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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개토호태왕 비문 원본의 바른 해석 |
| 우리의 무관심으로 일제가 임라일본부설로 활용 |
1. 서론
1900년대 초에 우리나라에 알려진 광개토호태왕비문은 대부분 일본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비석이 우리의 유산이면 제도권 학계와 전문인들이 그 내용을 진작 밝혔어야 했고, 정부는 그것을 보호·관리하고 그 가치를 홍보하는 후속조치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소위 재야의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원탁본과 조탁본들을 비교·연구 하고 다양한 석문의 연구를 통해 그 비문의 원본을 찾으려는 노력이 거의 전무한 채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에 의해 주어진 석문을 가지고 해석상의 문제나 이견을 제기하는 수준의 연구가 주류를 이루어왔고, 정부에서도 그곳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오히려 일본에 의해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지배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활용되어온 것이 안타깝지만 현 실정이다.
반면 일본은 광개토호태왕의 비문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아 국민들의 사기를 드높이는 자료로 활용해 현대의 강국을 일구어내었다. 1883년 만주지역 정보원으로부터 태왕의 비문을 일찍 입수한 일본은 많은 학자를 동원해 해석해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밀실에서 대책을 고민한 끝에 임나일본부설 등 자신들에게 유리한 역사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현장에 가서 비문의 글자를 이 틀에 맞추어 변조하고는 자신들의 논리에 맞추어 왜곡된 해석을 할 수 있는 탁본과 석문을 만들어 세상에 공개하였으며 우리나라에도 적극적으로 전파하였다. 이렇게 국책문서로 확대하여 일본인이면 누구나 대륙으로 가서 야망을 펴도록 했다.
우리의 역사적 자산인 대왕의 비문을 보는 관료들의 역사관과 국가를 생각하는 국가관의 이러한 차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일본은 건국 이래 최대의 부강과 호사를 누리면서 러시아와 중국을 밀어내고 아시아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게 만들었다. 과연 도대체 대왕의 비문에 무엇이 있어서 한국과 일본 두 국가의 운명을 바꾸게 되었을까?
1903년에 발표된 만주인 영희(榮禧)의 석문은 전체적으로 15자 정도의 결자밖에 없는 거의 원문에 가까운 것이며, 우리나라에도 창강 김택영(滄江金澤榮)이나 소앙 조용은(素昻趙鏞殷) 등 비문의 원본을 찾으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었고, 조소앙처럼 우리식 한문을 이해한 사람도 있었다. 반면에 동북아역사재단처럼 지금도 국민의 세금을 사용하면서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는 식의 중화사상이나 퍼뜨리는 교육을 하고 있는 곳도 있다.
주체적 역사의식을 널리 폈던 단재 신채호 선생도 지나치게 고구려를 높이는 고구려 정통론과 나라 찾는 민족의식을 드높이려고 호태왕을 높이 평가하여 비문에 나오는 민족 내부 쟁패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놓고 보니 단기적으로는 나라에 크게 기여를 했으나 장기적으로는 민족의 분열을 부추긴 결과가 되기도 했다.
지금도 실제 진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연구서는 날아다니고 드라마가 제작되고 소설이 나오니 국민 누구나 다 광개토호태왕을 잘 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학자는 무엇을 믿고 ‘고대사 부분에 하나도 고칠 것이 없노라!’ 큰소리치면서 냉소를 하고, 중국은 자기네 것이라 하면서 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광개토호태왕의 비석과 비문은 과연 누구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인가? 우리들에게 ‘그것은 우리의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용기는 있는가?
이처럼 작은 일인 것 같지만 광개토호태왕의 비문이 제대로 찾아져 해석된다면, 우리 민족이 오랜 옛날 천제국(天帝國)에서부터 비록 삼국으로 나눠지면서도 한 덩어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노력했던 민족정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일본의 자만심을 누르고 중국의 동북공정을 잠재우면서 21세기 세계의 주도국으로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닦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새로운 한류의 샘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원본을 찾는 문제에 대해서는 오늘 앞에서 상세하게 발표를 했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줄이고 원문의 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사문(朝鮮詞文)에 따라 우리의 민족정신이 깃든 비문해석에 초점을 맞추어 발표를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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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개토호태왕 비문 원본과 바른 해독방법
1) 『증보문헌비고』에 실린 일본 변조 비문
1903년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홍문관에 찬집청을 두고 법무대신 박용대(1849∼?)를 책임자로 명하여 발간을 중단했던 <동국문헌비고>를 속간하게 하였다가 1907년(융희2)에 <증보문헌비고>로 개정, 16고 250편을 완성했는데, 이 책 권36 여지고 24에 호태왕비문의 석문 전문과 비석의 크기, 위치, 발굴관련 내용을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공식 역사책에 처음으로 실린 광개토호태왕 비문이다.
그런데 그 내용에 문제가 있다. 그 비문이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자료를 전해준 자가 누구인지 등 자료의 출처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없고, 자료가 인쇄문이었는지 탁본인지도 기록이 없으며, 현지 확인여부나 비교검토를 했다는 내용도 없다. 내용도 높이가 1장 8척이라 하여 실물보다 1m 정도 낮게 기술되고, 편년과 내용 중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고 빠진 결자도 200자가 넘으며 오자(誤字)도 많았는데,
일본인들이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제시하는 신묘(辛卯)년 기사만은 “百殘(百濟也) 新羅舊盡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三字缺)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任殘…”(백잔과 신라는 다 쇠퇴한 지 오래여서 고구려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을 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일본이 의도적으로 해석한 대로 해석될 수 있도록 편집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판독한 사관이 “멸망한 고구려 고씨의 유적이다.”고 할 정도로 민족사에서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였다. 누가 보아도 납득할 수 없는 이 출처불명의 문서는 사실상 일본 정보원이 전해준 것이니 한 민족의 역사를 와해하려는 공작문서가 버젓이 홍문관의 문서에 기록되어 우리 정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대한제국 사관(史官)들은 최고의 실력을 갖춘 문사(文士)들로 구성된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이었으므로 그들이 비문을 검토한 결과 결자가 너무 많고 문맥이 맞지 않는 구조라서 접근이 어렵다 하였다. 처음 이 자료를 접한 사관들은 ‘현지에 사람을 보내 비석과 비문을 확인하자’고 찬집책임자에게 요청했으나 박용대 찬집책임자는 묵살하고, 조정에도 보고하지 않았으며, 성균관 유생에게 논의할 기회도 제공하지 않고 직권으로 책 속에 포함시켜 편집하였다.
박용대의 전횡적 행동이 잘못이라고 사직서를 던진 사람과 고국을 떠난 사관이 창강 김택영 등 여러 명 있었으며, 일본은 우리나라와 강제 병합을 마치고 병합의 공로자로 홍문관 찬집책임자 박용대에게 작위를 주었다. 박용대가 그렇게 직권을 남용한 것이 사전에 일본으로부터 일찌감치 매수당하여 행한 친일 행각으로 짐작할 수 있다.
|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원본을 찾아서 |
| 변조 전 비문의 탁본을 찾아야 올바른 고구려 역사를 찾는다 |
2) 광개토호태왕비문의 원본
⑴ 원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주류 학계의 연구
1880년대 초에 광개토호태왕비가 재발견된 이후 130여 년 동안 비문을 연구한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논문은 한국과 중국·일본 등에서 무려 1,000여 편이 넘는다고 한다. 논문과 서책이 주류를 이루지만 어떤 자료를 가지고 연구되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비석 앞에 가서 아무리 살펴봐도 해독할 수 있는 글자 수는 많지 않다. 그러므로 탁본을 하여 탁본문을 살펴야 하는데, 문제는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현재 일본인에 의해 변조된 후에 퍼뜨린 탁본들이 많이 나돌고 있는 데 있다.
따라서 비문의 원문을 알기 위해서는 변조 이전에 비문을 탁본한 정탁본(精拓本 또는 正拓本)과 변조 후의 조탁본(粗拓本)을 비교 연구하여 현재 없어진 260여자의 결자를 찾아 원문에 가까운 석문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글자들이 오랫동안 마모되어 정탁본만으로도 판단이 어려운 글자가 있고, 조작이 많은 조탁본은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정탁본이란 ‘原石 精拓本’의 약자로서 비문에 일체의 손을 대지 않고(변조되기 이전의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탁본한 것을 말하는데, 북경대학에서는 正拓本이라고도 한다. 북경대학에서는 현재 정탁본 3질과 조탁본 5질의 탁본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데, 경희대학 도서관에서 1, 2면 정탁본만 최근에 입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조탁본이란 석회를 발라서 한 탁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간 연구한 국내외 대부분의 학자들은 260여자에 달하는 결자(缺字)를 찾아 채우지 않고 일본이 배포한 석문이나 탁본을 근거로 연구서를 쏟아내었다. 이처럼 출처가 불명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글이 근간을 이루고, 해석이 어려운 결자 부분은 중국이나 일본식인 관념적 해석으로 어물쩍 넘어가니 광개토호태왕 비문을 바로 알려는 연구는 거의 없고, 일인들이 변조한 탁본을 가지고 그들이 해석한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일본의 역사왜곡 의도를 돕는 결과가 되고 있는 것이다.
비문의 원탁본이 제법 있으나 판독이 어렵고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등의 조탁본은 의도에 따라 많은 변조가 되어 내용이 동일하지 않다보니 비문에 없는 말까지 덧붙여 해석문을 쏟아낸 것이다. 이 중에는 본문에도 없는 글을 후세에 쓰인 역사서와 비교하여 이러 저러한 구실을 붙여 비문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글도 적지 않다.
단재 신채호를 시작으로 문정창, 이진희 등이 1970년대에 일본인에 의한 비문의 변조에 대해 연구를 하고 구체적인 증거까지 제시하면서 발표를 하였으나 원본을 찾는 연구는 부족했으며, 이들의 변조론이 상당한 주변의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던 1980년대에 중국인 왕건군(王健群)이 “일본은 석회도포 변조를 하지 않았다.”고 일본의 주장을 옹호하는 책을 발표하고 일본학계로부터 초청을 받아 여러 번의 국제학술대회를 하면서 우리나라 학자들의 변조론도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으며 원문을 찾겠다는 노력이 더 힘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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⑵ 외면 당하고 있는 소수 연구자들이 찾은 원문
국내외에서 발표된 천여 편의 글 중에서 결자를 복원한 완전한 해독문을 발표한 것은 찬집청 사관을 그만두고 중국으로 건너간 김택영 선생이 처음이다. 창강(滄江) 김택영(1850∼1927)선생은 찬집책임자 박용대에게 사직서를 던지고 1904년 중국으로 이주해버렸다. 그는 대왕비가 있는 회인으로 바로 달려가서 비석을 관찰했고 20여년 간 현지에서 탁본과 지인들로부터 구한 자료를 비교 연구하여 일본인들이 전해준 호태왕비문의 내용이 변조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원본 석문을 완성하여 고국에 전하기 위해 돌아오는 길에 을사늑약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즉시 멸망한 조국의 역사를 집대성하여 지인들의 도움으로 1922년에 중국에서 간행한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에 실어놓았다. 이러한 일을 하신 창강 선생은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가 된 문사출신인 사관이었으며, 성균관 교사로서 많은 문집을 남겼고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그의 제자에는 단재 신채호와 소앙 조용은도 있다. 따라서 선생의 금석문에 대한 안목은 당대 최고라 해도 될 것이다.
참고로 1922년 중국 한묵림서국 축간 김택영 저 <한국역대소사> 28권 9책에 실려 있다. 그러나 고국으로 보낸 그의 책은 일제에 의해 압류되었는데, 압류 당한 『한국역대소사』에는 대왕의 비문을 해독하여 결자가 없는 전문을 수록해 두었다. 다만 해석문이 없고, 부분적으로 선생도 변조한 흔적이 있어 후학에게는 혼란을 일으킬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창강 선생의 변조부분을 조소앙(趙素昻)선생이 수정, 재편집하여 『한국문원』에 수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창강 선생의 연구서가 출처라고 밝힌 소앙 조용은 선생의 연구서가 온전한 두 번째 자료라 할 수 있다. 다만, 소앙 선생은 창강 스승으로부터 직접 받은 『한국역대소사』와 중국현지에서 구한 호태왕비 정탁본을 비교해 보고 창강 선생이 자의적으로 몇 곳을 변조한 부분을 확인하여 삭제하고 누구나 읽기 쉽도록 구두점을 찍어 재편집하여 1938년 남경에서 발행한 『역조한국문원(歷朝韓國文苑)』에 남겼다.
그러나 아쉽게도 창강 선생의 것은 총독부가 도서를 압류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소앙 조용은 선생의 것은 80년대까지 금서 대상이어서 대중에게 알려질 수 없는 비운을 가지고 있었다. 세 번째 원문 복원자 이유립은 관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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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창강 선생은 원문 석문과 함께 비문을 어떻게 해독할 수 있었는가를 밝혔다. 그가 현지에 갔을 때 ‘1882년 중국 문사 왕언장(王彦莊)은 석비를 찾아가 보았으나 해독할 수 없어 만주인 장백산인(長白山人) 영희 조봉(榮禧 莜峰, 1854∼)에게 설명하고 그에게 해독하도록 요청했다. 장백산인(長白山人)이 탁본해 살펴보고 고구려의 비문이라 했고 중국에는 찾아볼 수 없는 북방지역 한문 형식이며 고구려 기록문이라 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중국 측 연구진에 장백산인의 이름은 없다. 그 후 뜻밖에 만주지역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통역관으로 활동하다가 일본군으로부터 첩자라는 죄명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서 “중국과 일본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한탄을 자주하였다.”고 했다.
여기에는 한국인만 모르는 어떤 내막이 있는 듯하다. 장백산인을 통해 일본 주둔군으로 넘어간 탁본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최소한 두 벌은 더 되는 듯하다. 일본정보원은 영희(榮禧)를 통해 대왕의 비문에 관한 설명을 들었고 일본 정보원은 더 정확한 자료를 입수하기 위해 온갖 협박과 회유를 가한 것 같다.
영희와 창강 선생은 어떤 경로로 교분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은 없으나 창강은 영희로부터 비문의 결자 부분을 받았고 영희는 창강으로부터 고구려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에 대한 역사를 설명 듣고 동족의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이후로 영희(榮禧)를 첩자라면서 감옥에 두고 회유한 듯하다. 그러다 결국 일본 측에서는 그를 ‘미친 소리 하는 자’, ‘소설을 쓰는 자’라고 모함을 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을 볼 때 영희가 일본 측에 넘긴 자료는 온전한 비문이 아닌 듯하며 창강에게만 온전한 전문을 전달한 듯하다. 그 이유가 바로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배신당했던 섭섭함을 동족인 한국 사람에게 베풀었다고 판단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를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올바른 해석 방법, 사문 |
| 조선사문(朝鮮詞文)이란 조선인이 쓰는 조선식의 글 |
3) 비문의 바른 해석 방법, 사문(詞文)
⑴ 사문(詞文)과 한문(漢文)
광개토태왕의 비문 문장은 한자로 쓰여 있으나 중국식 한문구조가 아니다. 비석문은 조선사문(朝鮮詞文)이어서 한문식 해석으로는 제대로 번역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앞에서 보았듯이 중국의 왕언장(王彦莊)이 번역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사문(朝鮮詞文)’은 조선민이 쓰는 ‘조선식의 글’이라는 뜻이다. 고대 중국과 한국은 소위 한자를 공용으로 썼고, 글은 말을 문장이나 문서에 쓰임에 따라 표현되는 도구적 수단이었다. 그러니 말이 다른 두 나라 간에 글 표현 방식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의 출현으로 ‘글’은 시(詩)ㆍ서(書)ㆍ춘추(春秋)로 나뉘어 중국은 문장문화에 변혁이 일어났으나 우리나라는 여전히 ‘옛글’ 즉 사문을 쓰는 입장이 되었다. 『신지비사(神誌秘詞)』가 오래된 고대 조선민의 기록이라 하고 태왕의 비문에도 ‘詞文’으로 기록한다 하였으므로 ‘조선인의 글’인 조선사문이 어떻게 쓰이고 어떻게 해독해야 하는가를 비문에서 알 수 있게 되었다.
한문(漢文)과 사문(詞文)은 다 같이 한자를 사용하는 글이지만 편의상 대부분의 한문은 관념적 글이고 사문은 사실적 어문이다. 따라서 한문문장은 사성 음운(四聲 音韻)과 율(律)이 중국인 호흡에 맞도록 짜여져 있고 지켜야 하는 문장법(文章法)에 따라 구성된다. 그러나 사문(詞文)은 ‘반쪽 글, 잡글, 조선글’이라는 별명처럼 낮춰 부르지만 이 글은 우리 호흡에 맞는 우리 민족 고대의 글이며 사실적 표현에 충실하다. 이런 사문은 선비들이 귀족이 되려는 열망으로 전문적인 한자 중심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관심에서 밀려났을 뿐이지 실제로는 생활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삿갓이 절묘하게 활용한 문객(文客)이다.
⑵ 사문(詞文)은 얼을 지킨다.
기자조선이 사라진 지 천년 후 宋나라에서 ‘詞’가 나왔다.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의 의 시부(詩賦)를 흔히 송사(宋詞)라 하는데, 송사는 조선사문(朝鮮詞文)이 사성(四聲)도 율(律)도 따르지 않는 완전 자유로운 글인데 반해 운율(韻律)은 한문구조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당·송 8대가들은 금나라의 영향으로 북쪽 사람들의 글에서 그 자유로움에 매료되어 한문구조 속에서도 매우 자유롭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서사시가 나올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문은 詩ㆍ書ㆍ春秋(역사)를 생산했고 송사(宋詞)까지 생산했으니 모든 글의 원천으로서 고대에는 중국과 조선의 공용 언어체계였는데 중국은 그것을 버렸고 우리는 품고 있었다. 우리가 품고 있는 이 조선의 글은 머릿속에서 지어내는 관념성을 배제한다. 표현하려는 모든 대상에 따라가서 도구가 되어주는 것이다. 사문은 음운과 율에 갇혀 허세와 감동과 멋을 부리는 관념적 행태를 완전히 거부한다.
따라서 사문은 1) 자연의 글이며 천심(天心)을 전하는 글이다. 우리 민족이 천평(天坪)을 경영하듯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전한다.
2) 왕의 말과 약속을 하늘의 말이라 여기고 정직하게 전하고 남기는 것이 본분이다.
3) 백성의 말과 약속을 정직하게 전하고 남기는 것이다. 전쟁기록, 물품거래 등 있는 그대로 기록할 뿐, 여기에 기록자가 관념적 논리와 수식을 더하여 생각을 다르게 하는 거짓 발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4) 왕이나 백성이 모두 읽을 수 있고 책문(策文)처럼 뜻을 따로 숨겨 두고 쓰는 글은 허락하지 않는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도 이런 정신이라고 본다.
5) 사문(詞文)과 한문(漢文)의 구별은 사실성과 관념적 구조를 보면 판단된다. 규칙이 없는 것이 사(詞)의 규칙이고 음운과 율을 갖추면 한문이다. 사문은 배우지 않아도 쓰고 지을 수 있다. 그러니 힘이 있다.
⑶ 사문으로 쓰인 호태왕비문
앞에서도 말했듯이 광개토태왕의 비문은 중국의 문장과 다른 사문이다. 이 사문은 우리의 얼을 담고 있으므로 고대 조선을 향하는 연장선상에서 우리 민족을 지키고 보존하려는 방책일 수 있다. 그러니 중국 문사인 방언장씨가 비문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 『한국역대소사』에 나와 있는 아래 글을 보면 그런 차이를 느낄 수 있다.
1882년 만주 남방 경계지역 폐허에 버려져(?) 있는 거대한 석비(石碑)를 회인(懷仁} 지역에 사는 한족(漢族) 문사 왕언장(王彦莊)이 어루만지고(按) 있었다. 비석은 이미 병이 들었고 왕씨는 해독을 할 수 없어서 문우(文友) 만주인 문사 장백산인 영희 조봉(榮禧筱峰)씨에게 말하였다. 조봉씨가 탁본해 살펴보니 위(魏)의 비문(碑文)인 듯하고 고박(古撲)하여 품위와 무게감이 있었다 하며, 손과정(孫過庭)과 저수량(褚遂良)의 서법을 참고하여 여러 해 연구하였으나 각석(石刻)의 글씨체는 진대(晉代)의 전예(篆隸)가 6~7이고 해(楷)가 2~3, 필세(筆勢)는 장쾌하였으며 해독하였지만 소감은 없었다 한다.
여기서 중국인 문사는 해독할 수 없었던 것은 한자인 줄 알고 접근하여 해독하려 했으나 사문(詞文)을 몰랐으므로 자신 있게 해독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만주사람 영희(筱峰)씨는 어느 정도 해독할 수 있었다고 하니 당시 만주지역에는 아직 옛 조선민의 사문(詞文)을 쓰고 있는 자가 있었던 것 같다.
일본에서 발간되어 배포된 비문은 대부분 일본인 특유의 의역판뿐인 것으로 봐서 출처가 한문 해석본이지 조선사문(朝鮮詞文)은 아니었다. 사문을 알고 있는 영희(筱峰)씨의 해독본을 어디까지 활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영희씨가 모두 다 알려주지 않고 그들의 압력에 따라 일부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실과 다르게 알려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에서 발간되어 배포된 비문은 마술 같은 해석문이 여러 군데 있다. 대표적인 것이 소위 신묘년(辛卯年) 사건이다. 이 마술 같은 해석으로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일본 중심으로 관심을 갖게 하고, 호태왕 비문의 실체에 접근하는 연구보다 고대일본이 한민족을 다스렸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실체도 모르면서 비문에 「왜(倭)」라는 글자가 기록되어 있다 하여 마술 같은 해석으로 대륙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목적에 이용한 것이다.
따라서 태왕의 석비를 연구하는 우리나라 학자들이 중국서책에서 뿌리를 찾으려 하고, 해석을 한다며 일본의 문서를 엿보는 것은 우리의 민족양심에 반한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정서가 있는 사문을 먼저 공부를 해야 한다. 사문은 그들에게 있지 않으므로 호태왕 석비의 문맥은 영원히 짚어내지 못할 것이다.
⑷ 비문 발굴과 해독에 관계한 지식인들
비문 발견 초기 중국 문사들의 사정이 대부분 같은 경우였다. 앞에서 일부 소개는 되었지만 1876 ~1882년 사이 중국에서는 관월산(關月山), 왕지수(王志修), 이대용(李大龍), 초천부(初天富), 진사운(陳士蕓), 원주산(元丹山) 등이 탁본(拓本)을 맡고 왕언장(王彦莊), 반조음(潘祖蔭), 단국환(談國桓) 등은 석록(釋錄)을 맡아 비문 해독작업을 했다. 이 명단에 만주인 영희는 없다.
일본은 1884년 회인(懷仁)에 주둔한 일본 군인으로부터 탁본문을 입수하고, 1889년 이 탁본문에 먹칠을 하고 글자를 보완(加墨補字)하여 변조한 석문과 함께 회여록(會餘錄)에 게재하여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03년 찬집청에서 일본으로부터 석문을 입수하였으며, 1904년 중국으로 이주한 창강(滄江) 선생은 현장에 가서 비문(碑文) 연구를 하고 있었으나 일반인들은 1908년 일본 여행자로부터 비문을 구입함으로써 처음으로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1922년 김택영이 원문을 복원하여 『한국역대소사』를 간행하고(조선총독부가 국내반입 차단), 신채호가 부분 석략을 발표했으며, 1938년에 조소앙이 전문이 복원된 창강의 연구를 바탕으로 일부 수정하여 발표, 1955년 정인보가 부분 석략을 발표했고(참고자료 2), 1973년 관학자는 아니었으나 이유립이 원문을 복원하여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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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김택영ㆍ신채호ㆍ정인보 선생의 석문(釋文)이나 약문(略文)은 한문식 해석이지 사문적 완역은 아니었으며, 이병도ㆍ문정창ㆍ최인ㆍ이유립ㆍ이형구ㆍ천관우ㆍ이진희 등 1970년대까지의 활동가는 물론, 이형구와 서영수, 북한의 박시형, 김석형 등 근래 연구활동을 한 사람들도 한결 같이 사문을 알지 못해 호태왕비문이 고대 조선을 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단지 만주인 영희, 조소앙 선생만 사문을 조금 알았다.
⑸ 사문으로 고대 조선을 담은 비문
또 하나 놀라운 일은 호태왕의 석비에 고구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태왕은 당연히 고구려의 왕인데 비문에 왜 고구려가 단 한 자도 없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면 연구자들은 문맥을 짚지 못했다고 하겠다. 영희(筱峰)씨가 해석은 했으나 문맥을 알지 못한 것은 그 동안 단절되어 전하지 못한 조선 민족의 역사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창강(滄江) 선생은 개성인이다. 철저한 유학자에 주자학파다. 『한국역대소사』 전문(全文)을 살펴보게 되면 사문(詞文)을 쓴 흔적은 없다. 전문은 한문구조이고 태왕의 비문도 한문구조로 편집하였다. 그러나 조소앙(趙素昻) 선생은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서 일찍 성균관(소년급제)에 들어갔고 역시 유학자이지만, 양주 지역에는 남하한 유민들의 토속서당이 있었을 것이고(김삿갓도 이 지역에서 활동함), 북부의 ‘잡글’(詞文의 별명)을 좀 알고 있은 듯하다.
두 분의 광개토호태왕비 석문을 분석하면 창강 선생의 것은 고구려의 역사관으로 편저를 했고, 조소앙 선생의 것은 고대 조선의 연장선에서 편저한 것으로 봐서 소앙 선생은 태왕 비문의 문맥을 정확하게 짚었다고 판단된다. 두 분의 관계는 성균관의 대 선배와 후학의 관계인데 임정 시절 중국에서 다시 만남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소앙 선생은 창강 선생의 『한국역대소사』 한문본에서 연구한 비문을 다시 정리하여 한문본 『한국문원』에 수록하였으나 사문(詞文)을 알고 정리하였으므로 고대의 한국사와 한국문학에 새로운 사표(師表)가 될 자료로 참고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글은 조소앙 선생이 호태왕의 비문이 고대 조선민의 글임을 발견한 공(功)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그러니 사문으로 읽어야 내용 속에서 고대 조선의 연장선상에서 기록된 것을 발견할 수가 있게 된다. 사문(詞文)은 지금까지 몰랐던 분야로서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으나 실재 태왕의 비문이 사문인 것으로 봐서 앞으로 고대 사서를 연구하거나 민속과 언어를 연구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며 기본적으로 우리 문화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 꼭 필요한 분야라고 생각된다.
| 광개토호태왕 비문 신묘년 기사의 바른 해독 |
| 단재 신채호선생의 해석에 대한 비판 |
3. 호태왕비문 원문의 바른 해독
이렇게 원본이 찾아져도 사문을 알지 못한다면 사실문으로 쓰인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게 된다. 조소앙 선생이 찾은 원문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서 비문의 바른 해독법에 대해 살펴본다.
1) ‘屬民觀’의 바른 해석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은 성균관 박사(正七品) 출신이다. 선생께서 설파한 한국사에 감명 받지 않은 자가 없을 만큼 유명한 역사가께서도 광개토대왕 비문을 오판하여 후학에게 곤란을 겪게 한 부분이 있다. 필자는 단재 선생을 폄훼할 목적으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지만 실수가 있음이 안타까워 3년 동안 책을 덮고 글 한 줄 쓰지 않을 정도로 충격을 크게 받았음을 실토한다.
그러나 한국사의 발전을 위해 틀린 부분은 틀렸다 말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서 작심한 바 2012년도에 부분적으로 그 사실을 발표하였다. 오늘 발표될 글에 이 사실을 다시 환기시켜 후일을 대비해 선생께서 실수하고 오판한 부분을 언급하겠다.
속민관(屬民觀)이라 칭하는 부분은 비문 내용 중에 한일 간 다툼이 되는 부분이자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소위 신묘년 기사로 1면 중간 하단부에서 시작되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而 倭以 辛卯年來渡海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이 왜이 신묘년래도해)
단재는 바로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민이니 조공을 해마다 바쳤다….’라고 해석하므로 뒤에 연결되는 ‘倭(왜)는 辛卯年(신묘년)부터 조공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왔다.’는 부분을 ‘왜가 바다를 건너와 멸망한 백제·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주장하는 일본 측의 해석을 도와주는 격이 되었다. 그러나 아래와 같이 단어의 뜻을 바르게 찾아 해석해보면 전혀 뜻이 다름을 알게 된다.
- 백잔(百殘) : 백제의 잔재라고 보는 것은 아직 이르다. 한자의 의미로 <새벽에 남은 별들>
이라는 의미도 있으니 격조높은 어휘가 되며 아직 백제가 망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잔재라
는 용어도 적절하지 않다. 특히 문정창은 백제와 전혀 다른 부족국가라고 주장한다.
- 신라(新羅) : 새 터에 조상의 묘를 옮겨 얼을 빛내다. 고구려는 신라를 확실하게 국호로 썼
다. 신라를 높여서 예우하고 있는 것이다.
- 속민(屬民) : 권속과 구민(舊民)의 뜻. 백잔은 고구려의 직계친족 간이고 신라는 옛터를 지
키고 있는 구민이니 조상 때부터 동족이라는 뜻이라 결코 고구려의 속국민이라는 의미가 아니
다. (참고: 가야만 초기에 신라의 속국이었고, 삼국은 어떤 나라도 속국민이 된 때가 없었다.)
- 이신묘(以辛卯) : ∼부터 하라 (명사 앞에 以는 부사격이다)
- 구시(舊是) : 옛 이곳. 옛부터 이곳에 (살다)
- 유래(由來) :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음 (풍습·전통)
- 년래도해(年來渡海) : 해마다 바다를 건너옴
이런 뜻을 바탕으로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순서에 따라 본문을 해석해보면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이곳에 살던 권속과 구민이니 조상의 풍습을 물려받아 조공을 거래했고, 왜는 신묘(년)부터 조공을 가지고 해마다 바다를 건너왔다.’ 라고 해석된다.
위의 문장 주제는 조공(朝貢)이므로 ‘而’ 때문에 후속 문장도 조공을 뜻한다. 곧 조공을 반복해 사용하라는 문장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왜는 조공을 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왔고, 전쟁하려고 바다를 건너왔다는 해석은 거짓이다. ‘而’가 바른 해석을 밝히는 근거가 되었다. 서투른 해석자가 조사나 부사를 무시하고 명사나 동사·형용사 등만 가지고 해석을 하다보면 이와 같이 엉뚱한 문장을 만들게 된다는 사례다.
그리고 ‘辛卯’는 간지의 ‘年’을 붙이지 않아도 신묘년이라고 읽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뒤에 붙어 ‘年來渡海’로 쓰일 ‘年’을 앞으로 끌어다가 ‘신묘년에…’라고 해석하는 것은 부사격 서술어 ‘以’의 ‘~부터’라는 쓰임을 무시한 것이다. 분명히 문장에는 ‘以辛卯’로 해석하게 되어있는데 ‘以’를 생략하였으므로 서술어가 없는 문장으로 변질되었다.
또 ‘年來渡海’여야 할 문장에서 ‘年’을 떼어냄에 따라 ‘來渡海’가 되었고, 문장의 격을 채우기 위해 다음 문구에 붙어 ‘破百殘…’이 되어야 할 ‘破’를 끌어다가 來渡海破라는 우스운 글을 만들었으니 이는 완전한 엉터리 글이다. 來渡와 海破는 시어(詩語)에 쓰일 수 있는 관념문의 글인데 비문의 전체 문장은 사실문이기 때문에 엉뚱하게 시어가 등장할 부분이 아니다. 그런데 당연히 연도를 가리키는 간지에 ‘年’을 붙여서 해석하니 웬만큼 글을 보는 사람도 속았던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이 100여 년 동안 이렇게 문장을 조작하고도 아직까지 부끄러워하기보다 큰소리를 치는 것은 피해 당사국인 우리나라 학자들이 이러한 의도적 왜곡을 구체적으로 집어내어 반론을 못했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웃음꺼리로서 일본인들에게는 회심의 미소를 줄 내용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일본인들에게 농간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 끝없이 창피한 일이다. 이제는 이러한 무지(無知)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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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의 이런 실수는 단순한 오판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위와 같은 실수는 민족의 수난기에 광개토대왕을 위대한 대왕으로 높여서 아시아에도 알렉산더 대왕 같은 인물이 있다는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고구려 정통론을 주장하느라 저지른 고의적인 실수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족 간의 싸움을 강조한 이런 해석은 일본인들에게는 ‘조선인은 단결보다 분열의 민족성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 있게 했고, 북한에게는 동족상잔을 일으킬 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문 전문을 잘 짚어보면 태왕은 동족을 정복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분쟁이 있을 곳은 미리 토벌하여 사전에 큰 전쟁을 예방했다. 그러므로 ‘토벌’한 이유와 상황을 설명하였고, 동족이 살고 있는 땅에 다른 족속들이 횡포를 부릴 때는 과감하게 정복의 길을 떠나서 평정했으며, 터를 지켜온 구민(舊民)들에게 편하게 살도록 보살피고 조상의 묘를 잘 지키라 당부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대왕은 실제로 이렇게 동족을 아끼고 위무했는데 단재는 대왕을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는 큰 뜻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하는 데 걸림돌이 될 자국 동족도 때로는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런 주장은 단재의 개인적인 역사관 내지 영웅관(英雄觀)으로서 식민지 생활을 하던 한국인에게 크게 영향을 끼쳐 대일항쟁 의욕과 용기를 불어넣은 공로는 있다. 그리고 호전적 후학에게는 청량제가 되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안타깝게도 광복이후 남북이 단일정권으로 수립되지 못한 이유에 바로 이 단재 선생의 동족정복 옹호론이 불씨가 될 줄을…. 북한이 정권 수립과정에서 독자노선을 주장한 이면에는 바로 단재의 역사관에 그 뿌리가 있으며, 서슴없이 남한의 동족을 협박하고 오만을 떠는 것도 단재의 ‘위증’이 빚어낸 결과라고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이 진정한 민족의 영웅이 된 까닭은 동족을 지배한 영웅이 아니라 동족끼리의 싸움을 차단하고 구민과 유민을 정착하여 안심하고 살게 한 것 때문이라는 것을 바로 대왕의 비문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훌륭한 민족지도자를 잘못 이용될 수 있도록 해석한 역사가의 실수는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단재의 그런 해석은 당시 일제치하서 신음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를 일으키게 할 목전의 목적이었지 광복이후 동족상잔까지는 내다보지 못한 단견적 충정의 결과였다고 정리하고 싶다.
나는 단재만한 역사가가 더 있기를 바라고 단재만한 애국자가 더 있기를 기대하면서 ‘왜 단재께서 이런 실수를 했을까?’하고 한 때는 경악하였지만 일제시대에 저항정신을 일으키기 위한 고의적 실수였다고 애써 변명해 보았고,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민족분열을 초래하는 데도 기여했다는 잘못에 대해서도 논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민족정신을 저해하고 사상이나 종교적 이론을 앞세워 민족을 혼란으로 빠뜨리는 이념주의나 종교주의자에게는 단재와 같은 ‘증언’이 치유의 약이 될 수도 있으나 ‘위증이 아닌 진짜 민족정신’이 대왕의 비문에 유훈으로 고스란히 있음을 분명하게 찾아내어야 하며, 나는 이 자리에서 그것을 확실히 증언할 수 있다.
|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임나일본부설은 허구 |
| 임나가라는 없고, 안라인은 옛 신라인 |
2) ‘임나가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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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외에도 태왕의 비문을 연구하는 학자의 글에는 잘못이 많다. 비문의 2면 뒤쪽에 임나가라(任那加羅)가 나오고 안라인술병(安羅人戌兵)이 나오는데 이 부분은 대부분 연구자들이 완전히 잘못 해석하고 있다. 문장을 잘 탐독해보면 바로 앞 구절인 ‘至任那加羅從拔城’에 답이 있다.
이 문장의 해석은 ‘임나에서(至) 가라까지(從) 성을 빼앗았다’이므로 분명히 임나(任那)와 가라(加羅)는 두 지역의 이름이다. 그리고 신라지역의 임나와 가라의 안라인(安羅人) 가라지역 사이는 상당히 먼 지역임을 알게 한다. 뒤에 나오는 ‘성즉귀복(城卽歸服) 안라인술병(安羅人戌兵)’은 ‘성은 바로 안라인 술병에게 돌려주었다’이다. 두 문장을 해석해보면 ‘임나에서 가라까지 성을 다 빼앗았고 성은 안라인과 술병에게 돌려주었다’가 바른 해석이다.
그러니 ‘至任那 加羅從拔城’에서 보면 백잔과 왜에게 신라지역의 任那와 安羅人의 加羅 사이는 상당히 먼 것으로 판단된다. 至는 분명히 출발지가 任那이고 도착한 종착지가 加羅이니 從이 있으며, 시작한 출발과 도착지역을 표현하는 문장임을 至와 從에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任那加羅’가 한 지명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대왕께서는 백잔과 왜가 신라지역과 안라(安羅)지역까지 유린하므로 군사를 5만씩이나 파견했다.
만일 한정된 지역 안라인 가라(安羅人加羅)였다면 1개의 성에 5만이나 보낼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 신라지역 임라(任那)에서 안라 사이에 성이 여러 개 있었으므로 ‘마침내 성을 모두 빼앗았다’로 해석되고 임라(任那)와 가라(加羅)는 지역이 다르다는 결론이 성립된다. 성은 왜인이 돌아와 항복한 곳이 아니라 안라인에게 돌려줬다는 글이니 해석자들의 잘못이다. ‘任那加羅’라는 지역은 비문 해석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잘못은 왜 나왔을까? 대체 연구하는 학자들의 해석틀의 출처가 어디인가? 이 부분을 좀 더 증언한다면 가라(伽羅)지역에 실존하는 임나가라(任那伽羅)가 있다면 굳이 비문에 ‘至任那伽羅’라고 길게 쓰지 않을 문장이다. 실존 국명이나 지명을 是, 此, 之 등으로 축약하여 표현하는 것이 당연한데 굳이 임나가라(任那伽羅)를 주장하는 것은 앞 글자 부사 ‘至’의 뜻을 몰랐던 것이다. ‘至’를 넣으면 임라가라(任那伽羅)가 임라(任那)와 가라(伽羅)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라(任那)는 신라 지역의 한 곳이고 가라(伽羅)는 다른 곳으로 백잔과 왜가 가라(伽羅) 지역을 유린했다는 뜻이라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왕은 5만의 군사를 보내어 신라 지역의 침략자와 가라(伽羅)지역의 침략자를 평정하였고, 그래서 ‘至任那伽羅’라 하였으며 ‘마침내 성을 모두 빼앗았다.’라고 하는 것이 문장을 지은 저작자에게 죄를 짓지 않는 해석이라 할 것이다.
‘從拔城’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성(城)이라는 해석도 일본인들의 해석을 도와주는 결과가 된다. 아무른 근거가 없으며 한문어법에도 맞지 않는다. 그냥 일본의 해석을 따라간 데서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끝으로 대왕께서 5만의 군사를 보내고 안라인(安羅人)과 술병(戌兵)에게 다시 성을 돌려줄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안라인(安羅人)이 옛 신라인이며, 이 땅의 옛 백성(舊民)이기 때문에 핍박받는 동족을 구하고자 백잔과 왜를 토벌했던 것이다.
3) 伽羅人은 누구인가?
다음으로 제 3면의 처음 부분인 安羅人戌兵昔新羅寐寢(錦)未有身來朝貢(안라인술병석신라매침(금)미유신래조공)이란 기록을 살펴본다. 이 내용은 ‘안라인과 술병(파견병)은 옛 신라인데, 편한 잠자리를 갖게 되어 몸소 조공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그런데 단재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安羅人戌兵’을 생략한 채 해석하지 않고, ‘昔新羅寐錦 또는 寐寢 또는 安錦’, ‘未有身來朝貢’만 가지고 해석을 하였다. 그래서 ‘옛날 신라 매금이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아서’라고 잘못 해석하게 된 것이다.
위의 문장은 안라인(安羅人)은 옛 신라인이며 신라에서 파견한 병사가 신라에 있을 때보다 편하고 살만해서 조공을 귀찮아했다는 실상을 그렸는데, 느닷없이 신라로 둔갑하여 매금을 등장시켰다. 그리하여 신라가 마치 고구려의 속국처럼 조공을 게을리 한다는 꾸지람으로 표현했으니 이런 기가 막힐 해석문이 있는가?
이 부분은 신라를 구하고 안라지역을 회복한 부분에서 안라왕이 광개토태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장면이다. 이런 상황에서 왜 학자들은 신라 매금으로 매도했는가? 이 부분은 단재 선생도 똑같이 보았는데, 단재는 정복론자라서 그렇게 볼 수 있다 해도 여타의 학자들은 왜 이 같은 해석을 하게 되는가? 대체 이와 같은 해석의 근원은 어디인가? 이 문장을 보면 가야는 신라에서 분국했고 병사는 신라에서 파견하여 관리했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두 나라의 뿌리가 같음을 증언한 부분인데 학자들은 왜 이 사실을 덮으려 하는가?
태왕의 비문이 세상에 다시 출현하여 한국민족의 근원에 대해 밝히는 중요한 사료인데, 일본 연구자들은 자기들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니 대부분 억지로라도 그렇게 해석했겠지만 우리 학자가 같은 해석을 한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의도적 태왕비문 변조와 왜곡해석을 도와주는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