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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912년생으로 한 세기를 가로지른 이 프랑스 노신부의 이름 앞에는 '프랑스 최고의' 혹은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공동체 '엠마우스'의 창시자이며 프랑스에서 7번이나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선정된 그에 대한 애정의 표시이다.
<단순한 기쁨>은 이 아베 피에르 신부의 자전적 회고가 담긴 에세이집이다. 평범한 소년에서 신부로, 레지스탕스로, 국회의원으로, 엠마우스의 아버지로 자리바꿈해온 일생을 회고하며 '더불어 사는 기쁨'을 고백하는 평안한 목소리에는 가장 회의적인 사람조차도 발목을 잡힐 것 같다.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나는 세 가지 절대적 필요를 느낀다.
먼저, 지난일과 근래의 일들을 통틀어 내 삶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를 고백할 필요를 느낀다. 내게 주어졋던 그 모든 것에 감사할 필요 또한 느낀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면서 수도 없이 화내고 투쟁하고 논쟁을 벌였던 늙은이가 화해와 평화를 점점더 강렬하게 갈구한다는 사실을 감출 이유가 어디 있으랴. (...)
생에 마지막 날에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우리가 용서하듯 우리를 용서하소서’ 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책머리 글에 올린 신부님의 염원이 우리의 삶의 가치를 좀 더 확고히 다지게 한다.
쫓기는 유대인에게 신발을 벗어주고 맨발로 눈길을 걸어오는 사람, 누군가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레지스탕스에 참가한 사람, 동정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나눔을 통해 '살아야 할 이유'을 안겨주는 사람. 인간적이면서도 강한 그 모습에는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표현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상식적이어서 종교를 가리지 않는다. 그는 가톨릭 사제이지만, 피임을 부정하는 '비현실적인' 권고를 따끔하게 쏘아붙인다. 종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처입은 독수리들', 인간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피에르 신부는 사르트르와 까뮈 등 '절망의 교사들'과는 정반대의 인생관을 설파한다. 그는 '부조리와 신비' 중에서 삶을 '단순한 기쁨'으로 채워주는 것은 신비라고 말한다. 삶은 어렵고 사람들은 악하기도 하지만, 그 속에 희망이 숨겨져 있다는 신비한 이치를 굳게 믿는 것 말이다.
목차
-책머리에
[1] 상처입은 독수리들
1. 눈물의 기쁨
2. 엠마우스
3. 가난한 자들의 복음
4. 열광적인 환멸5. 희망
6. 부조리와 신비
[2]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확신
1. 타인과 공감하는 자, 홀로 만족하는 자
2. 가난과 행복
3. 세 가지 확신
4. 사랑의 세 가지 얼굴
5. 말씀은 사람이 되고
6. 자유
7. 깨어나야 한다
8. 진리의 빛
[3] 만남을 향하여
1.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
2. 인류형제들
3. 새벽의 만남
4. 고통의 힘
5. 애타게 기다리던 만남
6. 길은 계속된다
-옮긴이의 말
서평
프랑스에서는 해마다 ‘가장 좋아하는 인물’을 선정한다. 그리고 이 설문조사에서 8년 동안 무려 일곱 차례나 1위에 오른 인물이 있다.
한 세기를 가로지른 노사제 피에르 신부. 연예인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기경이나 교황도 아닌 그냥 보통의 성직자에 불과한 그에게 사람들은 왜 그토록 사랑과 존경을 표하는 걸까? 그 이유로는 피에르 신부의 자전적 기록인《단순한 기쁨》(제:Memoire d'un croyant)에 그 답이 담겨 있다. 《단순한 기쁨》은 현재 전세계 44개국 350여 곳(지금은 더욱 늘어났겠지만)에서 활동하고 있는 빈민구호 공동체 의 창시자인 피에르 신부의 자전적 기록이자, ‘노사제가 우리들에게 털어놓는 고백성사’이다.
어느날 절망에 빠진 한 사람이 그에게 삶의 이유를 물어온다. 피에르 신부는 이 물음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으며, 삶의 의미를 묻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대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책 속에서 밝히고 있다.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피에르 신부는 한평생의 실천적인 덕목들을 일러준다.
《단순한 기쁨》에서 피에르 신부는 솔직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얘기함과 동시에, ‘더불어 사는 기쁨’ ‘나눔의 철학’ ‘실천하는 사랑’ 등, 이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귐과 섦김, 나눔의 유기적이고 핵심적인 메시지들을 그 이야기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그의 인생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삶의 ‘기쁨’은 결코 멀리 있거나 거창한 것이 아님을, 목이 마를 때 물 한 모금 속에서도 무한한 기쁨을 맛보게 되듯이, 이웃과 더불어 베풀고 나누고 작은 것에 만족하는 데서 오는 것이며, 타인이 바로 내 삶의 ‘기쁨’이라는 단순한 진리와 깨달음을 얻기에 이른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실제로 경험하거나 보고 들은 재미있고 감동적인 일화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어, 그의 삶과 메시지는 우리 곁에 한층 친근하게 다가선다.
1부 에서는 삶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어떻게 해서 신부 자신이 부조리를 등지고 신비를 선택했으며, 절망을 등지고 희망을 선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부 에서는 지식으론 알 수 없는 하느님과 복음서 속에 드러난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3부 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모색과 비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피에르 신부 Abbe Pierre
그는 어떻게 신부가 되었나?
프랑스 리옹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그 많은 유산과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서 성직자의 길을 선택한다. 그가 수도사가 되기로 마음먹기까지는 신앙이 돈독한 집안환경도 환경이지만 그의 마음 밑자락에 깔려 있던 종교인으로서의 성정과 두 번의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열네 살, 성실한 보이스카웃 단원이었던 그에게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인 는 무엇보다 유년시절 피에르 신부의 면면을 적절히 말해주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열네 살짜리 남자아이들이 이 이름을 내게 골라준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앞으로 나는 집을 짓기 위해 평생을 바쳐 싸우게 될 터인데, 해리는 집을 짓는 동물이고, 명상은 나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니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로마로 수학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들른 에서 ‘한 수도사로부터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에 대해 듣고 난 뒤’ 결심을 굳힌다.
그는 그때부터 ‘맨발로 지내며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고, 매일 밤 자정에 깨어나 한 시간 가량 시편을 암송하고 다시 한 시간 동안 어둠 속에서 기도드리는’ 수도사로서의 생활에 전념하며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남다른 이력, 레지스탕스와 국회의원
피에르 신부의 이력은 남다르다. 그중에서도 사제라는 신분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투사였다는 점이 이채롭게 다가온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믿고 내 가족, 내 나라, 내 민족을 넘어서 인류는 한 형제라고 생각한 그를 떠올려볼 때, 배타적 민족주의와 인종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싸움을 그냥 지나쳤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답지 못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1941년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기 시작한 피에르 신부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레지스탕스에 가담하면서 내 삶과 신앙에 새로운 한 장이 열리게 된다. 솔직히 말하건대 그 선택에는 정치적 동기라곤 없었다.’
쫓기는 유대인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그는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넘고, 헌 신발을 신은 유대인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어주고는 맨발로 눈길을 걸어 돌아오고, 동료의 밀고로 독일군에게 체포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 등,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시작으로 그는 지금까지 궁글려왔던 자신의 사유와 말을 차근차근 행동과 일치시켜나가기 시작한다.
또 하나의 독특한 이력인 국회의원 활동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이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 부조리와 불합리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정치적인 힘에 호소했다. ‘나는 국회의원으로 지내면서 아주 단순한 사실 한 가지를 터득했다. 정치인들의 할 일은 근본적으로 누구에게서 돈은 얻어내어 재분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엠마우스, 더불어 사는 기쁨
전쟁 후 국회의원 활동으로 뇌이-플레장스에 머물던 피에르 신부는 어느날 자살을 기도한 사람과 얘기를 나누게 된다. 신부는 섣부른 위로와 도움 대신 자신의 집에 머물면서 집짓는 일을 도와달라고 청한다.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되찾은 그는 후에 이렇게 말한다.
“신부님께서 제게 돈이든 집이든 일이든 그저 베푸셨더라면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 ‘상처입은 독수리’라는 생각 아래 피에르 신부는 자신이 살던 집을 개조해 그곳에 집 없는 사람들과 부랑자들, 그리고 그 당시 넘쳐나던 전쟁고아들을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엠마우스’라고 명명한다.
현재 44개국 350여 곳으로 확산되어 있는 ‘엠마우스’는 단순한 자선단체가 아니다. 그곳에는 세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우리가 먹을 것은 우리가 노동해서 번다.
둘째, 우리는 모든 걸 나눠가진다.
셋째, 멸시받고 소외된 주변인들인 우리는 베푸는 사람이 되는 사치를 누리기 위해 더 많은 노동을 한다.
즉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곳을 찾은 구성원들은 조건 없이 도움만을 받기보다는 땀 흘려 노동을 함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하고, 사회로부터 받은 도움을 다시 사회로 환원할 줄 아는 존재로 거듭나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당당하게 말한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우리도 마음을 담아 나누고 구원을 베풀 수 있는데,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소유한 여러분이 그런 일을 못할 게 뭐 있습니까.”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 피에르 신부
공동체 형제들과 ‘엠마우스’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며 여전히 집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던 피에르 신부는, 1954년 방송국과 텔레비전을 찾아가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실상을 호소했고, 이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얘기는 1989년에 세자르영화상을 수상한 영화 (un Hiver)에서 자세하게 다뤄졌다. 그는 외부적인 사안뿐만 아니라, 자기자신 혹은 교회와 성직자가 범한 오류도 과감히 질타하는가 하면, 법을 어기고서라도 집 없는 자들에게 집을 지어준다. 그러나 그가 목소리 높여 비판하고, 논쟁을 만드는 것은 싸움을 좋아해서도, 어떤 대가를 바라서도 아니다.
그가 약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세상의 저열함에 진정으로 분개하고, 온갖 부정과 부패와 불의와 불평등에 무감각해져 있는 우리들의 근시안을 깨우쳐주려는 것은 오직 하나,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몸소 실천으로 옮겼기에 그의 메시지들이 아무리 원론적이고, 평범한 것들일지라도 결코 공허하거나 평범하게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타인은 지옥이다, 라고 사르트르는 썼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반대라고 확신한다. 타인들과 단절된 자기 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한다. ‘유일한 신성모독은 사랑에 대한 모독뿐이다.’
“이 책에서 피에르 신부는 예상대로(?) 믿음, 기도, 용서, 고통, 그리고 죽음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을 어쩌면 이렇게도 산뜻하고 친근하게 하는지. (……) 그는 한 인간으로서 삶의 핵심에 대해서도 말한다.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들―자유, 행복, 사랑, 그리고 희망, 이런 것을 얻기 위해 평생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를 깊은 목소리로 전해준다. 삶의 ‘해답’이 아니라 ‘공식’을 깨닫게 해주는데, 이 공식들을 내 삶에 대입해보고는 나도 잘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들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피에르 신부를 좋아하고 신뢰하는 이유는 그가 ‘행동파’이기 때문이다.”
―한비야(오지 여행가, 긴급구호활동가)
책속으로
하느님은 어쨌든 사랑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어쨌든 사랑받는다. 인간에게는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이것이 내 믿음이 근본 토대들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많은 종교인들도 이 신념들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하신 비밀스런 말씀인 계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보다 깊이 탐구하게끔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 후 몇 세기 동안 신학자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가장 근원적인 신비에 우리가 좀더 가깡 다가갈 수 있도록 하려고 애를 썼다. 그 신비란 삼위일체의 신비와 강생(絳生)의 신비, 그리고 구원의 신비이다.
신앙인으로서 나는 이 신비의 미광(微光) 속에서 내 삶을 헤쳐 왔다고 할 수 있다.
내 믿음을 되살아나게 한 이 '나는 있는 자 그로다'라는 말을 발견한 이후에도 나는 이 '나는 있는 자 그로다'에는 '사랑'이라는 말 이외의 그 무엇도 덧붙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랑이다'라는 말이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점차적으로 신비를 발견해나갔다. 흔히 이성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지며 수긍하기 힘든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 pp. 109-110
인간은 무한자를, 영원을, 절대자를 향한 열망을 품고서 유한한 세계속에, 시간속에, 상대적인 세계속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해 존재론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이다. 이점을 의식하지 못할 때 인간은 무엇보다 근원적인 열망들을 소유의 영역에다 쏟는다. 끊임없이 물질적 재산과 즉각적인 쾌락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를 채워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원히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가 진정한 재산의 의미를 잘못알고 있기 때문이다. --- p.54---p.55
온갖 잔혹한 행위들이 우리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지만 그럼에도 내 신앙생활의 핵심은 세 가지 확신에 토대를 두고 있다. 내 신앙의 첫 번째 토대는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확신이다. 두 번째 토대는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그리고 세 번째 토대는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이유라는 확신이다. --- p.101
사실 우리는 모두가 같은 목표, 즉 행복을 추구한다. 진짜 문제는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이다. 모든 인간은 그가 어떤 시대, 어떤 조건, 어떤 문화속에서 생활하건 두 가지 길 가운데 선택하게 마련이다. 타인들 없이 행복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들과 더불어 행복할 것인가. 혼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과 공감할 것인가. 매일 아침 새롭게 다짐해야 할 이 선택은 그 무엇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그 선택이 우리의 삶의 실체를 결정짓고 우리를 만든다. --- p.181
고통받는 자들에게 충고를 하려 들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들에게 멋진 설교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다만 애정어리고 걱정어린 몸짓으로 그 고통에 함께 함으로써 우리가 곁에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그런 조심성, 그런 신중함을 갖도록 하자! --- p.72
첫댓글 피에르신부님 하면 먼저 엠마우스가 떠오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