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울산암벽등반전문 /울산클라이머스연합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클라이머스 서재 스크랩 설악산 토왕성폭포 좌벽
rohavlee 추천 0 조회 43 10.06.29 11: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treme Climbing 설악산 토왕성폭포 좌벽

토왕 좌벽은치열한 정신의등반가를기다리고 있다 초등 역사 따라 320미터 좌벽 등반

글|임성묵 기자  사진|주민욱 기자

(土)의 기운이 왕성(旺)하지 않으면 기암괴석이 형성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설악의 땅 기운으로 치솟아 만든 320미터 절벽. 외설악의 백미이자 거벽으로 향하는 이들의 등용문, 바로 토왕 좌벽이다. 이 벽은 1970년대 중반부터 뭇 클라이머들을 뜨겁게 달궜고 초등은 한국산악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1975년, 부산 청봉산악회가 했다. 이들은 낙석의 위험 속에 상하단 벽을 돌파, 토왕 정수리에 섰고 당시의 감회를 아래와 같이 적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34년 전 서울의 내로라하는 클라이머들이 손도 대지 못한 위협적인 벽을 지방산악회가 오른 것도 그렇지만, 당시 그들의 등반 목적이 새로운 장비를 이용한 클린 클라이밍이었다니 말이다. 청봉팀은 비록 전 구간을 자유등반으로 오르진 못했지만 이런 사조가 1980년대 초반에야 전파된 것을 생각하면 5년을 앞선 등반이었다.

그래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좌벽을 등반하기 위해 정월 대보름날 설악산으로 향했다. 크럭스 존 암장을 운영하는 김팔봉씨와 취재를 도우려고 휴가를 낸 청악산악회의 전양준씨와 함께 였다.

“추위가 풀려서 등반하기는 최적의 날씨인 것 같습니다.” 어스름한 새벽 헤드램프 불빛에 의지해 토왕골로 향하던 팔봉이가 더워진 몸을 식히려고 재킷을 벗으며 한마디 했다. 적설량이 적어 걷기 좋은 등산로를 따라 1시간 남짓 오르자, 320미터 얼음기둥이 거대한 검은 벽을 좌우로 거느리며 우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형 언제 왔어요? 등반 빨리 끝내고 이쁜이네 집에서 막걸리 한 잔 해요.”

출발점에서 만난 부부 거벽등반가 최석문, 이명희씨가 건네는 반가운 인사였다.

폭포 우측 설동에서 장비를 착용한 우리는 곧 출발을 했다. 좌벽 스타트지점은 동굴 좌측이었지만 중단 슬랩을 빙벽화로 오르기에는 너무 위험부담이 커 하단은 빙벽으로 오르고 좌벽은 중단부터 등반하기로 했다.

스크류 10개를 챙긴뒤 1월과 비교해 살이 많이 붙은 빙벽에 올라붙었다. 추락계수가 1이 넘지 않도록 스크류를 촘촘히 설치하며 40미터를 오르자 경사가 누그러졌다. 연빙이라 피크가 마음먹은 대로 얼음에 박혔다.

70도 경사 빙벽 40미터를 더 올라 쌍볼트에 도착 “완료!”를 외치자 팔봉이가 등반을 시작했다. 후등으로는 등반을 못하는 전형적인 톱장이인 그는 박혀있는 스크류를 이용, 15분만에 확보지점에 도착했다.

상단에는 토왕성의 마력에 이끌려 전국에서 몰려든 30명의 등반가들이 차가운 얼음기둥에서 저마다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주민욱 기자의 부인 김유희씨도 있었는데 부부가 먼발치에서 안부를 전하는 모습이 마치 견우와 직녀를 떠올리게 했다.

“벽에 눈이 많은데요? 동계 초등 당시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팔봉이 말이 맞다. 1980년 12월 24일 동계 초등을 위해 좌벽을 다시 찾은 청봉산악회의 정태희, 홍복광씨는 초등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생을 했다. 얼음이 들어찬 크랙, 쉬지 않고 떨어지는 분설 눈사태, 눈이 덮여 홀드를 찾을 수 없는 중단부 슬랩 등을 돌파한 끝에 동계 초등을 이루었던 것이다.

하지만 좌벽은 시작에 불과했다. 치열함으로 무장한 이들은 연속해서 우벽과 빙벽까지 연달아 올라 총 1000미터의 연장등반에 성공했다. 청봉팀의 이런 도전정신은 1982년 마터호른 북벽 동계 한국 초등의 밑거름이 되었다.

 

등반 준비를 마친 나는 초등자들처럼 캠과 하켄을 주렁주렁 매달고 중단부 등반에 나섰다. 상단벽까지 가려면 7센티미터 정도 눈이 쌓여있는 20미터 슬랩을 트래버스해야 했다. 중단 설벽을 직선으로 올라 좌측의 군함바위를 넘어서는 최단 루트를 따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30미터 설벽을 지나 바위에 붙었다. 경사가 급하지 않아 작은 홀드를 잡고 3미터쯤 올랐는데 확보물을 설치할 마땅할 크랙이 보이지 않았다.

버드빅까지 꺼내 막힌 크랙에 박아보지만 든든하질 않았다. 결국 나이프하켄을 반쯤 박고 일어서는데 5미터 위쪽에 바위틈이 보이는 듯했다. 그래 그리로 가려고 프런트 포인트로, 눈이 살짝 붙어있는 슬랩을 딛고 일어서자 발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떨어지면 어설프게 설치된 피톤이 빠져 30미터 아래로 곤두박질 칠 것이 확실했다. 살이 떨리는 순간 피크로 눈을 천천히 긁어 내리자 “턱!” 소리를 내며 바위에 걸리는 것이었다.

자세를 다잡은 나는 같은 동작으로 세 스텝을 더 올랐다. 그런데 크랙인줄 알았던 바위는 검은색 물길이었다.

안전을 담보할 희망이 사라지자 몸이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기 시작했고 추락할 때 눈이 많은 사면으로 뛰어내려야 덜 다칠 것이라는 답이 계산기보다 빠르게 나왔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곳도 돌파하지 못하느냐는 자책과 오기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한 번 신나게 떨어지자!” 마음먹고 5미터 위에 있는 쌍볼트로 등반에 나섰다. 발이 밀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두 팔과 무릎, 발꿈치 그리고 아이스 툴을 눈에 박고 아기처럼 기기 시작했다.

“앞으로 쌍볼트까지 5, 4, 3….”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하며 위험한 슬랩을 곡예처럼 오르자 눈앞에 슬링이 나타났다. 확보를 한 후 약한 마음을 떨쳐버렸다는 성취감에 소리 높여 완료를 외쳤다. 가슴이 시원해졌고 뜨거운 무엇인가가 몸 속에서 흐르는 것 같았다.

중단 테라스 위로 곧추선 이후의 벽은 오늘의 주인공 김팔봉씨 무대였다. 힘이 장사인 그는  암벽장비로 무장하고 인천교대 산악부가 만든 하강루트 왼쪽 상단 첫 피치 등반에 나섰다. 이 길은 청봉산악회가 개척한 길보다 경사가 훨씬 센 루트였다.

“형 확보물 설치할 곳이 없어요. 추락할지 모르니 확보 잘 보세요.”  

75도 페이스에 진입한 김씨가 바위 굴곡진 부분에 쌓인 눈을 적절히 이용하며 올라 캠 하나를 설치했다. 안전이 확보되자 곧 평정을 되찾은 그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페이스 30미터를 더 올라 등반을 마무리했다.

테라스 위로는 오버행 크랙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우선, 5센티미터도 안 되는 베르글라(Verglas) 구간 5미터를 올라야 했다. 조심스러운 스윙으로 피크 두 이빨을 얼음에 박으며 고양이처럼 오른 그는 크랙에 큼지막한 캠을 설치했다. 이를 지켜보던 양준이형이 이제 추락해도 걱정 없다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팔봉이가 오버행 크랙을 가볍게 넘어서자 벽의 각도가 수그러들었고 홀드도 좋아졌다. 알맞은 발디딤과 손잡이를 이용, 등반에 속도를 붙인 팔봉이는 이내 넓은 테라스에 도착, 완료를 외쳤다.

주마링으로 테라스에 오르자 노적봉 뒤로 푸른 동해가 펼쳐졌다.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듯했다.

50미터 두 마디를 등반했기에 위로는 35미터의 완경사 잡목지대만 남아 있었다. 정상까지 악착같이 오르기에 우리는 너무 지쳐 있었고 해 지기 전에 내려서려면 지금 하강해야 했다.

100미터 로프를 이용해 세 번을 하강,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우리는 34년 전 부실한 장비로 미지의 벽을 오른 선험자들의 치열함으로 오늘의 등반을 반추해 보았다.  

누구는 등반능력과 기술이 발달했다고 했고 누구는 장비만 있으면 못 오를 벽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초등자들이 앞선 안목으로 볼트 사용을 자제해 가며 저 벽을 오른 이후 넓은 좌벽에는 새로운 등반선이 지금까지 추가되지 않고 있다. 이것이 말로 벽을 오르는 현재 우리들의 자화상인 것같았다.

치열함은 클라이머의 간절함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했던가? 그것의 부재를 통감하며 이쁜이네 집에서 쓴 막걸리 사발을 들이켰다. 벽은 치열하게 올라야 했기에….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