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아들 있소?' 물으며 따라오던 공수부대원이
증언자 : 마순란(여)
생년월일 : 1935. 9. 20(당시 나이 46세)
직 업 : 주부(현재 주부)
조사일시 : 1989. 2
개 요
기독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5월 20일 새벽, 집에 있는 아들이(전남대학 1학년 재학) 걱정되어 병원에서 몰래 빠져나와 집으로 가던 중 무등경기장에서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해 코뼈가 부러졌다.
해남군 부평면 신월리는 남편과 나의 고향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우리 부모님은 겨우 서너 마지기의 농사를 지으셨으므로 생활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학교를 진학할 수도 없었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여자들은 웬만해선 국민학교 이상은 보내지 않았다. 나 또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의욕이 별로 없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일을 거들다가 1953년 열아홉 살 되던 해에 결혼을 했다.
남편은 원래 교직에 있었으나 6·25 때 낙동강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여 마을에서 이장을 하고 있었다. 결혼 후 10년 사이에 5남매를 낳아 아이들 교육문제로 아무런 대책도 없이 1965년에 광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남편은 국가유공자라 쉽게 대한석탄공사에 들어갔다. 1968년까지 3년을 다녔는데 광업소라 사고도 많이 나고 월급이 체불되는 경우도 많아 그만두고 2년 정도를 집에서 놀았다.
남편의 월급으로도 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는데 더군다나 남편이 실직상태라 나라도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나는 막내아들을 업고 한일극장 부근에 있는 '백마메리야스' 공장에서 일당 400원을 받고 일했다.
1970년 남편이 '신탄진 연초제조장'에 취직을 해 떨어져 있게 되자 나는 메리야스 공장을 그만두고 애들 뒤치다거리와 남편 뒷바라지를 했다.
1975년, 남편이 55세의 나이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생활이 나아진 건 별로 없었다. 그런 속에서도 남편은 목포 성서신학교와 총신대학을 졸업하여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남편의 퇴직 후 별다른 수입이 없는 우리 가족은 매달 지급되는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나는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권유로 신앙생활을 했는데 곤란한 생활은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1980년에는 큰아들 동연이가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1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5월 15일 아침 일찍 학교에 간다고 나갔는데 도청 앞에서 대학생들이 데모를 한다는 말이 들렸다. 불안한 마음에 동연이를 데려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도청 앞 분수대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오로지 동연이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오른쪽 배가 심하게 아픈 적이 있었는데 병원에는 가보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져 아들 찾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버렸다.
사색이 된 나를 보고 놀란 남편과 함께 기독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는 입원을 하라고 했다. 그날부터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 때문에 나는 18일 공수부대가 들어 온 것도,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구타한 것도 잘 몰랐다. 다만 공수부대에게 맞아 병원으로 실려온 환자들을 보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젊은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두들겨패고 잡아간다는 소리를 듣고 동연이가 걱정이 되었다. 내 아들 동연이가 죽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가서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는 조급함에 20일 새벽 다섯 시경에 병원을 몰래 빠져나왔다. 걸어서 집에 가는데 시내 분위기가 굉장히 살벌하고 이상했다. 갑자기 무서움 증이 와락 들었다. 마음 속으로 '주님 나를 지켜주세요. 주님 나를 지켜주세요' 하면서 정신 없이 걸어갔다. 무등경기장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곳을 지키고 섰던 계엄군이 나를 불러세웠다.
이때가 6시경이었는데 나는 통행금지가 앞당겨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줌마 어디 가요?"
"집에 가요."
"어디서 오는 길이오."
"기독병원에서 오는 길인데 집안일도 궁금하고 교회에 가서 기도도 하려고 그러요."
"이 아줌마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기나 해요. 아줌마 이름이 뭐요? 집이 어디요? 기독병원 몇 호실에 입원해 있었오?"
나는 사실대로 대답하고는 집이 발전소 뒤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줌마 집에 가서 확인을 해야겠소."
하며 그 군인이 앞장 서서 걸어갔다. 나는 별다르게 지은 죄도 없고 설마 나이 먹은 나를 어쩌랴 싶어 같이 갔다. 걸어가면서 계엄군은 갑자기 엉뚱한 말을 물어왔다.
"아들 있소."
"아들이 있는데 우리 아저씨가 국가유공자라 괜찮아요."
남편이 국가유공자란 말을 강조했다.
"아들이 대학생이오?"
"전남대학교 다녀요."
집 부근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집집마다 뒤져서 젊은 사람들을 잡아간다는데 혹시 내 아들을 잡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같이 가서는 절대로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집을 지나쳐 계속 가자 계엄군이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아줌마 집으로 가자고 하니까 도대체 지금 어디로 가는 거요."
"교회에 먼저 가서 기도를 드려야 해요."
그러자 계엄군은 눈치가 이상했는지 나를 윽박질렀다.
"이 아줌마가 정말로 이상하네. 혹시 아줌마 정보 얻으러 다니는 것 아니요. 왜 이랬다 저랬다 말이 틀리요."
나는 덜덜덜 떨면서 우리 아저씨도 6·25 때 부상당한 상이군인이라고 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말밖에 없었다. 계엄군은 화가 났던지 집에 안 갈거냐고 소리쳤다. 나는 겁에 질려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남편이 상이군인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내가 피해를 당했으면 당했지 절대로 계엄군을 집으로 데려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몇 번 옥신각신 실랑이를 하다가 계엄군이 나의 양쪽 어깨를 잡고 흔들어댔다.
"지금은 계엄상황이니 아줌마 한 명은 죽여도 아무 일 없소. 진짜 말을 안 하면 죽여버리겠소."
"오메 왜 이런다요. 왜 이런다요.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단 말이요. 제발 그냥 보내주시오."
그러나 눈이 뒤집힌 계엄군에겐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나의 우물쭈물하는 행동이 계엄 군을 화나게 만들었다. 계엄군은 도저히 말로 해서는 안 되겠는지 다짜고짜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내 코에서 코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래도 계엄군은 나를 쓰러뜨렸다. 내가 넘어지자 군화발로 짓밟았다. 다리, 얼굴 등 온몸을 얻어맞고 정신이 가물가물한 상태로 질질 끌려가다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렸다. 아마 그때 비가 보슬보슬 내렸을 것이다. 얼마나 자났을까?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다. '일어서야 되겠다. 일어나야 되겠다' 하면서 몸을 일으켰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한참 꼼지락거리면서 겨우 몸을 움직이는데 지나가던 청년이 나를 일으켜세웠다. 그 청년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왔다. 청년은 집 대문을 열어 나를 문 안으로 데려다주고 곧바로 돌아갔다. 집에서는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지하실에 숨어 있다가 소식을 듣고는 뛰쳐나왔다. 병원에 누워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채 마당에 쓰러져 있으니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남편은 병원에 있지 뭣 하러 왔냐고 야단 아닌 야단을 쳤다.
날이 밝았다. 식구들은 나를 부축해 방에 눕혀놓고 병원에 전화를 했다.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신음 소리를 내며 방에 누워 있었다.
오후 2-3시경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는 잘 왔다고 좋아했다. 간호원은 마순란 씨가 병원에 있냐고 조회를 했다고 했으나 확인해 보지 않아서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병원에 이틀 정도 있다가 22일 계엄군들에 의해 부상당한 환자들이 너무 많이 와 병실이 부족해 나는 퇴원을 했다. 코는 퉁퉁 부어 있어 부기가 가라앉는 약을 복용했다. 집에 있다가 28일 재입원해 29일 결석증 수술을 받고 6월 6일 퇴원을 했다. 그러나 코는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성형외과는 의료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어 통증이 가라앉는 약만 복용했다.
이런 사고가 생기기 전만 해도 나는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사고 이후 내 코는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점점 밖에 나가는 일이 꺼려졌다. 행여 사람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심장이 발딱발딱 뛰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거울이라도 보면 나오는 건 눈물과 한숨밖에 없었다. 옛말에 여자는 병상에서도 화장을 한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여자는 여자이고 남들보다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욕심은 누구나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우리 집안 형편으로 수술비를 마련하는 것이 어려워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태로 3년을 생활했다. 1983년 10월 10일 전남대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수술을 할 때는 무섭고 두려웠는데, 수술을 하고 나면 본래의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그런데 수술결과는 의외로 좋지 않았다. 인조뼈를 박았는데 그 부위가 빨갛게 되어 무섭게 보이기도 했다. 병원에서 6개월 후면 괜찮다고 해 그 말을 믿고 6개월을 참고 기다렸으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애가 타고 죽겠는데 병원에서는 또 1년 정도 지나면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미장원에 가서 거울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코가 빨갛고 이상한 건 차치하고라도 이제는 통증까지 심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결국 1985년 5월에 부작용을 일으킨 이물질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으나 별 소용이 없다. 돈만 까먹은 셈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수류탄이나 가지고 청와대로 가 전두환이고 누구고 모두 죽여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오죽했으면 종교인인 남편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인가?
코가 멍멍하게 아파와 두번째 수술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시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주님께 더 간절히 기도하면서 생활했다.
1988년 2월 주위 사람의 권유로 서울대 병원에서 2백만 원을 들여 수술을 했지만 이번에도 별 수 없었다. 지금도 냄새를 잘 못 맡고 항상 감기든 것같이 코가 찍찍하고 코피가 잘 난다.
코뿐만이 아니라 날씨가 궂으면 온몸이 쑤시고 허리가 아파 거동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누구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불쌍한 육신들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면 세상의 모든 미움도 증오도 없어지기 마련이다.(조사.정리 이현주)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