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복음을 나누고 싶었다. 청소년부를 맡으면서 첫번째로 함께 나누었던 책이 “갈라디아서”다. 로마서를 다루기엔 너무나 거대한 산맥이었기에, 그 로마서와 맞닿은 앞산 같은 갈라디아서를 골랐다. 그리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배경, 논쟁, 율법, 자유, 믿음 등 어느 하나 쉽지 않았다. 결국 갈라디아서는 당시 유행하던 “네가 게맛을 알아?”란 광고처럼 “네가 복음을 알아?”라며 나의 교만에 펀치를 날렸다.
그런데 남서울교회에 화종부목사님이 갈라디아서 설교집을 냈단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설교집을 좋아하진 않는다. “아무개 목사 성역 *년” 설교집이나 날 것 그대로가 아니 착착 감기는 듯한 출판사 편집의 대형교회 설교자들의 설교집들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교회 때부터 말씀에 대한 깊이와 진중함을 가지고 파고드는 설교자였기에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책을 펼쳐들었다.
처음부터 흐뭇하다. 개인적으로 설교는 설교문을 읽기보단 설교 그 자체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현장에서 역사하고 느낄 수 있는 설교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도 들어가는 글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가능하면 거의 수정하지 않은 원형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했습니다. 설교집은 청중들엑 들려진 형태를 가능한 한 그대로 담아야 설교집다울 뿐만 아니라 설교의 맛과 멋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p.12) 그렇기에 이 책에 있어 화종부란 “저자”라는 표현하기 보다는 “설교자”라 해야 한다. 표지에 있듯 이 책은 “읽는 설교”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갈라디아서는 원래 성경 갈라디아서가 그러하듯 복음에 초점을 맞춘다. 본 책은 크게 3부로 권위에 관한 문제, 복음과 구원에 관한 문제, 성령을 통한 성결로 구분한다. 강해설교이기에 갈라디아서의 장별 내용과 구조에 따른 나눔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본 설교문을 읽으면서 설교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복음에 대해 진술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재구성해 볼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지?”, “은혜란 무엇인지?”, “바른 신앙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설교자는 자주 인간의 자기 중심성을 직시하게 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가장 소중한 사람도 바르게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중략) 자기 중심성이 드러나는 아픈 과정을 통해, 우리 삶에 주님이 좌정하셔서 우리의 임금, 우리의 목자,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삶이 얼마나 복되고 행복한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자신의 실체를 본적 없는 사람은 기독교를 종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주를, 나를 대속람하신 주로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p.207) 설교자는 갈라디아서 말하는 인간본질이 어떠한지를 세밀하게 추적해 나간다. 이런 부분이 바로 화종부 목사의 갈라디아서가 가진 강점이다.
인간의 자기 중심성과 대비하여 은혜에 대한 이해를 선명히 부각시킨다. 특별히 은혜에 대한 이해는 인간과 하나님께 대한 대비로 더욱 부각된다. 지금도 지속되는 인간의 자기 노력과 무지를 설교자는 고발한다. 그러면서 설교자는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달달한 예화나 은근한 설교자의 체험보다는 하나님 그 분 자체를 더욱 드러내려 한다. “그 분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끼지 않고 보내셨습니다”(231), “유언장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고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약속을 주시면, 그 약속은 참된 것입니다”(196) 설교자는 나인 인간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은혜요. 그 은혜를 깨닫게 함으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임을 알게 한다.
바른 신앙에 대해서도 설교자는 강조한다. 이는 복음이 바로 서 있는 곳에 당연히 일어나는 신앙에 대한 설명과 삶에 대한 촉구의 측면이다. “자기를 꾸미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조건을 구비하는 세상의 행위가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행위가 참 행위입니다”(142). 본 책은 대상이 명확하게 있는 지역교회에서 선포된 설교이다. 따라서 갈라디아서에 말하는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오늘 여기에서 분명히 복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부단히 고민하며 도전한다. 그런데 여기에 인상적인 점이 발견된다. 설교자는 오늘 여기에 대한 강한 적용으로 믿음의 선배들이 복음에 반응한 원형의 삶을 주목케 한다. 그렇기에 강력함이 있다. 복음으로 흔들기 때문이다. 설교자도 괴로워한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많이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열심히 신앙 생활 잘했던 사람들을 흔들어도 되는 건지, 참 괴로웠습니다”(294)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시대 기준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에 반응하고 살아가는 원형의 삶에 대비시키기 때문이다.
화종부의 갈라디아서에는 복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노력이 있다. 배경에 대한 설명, 복잡한 논쟁을 최대한 쉽게 간결하게 소화해서 전하는 부분, 주제를 잃지 않고 세밀하게 점진적으로 논지를 펼쳐가는 부분은 매력적일뿐만 아니라 성실한 설교자임을 드러낸다. 물론 본서는 남서울교회라는 직접적인 회중을 대상으로 설교문이다. 그러기에 때로는 지역교회만의 문제도 살짝 엿보인다. 그러나 신약의 서신서들도 지역교회를 염두한 서신이 회람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미친다는 점에서, 갈라디아서 그 자체가 이런 배경 속에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감안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직접적인 현장성을 가지기에 공감을 가지고 대할 수 있다.
본서를 읽으면서 설교자와 함께 동의하는 바는 결국“조국교회”(설교자의 표현대로)와 우리네의 문제점은 복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복음을 안다고 하지만 복음과 얼마나 동떨어져서 생각했는지,
복음을 알기 원한다면서 얼마나 복음을 멀리 했는지,
그리고 복음대로 살았다 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복음과 상관없는 삶이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렇다! 문제는 복음이다. 실상 복음이 문제겠는가?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리가, 살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 아닌가? 복음과 관련된 국내서적을 발견한듯하여 행복하다.
첫댓글 아멘! 글이 따뜻합니다.
정목사님 평안하시죠^^? 정목사님 글에 늘 감동받는 1인입니다^^
복음을 잘 모르는 우리가 문제이지요. 저도 내년부터 청소년을 담당하게 되는데, 갈라디아서를 도전해봐야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와~ 요즘 청소년 사역이 거의 특수사역(?)인데요^^ 목사님을 통해 복음이 청소년들 가운데 힘있게 역사할 줄 믿습니다^^
첫단락부터 흥미롭게 읽었어요. 잼나게 그러나 날카로운 글입니다. 누구하나 모자람없이 모두 잘 적으시네요.^^
예전부터 뉴조와 본 카페를 통해 주의깊게 읽고 있는 저자(?)가 "이현미"님이십니다^^ 고민과 예리함에 늘 감탄해 한답니다~^^
@장재우 이론ㅜㅜ 아~감사합니다^^ 뉴조는 이제 쉬고 요즘 대세인 <로고스서원>카페를 애용할려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