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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6세(1537. 10. 12.출생, 1547. 1. 28. 즉위 – 1553.7. 6 사망)는 아버지로부터 선천성 매독이 유전되어 어릴 때부터 병약했다. 그러나 남달리 지성이 높고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에 유창했다고 한다. 부왕이 죽자 그는 1547년 2월 9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의 맏외숙인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무어가 스스로 호국경이 되어 왕국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다.
헨리 8세는 생전에 에드워드를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와 결혼시켜 스코트랜드의 실권까지 장악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서머싯 공작은 이를 계승하여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메리를 데려가려 했지만 실패했다. 1549년 메리의 모후이자 섭정 왕대비인 메리 드 기즈가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시키기 위해 프랑스에 보냈던 것이다.
1552년 서머싯 공작이 실각되고,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 리가 호국경이 되어 실권을 잡았다. 1553년 에드워드의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는 왕의 이복 누나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왕위 계승에서 배제하고자 자신의 아들인 길포드 더들리를 에드워드의 오촌 조카인 제인 그레이와 결혼시켰다. 그리고 에드워드로 하여금 제인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도록 강요했다.
에드워드 6세는 어리고 병약했으며 통치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번번이 이복 누나 메리로부터 왕위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재위 6년 만에 병사했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는 그를 모델로 한 것이다.
제인 그레이(1537 출생, 1553년 7월 10일부터 19일까지 재위, 1554년 2. 12. 사망)의 왕위 계승에 귀족들과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메리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한다. 제인은 런던탑에 갇혔다가 이듬해 열여섯의 나이로 처형되어 ‘9일 여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노섬벌랜드 공작은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다. 부모의 헛된 욕망의 희생양이 되어 어린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제인은 내성적이고 학구적인 성격으로, 야심이 많은 부모(아버지는 도셋 후작 헨리 그레이, 어머니는 헨리 8세의 생질녀인 프란세스 브렌던)로부터 그리 사랑을 받지 못했다. 공부와 독서에 힘써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구사하고, 종교 개혁 운동에도 영향을 받은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다.
1546년 제인은 헨리 8세의 마지막 왕비였던 캐서린 파의 집에서 살게 된다. 캐서린은 모성애가 강한 여성으로 제인과 엘리자베스에게 애정을 쏟았다. 그러나 1948년 왕의 사후 토머스 시무어와 결혼했던 캐서린 파가 첫아이를 낳고 산욕열로 숨을 거두면서 제인의 안락한 생활도 끝났다.
욕심 많은 후작 부부는 토마스 시무어의 도움으로 제인을 에드워드 6세와 결혼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시무어가 에드워드를 납치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함으로써 무산되기도 했다. 요행히 그레이 가문은 화를 면했으나 어머니는 딸을 왕비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버리지 않았다.
1553년 그들은 제인을 존 더들리의 아들 길포드와 강제적으로 결혼시켰다. 그 해 7월 6일 에드워드가 죽자 존 더들리와 그레이 후작 부부는 아무 욕심이 없는 가엾은 제인을 왕위에 올렸다. 메리 1세는 존 더들리를 피해 서포크 지방의 프레밍턴 성으로 몸을 숨겼다.
결국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메리가 입성하자 그레이 후작 부부는 딸 제인을 버려두고 런던에서 도망쳤다. 제인과 남편 길포드는 반역죄로 런던탑에 유폐되었고, 존 더들리는 8월 21일 처형당했다.
제인의 무고함을 잘 알고 있던 메리 1세는 그녀의 목숨을 구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1554년 1월 토머스 와이어트를 중심으로 성공회 신자들이 일으킨 반란에 제인의 아버지 헨리 그레이가 가담하면서, 제인의 처지가 위태로워졌다. 메리 1세는 마지막 기회를 주고자 제인에게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제인은 이를 거절했고, 남편과 함께 런던탑에서 참수되었다.
헨리 그레이도 처형당했다. 그러나 어머니 브랜던은 딸의 죽음을 막으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고, 남편이 죽은지 겨우 3주만에 자신의 시종 아드리안 스토크와 결혼했고, 여왕의 사면을 받았다.
메리 1세(본명 메리 튜더, 1516. 2. 18. 출생, 1553. 7. 19. 즉위 – 1558. 11. 17. 사망). 어머니의 영향으로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재위 기간 동안 아버지의 종교 개혁을 뒤엎어 로마 카톨릭 복고 정책을 실시했다.
그 과정에서 휴 레티머 대주교,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 등 성공회 성직자들과 개신교 신자들을 체포, 처형했는데 그 수가 300여 명에 달했으므로 ‘블러디 메리’(칵테일 이름의 유래. 보드카와 토마토 주스, 타바스코 소스, 검은 후추, 레몬이나 샐러리 등을 재료로 만든다.)란 별명이 붙었다. 또 마틴 루터, 존 칼뱅, 에라스무스 등의 이름으로 쓰여진 책들, 카톨릭에 배치되는 모든 책을 영국에 반입하는 경우 엄벌에 처할 것을 명했다. 이런 독선적인 친 카톨릭 정책은 개신교인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에스파냐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메리는 자신의 결혼 상대로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아들인 펠리페 2세를 선택했다. 이에 반대하는 신료들도 많았고, 켄트에서 토머스 와이어트 등이 봉기를 일으킬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었지만, 봉기를 진압하고 1544년 7월 20일 결혼을 강행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 38세, 펠리페는 27세였다.
1556년 펠리페는 본국으로 돌아가 왕위에 올랐고, 1년 반 뒤 런던으로 돌아왔지만 겨우 3개월 머물다가 다시 돌아갔다. 결국 잉글란드는 프랑스와 에스파냐 간의 전쟁에 휘말려 프랑스에 패함으로써 유럽 대륙에 가지고 있던 마지막 영토인 칼레를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
그녀는 난소 종양으로 인해 간절히 원하던 아이를 낳지 못했다. 또 어머니 캐서린을 내쫓은 앤 블린의 딸인 엘리자베스를 평생 미워했다. 그럼에도 1558년 11월 17일 세인트 제임스 궁에서 난소암으로 사망하기 직전 자신의 후계자로 여동생 엘리자베스를 지명한다.
에드워드 6세와 메리 1세가 재위한 10여 년을 역사가들은 잉글랜드 역사 상 가장 황폐했던 시기로 평가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1533. 9. 7. 출생, 1558. 11. 17. 즉위, - 1603. 3. 24. 사망)는 44년 간 잉글랜드 및 아일랜드 국왕이었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튜더.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럽던 16세기 당시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잉글랜드를 세계 최대 제국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하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처녀 여왕’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그녀는 ‘짐은 국가와 결혼하였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녀의 독신주의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계모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 앤 블린이 간통죄로 고발되자 그녀는 생존 자체가 위험했다. 어머니가 죽고, 그녀는 공주의 신분이 박탈되어 사생아로 남아 왕위 계승에서도 제외되었다. 늘 불안하고 위험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복 언니 메리가 늘 그녀를 감시하고 견제했으며 부왕마저 그녀를 홀대했다. 그러다 부왕의 마지막 왕비였던 캐서린 파가 화해를 주선하여 공주의 신분을 회복하였다.
아버지가 죽고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였다. 캐서린 파는 헨리가 죽은 뒤 토마스 시모어와 재혼하고 엘리자베스를 가족으로 받아주었다. 그러나 시모어와 엘리자베스가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본 캐서린은 시모어와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엘리자베스도 쫓아낸다.
이후 메리 1세의 성공회에 대한 탄압을 피해 카톨릭 교도로 위장하였고, 때로는 죄수로 몰려 런던탑에 갇히고, 고문과 감시를 당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밝고 활기찬 엘리자베스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메리 1세가 병사하자 엘리자베스가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녀는 추밀원과 균형적 관계를 유지했다. 전제적이지만 신중한 군주와 충성스럽지만 견제하는 추밀원 사이에 균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업적은 종교 분쟁을 지혜롭게 해소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종교적으로 성공회 신자였지만,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었고 종교적 극단성을 극히 혐오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로마 카톨릭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였고, 성공회를 다시 영국 국교로 확립하였다.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 사이에서 극단을 피하는 중용 노선을 걸음으로써 혼란을 바로잡았다.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여 농촌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였지만, 양을 키우기 위해 쫓겨난 농민들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구빈법으로 불리는 사회복지 정책을 제정하였다. 노동력이 있는 사람은 공공사업을 마련하여 일하게 하고, 노동력이 없는 사람은 구빈세로 마련한 사회복지 비용으로 돌보는 것이다. 그녀는 1년에 두 번 순시를 하면서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대외적으로는 국력이 에스파냐, 프랑스에 비해 역부족인 상황에서 겉으로는 세력 균형 정책을 펴면서도, 뒤에서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해적을 지원하여 에스파냐를 견제하였다. 개신교 국가인 에스파냐령 네델란드의 독립전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에스파냐와 잉글랜드는 숙명적인 라이벌이 되었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카톨릭교도였던 메리 스튜어트가 장로교를 믿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어린 아들 제임스에게 왕위를 넘기고,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그후 20 년 동안 메리는 엘리자베스를 제거하고 왕위를 차지할 음모를 꾸미다가 1587년 배빙턴 사건(엘리자베스의 암살 음모)의 전모가 드러나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엘리자베스를 견제하는 데 필요한 메리가 처형되자 에스파냐는 잉글랜드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588년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를 출동시켜 잉글랜드를 제압하여 했다.
전쟁은 드레이크의 해적 행위로 인해 촉발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오랜 숙원이 있었다. 헨리 8세로부터 시작된 종교적 갈등으로 스페인이 아일랜드의 카톨릭교도들의 반란을 지원했었고, 포르투갈 왕위를 둘러싼 전쟁에서는 펠리페 2세의 경쟁자를 잉글랜드가 지원했다. 또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독립 세력을 영국이 지원하기도 했다.
당시 유럽 최강의 전력을 가진 스페인 육군의 지휘관은 명장 파르마 공작 알렉산드로 파르네세였고, 무적함대의 지휘관은 레판토 해전(지중해 제해권을 놓고 벌어진 스페인과 오스만 투르크 사이의 해전)의 영웅인 산타크루즈 후작 돈 알바로 데 바잔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우세를 자만한 펠리페 2세의 영국 공격 계획은 위험하고 신중하지 못한 작전이었다. 펠리페 2세는 승리를 과신한 나머지 최고의 기밀을 유지해야 할 작전 계획서를 출간해 팔기까지 했다. 본토에서 출발한 함대가 적의 주력을 피해 네덜란드 쪽에 주둔한 스페인 육군 병사들을 만나 싣고 단숨에 런던으로 상륙시켜 잉글랜드를 정벌한다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지상군을 만나 싣고 가야할 칼레 항구는 수심이 낮아 대형 선박이 안전하게 정박할 시설이 없었고, 소형 선박의 게릴라전에 취약했다. 네덜란드 독립 세력의 도발로 지상군의 이동도 용이하지 못해 약속된 시점에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함대 총사령관 산타크루즈 후작이 갑자기 병사하였고, 후임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도 현명한 지휘관이었지만 부하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할 수는 없었다. 상륙 작전이 성공한다 해도 당시 1만 6천 명의 병력만으로 잉글랜드의 정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영국 함대는 전력의 열세를 의식하여 전면적 백병전을 피하고, 소규모 게릴라전과 화공 등 기동성 있고 교묘한 작전을 구사헸고(칼레 해전), 이에 고전하던 무적함대는 폭풍우를 만나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전쟁 이후 에스파냐의 지위는 크게 흔들렸고, 레판토 해전 이후 승승장구하던 스페인 함대의 잉글랜드 침공은 좌절된다.
이후 잉글랜드는 국민들의 정신적 결속과 일체감을 형성하고, 국민 문학의 황금기가 전개되었다. 그들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며 자랑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론 철학이 이 시대의 대표적 성과였다. 대외적으로는 동인도 회사를 창설하고, 스페인이 지배하던 인도를 비록하여 필리핀, 북미 지역에 그녀의 별명을 딴 버지니아라는 이름으로 식민지를 개척하여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왕 헨리로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그토록 설움을 받았던 엘리자베스가 왕국의 전성기를 꽃피워낸 것이다.
흔히 칼레 해전으로 무적함대가 궤멸되어 잉글랜드가 대서양의 제해권을 쥐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이후로도 전쟁은 계속된다. 잉글랜드는 이듬해인 1589년 ‘잉글리쉬 아르마다’라 불리는 대규모 원정군을 스페인 갈라시아의 라 코루나 항에 보내 남은 스페인 함대를 파멸시키려 했으나 1만 2천 명의 병력을 잃고 실패한다.
한편 스페인은 프랑스와도 전쟁을 벌였고, 잉글랜드는 네덜란드, 프랑스와 1596년 동맹을 맺는다. 스페인과 잉글랜드는 모두 전쟁으로 인한 재정 문제가 가중되어 펠리페 2세와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한 이후인 1604년 평화 협정(런던 조약)을 맺는다. 잉글랜드는 스페인의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나고 종교적 자유를 얻었고, 스페인은 잉글랜드 해협과 항구의 개방, 잉글랜드의 사략질 및 네덜란드 독립군에 대한 지원 중단이란 성과를 얻었다. 이후 1625년까지 평화를 유지한다.
스페인은 통념과 달리 영국과의 전쟁으로 일시에 몰락한 것은 아니고, 한동안 군사 강국으로 남았지만, 30년 전쟁 등을 거치며 네덜란드를 잃어버리고 차츰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반면 잉글랜드는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동인도 회사와 주식 회사를 개발하여 상업을 발전시키고, 해양 개척에 힘써 1607년 북미에 제임스타운을 세우는 등 해양 강국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그래서 대영제국의 시발점을 이 시기(1607년)로 꼽는다.
이후 한동안 해양 강국으로 위세를 떨친 것은 독립한 네덜란드였고, 영국이 바다의 패권을 공고히 갖게 된 것은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영국이 최종 승리한 18세기부터였다.
엘리자베스 1세를 도와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 중 공교롭게 이순신 장군과 생몰 연대가 비슷한 프랜시스 드레이크(1540 – 1596. 1. 27.)의 이력이 참으로 흥미롭다. 그는 마젤란에 이어 세계 두 번째, 영국인으로는 최초로 세계 일주를 완수한 모험가이면서, 해적이자, 영국 해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사촌 존 호킨스와 함께 1566 – 67년 카라브해를 탐험했고, 대담하게도 스페인령 카디즈의 도시들을 공격하고, 스페인 화물선을 습격해 재물을 약탈하고 스페인 해군의 추적을 교묘히 따돌리면서 그들로부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별명 엘 드라코<용>)
1570년부터는 원정대를 이끌고 스페인 대해로 나아가 다음해까지 두 차례 습격, 약탈한 재물의 일부를 왕실에 바치는 사략 활동을 펼쳤다. 1980년 세계 일주에 성공하여 명성을 드높였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여왕에게 그의 처벌을 요구했으나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그를 왕궁으로 불러 기사 작위를 내리고 함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카디프 해전을 비롯해 수차례 스페인 함대와 항구의 보급물자들에 대한 기습 작전을 성공시켜 무적함대를 괴롭혔다.
1572년 5월 73 명의 선원과 작은 배 2척으로 출항해 대서양을 지나 도미니카 섬에 정박하고, 7월 중순 파나마로 향하여 남미에서 채굴한 금, 은을 실은 티에라 피르메 보물선단을 약탈했다.
이어 도망쳐나온 스페인 흑인 노예들을 도와주고 그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하여 1573년 1월 ‘은색 대열’의 14 마리 노새 행렬과 경비병을 습격하고, 놈브레 데 디오스로 향하다가 프랑스 함대와 손잡고 공격을 감행하여 약탈에 성공한다. 모두 2만 개가 넘는 금은 덩이를 획득하여 엄청난 부와 영광을 안고 8월 잉글랜드로 귀환한다.
1577년 세계 일주 모험에 나서 대서양을 지나 브라질을 지나다가 폭풍으로 동행한 배 4 척을 잃고 기함인 골든 하인드 호만 마젤란 해협을 지나 태평양으로 나왔다. 이 과정에 남미 최남단 혼곶과 드레이크 해협(남미 대륙 남단과 남극 사이의 해협으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 험악한 풍랑으로 뱃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을 발견하기도 했다.
칠레와 페루 연안을 북상하며 에스파냐 식민지와 갤리온 선박을 공격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태평양을 건넜다. 자바에 도달해서 인도양을 횡단하고 희망봉을 돌아 1580년 9월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이때 그는 노획한 보물 대부분인 30만 파운드 가량의 재화(왕실의 1년 국고 수입보다 많은 액수)를 여왕에게 바쳤고, 여왕은 에스파냐의 처벌 요구를 묵살하고 그에게 남작의 작위와 훈장을 수여하고 명예 해군 제독에 임명했다. 이것이 잉글랜드와 에스파냐 사이의 전쟁을 촉발시킨 표면적 이유다.
그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많은 전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천생 해적의 본능으로 인해 작전 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그는 함대의 야간 기동 중 해적 특유의 감으로 많은 금화를 실은 배를 발견하여 이를 나포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함대를 이탈하여 단독으로 이 배를 추격, 나포하여 많은 금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 함대는 지휘관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칼레 화공 이후에 총지휘를 맡은 노팅엄 백작 찰스 하워드 제독은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백병전을 감행하거나 좌초한 배들의 약탈에 열중하는 드레이크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해임시켰다.
드레이크는 무적함대와의 결전 이후 다시 6척의 함대를 이끌고 카리브해로 복귀하여 멕시코 만에서 베라크루즈로 향하는 스페인 제국의 황금 수송선단을 공격해 엄청난 금,은을 획득했다. 그러나 와중에 4척의 배와 많은 선원을 잃고 귀환 도중 큰 곤욕을 치른다. 또 다시 키리브해로 복귀하여 1595년 파나마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596년 이질로 배 위에서 사망한다. 그의 시신은 철제 관에 넣어져 수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