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촌역사관> 전시실에는 확대경 아래 작은 도기[陶器] 한 조각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가로 3.8 ㎝ 세로 5.2 ㎝, 두께는 0.6 ㎝, 어른의 엄지 손가락보다 조금 클까 말까,
1989년,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유물인데, 흑갈색의 유[釉]를 발라 구웠고 중국 서진의 동전무늬가 찍혀 있습니다.
깨진 조각에다 크기도 작은 볼품 없는 중국제 오지그릇 한 조각에 불과하지만,
이 작은 도기에 찍힌 동전무늬 하나가 몽촌토성의 축조 연대를 3C 후반으로 밝혀주는 귀중한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9월 17일 토요일.
[한성백제박물관]이 주관하는 <고대 역사문화유적 탐방>의 1차 날입니다.
27도까지 올라간 한낮, 탐방객 30명의 첫 해설을 맡은 강사의 소임이 무거운지 나는 신발끈을 다시 졸라 맵니다.
가을 햇살이 따갑지만, 시간 맞춰 박물관 앞에 모인 탐방객 모두 백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갈 자세 돋보였습니다. ^^^
1층 홍보전시실에서 박물관 소개와 함께 백제의 건국 이야기를 곁들인 다음 곧바로 탐방의 길에 올랐습니다.
먼저 박물관 앞 마당에 있는 조각작품 스위스 뒤바크의 작품 <증인 Ⅲ>.
텅 빈 금고를 가리키며,
" 한성백제의 잃어버린 역사 493년"을 찾아 금고를 가득 채우는 역사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탐방의 첫 코스는 남문지.
고구려군이 침공해 들어오는 북문의 정 반대편에 있으니 몽촌토성 안에서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그래서 작전사령부인 지상건물지는 이 곳에 모여 있고, 조경을 위해 파 놓은 연못지 두 곳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문 오른쪽과 왼쪽 성벽은 눈에 확 띌만큼 무척 높습니다.
판축법을 이용하여 토단을 쌓아 성벽을 높게 만든 다음 망루를 세워 사방을 잘 살펴 사령부를 안전하게 지켰을 것입니다.
토성길은 여러 차례 구불구불 돌아가야 하니 구절양장[九折羊腸], 양의 창자를 닮았습니다.
풍납토성의 반듯한 성의 평면도를 보여주며,
자연 상태의 구릉[丘陵]을 이용하여 성을 쌓은 몽촌토성과, 평지에 토성을 쌓아 만든 풍납토성과의 차이점을 설명했습니다.
남쪽 토성길을 걷다가 서쪽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평화의 문 뒤, 큰 호수처럼 생긴 해자가 저 아래 내려다 보입니다.
몽촌토성의 특징 중 하나인 해자[垓子].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천동을 지나 오금동 → 올림픽아파트 → 몽촌토성을 감싸고 돌다가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성내천을 끌어들여 성을 지키려고 만든 해자입니다.
마침내 한강을 건너 기세등등 몽촌토성으로 밀려들던 고구려군은 또다시 저 해자 앞에서 진군을 멈출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김구의 묘역을 둘러 봅니다.
사약을 받은 '노산군'의 복위를 주청하여 '단종'으로 복위시키고,
시류[時流]를 따르지 않고 왕자를 낳은 장희빈의 사형을 반대했던 그는 충헌공의 시호를 받은 법의 수호자였습니다.
재미 나는 것은 김구의 혼이 저승에서 날아와(?) 길잡이 역할을 하는 신도비를 지나 무덤 앞의 망주석에 붙어 있는 도룡용을
타고 무덤에 들어가 지내다가 새벽 닭이 울기 전 다시 다른 쪽 망주석에 붙어 있는 도룡용을 타고 나와 저승으로 돌아가도록
무덤 앞에 서 있는 두 개의 망주석에는 도룡룡이 한 마리씩 붙어 있습니다. ^^^
아이들이 있어 가리키기가 저어해서 입을 다물었지만,
돌을 새긴 양 두 마리의 엉덩이 쪽 음낭이 너무 뚜렷해 경건한 참배 자리에 웬 해학이냐 싶어 재미도 나고 민망도 합니다. ^^^
동서남북 사방을 내려다보며 전투를 지휘했을 장대[將臺]에 오르니 절로 긴박했던 고구려군과의 싸움이 떠올랐습니다.
뽀빠이 이상용이 기증했다는 역기며 아령이며 장비들이 즐비한 가운데 현대판 백제 장군 몇이 체력단련에 한창입니다.^^^
토성의 정상인 망월봉 가는 길엔 가을을 흔드는 억새가 이제는 백제 군사가 된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가을의 낭만이 시심[詩心]을 돋우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한성 백제의 역사"를 찾아 나선 순례길, 갈 길을 재촉합니다.
성문은 없고 대신 비밀 통로만 있는 가파르고 좁은 서쪽 아랫 길이 내려다 보입니다.
거기에는 해자를 건너는 곰말다리가 있고, '큰 마을'을 뜻하는 '곰말', (* 곰말 →꿈말→몽촌)
'큰 마을'은 곧 서울이니까, 80년대 몽촌토성을 답사했던 서울대 김원룡교수는 몽촌토성을 하남 위례성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지상건물지와 중국과 일본과의 교류를 증거하는 유물들도 근거 자료였겠지만,
10여년 후 풍납토성의 출현으로 몽촌토성은 왕성인 풍납토성을 지키는 방어용 성이라는 결론이 학계의 대세가 되었습니다.
해발 42.9 m, 몽촌토성에서 가장 높은 망월봉에 올랐습니다.
마름모 꼴 비슷하게 생긴 몽촌토성의 길이는 2.3 Km, 면적은 6만 3천평, 8천명 남짓 거주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남북의 최대 거리는 730 m, 동서는 540 m, 걸어서 50분 정도 걸리는데 우리는 남문에서 출발했으니 반 정도 걸은 셈입니다.
사방을 둘러봅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온조의 백제 건국 기록인 "부아악"(북한산) 에 올라 조망해 본 하남 위례성의 지형 그대로,
북으로 한강을 사이에 놓고 아차산과 풍납토성이 소리쳐 부르면 손 흔들만큼 가깝게 자리 잡고 있고,
남한산에서 흘러내린 성내천이 몽촌토성을 안고 흐르다가 아산병원이 있는 서쪽 한강으로 빠져나가 서해바다와 합쳐지고,
동쪽에는 올림픽아파트 너머 이성산과 검단산이 앞 서거니 뒤 서거니 서 있다가 남한산성과 성벽처럼 우뚝 솟아 있고,
우리가 지나쳐온 남쪽에는 오륜동 오금동 방이동 가락동 너른 평야가 그 당시에는 기름진 들판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망월봉 아래는 급경사라서 적군이 몰려와도 밑에서 오르기가 어렵습니다.
완만한 경사를 깎아 비탈길을 만드는 삭토법을 썼기 때문입니다.
또, 이 부근에서 저장 구덩이 7개가 발굴되었는데 지름 20 cm 정도 되는 강돌이 많이 들어 있는 것은 투석작전을 증명합니다.
북문 성문터로 가는 길에 목책이 늘어서 있습니다.
물을 이용한 방어용 해자와 더불어 또하나의 방어수단인 나무 울타리입니다.
지름 30 ㎝의 나무 기둥을 1.8 m 간격으로 여러 개 박아 세운 다음 사이사이에 작은 보조기둥을 세워 적군의 성벽 오르기를 막는
울타리니까 끝은 창칼처럼 날카로와야 할 텐데, 고구려군이 없어서 그런지 끝이 평평해서 싱겁기 짝이 없습니다. ^^^
북문지로 내려가는 길엔 올림픽공원의 명물 은행나무와 왕따나무가 사람들의 눈길을 끕니다.
은행나무는 나이가 583살, 쉽게 말하면 세종이 한글을 만들던 때 심었다고 보면 되고,
측백나무이자, "나홀로나무"라고 불리는 왕따나무를 찍기 위해 사진동호회 회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올해 처음 심은 문익점의 목화가 추운 겨울 따뜻한 이불 만들라고 솜뭉치를 터뜨리고 있어 탐방객들이 무척
신기해 했습니다.
목화를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주변에 핀 황화코스모스와 밭벼도 수첩에 적을만큼 기억하고 싶어 했습니다.
역사 해설 중간 중간에 조각작품이나 나무나 꽃에 대한 이야기를 끼워 주면 색다른 맛이 있어 인상 깊었다는 인사를
듣곤 합니다.
북문지에 다 내려 왔습니다.
북에서 처내려오는 고구려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백제의 주력군은 당연히 여기 북문 쪽에 진을 쳤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 곳이 다른 성문 쪽보다 몇 배 넓을 수밖에 없고, 그 사실을 증명이나 하듯 수혈 주거지와 저장 구덩이,모두 이 부근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어 있었고, 심지어 적석 토광묘와 독 두 개를 합쳐 만든 옹관묘까지 발굴되었습니다.
또, 망월봉과, 이 곳에서 동문으로 넘어가는 구릉 위에 토단을 쌓아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망루를 세웠고,
북문 뒤 동쪽으로 3백 m 가량의 외성을 쌓아 합동작전의 이점도 확보했는가 하면, 목책도 설치하여 방어를 튼튼히 했습니다.
그러나 기울어가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는 듯, 475년 장수왕이 거느린 고구려군과의 7일간의 전투 끝에 풍납토성은 함락되고,
이 곳 몽촌토성에 피해 있던 개로왕은 서쪽으로 도망 가다 잡혀 아차산으로 끌려가 목이 달아나고,
그렇게 493년간 이어져 온 한성백제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88올림픽을 준비할 때, 성벽의 구조를 알기 위해 북쪽 성벽을 절개했는데,
성벽의 폭은 40m 내외, 10 m가 훨씬 넘는 성벽을 쌓기 위해 10 cm 높이로 흙 한 겹, 나뭇잎과 가지 한 겹, 다시 흙 한겹 식으로,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아 흙이 쓸려가지 않고 튼튼한 성벽이 되도록 판축법과 부엽법을 섞어 쓴 공법이 드러났습니다.
중국에서도 토성을 쌓을 때 판축법을 썼는데, 송곳으로 찔러 송곳이 들어가면 현장감독을 성벽 속에 함께 묻었다고 할만큼,
판축법을 쓴 토성은 그만큼 견고한 성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구릉과 구릉이 이어지는 낮은 곳인 안부[鞍部]에 말 안장 놓듯 흙판을 여러 겹 쌓아 올려 성벽을 만들던 백제군사들의 씩씩한
모습과 결연한 기개가 천 몇 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눈 앞에 선연히 떠올라 감회가 새롭습니다.
<몽촌역사관>에는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수혈주거지와 움집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백제인들의 특색인 출입구 달린 육각형 움집과 화덕과 저장 구덩이, 그리고 토기들.
세발 달린 삼족기와, 굽이 높은 그릇들, 계란처럼 생긴 저장용 항아리와, 제사 때 썼을 그릇 받침대는 일본에도 전파된 그릇.
고기잡이할 때 그물 끝에 달던 어망추와, 실 만들 때 쓰던 가락바퀴. 중국제 벼루와 동전무늬가 새겨진 중국 서진의 도기.
고구려의 침공 역사를 뒷받침하는 고구려 그릇인 네귀달린 목넓은 항아리와 기다랗게 생긴 원통형 삼족기.
그리고 최고 지휘관이 착용했을 가슴을 보호하는 소뼈로 만든 비늘갑옷과 쇠화살촉과 칼과 창날.
이 중 어느 하나 백제의 역사를 증언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호기심과 역사적 지식과 그 지식들을 꿰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상상력입니다.
<몽촌역사관>을 나와 시계를 보니 출발한 지 1시간 30분이 지났습니다.
오늘은 걸어서 무지개다리를 건너 송파세무서 건너편에 있는 풍납토성 남벽부터 시작하여 풍납토성을 본 후,
<한성백제박물관> 차를 타고 [석촌동 백제초기 고분]을 가야 되니까 갈 길이 많이 남은 일정입니다.
용인에서 왔다는 탐방객 한 분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내가 힘들 것 같다고 음료수 한 병 건네 받았습니다.^^^
사람과의 인연,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깨닫습니다. ****
< 풍납토성>과 <석촌동 백제초기 고분>에서.
9월 17일 토요일.
한성백제박물관이 개설한 [고대 역사문화 유적 탐방] 1차 날입니다.
오후 2시 현재 섭씨 27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