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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옌안 근교 나가평에 위치했던 조선혁명군정학교 근처 숙소. 김두봉 등 독립운동가가 머물렀던 이곳은 현재 폐허로 남아있다. |
옌안에서 기차로 8시간거리에 있는 시안(西安). 광복군 제2지대의 주둔지가 있었던 곳인데 이곳 사정도 옌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둔지 건물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 자리에는 양곡창고가 비스듬하게 서 있다. 지대장이었던 이범석 장군의 가택지에는 현지 중국인이 새로 집을 지어버렸다.
당시 광복군 활동을 기억하는 루펑주씨(83)는 “사냥개를 유난히 사랑하던 이장군의 따뜻했던 모습이 어렴풋하나마 생각난다”면서 “광복군들이 돌아간 이후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역사는 이렇게 현지 주민들의 증언만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시안에는 세계2차대전 중 한국광복군 제2지대원들이 OSS(Office Strategic Service) 훈련을 받았던 장소가 있다. 이 훈련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사찰 미타고사(彌陀古寺) 근교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해 한결 찾기가 쉽다. 하지만 이곳 역시 광복군의 훈련 장소임을 알리는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마련돼 있지 않았다.
그나마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시안 내 시뻬이대학. 1941년 광복군의 주력부대로 활약했던 한국청년훈련반의 훈련장소였던 대학교 내에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한국청년훈련반에서 활동했던 선친을 둔 이형진씨(53)는 “옌안에서 밤새 기차를 타고 오는 내내 아버님의 훈련지를 방문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면서 “평생을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현장에 와보니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이 커진다”고 울먹였다.
한국 광복군 제3지대의 성립 장소가 있는 부양시내. 광복군 3지대원들이 ‘탈출기’라는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던 자리에 지금은 2층 규모의 디스코장이 들어서 있다. |
시안에서 기차로 하루 넘게 걸리는 부양(阜陽)엔 1945년 6월 당시 한국 광복군 제3지대의 성립 장소가 있다. 현재 이곳은 2층 규모의 디스코장으로 변모했다. 보기에도 요란한 DISCO란 영문글자가 크게 씌어진 이곳 역시 팻말이나 표지판 하나 없다. 시내 큰길가에 놓인 디스코장 앞을 무심히 지나치는 중국인들은 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탐방단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시안의 반대쪽에 있는 난징의 상황도 후손들의 가슴을 갑갑하게 했다. 의열단이 만든 군사정치학교가 훈련장으로 활용하던 천녕사는 폐가처럼 방치돼 있었다. 인근 채석장에서는 발파작업으로 끊임없이 폭파음이 들려왔고, 벽면에는 붉은 페인트로 ‘산불을 조심하라’는 문구가 흉물스럽게 적혀있었다. 낯선 타국에서 독립의 일념 하나로 젊음을 바친 조선청년들의 흔적이 난징의 산중턱에서 그렇게 또하나 스러져가고 있었다.
난징 시내에 위치한 민족혁명단의 거점지 호가화원은 아예 흔적조차 찾을수 없었다. 1935년 4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한 김원봉 계열의 학생들과 민족혁명단 인사들이 6년동안 거주했던 호가호원은 현재 빈민촌으로 변해있어 제대로 찾아왔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대학원생 고호씨(29)는 “남의 땅에서 항일운동을 해야했던 역사도 서러운데 이렇게 잊혀져 가는 중국 항일투쟁지가 많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고씨는 “지금은 중국까지 찾아오는 후손들이 있지만 2~3세대가 지나면 이곳이 후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분들 잊고 산 우리 부끄러웠습니다”
중국 장쑤성 쑤저우(蘇州)에서 허베이성 한단으로 향하는 K234 야간열차 안은 뜨거웠다. 60~70여년 전 머나먼 중국 땅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선조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중국을 방문한 20대 청년들이 벌이는 난상토론 때문이었다. 주제는 광복과 우리 현대사. 한국 근·현대사를 배울 기회가 적었던 ‘7차 교육과정세대’인 이 청년들은 알지 못했던 항일투사들의 간난고초와 폐허화된 항일무장투쟁지를 확인하고는 한결같이 가슴을 쳤다. 누구보다도 각별한 8·15 광복 61주년을 맞은 셈이다. 다음은 난상토론 요약.
박창원=“답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너무 모른다’는 사실이었어요. 우린 독립운동사에 대한 아웃라인(개념)도 전혀 없는 세대잖아요. 독립군과 조선의용대가 어떻게 다른지, 광복운동사에서 이념으로 인한 장벽이 있었는지조차 모른 채 항일무장투쟁지를 찾았다니…. 참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저뿐 아니라 답사에 참여한 50명 모두가 똑같은 심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김하원=“저 같은 7차 교육과정 세대는 (한국) 근·현대사를 선택과목으로 배웠어요. 과목을 선택한 소수의 학생을 제외하곤 독립운동사는커녕 광복 이후 근·현대사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고 봐야죠. 영어는 필수적으로 꼭 배우면서도 우리 역사를 배우는 일에는 너무 무심한데, 보통의 학생들은 이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거예요.”
이혜경=“사학을 공부하지만 전공으로 삼은 것은 고대사 분야입니다. 이번에 찾은 중국 내 (항일투쟁)지역들은 우리나라 학계에서조차 조명되지 않은 좌파계열 항일운동의 흔적이어서 더 생소한 것 같았어요.”
고호/연세대 대학원 사학전공 |
고호=“그 어떤 시대보다도 뒤죽박죽 얽힌 근·현대사 속에서 수많은 항일 단체들이 명멸했었잖아요. 그중 조선의용대 등 국내에선 잘 조명되지 않은 사회주의 계열 항일단체의 행적을 밟아보는 것은 색다른 일이었어요.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운동 연구는 일부 있지만 그것도 부족함이 많은데…. 지난 시간 속에 묻혀진 역사의 이면을 만나는 일은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직접 현장을 밟는 일은 평생 살면서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죠.”
이재선=“같이 오신 (광복투사)후손들을 만나면서도 감회가 새로웠어요. 우리 가까이에 그렇게 많은 독립운동 후손들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 이렇다 할 대접을 못 받고 그저 평범하게 살고 계시는 모습도 놀라웠고요. 그런 연유로 뭔가 울분에 차 있는 듯한 느낌도 받았죠. 바로 이게 우리 현대사의 현주소란 생각이 들었어요.”
박창원/성균관대 법학과 4학년 |
김하원=“전 독립운동가 3세대라서 감회가 더 커요. 친일파 후손들은 잘 살지만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죠. 전 살아오면서 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만큼 평범하게 살았죠. 한때는 시대의 변화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타협을 하셨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까지도 할 정도였으니까요.”
홍수민=“함께 오신 후손 중에 아버님이 투쟁하시던 장소에서 오열하시는 모습이 내내 기억될 것 같아요. ‘아버지를 미워했었는데 이젠 존경한다’며 생전에 자식의 도리를 다 못한 것을 후회하시고 계셨어요. 지켜보던 다른 친구들도 그분을 따라 많이 흐느꼈죠. 얼마나 많은 후손들이 가족끼리 갈등해야 했을까요.”
김하원/서울시립대 지적정보학과 1학년 |
고호=“옌안에서 표지판 하나 없이 초라하게 남겨진 투쟁지를 봤을 때 너무 씁쓸했어요. 중국 땅에 남겨진 우리 역사에 대해 정부는 정치·이념적인 문제로, 북한은 경제적인 문제로 손을 대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손을 쓰고 싶어도 손을 쓰지 못하는 거죠. 한국 사회가 이념의 세기였던 20세기에 머물러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더했습니다.”
이혜경/국민대 국사학과 2학년 |
박창원=“중국 친구에게 항일투쟁지를 간다고 이야기하니 거길 왜 가느냐고 묻더군요. 중국 사람들조차도 잘 모르는 외진 곳이라면서요. 그렇게 현지 사람들도, 우리도, 북녘 사람들도 모른 채 잊혀져가는 곳이 얼마나 많겠어요.”
이재선=“덜컹거리는 버스로 5시간을 넘게 달려가 안후이성 린촨에 갔을 때 허무하게도 광복군 제2징모처 터에는 그냥 중학교가 세워져 있었죠. 누가 증언하지 않으면 이젠 그 누구도 기억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잊혀져 가는 역사가 많을 거라 생각해요. 앞으로 역사와 철학을 전공하면서 현재의 우리에게 중요한 현대사를 객관적으로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많이 발굴하고 싶어요.”
이재선/서울대 인문계열1학년 |
이혜경=“역사가 배고픈 학문이라고 하죠. 하지만 그 때문에 역사가들마저 부족하다면 잊혀진 채 있는 수많은 역사를 눈 뜨고 잃어버려야 하지 않겠어요. 이번 답사를 계기로 내 열정에 불을 지피고 싶어요. 더 큰 열정을 갖고 공부하겠습니다.”
홍수민=“다음 학기에 독립운동사를 수강할 생각이에요. 역사를 공부한다는 학생이 현대사에 무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분야를 전공하는 학자도 미미하다는 사실이 자극이 되고요.”
김하원=“전 이번 경험으로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됐어요. 내 나이와 비슷하던 당시의 우리 할아버지들께서는 그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 아녜요. 나라면 그렇게 했을까, 그렇게 해야 할까…. 스스로에게 의문이 드는 만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고귀한 역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홍수민/안동대 역사학과 3학년 |
고호=“어떤 항일유적지보다도 린촨에서 장쑤성 쑤저우로 돌아오는 길목이 가장 인상깊었어요. 버스로 6~7시간이나 걸린다고 힘들어 했었는데 당시 우리 선조들은 차도 에어컨도 없이 4,000~5,000㎞를 걸어서 왔다는 생각을 하니 부끄러워지더군요. 가도 가도 산등성이 하나 보이지 않는 곳, 이 척박한 땅에서 싸우셨던 분들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고은·이호준 기자
첫댓글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부정부패로 일궈낸 재산 모두 국가환수...
항일투사와 그 후손들에게 삶의 질을 높혀주고 잊혀져간 항일투사 유적지 보존 등에 힘 쓸 터...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12월 대선에 투표를 잘 해야 할 겁니다
뉴라이트정부(친일파후손정치세력집단 이명박새누리당) 이런자들은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거머리들 입니다
대한민국이 살길은 이자들을 처단만이 해결이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