름 하나의 석상
이것을 위하여 그는 그토록 수고했는가. 잠을설치며 마음을 졸이며 살아왔는가.
가족들은 그를 무엇으로 기억할까.
저 비어있는 묘지의 주인은 지금 어디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염려하고 있을까 실망하고 있을까 분노하고 있을까.
그는 슬퍼했을까 울었을까 후회했을까.
이제 나는 내 삶의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 내 차례가 올 때까지 조금 더 정결하고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축복하며 조금 더 이 길을 걸어야 하리라
나의 떠남이 소망과 그리움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조금 더 걸어가야 하리라
행복한 죽음 후회없는 안식을 위하여 후회없는 이별을 위하여 오늘도 사랑의 길을 가야 하리라“
우리 인생에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준수한 외모나 화려한 성공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사망, 그것은 사랑이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 3 : 14).
진정 귀한 것은 주님과 친밀한 사람이 되며 사랑만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면 나 자신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눈이 뜨이게 되고 또 너를 보는 눈이 뜨이게 됩니다. 얼마나 소망적인 삶입니까.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오늘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전하는 눈” 을 뜨게 됩니다.
모세의 위대함이 어디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분 처럼 바라보며 살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히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내가 만난 하나님을 어떻게 후대에 알릴 것인가 하는 눈도 뜨게 됩니다.
누가복음 1장 6절을 보십시오. “6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습니다. 사가랴와 이름없는 제사장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세상은 아무도 이들을 주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누가복음 1장 7절을 보십시오. “7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두사람은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는 인생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사회에서는 심각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서 복을 누리는 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생각했고 특이 자식을 하나님의 주시는 복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히 제사장에게는 이것은 치명적인 문제였을 것입니다. 제사장이라면 자신의 가업을 이어 제사를 섬길 자녀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누가의 기록은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누가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요, 그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했다고 했습니다. 유대적인 사고에 의하며 이런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했고 그들은 자식의 복을 누려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점입니다. 우리는 의인으로 살더라도 자녀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의인이었다는 점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잉태하지 못하는 집안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들은 잉태를 못하는 집안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이것을 잘 감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의인의 삶이라는 것은 만사형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없는 문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는 것,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유지하고 사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들이 한 일입니다. 그들에게 잉태못하는 문제가 있었으나 이들은 이를 잘 감당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그들은 기도하는 사람들도 살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의인의 삶입니다.
신 6:5절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또 강조하기를 “그 하나님을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일만으로는 다가 아닙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깊이 알았다면 그 하나님을 알려야 한다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힘이고 능력입니다.
참 오늘 소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면 나 자신을 보는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너를 보는 눈도 뜨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알리려는 눈도 뜨이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