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덩어리 / 법상 스님
우리는 삶 위에 등장하는 많은 것들이
그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만
때때로 내 관심을 끄는 것들에 대해서
선택적으로 사로잡혀 붙잡고 집착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붙잡아 집착하는 것보다
집착하지 않는 것들이 더 많죠.
집착하는 것 보다 무집착하는 게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집착을 버리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무집착의 방법은
그저 흘러가는 것을
흘러가도록 그냥 놔두는 것 외에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냥 놔두면 된다는 거죠.
붙잡지만 않으면 됩니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지 않고 놔두면
저절로 이미 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흘러가는 것을 막아서죠.
흘러가는 것들 중에 내게 관심이 있는
소수의 것들만 집착하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아집(我執)을 창조해 내죠.
그렇게 ‘나’라는 집착 덩어리가
내 옆에 계속 있으니까 정이 들고
진짜 ‘나’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아상(我相)과 아견(我見)이 생겨나죠.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집착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나의 본질이 아닙니다.
다만 스쳐지나가는 것을 내가 붙잡아 놓았을 뿐인 거죠.
그것은 언젠가 다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이나 존재뿐 아니라 생각도 마찬가진데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들 가운데
어떤 몇 가지 특정한 생각을 붙잡아서
내 것으로 만들죠.
그래서 내 가치관이라고 생각하고,
내 견해라고 생각하고,
내 세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서 아집과 아상, 아견이라는
나의 집착 덩어리는 더욱 굳어지죠.
그런데 어떤 한 가지를 보았다고
누구나 집착하는 것은 아니죠.
어떤 사람이 집착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죠.
돌을 수집하는 사람에게는
강가에 있는 돌이 다 스쳐지나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중에 특별한 돌들을 붙잡아서
내 것이나 내 소유물로 삼고자 할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무리 봐도
갖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겠죠.
이렇게 해서 어떤 것을 보더라도
자기가 만들어 놓은 어떤 틀, 아집, 아상,
그 틀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만들어 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집착하는 생각이나
가치관, 삶의 방향성, 가지 기준 등이
사실은 이처럼 사람들 마다 다르게 만들어진 것 들일뿐
실체적인 것은 아니죠.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절대화 합니다.
자기 생각, 자기 고집에 집착하죠.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를 정의 하는 어떤 집착덩어리를 가지고
스스로 정해 놓은 그 틀을
모든 삶에 가치 기준으로 삼습니다.
자식을 키울 때
내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
어떤 집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자식을 전혀 다르게 키우겠죠.
스님이나 성직자분들도 마찬가진데요,
자기 종교라는 그 틀에 빗대어서,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 색안경에 빗대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불교신자나 기독교신자, 천주교신자도 그런데요,
자기의 종교적인 색안경,
집착하고 있는 그 종교적 견해나 사상 그 틀 속으로
세상을 바라보겠죠.
이상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이렇게 흘러가는,
그저 이렇게 놓여 있는,
있는 그대로의 중립적인 세상을
자기식대로 판단하고 집착하고
내 것이니 아니니 하고 나눠 놓으면서
내 것을 늘려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상이고 아집, 아견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아상, 아견, 아집은
실체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붙잡아서
내 것, 내 생각이라고 사로잡았을 뿐
진짜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