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경북문화체험 수필 은상 수상작
먹
김동수
먹을 갈 때, 진정한 묵객墨客은 마음을 다스린다. 번뇌는 묵향에 실어 날리고 손끝으로 전해오는 미세한 마찰로 감각을 조율한다. 욕심이 생기면 먹물이 탁해지고 마음이 중심을 잡지 못하면 붓이 흔들린다. 먹을 가는 일은 내면에서 우러나는 미美를 길어 올리기 위한 묵언수행이다.
묵향을 찾아가는 길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산 너머에서 신라의 향기가 불어오는 건천읍 송선리, 경북 무형문화재 유병조 선생의 집이다. 먹을 만드는 재료며 도구며, 선생의 땀이 배어있는 집안에는 묵향이 가득하다. 투박한 노동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는 손에, 세월이 성성한 머리칼에, 인생의 굴곡만큼이나 주름이 깊은 노인네지만 내공은 속이지 못하는가. 순순한 눈매에 말투는 어눌해도 선생의 풍채에는 묘한 신념이 서려있다.
일본에서 출생한 선생은 어린 시절에 부모와 함께 산내면으로 돌아와 작은 아버지에게 먹을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먹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온갖 곡절을 겪었으나, 온 산을 돌아다니며 질 좋은 관솔을 찾고 더 나은 제조법을 찾으려 숱한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오늘날 신라 먹장에 올랐단다. 돈이 되지도 그렇다고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하다 보면 누군들 속이 타들어가는 나날이 없겠는가. 몸을 희생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게 사람이라고 보면, 외곬인생을 태운 선생도 먹이 되어 있었다.
먹을 만들 때 장인匠人도 마음을 다스린다. 상술이 들어가면 결이 거칠어지고 욕심이 들어가면 표면이 갈라진다. 장인은 손끝으로 전해오는 질감으로 질료의 밀도를 조절한다. 반죽이 끝나면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는다. 차지도록 다진 반죽을 목형木型에 넣어 형상을 찍어내면 사람의 일은 다한다. 다음은 하늘의 기운에 맡긴다. 재 속에 묻어 달포쯤 건조해 형상이 갈라지거나 틀어지지 않아야 비로소 먹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존재의 근본 원리를 질료와 형상이라고 본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은 보다 낮은 형상을 떨쳐 버리려는 습성을 가지며, ‘최고형상’과 결합하려는 욕망을 가진다.”고 했다. 최고형상은 ‘어떤 형태도 가지지 않는 순수한 것’으로 신神과 같은 완전체를 의미한다. 이는 물질을 초월한 존재로 불가에서 말하는 해탈解脫과 통한다. 인간이 예술이나 수행에서 얻는 더 높은 차원의 가치 또한 저와 불이법문不二法門이 아닐까.
송연묵은 차원이 다르다. 죽은 소나무가 남긴 관솔을 태워 그을음을 얻고 몸을 보시한 소의 가죽을 녹여 아교를 얻는다. 질료에 사향을 첨가한 다음 반죽을 찧는다. 공을 들일수록 더 높은 차원의 먹을 얻는다. 나무절구에 쇠공이로 삼만 번 찧어야 木臼鐵杵三萬목구철저삼만, 나무공이로 십만 번 찧어야 十萬杵십만저라는 묵명墨名을 붙인다. 생물의 형상을 버린 질료가 장인의 혼과 결합해 송연묵이 되고, 송연묵은 제 형상을 갈아 묵객의 예술혼과 결합해 어떤 형태도 가지지 않는 순수한 가치를 낳는다. 먹 가운데 송연묵을 으뜸으로 치는 까닭은 그 속에 푸른 기상과 순순한 성품에다 해탈의 향기까지 품었기 때문이리라.
‘천년의 흔적을 만드는 그을음의 신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글귀가 환영처럼 마음을 사로잡는다. 신화가 간밤의 눈처럼 쌓이랴. 명장名匠에게는 물物과 아我가 하나가 될 때까지 공을 들이다보면 내면의 뜰에 쌓이는, 말하자면 인고의 무영탑無影塔과 같다. 천년의 흔적보다 더 전설 같고 그을음의 신화 보다 그윽한 무형無形의 탑이 있을까. 수 년 전 선생은 송연먹물 스무 말을 팔만대장경 탁본용으로 해인사에 흔쾌히 제공했다니, 그 고행의 흔적 또한 깨달음의 도량에 천년의 향기로 남을 것이다.
동이東夷의 사신이 한나라 황제에게 송연묵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삼국시대 특산품으로 담징이 일본에까지 제조법을 전수했으나, 수요가 줄어든 요즘에는 겨우 명맥만 잇고 있다. 전통문화에 대한 지원도 변변찮아 선생 역시 제대로 된 공방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먹 명가에서 좋은 조건으로 선생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선생은 단호히 손사래 쳤단다. 벼랑 끝에서도 기상을 잃지 않는 소나무를 닮아서일까. 고된 노동에도 우직함을 잃지 않는 소를 닮아서일까. 끼니는 굶을지언정, 은혜를 모르는 나라에 영혼을 팔지 않겠다는 선생의 정신 앞에서 마음이 송연해진다.
외모를 우선하고 처세술을 먼저 배우는 요즘, 물질을 최고 가치로 삼다보니 세상 곳곳에 비린내가 풍긴다. 얄팍한 돈을 따르다가 우리네 정신세계가 얕아진 탓은 아닌지. 간편하게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나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이 넘치는 글로 사람을 속이지나 않는지, 무형의 거울로 세상을 비춰보니, 하나의 가치에 인생을 걸고 애오라지 먹으로 자신의 세계를 묵묵히 드러내는 선생의 성품이 향기롭기만 하다.
서가書家에서 먹을 으뜸으로 치듯 옛사람은 내면에서 우러나는 풍채를 으뜸으로 보았다. 그리고는 심오하고 현묘한 이치는 사물 깊숙이 숨어있으며 그 아름다움은 결로 나타난다고 했다. 고결한 인품은 내면의 깊이에서 나온다고 여긴 선조는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벗 삼아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가다듬었다. 내면에 갈증이 날 때 선조의 정신문화에 두레박을 내려 봄직도 하다. 두레박은 삶을 편리하게 하는 도구지만 우물 깊이 내리지 않으면 맑은 물을 길어 올릴 수 없으므로.
선생에게 예를 갖추고 마을을 나서다보니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다. 삼원색(빨강․초록․파랑)을 같은 농도로 섞으면 검정이 된다. 또한 가시광선의 범위를 넘는 색깔은 검게 보인다.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오묘한 조화를 사람의 눈으로 다 보지 못해서일까. 두렵거나 먹먹하거나 혹은 편안하거나, 검정이 주는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다. 먹 앞에서 막막해지는 까닭은 나는 아직 그 속에 함축된 묵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심안心眼이 트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유형이거나 무형이거나, 우리네 세상에는 숱한 느낌표가 있다. 무형문화재는 장인의 삶에서 가치를 찾아야 한다며 떠난 길, 그 증표로 얻은 송연묵을 주머니에서 꺼내본다. 장인의 정신이 함축된 까만 느낌표를 손톱으로 두드리니 소리가 맑다. 코에 대니 향긋하다. 느낌표가 내게 넌지시 묻는 듯하다. 그대 생을 다 태우면 어떤 흔적이 남느냐고. (끝)
첫댓글 대구일보 홈페이지 기사에는 작품의 마지막 단락이 빠진 채 게재되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기에 오늘 알아보려 합니다.
이에 작품 원본을 올리니, 문우님께서는 착오 없기를 바랍니다.
이랑선생님,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먹을 가는 일은 내면에서 우러나는 미美를 길어 올리기 위한 묵언수행이며
장인匠人도 먹을 만들때는 마음을 다스린다는 말' 을 기억하겠습니다.
나는 생을 다 태우면 어떤 흔적이 남을까요?
예,
글쟁이니까 활자만 남지 않을까요 ㅎㅎ
축하, 고맙습니다 ^^
마지막 구절이 가슴에 쑥 남는데 그 부분이 빠지다니 ....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
편집에 오류가 있나봅니다.
고맙습니다 ^^
이랑 선생님!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단정하고 깔끔한 문장에 눈길이 갑니다.
기행수필에 목적을 둔 상이 아니었다면? 결과가?
이하는 생략하렵니다.
세상은 고수들 천지라는 걸 새삼 느낍니다.
나에게 묻습니다. 너의 생을 다 태우면 어떤 흔적이 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육신을 태운 거무레한 재만 남을 거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