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 목 : “장자권!(12) : 장자여! 눈물의 능력을 가지라!”
+ 본 문 : 마가복음 14장 66절 - 72절 (신약 82쪽)
66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아멘!
서로 축복 / “나는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의 근원입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복의 근원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장자 – 하나님의 자녀가 가지는 권세를 회복하고, 그 권세를 누리며 살아갑시다.
지난 주일에 여러분에게 “장자여! 십자가 능력을 받으라!” 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저를 따라서 선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장자인 나는 / 십자가 능력을 받으며 / 살아가리라! / 아멘!”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장자여! 눈물의 능력을 가지라!” 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저를 따라서 선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장자인 나는 / 눈물의 능력을 가지고 / 살아가리라! / 아멘!”
오늘 본문 72절 말씀입니다. 다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아멘!
똑같은 말씀인데 마태복음 26장 75절에서는 더 리얼하게 표현합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이 장면을 잘 보여주는 음악이 있습니다. 고난주간이면 한번쯤 듣게 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입니다.
특히 사이먼 래틀이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 마크 패드모어의 애처롭고,
처절한 목소리는 2천 년 전 예수님을 부인한 사실을 회개한 베드로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아 마태수난곡의 가사를 되새기며,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을 배반했던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가롯 유디와 베드로입니다.
가롯 유다는 은 30을 받고, 자신의 스승으로 모셨던 예수님을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시몬 베드로도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했고, 심지어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두 사람이 다 큰 죄악을 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사람의 끝은 전혀 달랐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가롯 유다는 후회했으나, 목을 매달아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닭이 울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심히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 초대교회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요? 실수와 실패는 똑같았는데 무엇이 각자의 끝을 이처럼 다르게 만들었을까요?
이렇게 실수와 실패를 밑거름으로 삼이 다시 회복하느냐? 아니면 실수의 구렁텅이 속에 멈춰 서느냐?
하는 차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결정적인 차이는 눈물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통곡했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자신이 한 짓에 대해서 화가 나서 울분은 터뜨렸지만, 통곡하지는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했습니다. 자기 분노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눈물이 메마른 인생! 눈물이 없는 사람! 그 결국은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만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흘리는 우리의 눈물은, 나 자신을 벌거벗는 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런 내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껏 저 깊은 마음에서 끌어오르는 울음을 토해본 적이 있습니까?
독일 안과협회의 보고에 의하면, 여자는 일 년에 30번에서 64번 정도 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는 일 년에 6번에서 17번 정도 운다고 합니다. 여자에 비해 5분의 1밖에 울지를 않습니다.
횟수뿐만이 아니라, 한 번 울 때의 시간도 차이가 납니다. 남자는 한 번 울 때 3분 정도 운답니다.
그런데 여자는 한 번 울면 평균 약 6분 정도 운다고 합니다. 또 한 번 울 때, 남자가 통곡을 하는 경우는,
약 6%에 불과한데, 여자는 약 65%가 통곡하며 운다고 합니다. 열 배의 차이가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래 남자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눈물에 인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울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남자는 강해야 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울면 안 된다.” 는 식으로 강요되어 왔습니다.
심지어 남자가 울면 “그걸 떼서 여자 아이한테 주어버려라. 개한테 주어버려라.” 고까지 했습니다.
아버지가 울면, 남편이 울면, 자식들도, 아내도,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웃긴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혹 남자가 울면 다 이상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그리고 심지어 쪼잔한 놈이라고 놀려댑니다.
그래서 남자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남자는 무조건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여자들이 감정을 억눌러야 착한여자가 된다는 콤플렉스가 있고,
남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억누르는 것이 강한 남자가 된다는 이상한 컴플렉스가 작용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울어야 할 일이 있어도 울음을 참습니다. 통곡해야 할 일이 있어도 꺽꺽거리며 참아 냅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수명이 짧은 이유 중에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하는데,
통곡해야 할 때에 통곡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마음과 몸에 독소가 쌓여 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울어야 할 일이 있을 때 우십시오. 통곡해야 할 일이 있을 때 통곡하십시오.
특별히 우리 남자 성도들이여! 울지 않는 것이 강한 것이 아닙니다. 울어야 할 때 울어야 오래 삽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흘리는 우리의 눈물은, 나 자신을 벌거벗는 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런 내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 오르는 울음을 토해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어 대제사장의 뜰 안에 불려왔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의 여종이 베드로를 보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가 깜짝 놀라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늘 본문 68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그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며 앞뜰로 피하였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보더니,
“이 사람은 그 도당 – 예수의 도당이이라.” 고 말하자, 베드로가 이번에도 극구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러 사람들이 베드로를 보더니 ‘너도 길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라.’ 고,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하면서까지 이렇게 주장합니다. 오늘 본문 71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캐릭터는 매우 특별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믿고 데리고 다녔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앞에서 가장 많은 실수를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때론 용기 있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지만, 비겁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가도 나 베드로는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죽더라도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이렇게 큰소리쳤던 베드로였고, 예수님이 한 밤중에 물 위로 걸어오실 때 다른 제자들은 다 두려워했으나,
“주님! 저도 물위를 걷게 해주세요.” 라고 하자, 예수님이 오라하시니 바다로 뛰어들어 걸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실 때는 분노하며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내리친 것도 베드로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검과 몽치를 든 사람들이 다가올 때에, 날 살려라 다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뒤를 밟아 대제사장의 집까지 따라왔다가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저를 포함한 여러분 가운데 이런 베드로를 보면서, 과연 정죄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여러분 가운데 나는 베드로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여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분 계십니까?
여러분은 혹 이런 베드로를 정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솔직하게 자격도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저는 분명히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갈 용기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일에 실패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위대한 제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통곡하며 흘린 눈물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왜 그렇게 슬피 울었을까요? 베드로가 “나는 예수를 모른다.” 고 저주하며 부인했을 때에,
누가복음 22장 61절 말씀에 기록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아멘!
그렇게 돌이켜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길과 마주쳤을 때, 시몬 베드로!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그 예수님의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또 자신이 예수님께 맹세하며,
“예수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라고 했던 결단의 순간도 기억이 나면서, 지금 자신의 행동을 봅니다.
“내가 왜 그랬지? 재판을 받을까 겁이 나서? 나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고 죽을까 봐서?”
정말로 자신이 봐도 자신의 행동이 비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 흘리며 통곡한 것입니다.
명색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녔지만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가장 고귀한 예수님과의 관계를 한 순간에 거절해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저주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예수님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걸 깨닫고 그는 그렇게 외치며 통곡했을 것입니다. “나는 망했다.”
그래도 한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으로 칭찬도 받았고,
“네가 한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놀라운 사명도 받았던 베드로 자신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중요한 기도와 말씀과 치유의 사역의 현장에, 예수님이 데리고 갈 정도의 제자였지 않습니까?
이런 자신이 어린 여종의 “당신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잖아요.” 라는 말에 무너져버린 자신,
그것도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하면서까지 부인해버린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통곡한 것입니다. “왜 나는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지 못했을까? 왜 나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에,
그렇게 두려워 떨며 도망갔을까? 그래 나는 예수님의 제자요. 그래 나는 예수 믿어 구원 받은 사람이요.
왜 그렇게 용기 있게, 담대하게 고백하지 못했을까? 왜 예수님과 함께 죽지 못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시선에 예수님을 부인해버린 자신이 미치도록 미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밖으로 뛰쳐나가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울며 회개했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이 베드로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지금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강하고 담대하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0 0 0 0 교회에 다니는 성도입니다. 직분은 무엇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장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복의 근원입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사십니까?
아니면 베드로처럼 다른 사람들의 한 마디 말과 시선에 예수님을 부인해버린 여러분은 아니십니까?
자기 자신이 하는 작은 선행과 신앙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면서, 예수님 자랑은 얼마나 하셨습니까?
나의 죄를 씻음 받게 하고,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유업으로 얻게 하는 십자가는 얼마나 자랑하셨습니까?
제가 지난 수요일에 수요예배를 드리면서, 이 김대용목사 일등목사 이따위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는 자랑할 만한 것도 없지만, 사람인 목사를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목사는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교회당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역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인 숫자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등등 헌금 많이 드린 것, 사역 열심히 한 것 자랑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자랑하며 남의 교인들 뺏어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건 사탄이, 미귀가 하는 짓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부흥했다고 자랑하는 사람 주댕이를 막아버리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 예수님이 기뻐하는 일 해야지, 예수님이 미워하는 일 하면 복 받겠습니까?
정말로 우리가 그런 짓을 하고도 자랑으로 여긴다면, 그건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는 정말 망할 짓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울어야 합니다. 통곡하며 울어야 합니다. 그 눈물이 새롭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울어야 할 때 울어야 합니다. 슬픈 일이 있을 때 통곡하며 울어야 합니다.
내 모습이 어리석게 보일 때,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토해내며 통곡하고 울어야 합니다.
내 모습이 정말 그리스도답지 못할 때,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며 통곡하고 울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게 변화가 일어나고, 참 자유가 일어나고,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여러분!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며 울므로, 치유 될지어다! 회복될지어다. 그대로 되니라. 좋았더라! 아멘!
기독교 교회사의 유명한 사람 어거스틴이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기록한 책 참회록이 있습니다.
그는 참회록 8권에서 자신이 변화 된 것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 깊숙이 숨겨져 있는,
내 인생의 비참함이 그대로 내 눈앞에 들어났고, 강한 폭풍이 내 영혼을 흔들더니, 내 눈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홀로 조용히 통곡하면서 울고 싶었습니다.
나는 알지도 못 하는 사이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엎드려 있었고, 내 눈에는 눈물이 폭포처럼 흘렀으며,
그것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회개의 눈물이었고, 나를 새롭게 하는 신령한 제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흘렸던 어거스틴의 눈물이 그의 삶을 180도 변화시켜 성자의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한 것이 은혜의 역사요. 성령의 역사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로 새 사람의 축복을 누립시다.
울 수 있다는 게 무엇일까요? 통곡하며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강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나는 강한 사람이야. 나는 문제가 없어. 나는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나는 강해.”
이런 자기 방어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런 사람이 진짜로 약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울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비판에서,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울음입니다. 옛 자아를 벗어나고 싶다면 울부짖으십시오.
울부짖다보면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의 울음은 새 사람으로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십시오.
흘러나오는 눈물이 있으면 그냥 그대로 놔두세요.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울음에는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눈물은 마음의 찌꺼기를 배출 합니다. 눈물은 나를 찾게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울어야 합니다. 그러면 육제의 질병도 영혼의 절망도 치유됩니다.
울음이 많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사명자가 됩니다. 누군가를 위해 울면 그가 잘 됩니다.
가족을 위해서 울면 온 가족이 복 받습니다. 잘 됩니다. 혹 병든 가족이 있으면 치유됩니다. 믿습니까?
우리교회에 영혼구원을 위해서, 문제를 안고 우는 사람이 많으면 우리교회가 부흥될 줄로 믿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울면 주일학교가 부흥되고, 우리 아이들이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인물이 됩니다.
셀 목자 부목자가 울면 셀 목장이 살아나고 부흥하며, 셀 목원들의 문제가 해결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역자들이 울고, 장로님들, 권사님들, 안수집사님들이 울면, 우리교회가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며 울었던 베드로의 눈물을 보시고, 그를 다시 위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주님 뜻대로 살지 못했던 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엎드려 다 토해내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가도의 사람들이 다 되시고,
나와 눈을 마주치며 내 눈물을 바라보시는 날 위해 고난 받으시고, 날 위해 십자가 지고 죽으신,
주님 안에서 새 사람으로 변하여 거듭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