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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남파랑길 89코스 노선을 걷는 날 입니다
완도군 본섬인 원동버터스터미널을 출발하여 완도대교 ㅡ 달도테마공원과 ㅡ 충무공 이순신의 임진왜란 때
전시 기록물이 새겨진 야외 전시장 ㅡ 구남창교 ㅡ
북평면사무소입구 교차로로 이어지는 남파랑길 노선을 걷게 되는데~
지난번 86구간을 걸을 때 <북평면사무소입구 교차로>부터 ㅡ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기록물 야외 정시장 ㅡ
달도테마고원 ㅡ 완도대교 ㅡ 원동버스터미널로 이어지는 코스를 걸었기 때문에
중복으로 걸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갈등이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 때 전시 기록물들을 새겨둔 야외 전시장을
다시 한번 더 가보고 싶어서이지요
이순신이 명량해전 전 선조에게 올린 <금신전선 상유십이, 今臣戰船 尙有十二> 장계가 새겨진 비문 정각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일대기
원동버스터미널에서 ㅡ 북평면사무소입구 교차로까지 노선 거리는 4.0km에 1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아쉽지만 오늘은 4.0km 단축된 <북평면사무소입구 교차로>에서
출발하여 달마산 미황사 사천왕문까지 약 10km를 건는 남파랑길 89코스 입니다
오늘 걷는 남파랑길 89코스 노선 전 구간 입니다.
원동버스터미널 ㅡ 완도대교 ㅡ 달도테마공원 ㅡ 충무공 이순신의 임진왜란
전시 기록물이 전시된 야외 전시장의 소공원 ㅡ 구,남창교 ㅡ 북평념사무소입구 교차로 ㅡ 오일장이 열리는 남창시장 ㅡ 남창사거리 ㅡ 달마산 임도 ㅡ 달마산 미황사 사천왕문까지 13.8km를 걷는 89코스 입니다
5월 05일(목) 서울 양재역(서초구청 앞)에서 24시에 출발하여 400km 거리를 달려 오전 4시간 55분에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위치한 <북평면사무소입구 교차로>에 도착하였습니다
남창교 북쪽 위치에서 남창교 남측의 전광판을 바라보았습니다
(현재 시간 오전 04시 57분 입니다)
줌업하여본 <건강의 섬 완도>를 홍보하는 전광판~
완도군 본섬인 원동버스터미널에서 완도대교를 지나 <북평면사무소입구 교차로>까지 걷는 약 4km의
노선을 단축하고, 구남창교를 건너자마자 이르게 되는 북평면사무소입구 교차로 여기서부터
달마산 미황사 사천왕문까지 걷는 89코스를 시작 합니다
구남창교를 건너오자마자 북평면사무소입구 교차로 입니다. 오늘 출발점은 이곳 북평면사무소입구 교차로 입니다.
북평면사무소 입구 여기서 달마산 미황사 사천왕문까지 실거리 약 10km쯤 됩니다
5일마다 장이 열리는 남창시장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공작새 조형물을 앵글에 담아 봅니다
5일마다 장이 열리는 남창오일장(남창시장)이여라~
우뫼~ 뭔 생선들이 이러코롬 많어라~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년 5월 23일, 음력 4월 13일)이 발생했을 때 조선, 일본, 명 3국 사이에 강화회담을
맡아 진행하면서 농간을 부림으로써 결국 정유재란을 초래하였던
중국 명나라의 신하 심유경(沈惟敬)이 있습니다.
일본진영에 파견된 심유경은 일본간의 강화회담을 5년간이나 지루하게 진행하다가 1597년 8월
나고야[名護屋]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났는데, 도요토미는 명나라에 대해
㉠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보낼 것.
㉡ 명이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할 것.
㉢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 조선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게 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에 심유경은 이러한 요구가 명나라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일본의 요구조건을 거짓으로 보고했다. 즉
㉠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책봉해 줄 것.
㉡ 명에 대한 조공(朝貢)을 허락해 줄 것을 일본이 요구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명나라는 이를 허락한다는 칙서를 보냈으나 두나라의 요구조건이 상반되자 강화회담은 결렬되었고, 결국
일본의 재침입으로 1597년(선조 30, 1월 15일) 정유재란이 발생했다.
후에 심유경은 비리가 폭로되어 엄형에 처형될 뻔 했으나, 석성에 의해 겨우 구제되었다. 그뒤 조선에
다시 들어왔으나 경남 의령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 잡혀서 죽임을 당했다 한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은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응 명령했고
1597년 1월 15일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장으로 하는
1만 4,500명의 군사가 다시 대한해협을 넘어왔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발대로 상륙시키면서, 조선말에 능한 요시라를 간첩으로 파견했다
그의 임무는 일본군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이순신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고니시유키나가의 부하였던 요시라는 1597년 1월 11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접근하여 가토 기요마사가
서생포(울산)로 올라오는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며 이순신을 시켜 가토 기요마사
함대를 공격하라고 제안했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이 아닌 화의를 원하는 사람이면, 강화협상이 결렬된 것은
전적으로 전쟁을 원하는 가토 기요마사 때문이니
이순신이 가토 기요마사를 제거해준다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 요시라의 말이었다
이 말에 귀가 솔깃해진 경상우병사 김응서는 이정보를 도원수 권율애개 알렸고 권율도 이를
그대로 조정에 전했다. 이중간첩 요시라의 간계에 넘어간 조정은 그에게
도사(都事)라는 벼슬까지 내리면서 이순신에게 무리한 출병을 강요했다
도사(都事) : 조선 시대, 충훈부(忠勳府), 의금부(義禁府), 중추부(中樞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등에
소속되어 관리의 감찰, 규탄 등을 맡아보던 종오품(從五品)의 벼슬. 1882(고종 19)년에 폐지되었다.
1597년 1월 14일 도원수 권율은 직접 한산도로 가서 이순신에게 요시라의 정보를 전하면서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것이 첩자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있던 이순신은
<적의 말만 믿고 출동한다면 적의 간계에 속을 위험이 있고, 풍랑이 심한 겨울바다에 판옥선 함대를
끌고 나가면 북병을 만나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추가로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한 후출동하겠다>라고 했다
며칠 후 다시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찾은 요시라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서생포(울산)로 들어왔는데,
왜 자신이 알려준 시간에 나가서 가토 기요마사를 요격하지 않았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사실은 다시 조정에 보고되었고, 윤두수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이순신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1597년 1월 23일 열린 어전회의에서 평소 이순신을 의심하던 선조의 내심을 잘 알고 있던 대신들은
이순신을 강하게 비난했다. 결국 2월 6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고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순신은 2월 26일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3월 4일 서울의 의금부 전옥서에 구금되었다
요시라가 알려준 정보가 거짓이었음은 곧 밝혀졌다.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역정보를 흘렸을 때 이미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에 도착해 있었다. 결과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순신 제거 작전
성공으로 3월 중순부터 대부분 임진왜란 당시에 침입해왔던 장수들로 총병력은 14만 1,500여 명이었다.
이순신이 파직으로 의금부 전옥서에 구금되자,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올라
1597년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이 전멸한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전사한 후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복귀한 이순신은
1598년 9월 16일 명량해전기적적인 승리를 거둔다
정유재란 때인 1597년 2월 26일 한산도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근무하던 이순신은 네 가지 죄목으로 구금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물은 죄목은
첫 번째 죄목은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였다.
1596년 12월 12일 이순신 휘하의 거제 현령 안위(安衛, 1563년 ~ 1644년) 등이
부산의 왜군 진영을 불태워 가옥, 군량, 화포 등을뷴멸한 사실을 보고한 것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둘째 적을 쫓지 않아 나라를 등진 죄는, 조정에서 일본의 이중간첩인 요시라의 말을 듣고 출동을 명령했으나
이순신이 출동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셋 째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한 죄는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옥포해전에서
적진포해전까지 원균과 함께 싸워 승리했음에도 이순신이 원균의 전공을 탈취했다는 논란이 제기된 것을 말한다
넷째 임금이 불러도 오지 않은 방자한 죄는 전주에 분조를 설치하고 체류 중이던 광해군이 이순신에게
협의차 전주로 올라올 것을 명했으나, 이순신이 급박한 전황으로 세자의 명을 따르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런 이유로 1597년 2월 26일(양력 4월 12일) 한산도에서 체포된 이순신은 3월 4일 서울에
도착하여 의금부 전옥서에 구금되었다
이진성지는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있다. 이진은 바닷가에 성을 쌓아 왜구를 방비하던 곳이다.
1597년 8월 20일부터 24일까지이순신 장군이 여기에서 머물렀다.
장흥군 회령포에서 칠천량해전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대패배로 배설이 전란 중 12척을 이끌고 도망처
남은 배 12척을 회령포에서 인수하고 어란포로 가면서 이곳 이진성지에 들렀다.
정유재란이 있은 1598년(선조 31)에 진을 설치하고, 1648년(인조 26)에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으로 승격되어
성을 축조하였다고 전해오는 이진성지는 둘레 약 2.5㎞인데, 지금 남은 성벽의 길이는 약 940m이다
이곳은 제주도로 왕래하는 출입통제소였으며, 제주의 말과 공물(貢物)을 상륙시키는 곳이었다고 한다.
1597년 7월 15일 삼도 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일본 수군과 벌인 전투에서
패배한 해전으로 이때 조선군은 전선 160여 척 중 140여 척을 잃고, 통제사 원균은 춘원포(통영시 광도면 황리)에 상륙했으나 추격해온 왜군에게 대항도 못 해보고 전사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 등
주요 지휘관과 수많은 장병들이 200여 척의 함선과 함께 거의 전멸했다.
이때 후미에서 눈치만 살피다가 겨우 도망쳐 살아남은 배설이 12척의 전선을 수습하여 한산도로 가서
주민을 피난시키고 병영과 무기, 식량을 소각한 다음 전라도 방향으로 도망쳤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1597년 8월 3일자로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이순신은 8월 19일
장흥 회령포에서 배설에게 남은 배 12척을 인수받고 다음날인 8월 20일 이진성지로 이동했다
의금부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이 많이 상한 이순신은 토사곽란 증세로 심한 몸살을 앓아 병세가 악화되어 1597년 8월 23일에는 배에서 내려몸조리로 휴식을 취하고, 8월 24일 겨우 병세를 회복하고
도괘(해남군 북평면 남성리 칼쾡이)를 거처 어란포(해남군 송지리 어란리)이동할 수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회령포에서 배설로부터 배 12척을 인수 받고
이진성지와 도괘를 거처 어란포로 이동 합니다
해월루는 1821~1850년 사이에 지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순조(조선 제23대 왕, 1790 ~1834) 때 개조되었다고 한다.
5칸 건물이었던 해월루는 1963년 훼철되었고, 2011년 팔작지붕으로 복원하였다.
달량진성과 해월루
해남군수협수산물위판장
북평 휠링 공원
북평면 주민자치위원회
남창교차로를 지납니다
뒤돌아본 남창교차로
라이그라스 가축 사료로 사용되며, 소들이 좋아하는 먹이이며 소화도 잘되는 풀로서 사료용으로 영양가가
아주 높다 합니다 이탈리안 라이그라스는 벼를 수확하기 전, 벼가 서있는 상태에서도 파종이 가능해
9월 하순에서 10월 상순에 파종하여 이듬해 5월에 풀 베기를 한답니다
이탈리안 라이그라스(Italian-Ryegrass)는 지중해 지역이 원산지이나 지금은 세계에 널리 분포되어
우리나라에서는 겨울 사료 작물 재배 면적 기준 70%로 가장 많이 재배하는 풀사료 입니다
매년 9월 하순부터 10월 상순에 파종하여 이듬해 2~3회 베어 목초(牧草 : 가축에게 먹이는 풀)와
녹비작물(綠肥 : 충분히 썩히지 않은 생풀이나 생나무의 잎으로 만든 거름)로 파종하는
라이그라스는 영양소 함량과 소화율이 좋아 가축들이 잘 먹는 사료라 합니다
이탈리안 라이그라스를 베어낸 후 수분함량이 50~60%이 되도록 1~3일 정도 건조하여 원형베일러로
곤포(베일러 작업)하여 바로 비닐랩 사일리지로 만들어 사료로 사용한다는군요
뿌리 부분은 자연 분해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두었다가 논을 갈아엎어 녹비로 이용하며
모내기 사전준비 작업을 하게 된다 합니다
※ 곤포(베일러 작업) : 라이그라스와 볏짚처럼 가벼운 것을 단단히 다져 큰 원형 뭉치로 만들어 묶는 작업
※ 사일리지 : 가축의 겨울 먹이로 말리지 않은 채 저장하는 풀
원형베일러
이탈리안 라이그라스, 목초, 볏짚 등을 수확하여 수분이 50~60% 내외에서 원형베일러로
곤포 사일리지를 두께가 0.025mm인 신축성비닐을 이용해 4겹 또는 6겹으로
밀봉하여 젖간발효를 시킨 조사료를 만든다 합니다.
유산균 발효에 의해 생성된 유산이 부패분해균 등 불량잡균의 성장을 억제하여 저장하므로
장기간 포장상태에서 겆조시켜야하는 건초에 비해 수용성 영양분이나 유효
영양소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사료가치의 향상과 함께 소의 기호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 합니다
랩핑기로 곤포 사일리지를 만들고 있는 모습 입니다
곤포 작업이 끝나면 오른쪽 논처럼 모내기를 하기 위해 써레질을 하지요
이탈리안 라이그라스를 베어낸 후 수분함량이 50~60%이 되도록 1~3일 정도 건조하고 있네요
어제와 다른 일출인듯 합니다
이진성지 방향 직진길은 잡풀로 쫍은 소로가 가리원저 있어 오른쪽으로 왕복 50m를 걸었습니다
짧은 거리였지만 알바한 위치를 뒤돌아 보고~
방금 지나온 곳을 뒤돌아 보고~
누렇게 보리가 익어가는 5월 초순 황금 들녘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진성지는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있다. 이진은 바닷가에 성을 쌓아 왜구를 방비하던 곳이다.
1597년 8월 20일부터 24일까지이순신 장군이 여기에서 머물렀다.
장흥군 회령포에서 칠천량해전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대패배로 배설이 전란 중 12척을 이끌고 도망처
남은 배 12척을 회령포에서 인수하고 어란포로 가면서 이곳 이진성지에 들렀다.
5월 초순 황금들판을 이루는 들녘, 1960년대 두메산골에서 소 몰며 보리피리 불던 어린시절 생각나는군요
감사합니다
남파랑길 89코스 2부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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