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7:1-16
찬송가 86장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
욥이 자녀 열 명과 전 재산을 다 잃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종기가 발병해 재 가운데 있어야 했고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으며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로부터 위로의 말을 듣기는커녕 책망과 회개 촉구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욥에게 위로 대신 회개 촉구를 하게 된 이유는 욥이 받는 고난이 매우 극심하여, 하나님의 징벌 또는 저주 아래 놓인 자가 아니고서야 그런 고난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욥에게 위로보다 책망의 말을 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으로 다스리시는 세상의 일을 인간의 경험과 지식과 지혜로 해석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욥기가 전하는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욥기의 독자는 욥의 고난의 원인이,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진행한 일임을 알고 있기에 욥의 세 친구들의 말을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욥기의 도입과 결말을 모르고 욥이 겪은 일만 본다면, 욥의 세 친구와 달리 ‘적절히 좋은 말을 욥에게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봅니다. 욥의 세 친구는 당대 지혜자이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공감력이 높아 영향력이 있고 존경받는 인물을 떠올려 보십시오. 현존하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역사적 인물 중 생각나는, 지략과 인품을 겸비한 한 사람을 떠올려 보아도 좋습니다. 그런 인물들은 고난 중에 있는 욥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잘 안다는 사람조차도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신학 논쟁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은 신학자들조차 성경을 근거로 논리적으로 만인에게 또는 신자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시키는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이 받는 고난, 죄로 인해 받는 고난이 아닌 고난, 의인의 고난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신약시대를 살아가며 복음을 듣고 성경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의인의 고난이 있음을 압니다. 의인의 고난을 믿지 않는다면, 주님의 고난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받는 고난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의인의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모든 사람이 받는 고난을 온전히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의인의 고난을 몰랐던 욥의 세 친구보다 더 나은, 고난에 대한 해석과 고난받는 사람에게 적절한 말을 잘해 줄 수 있겠습니까? 욥의 세 친구나 오늘날 하나님의 뜻과 계시가 있는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을 깊이 알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다양한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욥과 욥의 세 친구의 2차 논쟁에서 첫번째 논쟁자 엘리바스의 말에 대한 욥의 답변 중 일부입니다. 17장은 16장과 연결된 욥의 답변입니다. 욥의 답변에는 친구들의 말에 대한 반론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한탄이 섞여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중재 요청과 하나님에 대한 호소가 있음을 볼 때 욥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의 답변의 한 구절이나 일부만으로 욥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욥 역시 그의 세 친구처럼 자신의 고난이, 천상회의에서 시작된 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며 욥의 답변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운이 쇠하였으며 무덤이 준비되었구나(1-2)
1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 2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
1절은 16장 마지막 절과 같은 맥락입니다. 욥은 이 세상에서 인생의 날이 다 되어감을 한탄합니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는데, 죽음을 고요히 맞이하지 못하고 조롱당하고 있으니 자신의 처지가 더 비참함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조롱하는 자에게 대항해야 하는데 그들에게 직접 말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상소하며 기도합니다.
담보물을 주소서(3-5)
3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 4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마소서 5 보상을 얻으려고 친구를 비난하는 자는 그의 자손들의 눈이 멀게 되리라
3절의 ‘담보물을 주소서’는 하나님께 자신을 보증해 달라는 간청이면서 동시에 세 친구들에게 반박할 증거물의 간청입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실 분이 하나님이시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증거물을 주실 분 역시 하나님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궁지에 몰린 자신을 손잡아 주실 분이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자신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었기 때문이므로, 4절에서 욥은 그들의 주장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간구한 것입니다. 5절의 ‘보상을 얻으려고’라는 표현은 친구들이 금전적 이득을 얻으려고 했다기보다 욥의 희망을 빼앗아 간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자손은 잘되지 않을 것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백성의 속담거리가 되게 하시니(6-8)
6 하나님이 나를 백성의 속담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7 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8 정직한 자는 이로 말미암아 놀라고 죄 없는 자는 경건하지 못한 자 때문에 분을 내나니
6절을 통해, 욥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욥은 고난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고난의 시작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7절은 16장 16절에서 울음으로 얼굴이 붉어졌고 눈꺼풀에 죽음의 그림자가 있다는 한탄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일이 자신처럼 의로운 사람에게 일어난 것을 보는 사람 중 ‘정직한 사람과 죄 없는 사람’은 놀라고 분노를 표출할 것이라고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렇지 않기에 욥은 우회적으로 그들을 비판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9-10)
9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10 너희는 모두 다시 올지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
9절의 ‘그러므로’는 다른 번역본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직한 사람과 죄 없는 사람에게 놀랄 일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해야 할 일은 의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야 함을 욥은 전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원망하면서도, 의인은 의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때 힘을 얻게 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욥은 친구들에게 ‘다시 나에게 와서 논쟁해 보라’ ‘너희가 아무리 논쟁하더라도 너희 중에 지혜자를 찾을 수 없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길을 말하며 친구들의 주장을 반박한 욥이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생애는 길지 않음을 한탄하며 말을 이어갑니다.
나의 날은 지나갔고(11-16)
11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계획, 내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졌구나 12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 앞에서 어둠이 가깝다 하는구나 13 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으매 14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15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16 우리가 흙 속에서 쉴 때에는 희망이 스올의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
욥의 심리 상태가 극심한 고난으로 인해 요동치는 대목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면서 의인이 의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야 함을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인생이 길지 않을 것이라는 심정을 솔직히 드러내며 한탄하고 있습니다. 12절은 친구들이 욥에게 한 은유적 표현인데, ‘어두운 밤 이후에 낮이 오듯이 욥이 회개하면 어두움 속에 있는 너에게 낮이 찾아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희망을 주는 듯한 친구들의 말은 욥의 고난의 원인을 제대로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욥에게 그것은 결코 희망의 말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 죽음만을 기다릴 뿐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욥이 받은 고난을 의인의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이 욥에게 원죄가 없다거나 욥이 전혀 죄가 없는 의인임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욥이 극심한 고난을 받을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차원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완전히 죄 없으신 분으로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원죄도 없으시고 인간으로서 이 땅에서 일생을 사시면서 무죄한 분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완전한 의인의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실 때, 그 고난의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은 욥의 친구들처럼 예수님을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손과 발에 못박혀 죽어가실 때에 욥처럼 스올의 문으로 내려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의의 길을 꾸준히 가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욥과 달리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그리고 성경을 통해 의인의 고난이 있음을 압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받았던, 그리고 지금 받는 고난이 의의 고난으로 단정한다면 욥의 세 친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역으로 그 고난이 죄로 인해 받는 고난으로 단정하는 것 역시 욥의 세 친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는 고난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의 눈이 온전히 밝아져야 합니다. 우리는 욥처럼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받을 때 원망과 한탄,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와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마음이 오락가락할 때가 있습니다. 감사와 찬양이 나오다가도, 자신의 처지를 또 보면 원망과 한탄을 하고 처지를 비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인간으로서 심경이 요동치더라도 욥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앙,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지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오늘 하루를 시작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또한 마음의 눈을 밝히사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날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혜 가운데 있음을 잊지 않게 하시옵고, 절망 속에서도 손을 잡아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의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욥이 말하는 ‘나를 조롱하는 자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오늘날 ‘나를 조롱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2. 욥이 말하는 ‘나의 손을 잡아 줄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오늘날 ‘나를 조롱하는 자들’ 앞에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는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3. 의인이 그 길을 꾸준히 걸어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4. 욥처럼 감정이 요동칠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5. 하나님을 향한 창문을 여는 사람에게 욥과 같은 고난이 있겠습니까?
(작성: 김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