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전남대 후문에서 부상당해
증언자 : 장천수(남)
생년월일 : 1956. 11. 14(당시 나이 24세)
직 업 : 나전칠기공(현재 나전칠기공)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5월 18일 전남대 후문 앞에서 느닷없이 달려든 공수부대에 의해 무수히 구타당했다. 이후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가지고 있던 재산마저도 다 써버리고 궁핍하게 생활하고 있다.
3백 원짜리 인생
나는 1956년 11월 14일 백운동 로터리 근처의 봉주동(현재 주월동)에서 4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생을 막노동으로 연명하면서 하루 일당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어머니는 손이 닳도록 가난한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고, 큰 형님은 자동차 운전으로 살아오고 있다. 둘째 형님은 어릴 적부터 양복 기술을 배워 현재까지도 서울에서 양복점에서 재봉일을 하고 있다. 누나는 일찍 출가했고, 나는 국민학교 졸업에 그쳤는데 하루 먹을 양식을 걱정해야 했던 우리 집안 형편으로는 도저히 중학교 진학을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가구일을 배웠다. 막내 역시도 나의 뒤를 이어 가구일을 배우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배움이라는 혜택을 거의 받아보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물론 가족 모두가 어릴 때부터 막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루를 쉬면 가족 전체가 하루를 굶어야 했다.
나는 13살 때부터 배우게 된 가구일에 능숙해지면서 한 달에 3백 원을 받는 3백 원짜리 인생이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가구일에 자신감도 생기고 욕심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달 3백 원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음을 느끼고 가구업체 몇몇 선배들과 스승들의 도움으로 소규모 가구공장을 경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으로 경영하다 보니 빚도 늘어가고 점점 힘들었다.
부모님들은 조금이라도 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부인과 1979년 3월에 중매결혼을 시켜주었다. 결혼한 1년 후 아들을 낳았다. 생활이 윤택해지기는커녕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석유곤로가 있었지만 석유를 살 돈이 없어서 불을 피울 수 없었고 쌀마저도 없어 끼니를 굶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처가집에서 쌀을 갖다주었고 처가집의 도움으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하였다.
1980년 5월 18일 일요일은 가구업체 정기휴일이었다. 정기휴일이라고는 하나 뾰족이 할일도 없어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하다 전대 후문에 살고 있는 친구집(안유태)에를 가려고 생각했다.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어
오전 10시쯤 내가 집에서 나오려고 하자 아내는 계엄령도 내렸다는데 왜 나가느냐고 무척이나 애달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모처럼 휴일을 친구와 함께 보내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봉주동에서 전남대 후문을 가는 버스를 타고 10시 30분쯤 전남대 후문에서 내렸다. 내가 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계엄군 2명이 나의 양쪽 팔을 각각 잡더니 전대 후문 수위실로 끌고 갔다.
'왜 내가 잡혀가야 하는지 모르겠소'하며 놓아주라고 떼를 쓰고 사정했지만 공수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술취한 사람처럼 얼굴은 벌겋고 벙어리들 처럼 눈만 크게 뜨고 노려보면서 군화발로 차고 사정없이 몽둥이를 내리칠 뿐이었다.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두 팔이 잡혀 있어서 머리를 때려도, 허리를 차도 저항할 만한 힘이 없었다. 더욱이 아무 말 없이 수위실에 잡혀와 있는 학생들을 보면서 겁이 덜컹 났다.
수위실 옆에는 잡혀온 몇몇 학생들이 무릎을 꿇고 포승줄에 묶여 앉아 있었다. 이들 역시도 나처럼 맞은 흔적이 얼굴 표정과 옷차림에서 역력히 드러났다. 나는 수위실로 끌려가자마자 잡혀온 학생들처럼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수위실 앞에 의자 몇 개가 보였다. 그중 한 개에 대위 1명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계엄군 중사 4명이 보초라도 서는 듯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이게 바로 계엄선포라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학교 안쪽으로 끌려가면서 보니 담을 따라 계엄군들은 완전무장을 하고 5미터 간격으로 두 줄로 겹겹이 서 있었다. 맞아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도망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얻어맞아 고통스러웠지만 난 막무가내로 학교 안쪽으로 뛰었다. 1백 미터쯤 뛰었을까 날쌘 계엄군들에게 붙잡혔다. 이때는 처음에 버스에서 내려 맞을 때보다 강도가 더 심했다. 군화발로 차댔고 총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때리고 곤봉으로 등과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나는 저항할 의식마저 잃었다. 한 계엄군은 M16 총으로 쑤실 듯 위협했다. 다시 수위실로 잡혀갔다. 계엄군들은 상의를 벗으라고 강요했다. 상의를 벗었다. 바지를 벗으라고 했다. 바지를 막 벗으려고 지퍼를 내리려는데 대위 1명이 내 손에 쥐고 있는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운전면허증이 담긴 수첩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이것을 대위가 본 것이었다. 운전면허증을 본 대위는 학생이 아니니까 돌려 보내주라는 지시를 하는 듯했다.
그리하여 나는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 후문 앞으로 내팽개쳐졌다. 이곳에서 난 누군가를 만난 것 같은데 바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구타로 얻은 골병
병원에서 깨어나 안 사실이지만 전남대 후문에서 만난 사람은 내가 만나고자 했던 친구(안유태) 동생 안정태였다. 그가 택시를 잡아서 서방에 있는 임종호외과로 옮겼다고 한다. 그때가 오후 2시쯤 되었다. 임종호외과에서는 원장이 응급치료만 해주었다. 그러고는 "싸움이라도 해서 다쳤다면 치료를 다 해드리겠는데 계엄군들에게 붙잡혀 두들겨맞았으므로 누구한테 이야기할 것이오. 응급치료만 해줄 테니까 집에 돌아가서 치료하도록 하시오" 하면서 매정하게 대해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내와 친구의 부축으로 방안에 누웠다. 시간이 흐르자 몸은 점점 더 나른해지면서 붓기 시작했고 정신은 몽롱해지면서 어지러웠다. 마치 고무풍선을 불면 커다랗게 부풀어오르는 것처럼 온몸이 부풀었다. 왼쪽으로 누워 있다가 오른 쪽으로 몸을 바구려고 하면 비명소리만 날 뿐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입고 있던 옷도 벗겨지지 않아 가위로 부분부분을 잘라내어 겨우 벗을 수 있었다. 머리의 통증은 계속되었고, 팔과 다리는 퍼렇게 멍이 들고, 부은 자리는 가라앉지 않 고 철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광주항쟁이 끝난 후에도 머리, 허리, 무릎의 상처는 더 심해지는 듯했다. 일어서서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대로 영영 누워 있어야만 하나? 아내의 얼굴과 아이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매일 울어대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이라는 곳은 찾아갈 수 없었다. 병원에 가고 싶었지만 폭도라는 누명이 무서워 쉬쉬하면서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이렇듯 내가 관절염과 허리디스크로 인해 자리에 오래 눕게 되자 그나마 생계수단이었던 하청 가구공장을 정리해야 했고 가난한 살림은 바닥이 나버렸다. 옆집에 사는 아줌마는 안타까워하면서 밥해 먹을 쌀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쌀을 갖다주기도 했다.
이쪽저쪽에서 구걸하다시피 살아가야 했다. 내가 골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아내는 어디에서 사주(뱀술)를 구해 왔다. 계란을 화장실에 담가두었다가 며칠후 계란을 꺼내어 먹으면 효과가 좋다고 하여 먹기도 했다. 사주도 먹고 계란을 먹자 시간이 흐를수록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두 달 10일 정도 꼼짝 않고 누워 있다가 조금씩 거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워낙 가난한 살림에 세 달 정도 일을 하지 못했더니 아내와 자식은 먹고살기에 지쳐 있었고 나 역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아내와 나는 지금도 그 시절을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결혼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빚더미에 싸여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방에 누운 나와 아내는 어린 아들을 보며 눈물과 한숨으로 그 시절을 보냈다.
거동을 시작한 지 1개월 후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친구 공장의 일을 도우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사글세 20만 원의 단칸방 생활은 날로 어렵고 고통스러웠다. 출퇴근하며 시작했던 가구일도 며칠 지나지 않아 후유증으로 계속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친구에게 몸이 좋지 않아 도저히 할 수가 없다는 말과 함께 공장을 나왔다.
일도 하지 못하고 집에서 한 달 정도 쉬었다. 그러자 다시 몸이 나아지는 듯 했다. 처가집에서 돈을 대주어 어렵게 전남대 후문 부근의 공터에 공장을 마련하였다. 천막으로 사방을 막고 공사판에서 주운 나무토막으로 방을 만들고 가구일을 할 만한 여건을 어렵사리 만들어 일을 시작했다. 한 달에 60만 원 정도 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6개월 정도 지나자 땅이 팔렸다고 나가라고 하였다. 아내와 나는 눈물을 머금고 다시 월산동으로 옮겼다. 이집 역시 방 한 칸에 부엌은 한 사람이 들어가 서면 가득 찰 정도이다. 공장은 한쪽을 천막으로 막은 가건물이었다. 월수입 3, 40만 원 정도 벌어 겨우 생활하고 있다.
무서워서 신고도 못 해
나는 '1980년 5월 18일 전남대 후문에서 계엄군에게 두들겨맞은 부상자'라고 신고할 수가 없었다. 배운 게 없는 나에겐 실로 무서운 사실이었다. 어떤 처벌이 내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신고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지금 주위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살 것을 요구받고 있다. 어느 정도는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불안한 마음도 조금 수그러져 신고를 했다. 그렇지만 신고를 하려고 하자 이곳저곳에서 어려움이 따랐다. 매일같이 동사무소에서 직원이 나와 '자료가 빈약하다', '진단서를 가져와라', '보증인이 필요하다' 등등의 이유로 괴롭혔다. 밤 11시가 넘어서 어디로 서류를 갖고 나와달라고 하는가 하면 아예 노골적으로 "나는 당신들로 인하여 택시비가 얼마나 많이 드는지 알기나 하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너무나 기가 막혔는지 "당신네들은 나라에서 주는 돈 받고 일하는 것 아니냐? 나는 보상이고 뭣이고 내 남편 살아난 것으로 만족하며 그냥 살겠다. 신고하지 않을 것이여!!"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뿐만 아니라 동사무소 직원은 옆집에 사는 주위 사람들에게 "어디에서 다쳤다고 하던가요?", "오토바이 타고 다니다가 다친 것 아니예요? 힘든 일도 잘하던 가요?" 하는 필요없는 말로 우리의 진실을 더럽혔다. 더욱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던 것은 진단서를 떼어오기 위해 임종호외과를 찾아갔을 때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당시 다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진단서를 끊을 수 없다고 우리를 피했다. 그러면 확인서라도 좀 떼어주라고 사정하자 "정부에서 나와 왜 확인서를 떼어주었느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으니까 거절할 수밖에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1988년 10월 어느 날, 그러니까 신고가 끝나고 5·18 부상자 모임에 나오라는 5월 부상자동지회의 연락을 받고 '영호남 친선회'에 가게 되었다. 그때 나는 실로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1980년 5·18이 가져다준 결과의 총체를 보게 된 것이다. 나보다 더 엄청나게 다쳐서 걷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런저런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려고 한다면 5·18에 대해 책임있는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하며, 물질적 보상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안은정) [5.18dusrn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