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아함 스푸라나와 사하자 아삼프라갸타(명상의 대상에 대한 의식이 초월된) 사마디라는 용어는 동의어입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B.: 아닙니다.
Q.: 왜 아닙니까?
B.: 물을 담고 있는 냄비 아래에 불을 붙인 후 조금 지나면, 빈 냄비만 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냄비 [내부의 공간]은 항상 다시 채워지기가 쉽습니다. 만약 그 냄비가 산산조각나면, 그것은 아주 엉망이 되고 그 안에 어떤 것을 넣어둘 수 있는 더 이상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스푸라나는 냄비 내용물의 완전한 비움이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스푸라나는 단지 힘들이지 않고 자유의지 없이 유지되는 순수한 주관적 의식이라는 명확한[정신적 활동, 성향 또는 기타 변형에 의한 모호함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명확성] 상태를 포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깊은 곳으로부터의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초월적인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직 미묘한 이원성의 상태입니다. 이원성은 마음이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후에야 중단됩니다. 스푸라나 안에 지속적이고 끊어짐이 없이 내재하는 것은 자아가 최종적으로 굴복한 후에야만 가능합니다. 그런 자아 없음의 상태에 있는 사람만이 갸나로 깨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아가 없는 사람은 갸나를 원할 수 없으며 다른 어떤 것도 원할 수 없습니다. 갸나를 원하는 사람은 그것을 얻지 못한다고 말해지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갸나가 마침내 밝아올 때 그것은 사다카에게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못합니다. 갸나는 자아가 최종적으로 포기된 후에 잘 빛납니다.
Q.: 냄비 아래의 불은 구루의 은총입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B.: 그렇습니다.
Q.: 냄비는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B.: 그렇습니다.
Q.: 냄비의 내용물은 마음의 브릿티입니다. 제가 제대로 관찰하지 않았습니까?
B.: 그렇습니다.
Q.: 그 내용물이 아직 끓지 않았는데 냄비가 부서질 수 있습니까?
B.: 그것은 보통 불가능합니다. 마음에 갑자기 파괴가 강요되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점점 줄어들어야 하고,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을 만큼 무한히 작은 입자로 줄어든 후에야 마침내 그것은 나에 의해 파괴됩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자동차, 만약 그것이 굽어진 모퉁이 주위에서 갑자기 크고 무거운 장애물을 만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Q.: 자동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을 것입니다.
B.: 만약 운전자가 사전에 약간의 거리에 걸쳐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브레이크를 밟고 장애물이 부딪히기 전에 속도를 줄였다면요?
Q.: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B.: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탄생 동안 당신의 정신적 습관들은 당신에 의해 간직되어 왔습니다. 그것들은 싸움이 없이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싸움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고통은 불가피합니다. 또한, 이런 습관들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갑자기 사라질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바다 위를 활주하는 비행 도중에 부주의로 알을 낳고는, 해저만큼 아래의 물속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언젠가 그 노력이 바다를 말려서 그녀의 새끼들을 드러내 줄 것이라는 희망으로 파도의 표면에서 맹렬하게 날개를 펄럭이는 새의 인내심이 필요할 것입니다.
Q.: 그것은 말도 안 됩니다. 새의 노력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습니까?
B.: ‘나는 마음으로 나에게 닿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만큼 말도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