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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9:9-21
찬송가 324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엘리야를 부르시는 하나님(9-18)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어제 살펴본 1-8절과 같이 엘리야 선지자는 이세벨의 위협을 피해 북이스라엘을 떠나 브엘세바 남쪽 광야까지 피신하였고 이 과정에서 낙심하여 하나님께 죽기까지를 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엘리야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먹이시고 쉬게 하신 뒤 그를 호렙산으로 가게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9절의 시작에서 언급하는 굴은 호렙산의 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그 굴에 엘리야가 머물렀고 그곳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엘리야가 왜 이곳에 왔는지 진짜로 모르시기에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질문을 통하여 엘리야 선지자가 자신의 현재 상황과 정체성을 스스로 돌아보고 이를 극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상 숭배자들과 치열한 영적인 전투를 벌이며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이세벨이 엘리야 자신의 생명을 빼앗으려하자 자신이 있어야 할 사명의 장소인 북이스라엘을 떠났을 뿐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죽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사람의 신앙성숙은 흔들림 없는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실패와 낙심이 있는 곡선의 모양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신앙의 여정이 직선의 때나 곡선의 때에 모두 우리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질문에 엘리야는 자신이 억울하다는 듯,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울분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엘리야의 항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 대해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였고, 그 일들에 있어서 엄청난 결과들을 만들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에 있고 오히려 아합왕과 이세벨의 힘과 영향력을 더 커져 많은 선지자들을 죽였고, 이제는 자신마저도 죽이려 한다는 불만 섞인 고백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이방 선지자 850명과 대결을 하였고 거기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이제 더 이상 큰 영적인 전투는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예상과는 다르게 북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은 더 어두워졌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탄압을 더욱 심해졌습니다. 바로 여기서 엘리야 선지자는 큰 실망과 상처를 입을 것으로 보입니다.
신자로써 말씀을 따라 살면서 믿음의 일들을 감당하다보면, 그 일의 결과가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말씀의 따른 믿음의 결정을 했는데 그 결과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도 하고, 봉사나 섬김의 자리에서 자기희생적인 선택을 했는데 그 결과 도움을 받은 사람이 도리어 나에게 원망과 저주의 말을 한다면, 보통 당황하게 되고, 때로는 순진하게 말씀대로 살았던 자신을 책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잘못된 반응입니다.
일차적으로 우리가 믿음의 일을 감당하는 것, 즉 말씀에 순종하며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마땅한 반응이지 다른 무언가를 추가로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가 많으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향한 믿음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자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때에 우리가 기대하는 모양으로 오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음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내가 기대한대로 하나님께서 움직여주시길 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받들어 주기를 바라는 미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11-1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의 이러한 불평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엘리야에게 사명감과 헌신의 자세를 고취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뒤에 바람과 지진, 그리고 불로 생기는 특별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나타나실 때, 함께 동반되었던 현상들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준과는 다른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능력을 엘리야에게 직접 확인시켜주심과 동시에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이루셨던 놀라운 일들을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금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그제서야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표현을 담아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하나님께 다시 나아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엘리야는 현재 상황에 대한 두려움에 갇혀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다시 물으셨으나, 엘리야는 여전히 처음과 같은 답변을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그만큼 엘리야가 그 당시 받은 충격은 컸으며, 그가 느꼈던 두려움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세상에서 나만 손해 보고, 나만 바보같이 사는 것 같고, 때로는 내 아내와 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가야될 길에서 멈춰서는 안됩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여러 위협들이 너무도 크게 보이기도 하지만 말씀을 통해 눈을 들어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 하나님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두려워한다고 우리를 버리거나 우리를 윽박지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찾아와 다시 말씀해주시고, 우리가 다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바람도 보여주시고, 지진도 보여주시고, 불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다시 만나 우리 안에 믿음이 생겼을 때,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그 믿음을 따라 우리의 두려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우리의 삶에 반복되었을 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안에서 점점 더 크고 담대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다양한 상황과 질문으로 깨달음의 기회를 주셨으나 엘리야의 대답은 이전 10절과 같은 대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엘리야를 질책하신 것이 아니라 그 온유하신 음성으로 엘리야를 위로하시며 앞으로 그가 감당해야 할 구체적인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15-18)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새롭게 명하신 일의 첫 번째는 ‘네 길에서 돌이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일의 시작은 기존의 내가 하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의 방식을 따라 가는 것에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일을 시작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자리로 들어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일의 참여하는 사명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두 번째 명령은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사엘은 아람왕 벤하닷의 신하였던 인물로 벤하닷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후 북이스라엘을 계속 괴롭힌 인물입니다. 그러한 인물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신 의미는 하나님께서 하사엘을 북이스라엘을 향한 징계의 채찍으로 사용하실 것을 알리시는 용도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세 번째 명령은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예후는 아합 왕의 군대장관 중 한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는 후에 왕이 되어 아합의 아들 요람을 비롯하여 아합의 가문을 멸망시킨 인물입니다. 이는 결국 그렇게 천하를 호령하던 아합과 이세벨도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마지막 명령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앞으로 이어질 선지자의 사명을 엘리야 자신으로부터 이어받게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엘리야 선지자를 두려워 떨게 했던 무리들을 소탕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모두 밝혀졌는데, 17절의 표현대로 하사엘이 첫 번째 그물이 되어 하나님의 사람들을 괴롭히던 무리를 소탕하고, 두 번째로 예후가 그물이 되어 이세벨을 비롯한 악한 무리를 소탕하고, 마지막으로 엘리사가 남아있는 무리를 소탕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엘리야 선지자가 자신의 의지를 꺾고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로 돌아가면 벌어질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러한 설명과 사명 속에서 엘리야의 두려움은 조금씩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제 엘리야 선지자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에게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와 함께 하고 계셨으며, 이를 비롯하여 이제 엘리야 선지자에게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이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지원 앞에 이제 엘리야도 더 이상 과거의 두려움에 묶여,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리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과거 그 사람이 이미 경험한 고통과 두려움보다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엘리사를 부르는 엘리야(19-21)
(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엘리야 선지자는 그 즉시 호렙산을 떠나 엘리사를 만나러 갔습니다. 이는 19절 서두에 나오는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에 모두 그 행동이 즉시 이어짐을 보여주는 ‘와우 계속법’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납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께 즉각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간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렇게 엘리사를 찾아갔을 때 엘리사는 열두 쌍의 소에 겨리를 지워 밭을 가는 중이었습니다. 이는 엘리사가 24마리의 소를 소유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가 당시 큰 부자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엘리사를 향하여 엘리야 선지자는 대뜸 자신의 겉옷을 던졌습니다. 이런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 겉옷은 그 사람의 직업이나 직무를 나타내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진 행위는 엘리사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선지자 직무를 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 역시도 엘리야의 이러한 행동의 의미를 단번에 바로 알아챈 것으로 보입니다.
(20-21)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이어지는 20절에서 엘리사 역시 ‘와우 계속법’을 사용하면서 그가 즉각적으로 엘리야에게 달려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엘리사 선지자가 간곡히 요청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가족과의 인사였습니다. 이 본문은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가족을 장사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람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서에 나온 사람과 엘리사와의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복음서에 나타난 사람의 경우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피하려는 핑계에 불과했다면, 엘리사의 가족 방문은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여 온전히 하나님께 매진하기를 다짐하는 요청으로 그 마음의 중심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엘리사는 자신이 사용하던 농기구를 땔감으로 사용하여, 2마리의 소를 잡아 동내 사람들과 함께 나눠먹었습니다. 이는 이제 농부로서의 삶을 포기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엘리사의 이러한 결단은 과거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 앞에서도 자신에게 이익이 될 만한 것을 찾고 붙잡으려는 추한 모습이 아니라,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을 당하던 여인이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이자 유일한 소망으로 알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은 것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엘리사의 이러한 결단으로 인하여 엘리사와 엘리사의 가족들이 모두가 보다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사명의 자리에 하나님과 함께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부르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을 확인하였습니다. 과거 우리 하나님께서 엘리야와 엘리사를 사명의 자리로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명의 자리가 있음을 우리 함께 기억합시다.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욕망을 따라 엉뚱한 것을 붙잡은 어리석음을 사라지게 될 것이며, 참으로 가치있고 의미있는 예수님을 붙잡음으로, 우리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과 기쁨의 능력을 누리시는 우리 모든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과거 나의 상처와 두려움을 뛰어 넘는 놀라운 것임을 깨닫게 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이제 나도 과거의 경험과 두려움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오늘 나를 찾아오는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를 소망합니다.
그 결과 나의 인생이 두려움에서 용기와 믿음으로 바뀌고,
낙심과 실패에서 영원한 생명과 기쁨으로 변화되는 은혜가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오늘 하루 우리 교우님들의 각자의 기도의 제목에 응답하여 주옵시고,
당장의 현상과 결과에 낙심하고 좌절하기보다.
우리의 기대와 생각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현실을 이겨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엘리야 선지자가 당한 일들이 나에게 벌어졌다면 나의 마음은 어떠한 상태였을까요?
2. 과거 열심히 말씀을 지키고 순종했으나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황들이 펼쳐지면서 당황했거나 상처받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4.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 나의 소중한 것을 정리해본 경험이 있다면 적어봅시다.
(작성: 유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