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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1-3절
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Point: 문제의 근원은 자기 주장입니다.
Introduction: 경쟁력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 경쟁력의 근원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력으로서의 사람이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경쟁력있는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서 기업들은 인력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네덜란드의 필립스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면도기나 가전제품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이 회사는 유럽 최대의 전자그룹입니다. 필립스는 인재 선발과 육성에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이를 위해 투명하고 정확한 평가를 중요시여깁니다. 개인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면 핵심 인재를 찾아내고, 육성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도입된 것이 ‘PPM-people performance management’라는 시스템인데 번역하면 ‘개인실적관리’가 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360도 다면평가 방식입니다. 한 사람에 대해 아래, 위, 옆에서 평가하고 그것을 기초로 그의 포지션을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 회사가 설정한 고유 가치를 이행할 리더십과 직무능력이 있나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합니까? 치열한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쟁력 있는 인력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을 확보하기 위해 정확하고 투명한 평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한 공동체의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최근 한 기업이 검찰의 수사로 인해 휘청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 경제가 여러 가지 부담을 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핵심적인 내용에 분식회계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기업의 가치를 부풀린 것입니다. 그 부풀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풀린 가치로 은행의 대출을 받습니다. 일종의 거품인 셈입니다. 이것이 드러나자 낭패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확한 평가의 결여가 이런 모든 일의 근원에 있다는 말입니다.
정확한 평가가 중요합니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 평가를 기초로 문제해결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나 공동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하고 적실한 평가가 선행되어야할 과제입니다.
Point 1: 문제
오늘 본문은 ‘문제’ problem에 대한 말씀입니다. 인생의 근원적 문제를 보여줍니다. 그 문제를 보여주는 본문의 방식은 무엇보다 정확한 평가입니다. 다시 말해 본문은 인생과 그 삶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먼저 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영어번역을 그대로 풀어 보면 ‘너에 대하여 너는 허물과 죄로 죽어있다.’ 이렇게 나옵니다. ‘As for you, 너에 대하여, 너에 관하여’가 먼저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너는 누구냐?’ 이 말입니다. ‘인생아, 너는 누구냐?’ 이렇게 먼저 묻는 것입니다. 인생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리겠다는 뜻입니다.
그 정확한 평가가 어떤 것입니까? 인생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인생에 대해 내리고 엄정하고도 정밀한 평가입니다.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허물과 죄는 무엇입니까? 허물은 ‘transgression, 위반’입니다. 여기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고의성이 없는 죄라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또 이것을 생각에서 범죄를 계획하는 것이라 정의하기도 합니다. 구체적이고 특수한 잘못을 의미한다고도 말합니다.
또 죄는 무엇입니까? Sin, 그야말로 죄입니다. ‘과녁을 맞히지 못한 화살’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의성이 있거나 실제로 악한 생각을 행동화하거나 또 일반적인 잘못을 뜻하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굳이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어떠하든 ‘허물과 죄’는 인간의 총체적인 죄악아래의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은 죄와 허물아래, 죄의 지배아래, 죄의 영향권 안에, 다시 말해 죄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말씀의 평가입니다. 나아가 ‘허물과 죄’는 그것의 성격이 연속적이고 질기고 질김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죄가 질깁니까? 얼마나 끊임없이 밀려옵니까? 죄를 아는 사람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죄의 이 성격을 분명히 압니다. 그래서 우리를 회개하기에 민망한 지경까지 이르게 합니다. 그렇게 질긴 것이 이 죄의 성격입니다.
그리고 이 허물과 죄로 인해 사람은 죽어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인해 여러분과 저는 죽어 있습니다. dead! You dead! 그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에 대한 본문의 엄정한 평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우리의 반론은 시작됩니다. ‘죄, 허물, 물론 있지. 없는 것 아니야. 그런데 나만 있나. 나보다 더 심한 X도 있고. 그래도 걔 중에는 내가 좀 낫지. 그렇다고 죽은 것은 아니잖아. 아니 멀쩡하게 살아서 이렇게 싱싱한데. 이 피부를 좀 봐 윤기가 나잖아. 그런데 왜 죽었다고 하는거야. 기분이 나쁘잖아. 그렇찮아’ 이쯤 되면 ‘맞습니다. 맞고요’ 해야지요.
보세요, 여러분. 분명 살아있는데 왜 죽었다는 걸까요? 또 왜 그것을 정확한 평가라고 봐야합니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여기의 ‘죽어 있다. dead'는 어떤 경향성을 말합니다. 일종의 방향입니다. 영원한 생명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기에, 그래서 죽음의 방향으로 가는 인생의 경향성. 그와 같은 방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가끔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란 말을 듣습니다. 여기에 들어있는 의미가 본문 1절의 ‘죽었던'과 같습니다. 사람은 죽음을 향해 갑니다. 죽음을 향한 경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죽음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고 죽음이 다가 옵니다. 비관적인 말 같지만 사실입니다.
지난 주에 장례예배를 집례했습니다. 이 환자는 입지전적으로 산 사람입니다. 어려운 가운데 공부했고 또 이민 가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5년 전에 간암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미 진행이 많이 되어 수술하기도 힘든 상태에서 오래 버틴 셈입니다. 이제 중환자실에 있다가 산소마스크를 뗀 지 몇 일 지나지 않아 그 마지막을 맞이 했습니다.
이 분 때문에 병원에를 자주 왔다갔다 했는데 그러면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병원은 사람이 죽으러 가는 곳입니다. 물론 병원은 치료받고 살기 위해서 가지요. 회복되고 치유되기 위해서 갑니다. 그러나 그 결국을 보세요. 병원에서 대개 죽습니다. 죽으러 가는 곳이 병원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세요. 사람이 허물과 죄로 인해 얻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에서 분리되었다고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 되신 분과 그 관계가 끊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명에서 떨어진 그 운명이 사람을 다스리게 됩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자리에 자리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살았으나 죽은 인생입니다. 허물과 죄로 이미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에 대한 성경의 정확하고도 엄밀한 평가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허물과 죄’가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이것을 물을 차례입니다. 왜 인생에게 죽음이 있고, 죽음과 어두움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나, 그것을 물어야 합니다.
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인생에게 왜 허물과 죄가 있습니까? 그것으로 인해 생명에서 분리되고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구 때문입니까?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본문을 보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 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air’가 소개됩니다. 자 악한 세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허물과 죄를 도모한 어둠과 죄악의 세력이 분명 있습니다. 이것은 악한 영들, 나아가 악한 마귀의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존재들이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습니다. ‘공중’이라 함은 다스림의 영역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인생 가운데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역사하는 영, the spirit who works’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행의 배후에 악한 마귀의 강한 역사와 조정이 있다는 말입니다. 악인들 가운데서 악한 일로 활동하는, 역사하는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일과 그로 인한 죽음이라는 결과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즉 악한 마귀 때문입니까? 주범이 이 악한 세력입니까? 그래서 이분법적으로 선한 마루치아라치가 악한 파란해골 13호를 물리치면 됩니까? 야, 참 오래된 얘기가 나옵니다. ‘파란해골 13호 납작코가 되었네’ 아니면, 반지원정대는 절대 선이고 사우론만이 절대 사악한 세력입니까? 그래서 모든 책임은 사우론과 그 동조세력이 져야합니까?
본문 2절을 자세히 보세요. ‘영’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spirit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영입니다. 권세를 잡아 역사하고 활동하는 영이 있습니다. 그런 스피릿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영은 영입니다. 이 말은 영은 몸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엄격히 말하면 영만으론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손이 있어 사람을 때릴 수도 없고 바람을 일으킬 수도 없고 사람의 생명을 해할 수도 없습니다. 영은 영, spirit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영은 활동할 몸이 필요합니다. 악한 세력을 확장하는데 필요한 몸, budy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악한 마귀가 사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본문의 핵심이 있습니다. 여기에 사람의 문제의 근본이 나옵니다. 2절을 다시 보세요. ‘곧 지금 불순종하는 아들들 가운데서’ 자, 보세요. 악한 마귀가 그의 악한 일을 도모함에 결정적으로 사용하는 대상이 무엇입니까? 몸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그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사로잡아 그 몸을 자기의 목적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그 수많은 악한 일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죄의 일과 악한 일이 사람의 몸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벌어지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몸으로 행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 청년부 인터넷까페에 ‘만약 지구에 지구인이 사라진다면’ 이런 짧은 그림과 글이 올라왔습니다. ‘지구에 지구인이 없어진다면 종말일까? 아마, 아무렇지도 않을 걸?’ 그리고 마지막 그림이 초록으로 뒤덮히고 동물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세상을 그려놓았습니다. 의미심장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림 그대로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없어져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더 나은 환경과 자연이 형성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자, 이제 본문의 핵심중의 핵심으로 들어갑시다. 문제가 뭡니까? 문제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2절에 나옵니다. ‘불순종’입니다. disobedience! 다시 말해 몸을 가진 사람의 마음이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생각과 의도와 계획을 좇아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를 지으신 분에 대해 불순종하고 악한 세력에 대해 추종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악한 계획을 수용했고 그러자 그 몸이 악한 일을 만들어 내게 된 것입니다. 불순종하려는 마음과 그 마음을 따르는 사람의 몸이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강조하는 바요 성경이 사람에 대해 내리는 정확한 평가입니다. 이것이 문제요, 문제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자, 그러면 불순종이 뭡니까? 지금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밝혀진 불순종이 무엇입니까? 3절은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하나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순종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내 욕심대로 원하는 대로, 내 생각의 주장대로 하는 것이 불순종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이것을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보세요. 이것을 분명히 합시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에 대한 계획을 분명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주장하시는 바가 있고 그래서 그것을 우리는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유익과 풍성과 충만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for your own good,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이것이 그 계획의 목적입니다. 말씀하시되 우리의 유익을 위한 계획과 목적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것에 반하여서,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 말씀에 반해서, against the word! 사람이 자기의 주장을 폅니다. 자기의 계획이 자기에게 더 유익하다고 생각해서 그 길을 고집합니다. 자기의 주장을 주장합니다. 자기 생각을 펼칩니다. 그것을 관철하려고 하고 또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자 합니다.
바로 여기 이 부분에 ‘악한 영’이 역사합니다.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사람의 마음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그의 몸을 통해 죄악의 일을 하게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목도하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의 현장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러면 문제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보세요. 분명 하나님의 주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원리가 있습니다. 또 이것은 근원적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의 주장을 펴는 것, 그래서 그것을 실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불순종의 내용입니다. 이 불순종, 그래서 욕심대로 원하는 대로 하는 것, satisfying the longings of sinful nature and following its desires and thoughts 이것이 문제의 근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우리의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 하나님 마음대로고 사람에게는 그 마음대로 할 자유와 권한이 없는 것입니까? 전혀 없습니까? 도대체 그런 속박과 억압이 어디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는 항변이요 질문이요 때때로 저항입니다. 여기까지 듣다보면 여러분 가운데 이런 질문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다들 보니까 그 질문이 목에까지 차있습니다. 설교시간만 아니면 ‘쳇, 다 하나님 자기 맘대로야’ 이러고 싶은 데 모두가 어금니 물고서 참는 얼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분명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유는 고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귀한 자산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절대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욕심으로 표현되는 자유와 지혜로 표현되는 자유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욕심으로 표현되는 자유는 그야말로 불순종입니다.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주장을 무시하고 나의 주장을 펴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장보다 내 주장이 더 유익하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가 세운 나의 계획이 나에게 더 복되고 유리하며 나의 풍성을 위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욕심으로 표현되는 자유로 나아갑니다.
그런 반면에 지혜로 표현되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주장과 하나님의 길을 받아들일 때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길 위에, 믿음의 걸음을 걷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탁월한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놀라운 창조력이 나타납니다. 샘솟는 탁월함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부으신 지혜가 그것입니다. 그가 믿음의 길을 갈 때에 그에게 주신 자유와 지혜는 애굽을 구하고 근동 전체를 구한 탁월한 것이 되었습니다. 또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부으신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왕을 연속으로 모시며 국가를 경영하는 자리에 그들을 두신 것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탁월함입니다. 이런 지혜와 자유를, 하나님의 길을 갈 때에,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주장과 계획과 그 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허락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지혜가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주장과 나의 주장, 어느 것이 탁월합니까? 이런 질문이 너무 뻔하며 그래서 부담스럽다면 이렇게 물어봅시다. 나의 주장과 하나님의 주장 중에 나에게 어느 것이 더 유익하며 유리하며 나를 복되게 합니까? 이것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자신에게 깊이 물어보세요.
여기에 불순종과 순종의 갈림길이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있습니다. 여기에 허물과 죄로 나아가 죽음의 방향이 있고, 또 여기에 악한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나아가 여기에 축복이 있고 영광이 있으며 여기에 승리가 있으며 여기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자 어느 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길로 갈 것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사실, 나의 주장으로 가고 나의 욕심과 나의 원하는 바대로 가는 것이 현재 지금의 나에게 더 나아보입니다. 훨씬 더 나아보입니다. 그것이 더 큰 몫을 차지하는 길인 듯 보입니다. 그것이 현재 더 큰 기쁨을 주는 듯 보입니다. 그것이 지금 나에게 더 큰 복인 듯 보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성격이고 그런 세상의 모습을 우리가 분명 보고 있습니다. ‘죄다 이 길로 나아가는 데 나만 손해 볼 수 없잖아!’ 그런 마음이 듭니다. 이것이 믿음의 갈등이고 우리 존재의 번민이기도 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주장은 근원적으로 희생을 요청합니다. 봐 주어야 합니다. 한 번 또 참아야 합니다. 또 먼저 용서해야하므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쟤가 분명 잘못했는데! 와서 싹싹 빌어도 용서할까 말깐대!’ 나의 지금의 눈에 보이는 손해가 분명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포기도 있어야 합니다. 또 내 십자가가 있어서 그것을 져야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주장 안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임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 현실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믿음의 길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기에 순종의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지금 여기, here and now만을 보면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만을 주목하면 낙담하게 됩니다. 좌절하고 또 무너지게 됩니다. 나아가 허물과 죄에 휩싸여 버립니다. 그래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탁월한 전략에 말려 버립니다. 압도당합니다. 욕심대로 원대로 가버립니다.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마침내 불순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또한 그 불순종은 악한 역사의 원천과 바탕이 되어 버립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눈은, 믿음의 사람의 눈은 절대로 지금 여기만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지금 여기만 주목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러면 절대로 넘어지고 맙니다. 눈을 들어 저 너머 하나님의 나를 향한 그 놀라운 계획과 주장과 간섭하심과 역사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그 시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주장이 나에게 가장 복되며 귀하며 유익이 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지경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나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순종이 있습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를 이기며 악한 것들의 장난을 이김은 바로 이 순종의 역사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갈보리청년 여러분, 최근 개혁이라는 주제가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습니다. 그 개혁의 주제처럼 되어 있는 것이 소위 ‘서열파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개혁의 부정적인 의미만을 드러내는 것이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변화를 거부하는 편에서의 자기 주장인 듯 합니다.
이것을 조금 달리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능력 중심’ ‘가치 중심’ value-oriented!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이미 우리가 친숙합니다. IMF 이후 모든 기업들은 이것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왔습니다. 그 회사의 순수가치, 진짜 가치가 어느 정도인가 혹은 한 개인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가가 그 핵심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알짜기업, 우수기업이 있고 연봉제가 있고, 스톡옵션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 분위기는 이미 가치중심으로 변하고 있는데 지금 ‘서열파괴’라는 말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은 이미 사회의 큰 흐름에 뒤쳐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제 '가치 중심, value-oriented'이라는 말로 본문을 다시 설명해 보겠습니다. 무엇이 사람의 가치입니까? 무엇이 인생의 가장 귀한 가치입니까?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주장, 그 분의 주도하심을 받아들이는 인생이 가장 가치 있는 인생입니다. 그 인생에 허물과 죄가 힘을 잃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도 허공을 칠 뿐입니다. 마음이 정하여져서 하나님께로 가 있는 사람, 그 분의 인도하심이 어떠하든지 거기로 가는 사람, 그것이 자신을 위한 가장 귀한 유익임을 믿는 사람, 그 사람이 참된 축복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여기 앉은 여러분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Prayer: 거룩하신 아버지, 문제의 핵심은 나의 불순종입니다. 나의 욕심대로 원대로 나아감이 문제 중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허물과 죄로 나타나고 악한 영의 역사를 극심케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계획이 나를 위한 축복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주장과 그 말씀이 나의 유익임을 받아들입니다. 믿음의 길 가게 하시고 갈 때에 신실함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