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문예》 시 등단
•시집 『고모역 너머 바다가 있다』, 『퍼뜩 나온나』,
『단디 들어라』, 『들풀들의 순례길』
•저서 『생태주의 시세계』 등
•국제문학상, 한국힐링문학 평론상 수상
•설총문화연구원 원장, 독도문학회 회장, 고모역문화관 관장
평론 순수 시인이라면 기인 천상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시 「귀천」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현실을 함축적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1930년 일본 효고의 히메지에서 태어났으나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살다가 해방되던 해 가족을 따라 귀국하였다. 마산중 재학 시절 그의 재능을 알아본 김춘수의 눈에 띄어 1949년 김춘수의 추천으로 시 「강물」 등을 《문예》에 발표하였다.
그의 초기 시는 「강물」, 「갈매기」, 「등불」, 「새」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대상물은 우리들의 만남에서 감성을 가질 수 있으며 수정같이 맑고 깨끗한 서정성의 바탕이 됨을 알 수 있다. 자연 속에 인간의 감성을 자아내면 그것이 곧 생태시가 된다. 자연은 우리가 늘 보는 것이기에 기쁨을 주지 못한 것을 그는 시적 표현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또 다른 측면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그는 일상생활에서사용되는 쉬운 말로 표현하여 친근감을 느끼게 하며 인간의 순수성을 되돌아보도록 하는 언어의 마법사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중년에 와서는 삶 전체에 관한 질문을 던져 보기도 한다. 「만추」, 「하늘」, 「흐름」, 「매일 내일」 등에서 나타내듯이 종교에 귀의하여 하늘에 대한 인간 삶의 관계성을 말한다. 그의 시적 표현에는 40대 중반까지는 가톨릭이었고 40대 후반에 와서는 개신교로 개종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가난, 무직, 주벽, 무절제한 삶 속에서 온갖 번거로움을 걷어내고 시간을 넘어가는 전체성과 형이상학적 정서를 나타내는 영성적 시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30세에 《시인詩人》에 발표한 「만추晩秋」를 보면, 마태복음 13장의 말씀을 전반적으로 시로 표현한 것이다. 49절에 ‘세상 끝’이라고 하시면서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 악인을 갈라낸다고 한다. 즉 세상 끝은 추수의 계절을 뜻하며, 그것을 만추라고 비유한 것이다.
내년 이 꽃을 이을 씨앗은
바람 속에 덧없이 뛰어들어 가지고,
핏발 선 눈길로 행방을 찾는다.
숲에서 숲으로, 산에서 산으로,
무전여행을 하다가
모래사장에서 목말라 혼이 난다.
어린 양 한 마리 돌아오다.
땅을 말없이 다정하게 맞으며,
안락의 집으로 안내한다.
마리아,
나에게도 이 꽃의 일생을 주십시오.
—「만추晩秋」* 전문
1연에서는 늦가을 수확의 계절에 꽃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씨앗은 바람이 부는 방향을 찾아 정착할 곳을 찾는다. 마태오복음에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관한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군중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13장 3절), 9절에서는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 하시면서 13절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시었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핏발 선 눈길로 행방을 찾는다.”라고 표현하였다.
2연에서는 씨 뿌리는 자가 길가에도 뿌려서 새들이 먹어 치우고, 돌밭에 떨어져 싹이 나오지 않게 되고, 가시떨기 위에 뿌려서 기운을 막아 자라지 못한 결과가 되어 “모래사장에서 목말라 혼이 난다.”라고 표현하였다. 마태오복음 13장 4절에서 7절까지 말씀을 어둠과 빛에 대한 가르침을 암시하였다.
이어지는 3연에서는 13장 8절의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라는 복음 말씀대로 “어린 양 한 마리 돌아오다. / 땅을 말없이 다정하게 맞으며, / 안락의 집으로 안내한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비유로 말씀하신 복음 내용을 시적 화자는 분명 깨닫고 표현한 것으로 신앙심이 두터운 걸로 보인다.
4연에서는 “마리아. / 나에게도 이 꽃의 일생을 주십시오.”의 구
*김우창, 『천상병 전집·詩』, 서울 평민사, 2005, p94
절에서 16절의 말씀대로 눈은 볼 수 있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깨달은 그 순간에 마리아에게 기도하였다. 그 한 장의 티켓을 ‘나’에게도 씨앗을 뿌릴 기회를 주소서. 시적 화자의 신앙 척도를 알 수 있는 대목으로서 자연스러운 요구의 표현이다. 일상적인 삶과 의식 속에서 영성적인 성찰을 하면서 의식화하였다.
시인의 후기 시의 세계는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고 난 뒤 종교에 귀의한 세계관을 확연히 나타내고 있다. 특히 「청교도」란 시에서 개종한 이유를 자신 있게 표현할 정도로 소탈하고 솔직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은 어떻게 탄생했을까?」라는 시에서 보면, 누구나 궁금해하는 것을 소재로 삼아 자신의 생각을 담아보기도 했다.
하느님이 탄생하기 전의 우주는
완전한 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가 결정하여
유가 됐을 것이고
그 처음의 유가 하느님이었을 것이다.
우주에서
제일 처음으로 유가 되신 하느님은
친구가 친구를 찾는다고
대우주의 별과 별을
창조하셨을 것이다.
빛과 천체와 그늘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만물을 태어나시게 했을 것이다.
—「하느님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전문
1연에 하느님이 계시기 전에는 우주는 없었다는 것은 무지에서 말하기보다 절대자의 존재 가치를 감히 인간이 논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우주는 130억 년도 훨씬 지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지구도 46억 년이다. 창세기는 이제 6천 년이니까 하느님이 계시기 전에는 분명 인류의 역사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면 왜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을까? 그건 종교단체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대로 ‘태초’라는 용어로 하느님을 자존자로 표현하면서 이미 존재하고 계셨고 만물의 창조자로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기존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것은 창세기 1장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드신 것이고 2장에서는 아담의 부모가 있음이 분명히 나온다. 창세기 역사는 영국, 독일, 미국 등에서 기원전 3997~4004년으로 발표되었다.
2연의 “제일 처음으로 유가 되신 하느님은” 출애굽 “하느님이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3장 14절) 모세의 백성들을 선택하기 위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신 것이다. 절대자이시고 처음 유가 되신 것이다. 이어서 “대우주의 별과 별을 / 창조하셨을 것이다.”에서는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큰 빛 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그 가운데에서 큰 빛 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 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창 1장 16절)라고 하셨듯이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고는 빛과 어둠을 나누어 선과 악을 구분하게 하신 것이다.
3연의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 만물을 태어나시게 했을 것이다.”에서는 인간은 만물과의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만물도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이 있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인간 중심주의에서 지구 중심주의로 평상 속에 살아가야만 할 때 절대자의 사랑이 충만케 하고 축복이 있음을 말한다.
‘하느님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에 대한 의문의 대답은 인간들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서 그중에 선과 악을 구분하여 하느님의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셨기에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추수 때에 알곡으로 곳간으로 가는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절대자와 하늘이라는 용어가 언급되면 신학으로 접근하여 영성적인 시 이해로 본다. 영성적 시학은 생태와 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 자연과 인간과의 상호 의존성에 대한 구현으로 공동체 삶의 세계관을 추구한다. 그에 따라 생태중심주의 영성적 체험을 통한 상상력 사고력과 성경적 사상을 갖춘 생태 영성을 실천하는 삶을 갖추게 된다.
언제나 영성적인 시는 우리에게 영감을 주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어떤 포장 속 숨겨져 있던 내용을 불러일으킨다. 「귀천」 역시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자문하게 만든다. 1970년에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귀천」 시는 시인이 옥고를 치르고 정신병동에서 치료까지 받고 나와서 발표한 시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 전문
1연의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에서 당연히 누구나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준다. 갖은 고초를 겪은 후 발표한 시이기에 심리적 상태가 흔들리지 않는 통고에 가까운 느낌이다. 마흔 나이에 벌써 죽음을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에서 보면, 화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구절이다. 아침 해로 인해 사라지는 이슬들은 힘이 약해 피지 못하는 이들에게 손을 잡고 함께 가겠다는 것이다.
2연의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에서는 세상 끝 추수 때가 되면 가까운 사람과 함께 하늘로 돌아갈 준비를 하겠다. 마태오복음서에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13장 39절) 말씀대로 화자는 추수 때가 되어 천국으로 갈 준비를 한다.
이어서 3연에서는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고 하늘로 돌아갈 준비가 다 되었음을 말한다. 이제 계시 말씀의 완성 시점이 되어 하늘나라가 도래되었음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요한묵시록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말씀하셨듯이 화자는 천국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시간을 알았으니 이 세상은 소풍으로 즐거웠고 지난 시간들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화자는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서 천국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결국 시 내용을 보면, 천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맞이하는 것이지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는 것은 아니다. 우스갯소리로 지금 천국 문이 닫힌다고 소리쳐도 당장 이 자리에 죽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천상병은 영성적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