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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동길안초등40동기회 원문보기 글쓴이: 남병식
* 안동시 지역별 인구 통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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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인근 가 볼 만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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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분 류 : 서원
지 정 : 사적 제170호 (1969. 5. 28)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소유자 : 陶山書院
내용요약
이 서원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을 향사(享祀)한 도산서원이다.
선생은 1561년(명종 16)에 도산서당 건립하고 학문을 도야하였는데,
선생이 타계하자 문인들의 발의에 의해 서당이 있던 자리에 서원을
건립키로 하였다.
1572년(선조 5)에는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으며
1574년부터 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1576년에 완공하였다.
선조는 도산서원이라 사액하였는데 그 편액은 당시의 제1인자라고
손꼽히던 명필 한호(韓濩)의 글씨이다.
낙천(洛川)강변에서 곡구암(谷口巖)을 끼고 들어서면
영지산(靈芝山)을 뒤로 하고 동에는 동취병(東翠屛)이,
서에는 서취병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골짜기안에 안동호를
바라보며 계좌정향(癸坐丁向)하여 자리잡고 잇다.
정문을 들어서면 동측 조금 높은 터에 담장으로 둘러싼 도산서당이
자리잡고 서측으로는 농운정사와 하고직사(下庫直舍)가 자리잡고 있다.
도산서당은 선생이 을사사화의 피해를 입고 고향에 돌아가
칩거할 때인 1557년(명종 12)에 짓기 시작하여 1561년에 완공한
정면3간 측면1간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서당과 정사 사이로 난 통로를 따라오르면 진도문(進道門)이 나타나고
좌우에는 동·서광명실이 좌우대칭으로 자리잡고 있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전교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전교당의 좌우측에는
서재인 박약재(博約齋)와 동재인 홍의재(弘毅齋)가 있다.
전교당 마당에서 동측으로 또다른 담장속에는 장판각(藏板閣)이
자리잡고 서측으로는 한존재(閑存齋)라 하는 상고직사가 있다.
전교당과 장판고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높은 터 위에는 배향공간으로
내삼문을 들어서면 상덕사(尙德祠)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좌측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동채싸움(차전놀이)
지 정 : 중요무형문화재 제 24호 (1969.01.07)
소재지 : 안동시 운안동 132-21
관리자 : 안동차전놀이보존회
보유자 : 이재춘
내용요약
차전놀이는 왕건(王建)과 견훤(甄萱)이 싸운 고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동체싸움'이라고도 한다.
이 놀이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서 행해진다.
이 놀이는 안동성내뿐 아니라 인근지역인 금소동에서도 행해졌다고 한다.
현재 기능 보유자는 이재춘(李載春)이며,
전수교육조교(傳受敎育助敎)는 권석환(權石煥)이다.
이 놀이에 사용되는 동체의 준비는 연말에 동체목을 준비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이 동체목은 정월 4∼5일경 제관이 정장을 하고 목수를 대동하고 산을 오른다.
이들이 산에 도착하면 먼저 산신에게 고사를 하고 나무를 벤다.
벤 나무는 인근 마을 사람들이 협력하여 정중하게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 나무는 주로 안동 주변에서 구하지만, 안동 인근에 없을 때는
영양군 근처에까지 가서 구하기도 했다고 하며,
옛날에는 원님이 나와서 직접 지휘하였다고 할 정도로 이 행사에
대한 지역민과 관의 관심은 대단하였던 것이다.
동체목은 10여미터 정도 되는 참나무 두 개를 사용한다. 운반된 나무로
동체를 만들 때는 상대편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대문을 잠그고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동체의 크기나 견고성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행사는 상원날에 행한다.
이 날이 되면 안동시내의 주민은 동서로 두 편을 나누어서
각 편이 동체를 메고 백사장이나 넓은 보리밭으로 나온다.
이 때 시내의 청장년들은 거의 모두 모여들었다고 한다.
편은 출생지에 따라 동부와 서부로 나눈다.
그래서 부부간에도 편이 다를 수 있다.
동채 위에는 구군복(具軍服) 차림의 정장을 한 대장이 올라타서
왼 손은 동체에 연결된 줄을 잡고 지휘는 오른 손으로 한다.
동체를 멘 사람은 '동채꾼'이라고 하며,
동체의 앞에는 힘이 센 장정들은 무리를 이루어 팔짱을 끼고 위치한다.
먼저 두 편은 서로 대치한 상태로 기세를 올리려는 목적으로
자기편의 동체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환성을 지른다.
이러한 행위를 여러 차례한 후 싸움을 시작한다.
동체 앞에 위치한 장정들은 적과 부딪쳤을 때 서로 어깨로 밀면서
동체가 나아갈 길을 튼다.
이 때 동체는 그 틈으로 들어가서 상대편의 동체를 눌러서 땅에 닿도록 한다.
이것으로 승부가 결정된다.
그러나 일단 두 편이 겨루게 되면 각 편 대장의 지시에 따라
여러 차례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게 되어 승부는 좀처럼 나지 않는다.
또한 참가 인원이 수백 명에서 수천 명까지 이르러서 전진과 후퇴를
거듭할 때마다 서로 엎치락 뒷치락하게 된다.
동체싸움에서는 손은 사용할 수 없고 오직 어깨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부상자는 거의 없는 편이다
안동길안 묵계 용담사 용소의 전설
옛적 안동군 길안면 산달리 월성 이씨 가문에는 온 집안이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되는 이 아기는 아주 신통한 힘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은 장사가 태어났다고 수군거렸다.
낳은지 얼마 안되어 이빨도 나고 걷기도 하며 젖보다도 밥을 먹었다.
아지 첫돌도 지나지 않은 어느날 어머니가 시장에 갔다오니 놀랍게도시렁위에 올라가 흰 이를 보이며 씩 웃는데
가만히 보니 겨들랑이에 날개까지 돋아있는게 아닌가!
당시에는 장사가 나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역적이 된다고하여 그 집안을 멸족시키는 국법이 있어
소문이 자꾸 퍼지면 아들은 물론 친척들가 지 모두 화를 입게 될 처지였다.
이에 당황한 월성 이씨 일가는 의논 끝에 갓 태어난 장사를 죽 이려 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썼지만 어린 장사는 힘에 지혜까지 있어 어렵기만 했다.
인척들은 뜻대로 잘되지 안자 마침내 낮잠을 곤히 자는 장사위에 큰 널판을 덮고 떡메로 쳐죽여 버렸다.
장사가 마침에 숨을 거두자 그마을 건너편 산 기슭에 장차 용이 날 곳이라하여
용바위라 칭하던 큼직한 바위가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 용마가 한 마리 나타나
큰소리로 하늘을 향해 부르짖더니 곤두박질을 치며 산기슭아래 큰 못속에 빠져 죽었다.
그 용마는 장사가 타는 말로서 장사가 태 어나면 하늘에서 점지된 용마도 동시에 태어나
어떤 시기에 그둘이 만나게 되면 비로소 큰 장사 의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 어린 장사에게로 오던 용마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빠져 죽은 물은
하루에도 세 번씩이나 색깔이 변하여 이씨일가뿐 아니라 마을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을 주게되자 이 못을 없애려고 흙을 실어 메우게 되었다.
그러자 때아닌 큰 홍수가 마을을 휩쓸고 그 못을 메운 흙을 모두 쓸어가 버리고 말았다.
몇번 시도를 했으나 매번 홍수가 나 다시 못이 이 루어지자 포기하게 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 될 어린 장사를 죽인 월성이씨 가문은 점차 몰락하게 되었다고 하며
용마가 빠져 죽었다는 그 물을 용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용계은행나무
지 정 : 천연기념물 175호 ( 1966. 1. 13)
- 길안면 소재지에서 청송가는 길로 가다가 천지휴게소를 지나서 비포장도로로 용계리를 지나면 된다.
이 길은 지례예술촌(우회전)과 임동 수곡 신단지(좌회전)로 연결되어있다.
안동에서 31km거리다(안동-길안-용계리)
- 임동면 소재지 50m에 못미쳐서 오른쪽에 있는 수곡교를 건너 포장도로를 따라 박곡리를 지 나
고개마루에서 왼쪽으로 가면 지례예술 창작촌이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용계은행 나무가 있다.
원이 나무는 수령 700년으로 크기는 높이 37m, 가슴높이의 둘레 14.5m인 은행나무이다.
원래 용계초등학교 운동장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임하댐이 하류에 건설되면서 담수로 인하여
나무의 9m가 수몰될 위치에 있어 초등하교는 철거되고 이 나무도
'90년 11월부터 '93년 7월까지 2년 9개월에 걸쳐 많은 예산과 인력을 들여
그 자리에서 15m높이로 성토하여 가산을 조성한 후 지금의 위치에 올려 심어진 것이다.
우리국민의 나무사랑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인 것이다.
암나무이고 우리나라에 있어서 줄기 굵기로서는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조 선조 때에 훈련대장(訓練大將)의 벼슬을 한
탁순창공(卓順昌公)이 이곳으로 낙향해서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행계(杏契)를 만들어 이 나무를 보호하고 서로의 친목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살고 있었던 탁씨네들은 해마다 이 나무에 제를 올리고 있다.
◎ 安東 吉安, 龍溪里 銀杏나무 保存(천연기념물제175호)
樹齡 : 700년, 樹高 37m, 樹幹幅 : 33m, 胸高둘레 : 14m
- 朝鮮 宣祖大王(AD 1590年) 代 : 訓練 大將을 지낸 卓順昌公 落鄕 築臺를 쌓고 杏亭契를
組織 나무 管理
- 1966. 1. 13 : 天然 紀念物 指定 (第 175 號)
- 1 9 7 0 : 築臺 補修 및 長臺石 設置
- 1 9 8 2 : 胸部 瞳孔 外科 施術
- 1984. 12 ∼ 1990. 6 : 臨河댐 建設
('91.12.3 湛水 開始, 滿水時 나무 根部에서 9.7m 水沈)
- 1985. 3. ∼ 1990. 10 (5個年間)
- '87. 2. 24 大統領 慶北道 年頭巡視時, "天然紀念物인 龍溪銀杏나무의 保存對策을 講究
하라" 는 指示
- 銀杏나무를 水沈으로부터 保存하기 爲한 對策 協義 및 推進計劃 樹立
('87. 8. 5 銀杏나무 保存을 위한 慶尙北道 條例制定 公布, 保存推進委 員會 構成)
- 1990. 11. 3 : 龍溪 銀杏나무 上植保存工事 契約
∴施工者 : (株) 大 地 開 發 代 表 李 喆 浩
∴施行者 : 安 東 郡 (瑕疵保證期間 6年, 失敗時 工事費 全額辨償 檢察 公證 施工者 覺書 제출)
◎ 龍溪 銀杏나무 上植 保存工事
- 總工事 '90. 11. 6 ∼ '94. 10. 8(사업비 : 2,323,320千원)(4年間)
- 現 位置에서 15m 上植工事 : 生命土 工法 및 盆의 凹凸工法 採擇
- 年次別 推進事項
∴1次工事 : '90. 11. 6 ∼ '91. 1. 30, 240,100千원
(뿌리돌림, 작업대가설, 약재살포, 가지치기)
∴2次工事 : '91. 7. 10 ∼ '92. 2. 15, 500,000千원
(차수 심벽(점토)설치, 축제, 방풍대 설치)
∴3次工事 : '92. 3. 5 ∼ '93. 2. 19, 873,000千원
(겹분짜기, 상식용철골 제작설치, 상식, 관수시설)
∴4次工事 : '93. 9. 7 ∼ '94. 3. 8. 367,000千원
(방풍 및 조경수목식재, 조경석놓기, 관리사)
∴마무리工事 : '94. 9. ∼ '94. 10. 18, 5,400千원 (주변 정리)
∴進入橋梁架設工事 : 337,820千원
봉정사 극락전
극락전은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지난 1972년 극락전을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는
“신라문무왕 때 능인 대덕에 의하여 창건되고 고려 이후 여러 스님에
의하여 무려 여섯 차례나 중수를 하였으나 또 다시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지정 23년(공민왕 12년 1262년)에 예안의 용수사 축담스님이
중수한 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지붕이 허술하여 수리한다.”고
적고 있다.
이로써 이 때까지 최고의 목조 건물로 알려져 있던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더 오래된 건물로 확인되었다.
극락전의 또 다른 가치는 우리나라 목조 건물의 고형과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기둥머리와 소로의 굽이
곡면으로 내반되어 있는 점, 대들보 위에 산 모양에 가까운 복화반
대공을 배열하고 있는 점, 첨차 끝에 쇠서를 두지 않은 점 등이
극락전의 간결하면서도 각 부재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건물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극락전 앞마당에는 규모가 작은 석탑이 하나 있다. 가람 배치나
조성양식으로 보아서 건립연대는 고려 중엽으로 추정된다.
이중기단의 방형석탑으로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폭이 좁으며
각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의 제감율이 적고 옥개석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이 약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약간 둔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제비원미륵불상
이 불상은 원래 연미사(燕尾寺)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위치하며
근래에 제비원이라는 암자가 새로 들어서 일명 '제비원 석불'이라
고도 불리는 마애석불이다.
서쪽을 향한 높은 암벽에 조각된 불신(佛身)위에 불두(佛頭)를 따로
제작하여 올린 특이한 형태의 마애불로 머리 뒷부분이 일부 손상된 것
이외에는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佛頭는 큼직한 육계가 표현된 소발(素髮)의 머리와 얼굴을
각각 다른 돌에 새겨서 조립하였는데 미끈한 얼굴의 질감과는 달리
거칠게 표면 처리한 머리를 이마 위에 얹어 놓아 멀리서 보더라도
뚜렷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풍만한 얼굴의 미간(眉間)에는 白毫(백호)를 큼직하게 돋을 새김하고,
수평으로 길게 뜬 눈 위에는 초승달 모양으로 깊게 파인 눈썹이
날카롭게 우뚝 솟은 코의 윤곽선에 이어져 있다.
붉게 채색된 도톰한 입술은 굳게 다물어 강한 윤곽으로 표현된
얼굴과 함께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삼도(三道)가 뚜렷한 목에는 특이하게 연주문(連珠紋)을 돋을 새김한
장식이 표현되었으며, 강한 각선으로 조각된 환조의 머리와는 달리
장대한 신체는 선각으로 처리하여 다소 이질감이 느껴진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왼쪽 어깨에서 완만하게 흘러내린 옷주름이
오른쪽에서 수직으로 드리워진 법의 자락과 교차되어 접히고,
넓게 트인 가슴 밑으로 내의(內衣)의 띠가 수평으로 표현되었다.
수인(手印)은 두 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오른손은 복부에 대고
왼손은 손등이 보이도록 가슴 위로 올려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하고 있으며, 불상의 발 밑에는 큼직한 단판연화문을 음각하여
대좌로 삼고 있다.
불두를 따로 제작하여 불신이 새겨진 암벽 위에 얹는 형식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는 형식이며,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 11세기 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놋다리밟기
지 정 : 시도무형문화재 제7호
지정일 : 1984. 12. 29
소재지 : 안동시 용상동 1109-4
소유자 : 김순임
내용요약
이 놀이는 "동국세시기"에도 기록될 정도로 오랜 시기에 걸쳐 전승된 여성의 집단놀이이다.
수도재배 지역과 깊은 연관이 있는 남해안 지역의 '강강 술래', 의성의 '지와밟기',
영양군 청기면 당동 곡수의 '동다리밟기', 안동시 임하면 금소동과 예천의 '지애밟기' 등과
같은 여성 군무(群舞)의 일종이다.
공민왕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현재 안동시 서현동 소야천(所夜川)
나루에 이르렀을때 마침 배가 없었다.
그래서 읍의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다리를 만들어서
왕후가 그 위를 지나가게 했다.
왕 일행은 안동에서 매우 불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읍민들이 왕과 노국공주를 즐겁게 하기 위해 이 놀이를 고안했다고 한다.
이 놀이는 수도재배 지역의 분포와 함께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승되어 오던
지역민의 문화와 지역에서 발생한 역사적 경험이 결합된 유형으로써
지역민의 심성사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기능 보유자는 김순임(金順稔)이며, 보유자 후보는 김경희,
전수교육조교는 조진영, 전수 장학생은 김민정과 조희영, 정은숙, 정귀향 등이다.
이 놀이는
일렬형(一列型 : 성 안의 놀이 유형)과,
병렬형,
원형(圓型)(성밖의 놀이 유형)의 세 종류가 있으며,
원형이 가장 고형인 것으로 추정된다.
놀이는 음력 정월 보름날 밤에 동부와 서부의 부녀자들이
각기 패를 이루어서 행한다.
동부는 주로 마당이 넓은 초당집에 모이고,
서부는 주로 잿집에 모여서 놀았다.
저녁 식사를 한 후 큰 집 마당에 모인 이들은 둥둥데미를 시작한다.
즉 모든 사람들이 원형으로 손을 잡고 둥글게 앉아 있다가
선두에서부터 일어서면서 손과 손사이를 타넘으면서 둥글게 도는 것이다.
다 돌고 나면 지문 모양으로 겹겹이 싸이는데 이 때 둥둥데미 노래를 제창한다.
그 다음에 선두가 빠른 발걸음으로 겹겹이 싸인 원 사이를 통하여
풀어 나오면서 실감기 노래를 제창한다.
모두 풀려서 하나의 큰 원이 되면 이들은 원 안쪽으로 허리를 굽히면서
치마를 걷어 올려 덮어쓴다.
10세 가량된 소녀('공주'라고 부름)가 만들어진 등위를
시녀의 부축을 받으면서 천천히 걸어 나간다.
이때 놋다리 노래를 부른다.
소녀가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일행은 일자형으로 대열을 정렬하여
큰길로 향한다.
이 때 선두의 노부녀 2명이 선창을 하고
시녀 뒤에 따르는 17∼8명의 부녀자들이 후창을 한다.
행렬이 목성교까지 이르면 이 곳에서 동서부의 놋다리가 만나게 된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꼬깨싸움을 벌였다고 하지만,
1910년경에는 사이좋게 헤어진 후 제자리로 돌아가서 꼬리따기,
대문열기 등의 놀이를 행하다가 밤이 늦어서야 해산하였다고 한다.
귀어디서 소이왔노 경상두서~ 소이왔네
무슨일로~ 와겠다고 꼬깨미로 와겠다고네
물이많에~ 워에왔노 버들잎을~ 타구왔네 입이시러~ 워에왔노
문에쪽을 물구왔네 소이시러~ 워에왔나 양목토시~ 찌구왔네
꼬깨일로~ 오신손님 사랑으로~ 드시라오 무슨꼬깨~ 와겠는공
미옥꼬깨~ 왔나이다 부대꼬깨 하여보소
꼬깨꼬깨 우리꼬깨 이터이야 누터인공 나라임에
옥터일세 이꼬깨가~ 누꼬깬공 나라임에~ 옥꼬깨세
정성으로 마주오셔서 꼬깨한번 올러보세
및에칸을~ 밟아왔노 쉰댓칸을~ 밟아왔네
워데오다~ 닭이우도 이하촌이 개가짖고 우리꼬깨 싱겨났오
* 안동 지역 장날 소개 *
위치 : 안동시 옥야동, 남문동, 북문동 일원
장날 : 매월 2, 7, 12, 17, 22, 27일
안동장은 1945년도에 개설한 중앙시장(신시장)과 구시장을 비롯하여
북문시장, 용상시장, 서부시장 등이 있으며 이 시장은 경북 북부지역을
대표하는 중심시장으로서 지역에서 생산되는 고추, 마늘, 참깨, 채소,
한약재등 각종 농축산물을 비롯하여 수산물 의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
지고 있으며 의류, 전자 등 공산품을 비롯하여 안동 지역의 특산품인
안동포 시장인 베전골목과 그밖에 안동간고등어, 안동소주, 안동산약,
안동사과, 고추등이 유명함.
위치 :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
장날 : 매월5,10, 15, 20, 25, 30일
교통편
시내버스( 60, 67 번) : 버스정류소앞 출발(2시간 간격) 40분소요
승용차 이용 : 시내 → 국도35호→ 도산서부검문소→지방도935호
(약30분소요)
신평 1958년도에 개설하여 지역의 5일장으로서 역할을 하였으나
교통의 발달로 점차 기능이 쇠퇴해 지고 있으나 아직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고추, 참깨 등 농산물과 생활필수품 등이 많이 거래되고 있다.
위치 : 안동시 예안면 정산리
장날 : 매월4, 9, 14, 19, 24, 29일
교통편
시내버스( 59 번) : 버스정류소앞 출발(1시간 간격) 45분소요
승용차 이용 : 시내→ 국도35호→와룡면→지방도933호
(약30분소요)
정산 시장은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거주 주민이 이동하여 상권을
형성하면서 개설된 시장이다.
1973년부터 정기시장이 열려 70년대 말에 성황을 이루었으며
우시장도 겸하여 하루 이삼십 여마리의 소가 거래되기도 하였다.
장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오후 3시까지 장이서고 고추과 사과 등이
주거래 품목이다
위치 : 안동시 임동면 중평리
장날 : 매월5,10, 15, 20, 25, 30일
교통편
시내버스( 33 번) : 안동역앞 출발(1시간 간격) 40분소요
승용차 이용 : 시내→ 안동대학교 →국도34호→
영덕방면(약25분소요)
일명 책거리 시장으로서 영남 북부와 동부 해안지역에서 안동으로
들어오는 길목이 이었으며, 농산물과 수산물을 안동으로 옮겨가는
중심 기지로서 영남 북부권 중심상권의 몫을 담당했다.
예로부터 임동고추는 영양고추보다 품질과 가격 면에서 우위를
차지하였으며, 현재 안동댐 임하댐에서 생산되는 빙어, 붕어등
내수면 어업이 성행하고 있다.
위치 : 안동시 길안면 천지리
장날 : 매월5, 10, 15,20, 25, 30일
교통편
시내버스( 28 번) : 안동역앞 출발(20분간격) 30분소요
승용차 이용 : 시내 → 안동대학교 →국도35호→
영천방면(약20분소요)
천지시장은 1930년대부터 정기 시장이 형성되어 50∼70년대에
가장 성황을 이루었으며, 아침 일찍부터 오후 3시까지 장이 서고
사과, 고추 참깨, 콩등이 거래되고 있다.
위치 :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
장날 : 매월4, 9, 14,19, 24, 29일
교통편
시내버스( 76 번) : 안동초등학교앞 출발(30분간격) 40분소요
승용차 이용 : 시내 → 국도34호 → 풍산읍 →지방도916 예천
지보방면 (약 30분소요)
면소재지가 아니면서도 지역상권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구담장은
사과와 벼를 주종으로 한 과일과 곡물의 거래가 왕성했으며,
최근 시설채소 위주로 농업형태가 변화하면서 재래시장의 기능이
위축 되었으나 시장포장과 장옥등을 새로이 개축하고 인근지역의
영농규모가 커 상권발달의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위치 :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장날 : 매월4, 9, 14,19, 24, 29일
교통편
시내버스( 54 번) : 안동역앞 출발(30분간격)40분소요
승용차 이용 : 시내 → 국도 5호선 영주방면 약 25분거리
1970년대 국도개통과 함께 현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70년대부터
상업위주로 발전하면서 정기 시장으로 성황을 이루기 시작했다.
장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인근 지역의 농산물과 철따라 고추, 참깨,
수박과 색상 및 당도가 탁월한 사과, 허약 체질에 좋다는 산약과
기타 생활용품이 활발히 거래된다.
위치 : 안동시 풍산읍 안교리
장날 : 매월 3, 8, 13, 18, 23, 28 일
교통편
시내버스(11, 76, 44, 42번) : 안동역앞 출발(15분간격)30분소요
승용차 이용 : 시내 → 국도34호선 예천방향 약20분 거리
오랜 세월동안 우리시골 아낙네들의 휴식공간이며 매매의 장으로
사랑 받아온 풍산시장은 옛날 우리 시골장터의 모습을 간직한 보기
드문 곳이다. 있을 것 다 있고 없는 것 없으며 우리 시골사람들의
아름답고 재미있는 대화가 오가는 진한 삶이 배어나는 신명나는 장터이다.
장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농가에서 직접 생산한 풍산의 유명한 무와
배추, 고추 등의 양념채소와 오곡백과, 각종 공산품 등이 시끌벅적하
고 흥겨운 만남 속에 거래되고 있다.
지역특산품
[풍산김치] |
[안동쌀] |
위치 : 안동시 일직면 운산리
장날 : 매월1, 6, 11,16, 21, 26일
교통편
시내버스( 38 번) : 안동초등학교앞 출발(30분간격) 25분소요
승용차 이용 : 시내 → 국도5호 → 대구방면 (약 20분소요)
운산은 굴처럼 생긴 고개가 있어 굴터, 구르터 등으로 불리었으며
1914년부터 정기 시장이 개설되었다.
장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오후 4시까지 장이 서며 청결하기로 소문난
일찍 고춧가루를 비롯하여 주변에서 생산되는 마늘, 고추, 양파등이
많이 거래되고 있다.
2006.11.29
안동고23회, 길안초등40회, 남병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