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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불빽 메고 오음리에 |
1969년 겨울이 시작되는 12월... |
훈련이라면 지긋지긋 하지만 월남전의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요령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받았다. |
잘 있거라 부산항 |
춘천역에서 환송식이 시작되었다. 태극기를 손에 든 환송인파는 끝없이 이어졌다. 떠나는 열차에 이별이 시작되고 전우의 연인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음료수와 간식이 꾸역꾸역 열차에 올라왔다. 마지막 환송식이 부산 부두에서 있었다. "아느냐 그 이름~ 무적의 사나이~" ♬♩♪∼ 군악대는 쿵짜쿵짜 울려대고 커다란 미군의 수송함에 백마와 청룡이 탔다. 배위의 전우들이 오색 색종이를 길게 늘어뜨렸다. 아래에서는 가족과 연인들이 그 오색종이의 끝을 잡았다. "부우우웅~" 뱃고동 울리면서 수송함은 떠난다. 오색 색종이가 끊어진다... 절규하는 여인이 보인다... "잘 있거라 부산항아!... 꼭 돌아 올테니..." | |
전쟁터로 가는배...보내는 님... 이 심정 누가알까? |
엘리베이터 있는 수송함 |
베트남까지 일주일간 항해를 한다. 수송함은 건물10층 높이는 될것 같았다. 난생처음 선실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 보았다. 미군위주의 선실식당에서 양식으로 식사를 했다. 첫날은 고기, 소세지, 과일들이 너무 맛이 있었다. 그러나 둘째날부터 된장과 김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배멀미가 심한 전우들은 꼬박 일주일을 아무것도 먹질 못하고 목구멍에서 노란물까지 쪼올쫄 올리던 고생스런 항해였다 참으로 신기한건 배멀미로 그렇게 고생하던 전우들이 땅을 밟는 순간... 멀쩡하니 팔팔해진다는 사실이다. |
청룡은 다낭에서 내리고 |
겨울 야전잠바를 입고 출발했는데, 점차 열대의 날씨를 느끼게 한다. 긴 항해 끝에 '다낭' 항구에 도착했다. 갑판에서 처음 느낀 베트남 하늘은 너무도 이국적이다. 헬리콥터가 번갈아 날고 가끔 전투기 굉음은 전쟁터 근방에 온 느낌을 준다. | |
'다낭'항구에서 청룡 파월병력이 내리고 귀국하는 해병, 청룡 귀국병력이 승선한다. 새카만 얼굴에 눈빛만 반짝반짝 빛나는 전쟁터의 생존자들을 만났다. '나트랑'까지 같이 타고갔다 살아서 돌아가는 그들이 개선장군처럼 보였다. 선실 이쪽저쪽에서 환전거래가 시작되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어쩌면 필요없을지 모르는 한국돈과 월남돈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
나트랑에서 투이호아로 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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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트랑' 항구는 접안할 부두가 없어 상륙정을 타고 모래밭에 내렸다. '투이호아' 지역이 "백마의 최전방"이라고 파월동기들이 나를 위로하고 떠나갔다. |
백마부대의 최전방 "투이호아"를 향해서 트럭의 행열은 꼬리를 물고 정글을 헤치고 고개를 넘는다. 투이호아까지는 북쪽으로 120km를 더 올라가야 된다. 파월 초짜들이 탄 20여대의 작전트럭이 꼬리를 물고 북으로 북으로 올라간다. |
갑자기 앞서가던 APC 장갑차가 드르륵!!! 요란한 굉음을 토하며 연기를 품어낸다. 조마조마 쫄아붙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마을에서 교전이 벌어졌단다. | |
민간인 차량과 버스들이 길게 늘어섰다.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있는지 그들의 표정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다. 단지 더위를 피할 그늘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
APC 장갑차 |
월남전쟁은 산발적인 게릴라전이다. 정면으로 맞딱드려 서로를 겨누는 그런 전쟁이 아니다. 작전을 할 때에도 탱크는 없었고, 헬리콥터 기동력과 전투기의 폭격, 포병부대의 대포가 주력 화기였다. 전후방이 따로 없고, 수림으로 뒤덮힌 정글 어디선가 나를 노리는것 같은 긴장감... 그나마 위안이 되는것은 APC장갑차 였다. 베트콩이 출몰하는 혼바산 고갯길 정글지대를 통과 할때면 고개를 들 수 없도록 무차별 위협사격을 가해놓고 우리의 수송차량들을 인솔해 간다. |
주월백마부대 30포병대대 |
미군의 Air-base 활주로가 있고 해변쪽에 '도깨비'부대가 주둔하고, 혼바산쪽으로 겹겹이 50m 정도 철조망이 둘러쳐진 요새같은 곳, 일명 '독수리'부대 '백마 9사단 30포병대대'가 있었다. 혼바산을 넘어오던 긴장감을 풀기도 전에 포대의 요란한 대포 소리는 우리를 그렇게 환영하고 있었다. 따뜻한 전우애가 있는 나의 보금자리... "상병 '최진현'외 7명은 1970년 1월 26일부로 월남파병을 명-받고 이에 신고합니다!..." |
다시만난 훈련소 동기 |
어떤 놈들이 왔나? 월남고참(?)님들이 궁금했던지 이것저것 물어온다... 목이 탔지만 열심히 대답했다 |
누가 어깨를 툭치면서 "니도 월남에 왔나? 반갑데이" 머나먼 이역땅에서 훈련소 동기를 만났다. 생소하던 분위기가 환해지는것 같았다. 같은 내무반에서 빳다 맞아가며 정이 든 훈련병 시절 동기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우와...감동대! 여기서 만나다니..." 말문이 터지면서 궁금한걸 쏟아부었다 . 그런데 이넘이 고참행세를 하려 드는구나. 몇달 먼저왔다고 '월남고참'이라나?... |
C-레이션과 K-레이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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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도깨비부대 수색중대 용사들이 헬기로 공수된 그들의 식량인 C-레이션 박스를 보급받고있다. |
뚫릴뻔한 철조망 |
1970년 3월 30일 | |
철조망 위로 조명탄이 올라가고 관망대 k50중화기가 불을 뿜었다. 보이진 않지만 뭔가 있는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철조망 너머로 M16을 밤새도록 쏘아댔다... 새벽녘에 동이 트면서 10m앞 전방 철조망 밑에 시체들이 보이는데... |
이튿날 새벽에 확인하니 빤스만 입은 다섯명의 베트콩... 폭약을 가지고 50m도 넘는 겹겹이 쳐진 철조망... 부비트랩 인계철선이 거미줄처럼 쳐진 철조망밑을 거의 통과하구서 빈 맥주캔을 달그락 짚은 것이다. 아수라장이 될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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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파를 발견한 전우는 훈장받고 고국휴가를 갔다. 예하부대에서 견학을 많이와서 한동안 북적거렸다. "정규한" 사단장님도 노획한 전리품들을 돌아보며 부대원들의 철두철미한 전투태세를 높이 치하하셨다. |
독수리극장의 영사병 |
저녁을 먹고 하루일과를 정리하면 독수리 강당으로 모인다. | |
통신대 고참이 귀국을 앞두고 영사병 임무를 나에게 맡겼다. 털털거리는 고물 영사기 였지만, 딱고,조이고,기름쳐서 전우들을 즐겁게 해야하는 특명이었다. 미군부대 영화필름창고에 가서 중공제 영웅 만년필 뇌물로 주고 손짓발짓해서 빌린 영화... "패튼 대전차군단"이 기억에 남는다. |
박격포 날아오다 |
혼바산 밑에서 우리 진지로 | |
벙커 저편에서 첫발이 폭발하면 모두들 벙커에서 튀어나와 불꽃구경을 한다. 처음엔 겁이 많이 났었지만 포탄이 날아와도 겁들이 없어졌다. 장교님들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야 이넘들아! 벙커로 들어가라!..." |
고국에서 온 위문단 |
고국의 위문단이 30포에 오던날 모래밭인 연병장에 확성기 장치를 했다. 성능이 보잘것 없어 크게 나오지 않았다. 야간엔 박격포도 우려되고 조명도 때릴수 없어 벌건 대낮에 위문쑈가 진행되었다. 아무래도 여자가수와 무희들이 전우들을 설레이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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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남진'도 오고 '진송남'도 왔다. 앵콜! 앵콜...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나를 답답하게 만드는건 볼륨을 끝까지 올렸는데도 무대에 나가는 가수마다 "볼륨 쬐끔만 더 올려 주세요..네?" |
"노오란 샤스입은 말없는 그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한명숙 여사가 젊었을적에 그나마 시설이 괜찮은 백마 도깨비 극장에서 앵콜세례를 무지하게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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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보들한 언니들 말고 머시마들 지금 어디서 사노?... |
악몽의 부비트랩 |
영사병 사수도 귀국하고 나도 월남고참 병장이라고 거드럼 피우던 어느날... 그날도 일과처럼 수송부 배차계 이헌영 병장에게 시비를 붙었다. "나 영화 수령가니까 차 한대 배차해주슈..." 수송부 운전병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바라보는 눈길이 전부 (마음속으로) "으음...최병장과 같이 미군부대 가면 PX에 가서 맥주도 한탕...휘발유도 한탕..." 이헌영의 표정은 앵꼽고 더럽지만... 우짤끼라? 룰루 랄라... 미군부대까지는 잘 갔다. 그러나... 클릭→ 동영상으로 보기 위병소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곳 길바닥에 개 한마리가 죽어 있는걸 봤다. 운전병의 기분도 맞춰주고 돌아오는길에 보니까... 아까 죽은개가 있던곳에 폭격 맞은것 처럼 트럭이 두대나 뒤집혀 나딩굴어져 있다. 전차지뢰를 밟은것 같았다. 그런데 치우러 왔던 레카차마저 방심하여 미처 발견못한 다른 지뢰를 밟아 여러명이 헬기를 타고 후송 갔단다. 베트콩들이 밤중에 지뢰를 묻어놓고 차들이 밟지를 않으니까 죽은개를 갖다놓고 피하면서 밟으라고 한것 같다. "휴우...우리가 오전에 밟을뻔 했구나..." |
호랑이를 잡다 |
매복작전 중에 어둠속을 뚫고 나타난 호랑이를 포획했다. 침대 위에 가득한걸 보면 얼마나 큰놈인지 짐작되시죠? 도깨비부대 용사들이 '수이까이' 계곡에서 작전중 정글 속에서 접근하는 검은 물체를 사정거리까지 유인한 다음 크레모아 한방으로 호랑이를 눕혔다. | |
베트남은 열대지방이라 사계절 기온이 높아 나무와 숲이 울창하다. 또한 야생동물도 모두가 상상을 초월할만큼 크다. 특히 인간들에게 유익하지 않는것은 더욱 크고 징그럽다. 도마뱀들도 팔뚝보다 굵다. 도깨비 용사들이 비록 베트콩 소탕은 못했지만 호랑이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매복작전을 수행한 것은 한국군의 작전능력을 높이 평가할 대목이다. |
고국만리 탑 |
월남참전 병사가 만약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면 "고국만리"라는 단어가 꼭 몇번인가 들어갈 것입니다. 전쟁중이 아니라도 그럴테지만... '베트콩'보다도 더... 전우를 괴롭히는건 모기와 그리움 입니다. 누군가 먼저온 전우들이 구구절절 그리운 표현으로 이 탑에 글씨를 새겼지만 내가 읽으면 그것이 바로 내 마음입니다. |
그리운 꽁까이 |
전쟁터의 긴장과 그리움을 달래기 위하여 |
야자수마을 사람들 |
작전을 끝내고 돌아오면 야자수 해변의 휴양지로 정해놓은 마을에 단체 외출을 보내준다. 말은 '휴양소'지만 어촌 마을이다. 푸른해변에 끝없는 하얀파도 자연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전쟁터라는 생각이 사라져 버린다. | |
젖은 모래톱에 차를타고 달려도 빠지지도 않는다. 총의 안전장치를 잠궈도 되는곳이다. | |
마을의 촌장도 해변의 아이들도 순진무구한 표정들이다. |
전장의 크리스마스 |
베트남은 성탄절에도 따끈따끈한 날씨이다, 팔뚝만한 도마뱀들이 많이 보이는 계절이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명령이 내려왔다. 각 내무반 별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멋지게 살리라는 것이었다. 제일 분위기있는 내무반에는 상품으로 맥주 10박스가 주어진단다. 있는 실력 없는 실력 다 동원했다. 무전기 밧데리로 반짝반짝 네온도 달았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이신오 대대장님이 심사위원으로 내무반을 순방하셨다. 사실은 그러한 행사가 부하들의 사기를 충전시키려는 배려라는걸 우리는 나중에야 알았다. |
귀국선 타던날 |
고국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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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13개월 많은 전우가 왔고 많은 전우가 갔다 . 병원으로 간 친구도 있고 비행기타고 국립묘지로 간 친구도 있다. 새카만 얼굴에 눈빛이 반짝반짝, 깡마른 체구로 돌아가지만 자유의 십자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간다. 전우들이여! 고국에서 다시 만나자... |
나에게 월남전은 무엇인가? |
"반공을 국시의 제일위로 삼고..." 혁명공약과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다. 이데올로기 관념이 확고하던 시대였다. 누구나 그 시절에 태어 났더라면 비슷한 운명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전우들과 내가 월남전에 파병된 것은 그것이 영광스러워 간것도 아니요, 더구나 용병으로 간것도 아니다. "국방의 의무"는 거스릴 수 없는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했다. 부패한 자유 월남이 패망하고 베트남전 이야기는 그 자리에 있었던 지도자로부터도 외면 당했다... 국익을 위하여 이국의 전쟁에 투입되었던 5천여명 전사자의 고귀한 희생이 잊혀져 간다. 부상을 입고 악몽에 시달리는 파월장병들의 아픈 상처는 누가 회복시켜 줄 것인가? | |
"자신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존재가치가 없다" | |
불과 30여년전 현대사의 엄연한 사실이지만 이젠 누구도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전쟁터에 있었던 우리들이라도 그때의 시대적 배경을 일깨워 줘야겠다... 30여년간 파묻혀 있던 비망록을 이곳에 펼쳐 주세요. |
작전 이야기
백마11호 작전 Operation Baekma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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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70-1호 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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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18호 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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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에 북한軍도 참전한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
아래 사진은 1970년 5월 월남전 백마부대가 전개한 독수리 70-1호 작전 중 노획한 물품 중에서 북괴의 전단, 전술책자, 녹음테이프, 한글로 된 반전삐라, 무전기 등... 북한군이 적군 속에 있었다는 심증이 가는 증거물들이다. 베트콩 무리 속에 북한에서 파견된 북한군이 있다는 심증이 굳혀지고, 이들이 한국군의 무전교신을 도청하여 아군들의 전략을 혼란시키는 역할을 주도할 것이라는 교육도 받았다. 그러나... 내가 월남전에 있는동안 어디에서도 북한군을 목격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2000년 4월에 그 해답이 풀렸다.
1970년 5월 북괴심리전 요원이 참전한 증거서류 노획품 Captured enemy documents make clear the entry of north Korean soldiers into the Vietnamese War for paychological warfare. |
따이한이 싸웠던 적군의 사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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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의 땅굴 |
베트남 전쟁터에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총알이 날아온다는 동에번쩍... 서에번쩍... 홍길동같이 신출귀몰한 베트콩들의 전설은 바로 아래 사진과 같은 지하동굴 때문이었으리라. 가공할 만한 네이팜탄의 위력도 이들의 끈질긴 정신력은 태워 버리지 못했다. 끄떡없는 지하의 요새... 무서운 땅굴... 우리땅 휴전선에도 몇 개나 있을까? |
오작교 작전 |
1967년 3월 8일부터 4월18일까지 맹호부대와 백마부대의 2개사단을 동시에 투입하여 파월사상 처음으로 군단 규모의 협동작전을 전개하였다. 맹호부대의 전술책임지역 남단 송카우(Song cau)로부터 투이호아(Tuy hoa)지역에 위치한 백마부대 지역 북단까지 62km의 1번 도로를 연결하기 위하여 도로 주변 일대에서 준동하는 월맹정규군과 베트콩의 거점을 포착 섬멸하는 한국군 파월이래 최대규모의 포위공격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월남의 남북을 관통하는 1번 국도를 월맹의 베트콩들이 준동하고 있어서 월남 국민들의 불편은 극심했고, 1번 국도를 마음놓고 다니는 것이 숙원이었다. DMZ 군사분계선 훨씬 남쪽의 자유월남 중부지역이지만 이 지역엔 북에서부터 험준한 산맥으로 이어져 있고 또한 정글과 암석지대로 형성된 호지명 통로로 연결된 베트콩들의 보급기지이며 그들이 숨어 지낼 수 있는 천연의 요새로써 활동의 본거지였다. 과거에 연합군들이 평정이 필요한 지역이라고 판단은 하였지만 작전에 의한 공격기도는 생각지도 못 할만큼 베트콩들의 아성이었다. 맹호와 백마의 전투부대는 진격을 거듭하여 작전을 수행한 끝에 1967년 4월 18일 작전개시 42일만에 "오작교"라고 명명되어진 다리에서 서로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한국군은 약 73,000명의 월남주민을 적들의 통치속에서 해방시키고 401km의 1번 도로를 연결시켰고, 인구 120만의 6,800평방 km의 월남정부 통치지역으로 확보해 준 것이다. :: 송카우 남방 47km 지점에서 작전개시 42일 만에 남진하던 맹호부대와 :: 북진하던 백마부대 지휘관이 1번도로앞에서 극적 해후하는 순간. :: Maj. Gen. LEW Byong Hion, commander of the Tiger Division, and :: Maj. Gen. LEE So Dong, commander of the White Horse Division, :: meet at a place where the two divisions linked-up. 오작교 작전에서 올린 전과는 적사살 939명, 포로 425명, 귀순 297명, 소화기 681정, 공용화기 30문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동 작전중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23명이 발생했다. :: Operation Oh Jak Kyo was conducted under direct command of :: Lt. Gen. CHAE Myung Shin, commander of ROKFV, :: by two Korean division <Tiger and White Horse> in an area of :: 1,600 square killometers, between SONG CAU and TUY HOA, :: for 42 days from March 8 through April 18, 1967, :: to link-up the two divisions and secure the area. :: RESULTS: 939 enemy killed, 425 captured, 297 defectors, :: 681 individure and 30 crew served weapons seized, :: with friendly casualties of 23 dead. :: As the result of the link-up operation, :: ROKFV has openned 401 kilometers of Highway 1, and protected :: more than 1,200,000 population in an area of 6,800 square kilometers :: along the east coastline of the central Vietnam.- |
M16(엠씩스틴) 소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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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군장(軍裝) |
베트남 전쟁에서 작전을 나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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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병기(兵器) |
전쟁터에서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체계의 변화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그 위력이 가공할 만한 성능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월남전에서 소모된 병기들은 미군의 군수창고에 쌓여있던 재래식 재고들을 모조리 가져다 퍼부어 버린 것 같은 전쟁이었다. 산악지대가 많은 열대밀림의 정글속에서 암약하는 베트콩을 소탕하기 위하여 헬리콥터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보였던 전쟁이었다. 그나마 월남전에서 아군의 피해가 월맹군 보다 월등히 적은 것은 월등한 화력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베트콩들은 아군을 쓰러트리기 위해서 총알 한발이 소모되지만 아군들은 베트콩 한명을 잡기 위해서 200발 300발을 소모했다. 그 시절에 보았던 병기들을 순서없이 나열하고 자료가 많이 쌓인 어느날... 체계적으로 다듬을 생각이다. ▣ 헬리콥터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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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늘의 공중전 |
"베트남전"이라면 흔히 헬기를 탄 보병들이 정글속으로 날아들어가 베트콩과 싸우는 그런 장면을 연상하겠지만, 실제 베트남의 하늘에서는 팽팽한 긴장속에 팬텀기와 미그기가 공중전을 치렀던 숨가빴던 순간들이 항공전사를 장식하고 있었다. 세계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에 대항하여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군대인 월맹군의 조종사들이 겁없이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으며 월맹군의 뒤에는 공산주의 동맹국인 소련과 중공이 전투기와 대공미사일, 그리고 고사포 등 새로운 무기들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면서 월맹군을 활용하여 새로운 무기들의 성능시험과 전술의 필드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미공군과 항공모함의 지휘관들은 항공기의 전투력 만으로도 인도차이나의 작은 나라 월맹군을 쉽게 제압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월맹군은 그들이 생각했던 그런 물렁한 군대가 아니었다. 지상전의 베트콩처럼, 공중에서도 월맹 공군은 끈질기게 미공군을 괴롭힐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에 대한 미 국무성 발표가 있었다. "월맹의 어뢰정 3척이 공해상에서 순항중이던 우리 미구축함 매독스호에 공격을 가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며 우리 미합중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하여 공산주의의 도전을 물리칠 것이다." 미국합참본부는 월맹의 해군기지에 대한 항공공격을 허가하였으며 8월 5일 오후 항모 콘스텔레이션에서 함상기들이 발진하여 월맹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었다. 월맹의 어뢰정 8척파괴, 21척 대파, 석유저장고 완전 파괴라는 큰 전과를 얻었으나 뜻밖에 만난 강력한 월맹의 대공포화에 의해서 A-4 2기가 격추되어 조종사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포로가 되는 손실을 입었다. 이 손실은 자신만만하던 미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이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느껴지게 되었다. 월맹의 군사력은 소련, 중국의 지원으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강화되고 있었다. 1965년 소련으로부터 미그-15와 17 전폭기 약 50여기를 제공받았으며 SA-2 가이드라인 대공 미사일기지가 곳곳에 배치 되었다. 월맹의 대공 방어망은 미국이 생각했던 것처럼 3류가 아니었으며 미군은 수많은 항공기의 손실이 있은 후에야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월맹에 대한 미군의 최초의 공격이 있은후 하노이 정부는 대단히 강력하게 미국을 비난하였으며, 8월 7일부터 드디어 미그기 편대가 출현하였다. 미그-15와 17로 이루어진 30여대의 요격기 부대는 북베트남의 핵심인 Phuc yern(푹엔)기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이들 전투기는 비록 아음속이었으나 기동성이 상당히 우수해서 월맹공군의 전술의 핵이었다. 미국은 2개대대의 B-57 폭격기를 월남의 BienHoa(비엔호아)에 파견하였고 수개 비행대대의 F-100 수퍼세이버, F-102 댈타대거 전투기 부대를 Da Nang(다낭) 공군기지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미공군이 자랑하는 강력한 전투폭격기인 F-105 썬더치프 비행대대를 태국의 Takhli(타크리) 공군기지에 전개함으로써 본격적인 북폭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이로서 베트남 항공전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1965년 2월 7일... 그때까지 소강 상태이던 전선에서 베트콩의 공격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던 Pleiku(플레이쿠)지역에는 매우 심각한 정도의 공격이 퍼부어졌는데.. 미군을 지치도록 괴롭혔던 베트콩의 무기는 ... 다름아닌 박격포였다. 2-3명이 한조가 되어 계속 이동하면서 숨어서 쏘아대는 박격포는 이것이 얼마나 유효하고 효과적인 보병무기인가를 실증했다. 이날의 공격으로 150여명의 미군병사들이 사상했으며, 헬기 18대, 수송기 2대가 파괴되었으며 관측을 하던 정찰기도 손상을 입었다. 미국정부는 매우 당황했으며 즉각적인 분노의 대응을 하기로 했다.
44대의 F-105 썬더치프 그리고 20대의 B-57 폭격기가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날의 공격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격렬한 대공포화의 저항으로 인하여 미군의 항공기 4대가 손실되었다. 북베트남측의 예상외의 저항에 놀란 미군은 공격전술의 즉각적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965년 3월 19일에 실시된 대규모 폭격에는 공격목표 리스트에 새로이 월맹의 레이더 기지가 추가되었다. 이렇게 항공공격이 강화되자 4월부터 드디어 하늘에 미그기가 출몰하기 시작하였다. 4월 3일 미군공격기부대가 주요 전략목표인 탄호아철교에 공격을 가하기 위해서 A-4 스카이호크가 F-8 크루세이더 전투기의 엄호하에 공격을 가해왔다. 이날의 공습에서 드디어 월맹의 미그-17이 요격을 위해 떠오른 것이다. 이날의 공중전에서는 양측모두 피격은 없었으나 미군측은 미그기의 출몰에 놀란 공격기팀이 폭탄을 버리고 공중전에 빠져들어 결국 탄호아철교의 공격에 실패하였다. 결과적으로 미그의 요격은 성공을 한 셈이 되었다.
정확한 레이더 관제를 받으면서 F-105편대의 약간 측후방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고속으로 접근해오는 미그기에게 폭탄을 만재한 느린 F-105는 쉬운 먹이였다. F-105는 폭탄을 버리고 급히 산개하였으나,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공격을 해오는 미그-17을 따돌리기가 매우 힘들었다. 이내 미그-17의 기관포 사격을 받은 2기의 F-105기들이 명중탄을 맞아 검은 연기를 뿜으며 추락했다. 미군의 F-100 편대가 긴급히 교전 지역의 상공으로 날아왔을때는 이미 미그기들은 현장에서 이탈하고 없었다. 결국 미공군의 공격기 편대는 2기의 피격외에도 전체 편대가 와해되었으며, 대부분 폭탄을 버리고 미그와의 공중전에 대비하려 했으므로 또다시 탄호아 철교의 공격에 실패하였다. 이날의 미그의 승리는 미군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세상에 그런 3류 아시아의 공군한테 정예의 미공군이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2기의 전투기 손실을 입다니...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노릇인가? 이 전투를 통해서 월맹군은 비록 10년정도는 떨어진 기술력의 고물 취급을 받던 미그-17이 미군의 신형전투기들에 대하여 아직까지 효과적인 대항이 가능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미공군이 고전을 면치 못했던 이유는 근접전을 벌였을때 공대공 전투만 전담하는 공중전 요격기가 없다는것이 사실상의 문제점으로 노출 되었다. 베트남전에 투입된 미군의 항공기들은 전투기라기보다는 폭격의 임무를 병용하는 전투폭격기 개념에 가까웠다. 북폭을 감행하는데 있어서 조종사들을 괴롭히는건 대공포화와 미그 요격기만이 아니었다. 정치가들의 간섭으로 작전범위는 북위20도선으로 한정되고, 공격목표도 허가를 받아야 폭격할 수있는 제한된 작전으로 인하여 조종사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언론도 폭격으로인한 민간인의 피해를 부각시키므로써 미공군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거기에다 정작 전쟁당사자인 남베트남 군대는 애초부터 적극적으로 싸우려는 의지가 없었다. 자유월남 정권은 나라가 위태로워도 부정축제에만 눈이 어두워 국민의 지지를 받지못했다. 그러나 공산월맹군은 호치민루트를 통해서 늙은이부터 어린이까지 동원될 수 있는 인력이 모두 폭탄과 탄약을 머리에 이고 등에 져서 날랐다. 더우기 그들은 소련 교관들의 지도하에 소련식의 지상관제에 의한 요격전술과 최신의 대공미사일 사용법, 그리고 레이더 통제식의 대공포, 소구경의 육안 조준식의 대공화기들의 조작법을 배웠으며, 이 대공무기로써 영공을 방어하고자 결의를 다졌다. 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투쟁 정신은 이미 베트남전쟁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었고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은 점점 헤어날 수 없는 베트남 정글속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계속> |
주월한국군의 영웅 "나민하"소위 |
HERO OF KOREAN FORCES IN VIETNAM: 2ND LT. NA MIN-HA |
어느 소대장의 최후 |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6월 오후, 갑자기 헬기들이 줄을 지어 날아오더니 내가 속한 중대를 낯선 마을로 데려갔다. 김제 평야 같이 광활하게 펼쳐진 논에는 짙푸르게 자란 벼가 정강이 높이까지 솟아있었고, 논물도 풍부하게 채워져 있었다. 띄엄띄엄 마을이 보였다. 숲 속에 묻혀있는 마을들이 송곳 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기분 나쁜 마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건너편 마을을 사정없이 폭격하는 전투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4대의 미군 전투기가 마치 독수리처럼 내려꽂히며 사정없이 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나무 조각이 야자수 숲 위로 날아오르고, 연기가 마을을 자욱하게 덮었다. "따다다다닥. . . 쾅 . . . ". 직각으로 마을을 향해 내리꽂힌 전투기가 다시 수직 상승을 했다. 멀리서 보기엔 참 멋진 장관이었다. 이런 걸보고 전쟁을 예술이라고 표현하는구나 싶었다. 전투기 공격이 끝나자 포병사격이 뒤를 이었다. 전투기가 뿜어내는 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둔탁하지만, 야포의 포탄이 작렬할 때 내는 소리는 날카롭게 째졌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날아다니듯 마을과 마을 사이를 쏜살같이 뛰어 다녔다 4개 소대가 마을을 하나씩 배정 받았다. 모두가 전략촌이었다. 억센 가시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쌌다. 울타리에는 동그란 총구멍이 촘촘히 뚫려 있었다. 중대본부는 제4소대와 함께 장갑차를 타고 마을로 들어갔다. 앞으로 전진하면서도 온 신경은 뒷마을로 곤두서 있었다. 장갑차 위에 설치된 기관총이 뒷마을에 대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사수가 공포감을 느낄수록 기관총 소리도 요란했다. 뒷마을에서 총탄이 무수히 날아왔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를 꺾을 때 내는 소리처럼 "딱" 소리만 내고 여운이 없었다. "따쿵-"하고 여운을 남기는 총알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는 총알이었다. M-16 소총의 초속은 마하 2.8이다. 소리보다 2.8배 빠르다. 바늘에 실 따라 가듯, 총알이 먼저 나가면 그 뒤를 이어 총소리가 따라가는 것이다. 총알을 맞은 사람은 소리를 미처 듣지 못한 채 의식을 잃게 된다. 중대본부와 4소대는 피해 없이 마을을 점령했다. 빈 마을이었다. 장갑차에서 막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제2소대 무전병의 울먹이는 소리가 수화기에 울려 퍼졌다. 소대장이 전사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웃 마을에 도착하여 장갑차에서 막 내리려는 순간 뒷마을에서 무차별적으로 쏟아 붓는 베트콩의 총알에 머리를 맞은 것이다.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에 깊이 애도할 여유가 없었다. 중대장은 기지에 남아있던 부중대장을 불러 2소대장의 자리를 메우도록 조치했다. 부중대장은 부대에 남아 작전지역에 보급품을 보내주는 잡일을 맡고 있었다. 식량도 포장하고, 고국에서 온 편지도 포장해서 헬리콥터장으로 가져가서 작전지역으로 보내주는 일이었다.
그날만큼은 얼이 빠져 있었다. 이 장면은 두고두고 약점이 됐다. 훗날 그가 큰소리를 칠 때마다 나는 기를 꺾었다. "아! 그때 얼굴이 꽤 창백해 보였습니다" 숲으로 뒤덮인 마을에 모기떼가 극성이었다. 손으로 아무 곳이나 문지르면 수십 마리씩 잡혔다. 톡톡하기로 이름난 정글용 작업복을 뚫고 들어와 마구 쏘아댔다. 독한 모기약으로 얼굴과 손 그리고 작업복 위에 범벅을 해도 떼거지로 달려드는 모기떼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모기를 막는 방법은 정글용 가죽 장갑을 끼고 판초우의를 뒤집어쓰는 것이었다. 야간에는 방어 초소들을 잘 선정해야 했다. 전사한 소대장과 친분이 있던 제4소대장은 슬퍼하느라 아무 일도 못했다. 내가 그를 대신했다. 병사들에게 초소를 잡아주고 대응 요령을 꼼꼼히 확인했다. 임무가 끝나자 잠이 쏟아졌다. 배트콩이 우리의 위치를 알고 있다. 언제 공격해올지도 모른다. 이런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으면서도 쏟아지는 잠에는 저항할 수 없었다. 전장의 선머슴, 부중대장이 그날 밤 전과를 올렸다. 논 속을 포복해서 마을로 접근해오는 월맹 정규군 3명을 사살한 것이다. 공장에서 갓 뽑아낸 소총 세 자루와 적탄통 한 개라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튿날, 병사들은 대나무 막대를 뾰족하게 깎아 가지고 마을 바닥을 촘촘히 찔러댔다. 분명히 땅속에는 비밀 땅굴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허사였다. 있다 해도 그렇게 찔러서 발견될 땅굴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제서야 소대장의 죽음이 실감됐다. 그는 몇 달 전에 많은 전과를 올려 고국으로 포상 휴가를 다녀왔다. 그때부터 많은 여학생들과 알게 되어 펜팔을 맺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끝내도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식당에서 오자마자 그는 편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틈틈이 새어나오는 소리로 보아 여고생들은 월남의 영웅, 미남의 소위를 여간 흠모하지 않는 눈치였다. 침대 머리맡에는 언제나 꽃 봉투가 한 뼘씩 쌓여있었다. 읽을 때는 언제나 누워서 뒹굴었다. 기분이 좋으면 18번이 나왔다. 문주란의 "돌지 않는 풍차"였다. 약간 음치이긴 해도 특유의 가락과 감정이 있었다.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힌 채 눈을 지그시 감고 마치 예배를 끝 마무리하는 목사님처럼 팔을 하늘로 치켜올리고 목을 좌우로 저어가면서 소리를 뽑아냈다. 그 모습이 갑자기 없어진 것이다. 텅 빈 침대 위에 임자 잃은 꽃 봉투만 쌓였다. 그는 침대 밑에 귀가 쫑긋하게 올라간 귀엽고 통통한 황색 강아지를 길렀다. 주인을 잃은 첫 날부터 그 강아지는 식음을 전폐했다. 병사들이 안아주고 밥을 떠 넣어 줘도 먹지 않았다. 매일 밤 애조 띤 울음소리는 병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느날 강아지는 천막이 보이는 모래 언덕위에 잠들어 있었다. 강아지의 죽음과 함께 소대장에 대한 추억도 소멸되어 갔다 나 역시 몇 명의 아가씨들과 펜팔을 맺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아가씨는 조치원 아가씨였다. 글씨도 예쁘고 내용도 재미있고, 글 솜씨도 깔끔했다. 수십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도 서로는 신상을 소개하지 않았다. 사진도 교환하지 않았다. 생활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재미있었다. 포병 대위 한 사람이 그녀의 편지를 탐내기 시작했다. 자기에게 양보하라고 매일 마다 성화를 바쳤다. "야, 지 소위. 너는 많잖아. 그 아가씨 내게 좀 넘겨라, 응?" 견디다 못해 그에게 편지를 쓰도록 양보했다. 그후 그녀는 아무에게도 편지를 쓰지 않았다. 마지막 편지가 날아왔다. "사람은 내 남 없이 더 많이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가 내게 심어주었던 분위기가 섬세하고 깊었던 것만큼, 그 마지막 편지가 내게 남긴 여운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 끝- |
30포 B포대장의 월남전 참전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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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백마30포병대대 B포대장 지만원::: 베트남... 밀가루 반죽을 두 손으로 늘려놓은 것 같이 기다랗게 늘어진 국토... 동해안을 따라 1번 도로가 남북으로 길게 달린다. 월남의 경부고속도로였다. 이 도로를 따라 대부분의 농토가 늘어서 있었고, 미군의 송유관과 시설들도 늘어서 있었다. 한국군은 바로 이 1번 도로 주변을 지키고 있었고, 미군은 월맹 국경지대에서 월맹 정규군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국군은 주민과 친구가 되는 선무작전을 폈고, 미군은 국경선에서 죽기 살기로 정규전을 수행했다. 맹호사단은 퀴논 시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을, 백마부대는 나트랑과 투이호아 시를 잇는 남부 지역을 보호하고 있었다. 백마 사단 중에서 28연대는 북쪽 투이호아 지역에, 29연대는 사단 사령부와 함께 닌호아라는 중간 지역에, 그리고 30연대는 맨 남쪽인 나트랑 지역을 맡고 있었다. 28연대 지역은 베트콩과 월맹군의 소굴이었다. 육군소위가 가면 죽지 않으면 병신이 된다고 했다. 30연대 지역은 소위가 가도 1년 내내 베트콩 구경 한번 못하는 그야말로 안전 지대였다. 신내기들은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사단사령부에 설치된 보충대에 도착했다. 우중충한 군용 텐트가, 대낮에 받은 고열과 특유의 천막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해가 지면서 모기가 달라붙기 시작했다. 촘촘히 짜여진 작업복을 뚫고 들어왔다. 월남의 밤은 모기 약 없이는 견디지 못한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보충대장은 신참들에게 그 흔해 빠진 모기약 하나 지급하지 않았다. 배에서는 멀미를 핑계로 청소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던 친구들이 보충대에 오면서부터 눈빛이 빛났다. 여기 저기 전화를 걸었다. 사는 재주가 참으로 뛰어나구나 싶었다. 이튿날이었다. 활약(?)이 많았던 친구들은 사령부에 남게 됐다며 즐거워했고, 나는 빽 없는 30여명의 장교들 틈에 끼어 시누크라는 검은 깻망아지처럼 생긴 육중한 헬리콥터를 탔다. "따따따. . ", 시누크 지붕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두 개의 프로펠러가 내는 굉음이었다. 밖은 볼 수 없고, 소리는 고막을 울렸다. 입은 굳게 닫히고, 눈빛은 깊어만 갔다. 기나긴 40분간이었다. 가장 험악한 전투지역으로 배치돼 가는 신출내기들의 공포감도 그만큼 더했다. 28연대의 포병 파트너, 30포병 대대에 배치됐다. 연대본부와 대대본부는 해안가 넓은 백사장에 함께 위치했다. 군수부대, 병원, 간호장교 숙소, 보병 제1대대 본부, 한국군 PX, 헌병대, 보안대도 같이 있었다. 기지 주변에는 둥근 철조망이 5중으로 설치돼 있었고, 밤에는 기지 밖에서 기어 들어올지도 모를 베트콩을 감시하기 위해 전등불이 촘촘히 밝혀져 있었다. 위치가 적나라하게 노출돼 있기 때문에 1년에 몇 차례씩은 베트콩으로부터 심한 박격포 공격을 받았다. 한때는 십여 명의 특공조가 철조망을 뚫고 들어오다 우리 초병들의 집중사격을 받아 사살된 적도 있었다. 노출된 기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공격 수단을 강구해야만 했다. 때로는 대 규모 작전을 수행했고, 작전이 없는 날에는 매복을 나갔다. 베트콩은 야간에 활동했다. 그들이 다닐만한 길목에 소대 단위로 숨어 있다가 베트콩을 잡는 작전이다. 마을을 베트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활동을 제한하지 않으면 우선 한국군이 피해를 봤다. 연대기지로부터 3km 떨어진 서남쪽 지역에는 삼각산보다 더 우람한 바위산이 우뚝 서서 기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집채보다 더 크고 더러는 25층 아파트보다 더 큰 바위들로 구성된 산이었다. 정상에는 높이 150 미터나 되는 깎아 세운 쌍 바위가 뾰족한 모습으로 오똑하게 일어서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혼바산이라고 불렀다 그 밑에는 천길 만길 시커먼 바닷물이 호수처럼 잔잔하게 고여 있었다. 월남에서도 유명한 봉로만이었다. 호수 같이 동그란 만의 저 편에는 눈이 부실만큼 하얀 백사장이 동그란 띠를 두르고 그 띠에 갇혀 있는 깊고 깊은 물이 펼치는 다양한 칼러의 연출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때로는 검푸른 색을, 때로는 최고의 에머랄드 색을, 때로는 투명한 가을 하늘을 연출해 냈다. 아침으로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바라볼 때마다 색깔이 다르고 느낌이 달랐다. 정상적으로라면 나는 도착하자마자 포병 대대본부로 가서 대대장과 포대장에게 신고를 해야 했다. 그러나 내가 도착한 날은 그 유명한 한 달간의 홍길동 작전이 시작되기 하루 전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대장과 포대장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곧바로 보병 3중대로 직송됐다. 보병 제3중대! 기동타격 중대였다. 급한 상황이 전개되거나 다른 부대에 작전 지원을 나갈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5분 대기조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연대가 가지고 있는 14개 중대 중에서 전과가 가장 많았다. 백마 사단 전과의 90%는 28연대가, 연대 전과의 50%는 제3중대가 올렸다. 제1대대는 연대기지 내에, 제2대대와 제3대대는 찝차로 30-40분 거리에 뚝뚝 떨어져 있었다. 보병 대대들은 베트콩의 활동을 감시할 수 있는 수많은 거점 지역을 선정해서 중대 또는 소대 단위로 진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를 홈베이스라고 불렀다. 마치 옛날 일본의 성처럼 중요한 거점 지역에 성을 구축함으로써 베트콩이 민간 마을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이었다. 월남전은 게릴라전이었다. 게릴라는 민간 복장을 하고 다녔다. 마을에서 만나는 민간인이 양민인지 베트콩인지는 누구도 몰랐다. 게릴라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민이다. 주민의 도움 없이는 작전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모택동의 게릴라 전술이다. 게릴라는 고기요, 주민은 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군은 게릴라전의 전문가인 채명신 장군을 초대 주월군 사령관으로 보냈다. 그는 주민과 게릴라를 분리시키기 위해 대민 활동을 강조했다. "100명의 베트콩을 놓지는 한이 있어도 한 사람의 양민을 보호하라" "병사 한사람 한사람은 모두가 다 외교관이다" "예의를 가지고 주민을 대하라" 이에 따라 한국군은 마을 주민에게 쌀을 주고, 교량과 건물을 지어주고, 태권도를 가르쳐 주고, 치료를 해주었다. 월남에서 "따이한" 하면 친절의 대명사였다. 같은 물자라도 미군이 주면 거부하지만 한국군이 주면 고마워했다. 낮에는 민간 마을에 따이한의 이미지를 심어 주민의 마음을 한국군 편으로 만들고, 밤에는 이러한 민간인들이 베트콩에게 사살되지 않도록 마을을 지켜주었다.
제3중대 중대장은 육사 16기생으로 깡마르고 작은 키를 가졌지만 생도 때에는 럭비 선수였다. 관측장교는 중대장과 같이 행동하면서 중대에 포병화력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나에게 자리를 물려준 장교는 육사 1년 선배였다. 생도 때에는 별로 친해 본 적이 없던 선배였지만 나를 보자마자 너무나 반가워했다. '야, 육사 선배라는 게 이렇게 좋은 거로구나!' 그는 하루 종일 싱글벙글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나의 도착이 하루라도 늦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근심을 했다는 것이다. 하루만 늦었어도 그는 한달 간의 험한 작전에 투입될 뻔했다는 것이다. 많은 장병들이 귀국을 불과 몇 일 앞두고 전사했다. 이는 모든 장병에게 징크스로 작용했다. 귀국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나를 보자마자 그토록 기뻐했다는 건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됐다. 하지만 선배 장교로서의 체통에 대해서는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병사들은 굳어진 얼굴을 해 가지고 다음날부터의 작전에 필요한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당번병과 무전병이 와서 첫인사를 하고는 내가 짊어지고 나갈 군장을 꾸려왔다. 4개의 수통에 물을 담아왔다. "소대장님, 물을 아껴 드십시요. 남에게 물을 주지도 말고 달라지도 말아야 합니다. 규칙입니다. 정글 속에는 식수가 없습니다. 산 속에 있는 물은 독성이 있어 마시면 큰일 납니다. 더러는 베트콩이 물에 독을 넣는다고 합니다. 수통 물만 드셔야 합니다. 시장에서 수박을 사먹어도 큰일 납니다. 수박에 독침을 넣는답니다" 이튿날 여명에 각자는 군장을 메고 헬리콥터 장에 나갔다. 승객정원 5명, 헬리콥터가 기우뚱거리며 땅에 닿는 둥 마는 둥 정지하여 병사들을 태웠다. 말없이 눈들만 반짝였다.
정글로 뒤덮힌 산이 끝도 없이 전개됐다. 검푸른 솜을 뭉굴뭉글 깔아놓은 것처럼 아름답기까지 했다. 넓고 평평한 고산 지대가 펼쳐졌다. 산 위에 또 다른 평야가 전개된 것이다. 사람 키를 훨씬 넘는 갈대밭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보기엔 아름다운 잔디밭이었다. 낯선 이국의 경치였다.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낮게 떠가는 헬기를 향해 정글 속에서 총이라도 쏘면 어떻게 하나' 마음을 졸였다. 사람 키를 넘는 갈대밭 위에 헬기가 정지했다. 뒤뚱거리는 동안 병사들이 2미터 정도의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쏜살같이 사방으로 엎드려 경계를 했다. 몸에 밴 동작이었다. 중대마다 내리는 곳이 달랐다. 광활한 정글 산에 2개 사단 병력이 바둑판처럼 깔렸다. 가장 길었다는 홍길동 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정글 속에서의 행군은 언제나 일렬 종대였다. 1996년9월 강릉에 출현한 잠수함 사건에서 한국군은 달아난 몇 명의 승무원을 잡으려고 매일 7만 명의 병력을 산에 깔았다. 합참의장은 병사들이 일렬 횡대로 늘어서서 산을 샅샅이 뒤지면 잡을 것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나무가 우거진 산 속에서의 행군은 절대로 횡대일 수 없다. 그래서 길목을 잡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 4성 장군은 이런 기본적인 상식조차 없었던 것이다. 정글 속에는 집채만한 바위들로 뒤엉켜 있는 곳이 많다. 그런 곳에는 베트콩이 서식하는 동굴이 마련돼 있다. 나무 밑에는 열대림에서 떨어져 내린 잎사귀들이 수백 년 지나는 동안 검은흙으로 변해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가 들어서 있는 곳은 행군하기에 편했다. 걸을 때는 한없이 땀이 흘렀지만 몇 분만 쉬고 있으면 한기가 돌았다.
입이 타들어 갔다. 침조차 말라 버렸다. 처음으로 당해보는 목마른 고통... 참으로 가혹했다. 바로 이때, 선발대에서 총성이 들렸다. 모두가 반사적으로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부산항에 나왔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이 순간을 다시 무를 수만 있다면!... 세상 끝, 절벽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전후 좌우는 물론 나무 위까지도 바쁘게 살폈다. 나무 위에서 총을 쏠지도 모르며 바위틈에서 솟아날지도 몰랐다. 총소리는 잠시였다. 이내 선발대에서 상황보고가 들어왔다. 중대 본부가 현장으로 접근했다. 조금 전 긴박했던 분위기와는 전혀 달리 현장은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검은 옷을 입고 맨발로 다람쥐처럼 달리던 16세의 어린소년을 잡아놓고 몇 명의 병사가 말을 걸고 있었다. 얼굴이 어찌나 예쁘던지 병사들이 저마다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호해 주고 싶은 아이였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발바닥은 군화 바닥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발가락 사이가 넓게 벌어져 있었다. 얼굴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병사가 주어들은 몇 마디로 소년에게 물었다. "브이씨, 어 더우?" 하니까 "콩비억"하고 고개를 저었다. 베트콩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모른다는 답변이었다. 서울의 소년들과 비교해보니 무섭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측은해 보였다. C-레이션 깡통을 까주고 과자와 초코렛을 주었다. 장난 끼 있는 병사가 어쩌나 보려고 담배를 주었더니 참으로 맛나게 피웠다. 눈을 지긋이 감고!...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도 소년의 가슴은 가쁘게 팔딱거리기만 했다. 몇명의 병사들이 소년을 취조하는 동안 다른 병사들은 동굴 속을 수색했다. 큰 바위들이 뒤엉켜진 곳에 미로와 같은 동굴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전등을 비치며 이리저리 수색하는 병사들의 신경이 칼날처럼 곤두섰다.
헬리콥터를 보내 노획 품을 나르기 시작했다. 20 미터 정도의 나무 위에서 헬기가 뒤뚱거리며 정지한 채 나무 틈 사이로 망을 내려보내면 병사들이 망을 채워 주었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성급한 지휘관들은 병사의 갈증은 아랑 곳 없이 무기만 날랐다. 갈증에 시달린 지 몇 시간이었다. 날아오는 헬기 망에 물통을 실어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중대장도 날벼락 맞듯 갑자기 쏟아진 노다지에 정신이 나갔다. "대대장님, 헬기에 물 좀 보내 주십시오" 이 한 마디를 못했다. 소변을 레이션 깡통에 받아 커피를 타 마시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어둠에 베트콩이 바위틈에서 "와. . . .!" 소리를 지르며 공격해 올지도 몰랐다. 밤이 깊을수록 공포가 더해갔다. 하지만 그 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건 갈증이었다. 어디에서 도랑물 소리만 들려도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뛰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있는 병사들에서 간간이 신음소리가 들렸다. 당번이 마지막 남은 오렌지 한 개를 중대장에게 건넸다. 중대장이 나를 쳐다봤다. 못 본체 했다. 그는 피- 하고 웃으며 반쪽을 내게 건넸다. 주는 그나 받는 나나 말 할 힘조차 없었다. 한 입에 털어 넣긴 했지만 갈증은 오히려 더했다. 날이 새자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긴급 요청을 했다. "대대장님, 목이 탑니다. 오바" "오! 고생했다. 즉시 보내주겠다. 물을 받을 수 있는 평지로 이동하라. 오바" 정글 속을 한발 한발 옮기는 것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나무 뒤에, 바위틈에, 숲 속에, 나무 위에, 베트콩이 숨어 있다가 따따닥. . . 쏘지나 않을까. 보이지 않는 부비트랩 선이 나무 사이에 연결돼 있지는 않을까? 그 무섭다는 독창이 바늘처럼 솟아있는 함정이 위장돼 있지나 않을까? 병사들은 말없이 눈만 반들거렸다. 행군 중 휴식시간이었다. 몇 몇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경계를 했다. 나는 조금 떨어진 바위 뒤에 앉았다. 의심의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배낭을 옮겨놓는 순간이었다. "어-어!". 팔뚝 굵기의 초 슈퍼 급 지네가 나를 향해 더듬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검푸른 등에 굵고 노란 긴 다리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악몽을 꾸듯, 소리를 지르려 해도 목청이 안 터졌다. 도망가려 해도 다리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김- 병- 장-" 간신히 더듬거리며 소리쳤지만 모기 소리였다. 아마도 내 얼굴은 사색에다 울먹였을지 모른다. 김병장은 체격이 좋고 판단이 빠른 중대의 기둥이었다. 현장에서는 사실 그가 병들을 지휘했다. 유난히 무성한 구렛나루를 가지고 있었다. "뭡니까? 소대장님" 그는 날랬다. 내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을 잽싸게 알아차렸다.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철모 띠에 꽂혀있는 모기약을 꺼내 지네에게 쏘았다. 지포 라이터 사이즈의 플라스틱 통을 납작하게 누르자 작은 구멍으로 액체가 힘있게 분출됐다. 독한 약이라 지네가 괴롭게 몸을 꼬았다. 지네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이상병에게 명했다. "야, 그어 대!.." 이상병이 성냥을 그어 지네를 향해 던졌다. 휘발성이 강한 모기약에 불이 붙었다. 삽시간에 재가 됐다. 이것이 전쟁터에서 1년을 지낸 김병장과 겨우 하룻밤을 보낸 소위와의 차이였다. 망망 산해를 지도 한 장을 가지고 다녔다. 계곡에 이르자 넘어야 할 산이 나타났다. 바늘구멍만큼의 틈도 없이 빽빽하게 가시나무가 들어찼다. 산에서 퍼져 나오는 기운이 스산했다. 스멀스멀 베트콩이 배어있는 것만 같았다. 깡다구가 있어 보이는 중대장도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중대장님, 포를 쏴서 진로를 개척할까요?" "네가 어떻게 길을 내냐?" "어느 통로로 가시게요?" 새로 온 풋내기가 무슨 일을 하겠느냐는 표정이었다. 산 정수리의 좌표를 따서 포대에 불러주면서 연막탄을 요청했다. 정글에서는 지도 읽기가 어려웠다. 건너 편 고지일거라고 생각해서 연막탄을 쏘아보면 발 밑에 떨어질 경우가 허다했다.
드디어 50m 눈앞에까지 내려왔다. 파편이 산밑에까지 날아왔다. 중대장과 병사들이 새파랗게 질렸다. 짐짓 중대장에게 물었다. "조금만 더 내려 쏠까요?" 예상대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중대장님, 이제는 행군이 좀 가능하시겠습니까? 더 해드릴까요?" 포병을 우습게 생각하는 보병 중대장, 나를 신참내기라고 얕잡아보는 선배에게 매운 맛을 톡톡히 보여준 셈이 됐다. 보병에 얹혀 사는 나의 당번과 무전병의 얼굴에도 순간 자랑끼가 흘렀다. 정글 속에서 밤을 지낼 때는 텐트를 쳤다. 전갈이나 뱀이 접근하지 못하게 독한 모기약을 땅에 부렸다. 얼굴과 손에도 발랐다. 병사가 고무베드에 바람을 불어넣고 그 위에 판초 우의를 깔고 다시 모포를 깔아주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축축한 땅에 우의와 모포만 깔고 잤다. 지리한 작전이 계속됐다. 한 달 후, 헬기들이 떼를 지어 날아왔다. 얼굴은 털부성이가 돼 있고, 피로에 지쳐 우거지상이었다. 하지만 철수할 때의 기분만큼은 이 세상 최고였다. 막사라 해야 모래밭에 천막을 치고, 베니아를 이리저리 얽어 매 벽을 만든 것이었지만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그 하나로 낙원처럼 느껴졌다. 작전이 끝나던 날, 중대장은 소대장들을 그의 천막으로 불러모았다. 얼기 직전까지 "시아시"된 캔맥주를 마음껏 마시게 권했다. 크라운과 OB였다. 이런 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몇 번씩 살을 꼬집으면서 생시인지를 확인했다. 그 아픔은 고통이 아니라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데 대한 기쁨과 희열이었다. 전축에서는 문주란의 "돌지 않는 풍차"를 비롯해 박재란, 현미, 정훈희 등 당대 여가수들의 히트곡이 흘러나왔다. 고국에서는 싫증나던 곡들이었지만 이 순간에는 음의 마디마디가 깊이 깊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고국은 온갖 꿈과 희망이 담겨있는 어머니의 품안이었다. 살아서 고국에 다시 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
홍길동 작전(Operation Hong Kil-Dong) |
1967년 7월 9일부터 8월 26일까지 백마사단과 맹호사단 2개사단을 투입하여 주월 한국군 전술책임지역을 위협하는 월맹군과 베트콩 게릴라들의 은거지 소탕을 위한 선제공격으로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으며 월맹군의 상부 지휘체제 붕괴와 베트콩들의 전투능력을 손괴시켰으며 VC게릴라들의 은거지를 색출하여 소멸시켰다. 적들이 출몰하던 1번국도와 6번도로의 안전을 확보하여 자유월남 주민들의 안전을 보호하였다. 이 작전으로 적사살 625명, 포로 88명, 귀순 26명, 소화기 348정, 공용화기 84문등을 노획하는 다대한 전과를 올렸다. The White-Horse and the Tiger Divisions were thrown into an area adjacent to the ROKFV's Tactical Area of Responsibility in order to launch a pre-emptive attack on the enemy threatening the Korean TAOR. As the result of this operation, the enemy's top command nerve was paralyzed and the enemy's combat capability was destroyed. During the operation 625 enemies were killed, 88 captured, 26 defected and 432 weapons seized.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중장의 진두 지휘하에 1967년 7월 9일부터 48일동안 맹호,백마 2개사단이 동시에 참가하여 "통트레"와 "쿵숀" 지역일대에 집결중인 월맹군 5사단 95연대와 베트콩 85연대 및 지방 게릴라 2개중대에 대한 선제공격을 목적으로 실시한 작전이었다. 아군들의 기동력을 최대한으로 동원하여 분산되어 있는 적의 은거지에 일제히 불시에 신출귀몰하는 "홍길동"처럼 적을 급습하여 적의 사기를 제압한 후 완전히 섬멸하는 작전이었다. 위에 열거한 노획물 외에 무전기 26대, 발전기2대, 교환대 2조,등 큰 전과였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 27명, 부상 62명이었다. |
이 한몸 조국을 위해 바치리라!... 월남전의 영웅들 |
<계속> |
1. 대부대 작전(파월 이후~73. 1. 31) : 대대급 이상 작전
2. 소부대 작전(파월 이후~73. 1. 31) : 중대급 이하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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