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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편 | ||
지하철 : 3호선(경복궁역 5번 출구), 5호선(광화문역 2번 출구) | ||
버 스 : 경복궁,광화문에서 하차 | ||
162,171,212,272,601,606,1012,1020,1711,7012,7018,7020,7022,9602,9700,9702,9711,9712 | ||
주소 : 서울 종로구 세종로 1-1 (우110-820) | ||
전화 : (02) 732-1932 | ||
팩스 : (02) 732-1933 |
↑조금 글씨가 잘렸네요 ㅈㅅ합니다..ㅜㅡㅜ
슬픈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_ 옛 러시아공사관 탑
산책길로 사랑받는 정동길 한켠에는 우리가 힘없는 나라로서 겪어야 했던 슬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고종이 피신하였던 러시아공사관이 그곳. 개선문 형식의 정문과 ‘ㄱ’자 형태의 단층 건물, 전망대 역할을 하던 3층짜리 탑으로 구성되어 있던 이 러시아공사관은 해방 직후 소련영사관으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탑 부분과 지하층만이 남았다. 이곳에 얽힌 시대적 상황과 국제관계 등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수 있는 장소.
덕수궁에서 러시아공사관 탑으로 향하는 중간에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정동교회를 만날 수 있고
난타전용극장, 정동이벤트홀 등에서 공연을 감상할 수도 있다. 별도의 관람시간이나 관람료는 없다.
가는 길 지하철 1호선 시청역 2번 출구(지하철 2호선 12번 출구)로 나와 정동극장 조금 지나면 있다.
우리나라 통신의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_ 우정총국
우리나라 최초의 우정업무가 시작된 곳으로 1972년 건물을 보수하고 체신기념관으로 개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래된 한국 엽서와 우표 등 우정사료와 고종황제가 발급한 여권, 신문사 인가서 등 총 3백여 종의 귀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체신기념관으로 쓰이는 우정총국을 비롯하여 우표마당, 편지정원, 전신의 뜰, 커뮤니케이션 광장 등으로 꾸며진 우정공원을 둘러보면 우리나라 통신 역사와 함께 인터넷, 위성통신 등 미래의 통신수단에 대한 정보를 한눈에 알 수 있다. 궁궐을 제외하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가까이에 조계사와 인사동, 경복궁, 창덕궁 등이 있어 주말 나들이 코스로 적당하다.
가는 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로 나와 5분 정도 걸으면 있다.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관람료 무료
부적과 민화, 민속자료가 가득한_ 가회박물관
전통가옥을 개조하여 민속자료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만든 곳으로 인간의 삶과 염원이 담겨 있는 부적과 민화, 기타 민속자료 등 약 1천5백 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이 라기보다는 친근한 한옥집이라는 느낌이 드는 이곳 전시실은 ‘ㄱ’자 형태의 안채를 개조해 만들었다. 신발을 벗고 온돌로 된 방 안으로 들어가면 안내인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주술적 신앙이 반영된 벽사그림, 통일신라시대의 인면와(人面瓦), 귀면와(鬼面瓦), 부적병풍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관람 후에는 직접 부적을 찍고, 귀면와를 탁본하는 체험도 할 수 있다.
가는 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와 전통병과교육원 방향으로 가면 있다.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월요일 휴관)
관람료 일반 3천원, 고등학생 이하 2천원
한양 도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_ 남산 봉수대
남산은 조선시대 궁궐 남쪽에 있다는 의미로 남산이라 불렸지만 고유 이름은 목멱산이다. 이곳에는 93년 ‘남산제모습찾기운동’의 하나로 김정호의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복원한 봉수대가 있다. 봉수는 횃불과 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수단으로 전국적으로 총 6백73개소의 봉수대가 있어 전국 어디서나 12시간 내에 그 내용이 목멱산 봉수대로 도착했다고 한다. 봉수대로 올라가는 길에는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드문드문 한양 도성의 흔적도 남아 있다. 근처에 서울타워가 있는데 이곳 지하의 지구촌민속박물관에 들러 세계 여러 민족의 생활문화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가는 길 지하철 4호선 명동역 하차 후 케이블카를 이용하거나, 버스(지선버스 0014, 간선버스 402)로 남산도서관 앞에서 하차한 후 팔각정까지 걸어가면 된다.
유교의 정신을 고스란히 간직한_ 문묘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와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으로 성균관대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으로 문묘의 담장이 보인다. 제사를 위한 공간인 대성전 구역과 교육을 위한 명륜당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대성전 구역의 현판은 한석봉이 썼으며 단청은 붉은색과 푸른색만을 사용해 단출하고 간결한 느낌이 든다. 대성전 뒤편에 있는 명륜당은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으로 된 우리나라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내는 건물이다. 전국에서 모여든 유림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석전대제를 올리는데 우리나라의 석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형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으므로 이때 방문하면 문묘에 대한 이해를 좀더 높일 수 있다.
가는 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1번 출구 하차 후 성균관대학교 입구로 가면 있다.
관람시간 24시간 개방
관람료 무료
길에서 옛 물건을 구경하는 재미가 덤으로 있는_ 동관왕묘(동묘)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를 모신 사당으로 임진왜란 당시 명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 나라의 신하였던 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까지 지내게 했으니 강대국에 대한 부끄러운 사대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현대를 사는 우리가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문화유산. 중국 건축의 영향을 받아 평면이나 외관이 우리나라 건축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외부를 돌담으로 둘러쌓고 각종 정원수를 심어놓았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동관왕묘로 가는 길에는 오래된 물건들을 파는 가게와 노점들이 즐비해 추억 여행을 즐길 수도 있다.
가는 길 지하철 6호선 동묘역 5번 출구로 나와 50m 정도 걸으면 보인다.
관람시간 오전 6시~오후 6시
관람료 무료
조선시대 건축양식과 우주 이치 담은_ 대원군 별장의 별당
10평 남짓 아담한 규모의 건물이지만 장인의 숨결과 정성이 느껴지는 이 별당은 ‘석파랑’이라는 음식점으로 사용하고 있는 전통가옥 내에 있다. 대원군 별장에 있던 건물을 서예가 손재형 씨가 옮겨온 것으로 전체적인 공간의 구성, 벽면의 사용, 창의 모양, 마감질까지 모두 빈틈없이 처리했다. 특히 건물 왼쪽 벽에는 하늘을 뜻하는 원형 창이, 오른쪽에는 땅을 뜻하는 네모 창이 있는데 여기에 사람이 사니 이 건물 한 채에 천지인, 즉 우주의 근본이 되는 삼재가 담겨 있는 것. 대청을 중심으로 하는 정면, 내부구조, 창살 등은 전통한옥의 형식을 갖췄고 외형을 이루는 모습은 조선 말 중국 청나라의 영향을 받았다. 1백50년의 역사를 간직한 전통가옥은 조선왕조
건축양식의 표본으로 상류사회의 대표적인 사랑채 모습을 보여준다.
가는 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버스(지선 0212, 1711, 7081)로 갈아타 상명대 앞에서 하차한다.
사대문 밖 역사문화공간
설렁탕의 유래가 깃든_ 선농단
고대 농업을 발전시킨 인물로 알려진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드리던 곳으로, 설렁탕이 유래된 곳이기도 하다. 선농단에서 제사가 끝나면 소를 잡아 국을 끓여서 농부들과 구경 나온 노인에게 대접했는데 이 국을 선농단에서 끓인 국이라 하여 선농탕이라 하였고 다시 설롱탕, 설렁탕으로 변한 것. 선농단 아래쪽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향나무가 있는데, 조선 초기 선농단을 축조할 당시에 심어 5백 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선농단 외에도 사직단, 원구단 등 10여 개소의 제단이 있었으나 오늘에 와서는 그 의미가 퇴색한 것이 사실. 정성과 간절함으로 제를 올리던 제단의 흔적을 선농단에서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별도의 관람시간이나 관람료는 없다.
가는 길 지하철 1호선 제기역 1번 출구로 나와 100m 정도 걸으면 있다.
한국 교회 역사가 숨쉬는_ 절두산 박물관
188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탄압을 받았던 역사의 현장. 병인순교 1백 주년을 기념하여 절두산 봉우리에 순교기념관과 성당을 지었다. 기념관 2층과 3층엔 기념박물관이 있어 교회사 관계 자료, 문헌 관계 자료, 유물 및 유품 등 총 3천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3층에는 한국 교회의 창립과정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자료와 신유, 병오, 병인박해 관련 사료 및 유물 등이, 2층에는 역대 주교들의 유품과 천주교회의 역사적 흐름을 보여주는 자료 등이 있다. 기념관 앞쪽으로는 순교기념공원을 꾸며놓아 자유롭게 산책을 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가는 길 지하철 2·6호선 합정역 7번 출구로 나와 합정시장 방향으로 15분 정도 걸으면 있다.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5시30분(12~1시 점심시간, 월요일 휴관)
관람료 1천원
세종대왕의 업적을 한눈에~_ 세종대왕 기념관
수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의 뜻을 기리기 위해 관련 유물을 전시해놓은 곳. 세종대왕의 어진(사진)과 재위 32년 동안의 행적을 동양화로 제작하여 진열하고 있는 일대기실, 한글 및 훈민정음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한글실, 금속활자 관련 유물과 천문기구 및 지도 등을 진열하는 과학실, 그리고 궁중에서 사용하는 악기와 악사·무용복식 등을 진열하는 국악실 등이 있다. 기념관 외부에서도 물시계 모형, 세종대왕 신도비 등 다채로운 유물을 만날 수 있다. 기념관 주위가 공원처럼 나무와 잔디밭으로 조성되어 있어 가족 나들이에 제격.
가는 길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2번 출구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있다.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월요일 휴관)
관람료 일반 1천8백원, 고등학생 이하 1천2백원
국립묘지
6·25때 전사한 국군 장병들과 무명 용사를 모시기 위하여 1955년 국군묘지로 창설하여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었습니다.
총 면적 42만평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순국한 애국지사, 군인, 경찰 11만 명의 무명 용사들의 위패가 모셔졌으며,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고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1983년 10월 9일 버마 아웅산 폭파 사건으로 순국하신 서석준 부총리 이하 16인의 외교 사절단이 고이 잠들어 계신 곳입니다. 입구의 꽃시계는 제일 동포 박철성씨가 기증하였으며, 시계탑은 이승만 박사의 부인이신 프란체스카 여사가 기증하였습니다.
제 1 한강교
1917 년 그때 돈 2백 9만원으로 만들어졌으며, 1950년 6월 28일 6·25때는 너무 빨리 다리를 폭파, 수많은 인사들이 피난을 못하고 북으로 북으로 미아리 고래를 넘어 끌려가는 일을 당하여 폭파 책임자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군법화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늘어나는 교통량를 감당하기 위하여 1981년 12월 원래 다리 옆에 다리를 하나 더 놓아 일명 쌍둥이 다리가 되었다.
대한생명 63빌당
동 양 최대의 대한생명 63빌딩은 1980년 2월에 착공하여 1985년 7월에 완공되어 5년 5개월이 걸렸으며, 대지 6천 5백 평에 연건평 5만 2백 평 공사비 1천 8백 억의 엄청난 돈이 들었고, 자본과 세부 설계에서부터 시공까지 모두 우리 기술진에 의해 이루어졌다. 높이가 264m로 남산보다 조금 낮으며 일본이 동양 최고라고 자랑하는 60층 션샤인 빌딩보다 23m나 높으며, 황금색 특수 유리는 1만4천장에 달하여 한 장에 30만원 하니까 유리 값만도 40억 원이나 되고, 철근이 2만 5천 톤이 되어 8톤 트럭으로 6,000대 분이나 된다.
상 주인구 1만 명에 유동인구 2만 명, 하루 약 3만 명의 인구가 이 건물에 출입하니 수직 도시가 되며, 이 건물에서 하루 쓰는 전기세와 수도세는 의정부시 전체가 쓰는 양과 거의 같을 것이라 한다. 이 큰 건물의 안전도는 특수공법인 피어 공법으로 지반을 다져 초속 40m의 강풍과 진도 7의 지진을 만나도 견딜 수 있으며, 건물 끝 부분은 좌우 30cm까지 흔들릴 수 있는 철골로 설계되어 있고 화재 발생 시 1,000℃의 온도에도 2∼3시간 견디도록 되어있다. 부대시설은 아이맥스 특수 영화관, 수족관, 쇼핑센터, 사무실 등이 있으며 60층 전망대에서 맑은 날에는 인천 앞 바다와 잠실 올림픽 타운 등 반경 50km를 볼 수 있다. 한다.
여 의 도
옛 날 고려시대에는 말의 사육지로 쓰였고, 조선시대에는 목장, 해방 후에는 조그만 비행장과 잡초만 우거진 섬이었던 것을 1968년 약 7km의 제방을 쌓아 73년 말까지 개발되어, 총면적 98만평의 부지에 1970년 완공된 여의도 교와 서울대교로 육지화되어 국회 의사당, K·B·S 방송국, 5.16 광장, 등의 고층빌딩들이 들어서 서울의 심장부로 개발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국회의사당
10 만평의 대지위에 1969년 7월 17일 제헌절에 착공하여, 1975년 9월 1일 준공하였다. 공사기간은 6년이 걸렸으며, 지상 6층 지하 2층 총 공사비는 그때 시세로 135억 원이 들었으며, 24의 기둥은 24절기를 뜻하고 통일이 되면 통일 국회를 열 수 있도록 의석을 마련해 놓았다. 그리고 지붕이 둥근 것은 태양을 뜻한다.
K . B . S
1973년 착공, 1976년 완공하여 지상 7층으로 내자 18억, 외자 750만 불로 건립되었으며 950m의 4견학 통로가 마련되어 있어, 관광객들이 실지 연속극과 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종합 안보 전시장.
정 부의 지원과 유엔 참전국의 협조로 1972년부터 병기를 전시, 6.25당시 사용하였던 탱크, 대포, 소총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2차 대전때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탄을 투하하였고 6.25때 맹위를 떨쳤던 B29폭격기와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큼 수송기가 전시되어 있으며, 6.25때 국군 6사단 2연대가 노획한 소련제 리무진 김일성 승용차가 1951년 미국으로 건너가 자동차 수집가의 소유가 되었던 것을 대우주식회사가 구입 기증하여 국민의 반공의식을 재인식시키기 위해 이곳에 전시하여 오늘에 이른다.
마포대교(서울대교)
여의도 개발에 의해 1968년 착공, 1970년 5월 16일 개통 외었고, 공사비 9,800만원이 들었으며 길이가 1,350m 폭 25m이다.
원효대교
여 의도에서 원효로를 연결하는 이 다리는 1981년 10월 20일 준공되었으며, 길이가 1,470m 폭 20m로서 동아그룹 최원석씨가 개통하여 돈을 주고 통과하던 것을 1983년 2월에 서울시에 헌납하여 무료로 통행한다. 공사비 245억 원이 들었다
양화대교(제2한강교)
경인 고속도로가 연결되며 조선시대에는 양화진이라는 중요한 나룻터가 있었으며, 1962년 착공 1965년 개통되었고, 길이 1,128m 폭 18m 이다.
성산 대교
1977 년 착공하여 3년 3개월 만인 80년 6울 30일 완공되었으며, 공사비 257억 원이 들었고 길이 1,410m 6차선 도로로서 160일간 수중공사를 하여 잠수부가 연인원 4만 명이나 들었다고 하며, 영등포에서 성산 대로를 통해 중앙청까지 제일 빠르게 갈 수 있는 도로입니다.
인공폭포
1977년 6울 27일 염창동 공항교 옆 절벽 위에 동양 최대의 인공 폭포가 완성되어 높이 18m 폭 90m로 설악산, 지리산, 금산 등지의 바위 모양을 실물과 같은 크기로, 화학 수지로 쌓고 6개의 폭포를 만듬.
1분에 156톤의 물을 방출, 오가는 시민을 시원하게 한다.
서울시가 공사비 4억5천만 원을 투입.
강변도로
1967 년 서울시가 첫손을 댄 강변 1로를 계기로 강변 2·3·4·5로를 건설하여 한강을 새롭게 하였고, 강변 1로는 성북구 하일동에서 영등포구 방화동에 이르는 총 연장 72.3km고 한강 연안의 노후한 제방을 보강 신설한 다음 폭 13m∼20m의 강변 도로를 건설하였다.
김포공항
김포 평야 광활한 지역의 우리 나라 하늘의 현관인 국제 공항이다. 하루 평균 약 50대가 이착륙되며, 출입국 여객은 약 1만 여명이 된다. 미 공군의 비행장으로 사용되다가 1958년 국제 공항이 되었으며 길이가 1,400m이다.
한남대고(3한강교)
1966 년 1월 19일 착공하여 1966년 12월 25일 준공되었으며, 길이 915m 높이 21m 폭 27m 총 공사비 150억 원이 들었으며, 다리 놓기 전에는 한남나루터가 있었으며, 경부고속도로와 연결 강남구와 영동이 급속도로 발전되었고 혜은이의 노래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슬람 서원
1976 년 5월 한남동의 경계지점 언덕에 회교의 독특한 건물 모양으로 건축 외었고, 마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전 세계 헤비급 챔피언 권투 선수 무하메드 알리도 이곳에서 예매를 보았다. 회교란 기독교, 물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며 마호멧을 주교로 코란을 교리로 한다. 주로 아랍 국가들이 많이 믿으며 신도 수는 4역5천만으로 추정된다.
남 산
옛 날에는 목멱산이라 불리웠고 1910년에는 한양 공원으로 불리웠다. 높이가 265m이며, 옛날에 남산골 딸각발이란 말이 있었는데, 이것은 남산골에 살던 가난한 선비들이 나막신을 신고 다닌다고 해서 나온 말이며 백범광장, 국립도서관, 소파 방정환 선생의 동상, 안중근 의사기념관, 서울 타워 등이 위치하고 있고, 예나 지금이나 이 공원은 서울 시민의 정다운 휴식처이다.
남산타워
거 대한 송신탑인 이 탑 안에는 화재 감시소, 송신소, 전망대, 휴게실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1975년 완공되어 높이가 236.7m 해발 479m로서 동양제일이며 세계에서 모스크바 안테나 해발 537m 다음으로 높으며, 일본의 자랑 도꼬 타워 보다 146m나 더 높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인천 앞바다가 보이며 사방 150리를 굽어 볼 수 있다.
남산1호터널
1970 년 8월 15일 개통되었고 길이가 1,530m 폭 10.8m이며, 한남동에서 필동간 약 20분 소요되는 것이 단 2분으로 단축 외었고, 거리는 6km 단축 양벽에 886m의 황색 등이 밝혀주며 공사비는 약 15억이 들었다.
남산2호터널
1970 년 12월 완공되었고 길이가 1,630m 폭10.9m 해방촌에서 장충동까지 약 20분 단축되었고, 양벽에는 황색 슈퍼 나이트 956개가 밝혀 준다. 터널에는 왜 백색 등이나 형광등을 쓰지 않고 황색 등을 쓰고 있나 하면 황색 등은 운전기사님들이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갈 때 일어나는 착각을 없애고, 벌레들이 황색을 싫어하기 때문에 모든 터널은 황색 등을 쓰게 됩니다.
남산3호터널
1977년 4월 25일 완공 개통되었고, 길이 1,270m폭이 10.7m 해방촌에서 회현동까지의 거리를 단축 시켜주며 공사비는 97억5천 만원이 들었다.
장충단공원
새 벽부터 밤늦게까지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가장 개방된 공원으로서 우거진 숲과 석호정이 있으며, 사명대사와 유관순의 동상이 있다. 장충단은 1895년 8월 명성왕후 민비가 왜인들에 의해 봉변을 당할 때, 이를 막고자 순직한 궁내 대신 이경식과 장졸들의 영혼을 달래고자 고종 4년에 건립한 제단. 이 제단은 6.25로 소실되고, 지금은 장충단이라는 고종의 친필로 된 비석만 남아있다.
장충체육관
국내 최초의 실내 종합 체육관으로서, 1963년 2월 준공, 대지 4250평 경기장320평, 스탠드 880평, 냉난방 시설을 갖추어 각종행사도 열린다.
동대문운동장
을 지로 7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시민의 변함없는 도시 생활의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기 위해 드나들며, 잠실 운동장이 생기기 전에는 각종 운동 경기 프로야구 등의 행사를 하였고, 조선조 때에는 이 자리에 하도감이 설치되었었다. 임오군란 때에는 청나라 오장경의 5천의 군사가 진을 쳤던 역사의 현장이던 것을 1926년 3월 경성 운동장이 세워지면서 국제 경기 및 국내 경기가 수없이 치러졌던 곳.
동대문(보물1호)
한양 도성 동쪽의 정문이며 홍인지문이자 보물 1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 대문과 함께 도성 축조때 기공되었으나, 땅이 무르고 여건이 불리해 태조 6년(1397년) 준공 되었고, 지금의 동대문은 창건 당시보다 크게, 1869년 대원군때, 개축되어 세부구조가 정교하고 특이한 것은, 석별이 이중으로 되어 적이 성을 넘어 침입했을 때 배후를 공격하도록 되어 있고, 흥인지문의 흥인은 동쪽을 뜻한다.
현 판이 처음에는 흥인문이었던 것이 세조 임금 이후 흥인지문으로 고쳤다. 다른 문의 현판은 모두가 석자인데 이 문만 넉자로 된 것은 풍수설에 인은 목에 속하고, 목은 동에 속하므로 흥인은 동쪽을 뜻하나 지자를 더한 것은 서울지세가 남쪽, 북쪽, 서쪽은 산과 고지로 되어 있으나 동쪽은 평지이기 때문에 풍수지리설로 외세를 막기 위한 뜻으로 풀이된다.
창경원(사적 123호)
수강궁이란 궁궐이 있었던 자리로 조선 4대 세종 임금이 1419년 즉위하면서 선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궐, 그후 성종 14년 생존한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세채의 궁궐을 짓고 창경궁이라 불려졌다.
1592 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16년 광해군 8년 복구하였으나 1830년 순조30년 큰 화재로 정전인 명정전을 제외한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원형대로 잘 보전된 명정전은 조선 왕궁의 정전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국보 226호로 지정되었으며, 1909년 순종 3년 창경궁에 동물원, 식물원을 꾸미고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 황제가 덕수궁에서 창경궁으로 옮기시고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일제가 궁의 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창경원으로 개명하였고, 일본 국화인 벚나무로 조경 하였다.
해방후 수 십년간 서울 시민의 사랑을 받은 창경원은 동·식물원이 과천으로 옮겨가고 1983년부터 창경궁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1986년 8월 23일 준공되어 원래대로 중창하였다.
종묘
태 조 이성계가 건국에 성공하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종묘를 세웠는데 종묘는 조선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 한 묘이다. 임진왜란으로 일부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에 증축하여 규모를 늘렸으며 약 5만6천 평이다.
돈화문
조선 3대 태종 12년(1412년)에 세운 이조 초기의 목조 문루이며 창덕궁의 남쪽 정문이다. 임진란의 병화를 모면하여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며 보물 383호.
창덕궁(사적122호)
조 선왕조 500년의 5대 궁궐중 가장 잘 보전된 궁궐이며 별궁으로 건립되었으나 경복궁과 함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623년 인조반정때 대부분 소실된 것을 서기1647년 인조 25년 완전 복구되어 1910년 한·일 합방으로 인하여 조선 순종황제를 끝으로 295년간을 왕궁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이 궁궐을 무대로 사육신의 참형을 비롯하여 사도세자의 애달픈 죽음이 있었는가 하면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겪었고, 낙선 제에는 순종임금의 왕비인 윤비가 1965년까지 사시다가 돌아가신 후 지금은 영친왕의 비였던 이방자 여사가 거처하고 있으며, 창덕궁 후원으로 만들어져 임금님과 왕비의 산책로이자 정원이었던 비원은 일본의 인공적인 공원이나 중국의 복잡한 기교의 정원과는 달리 천연의 지형을 이용한 자연 정원으로서 부용정, 주합루 등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하게 하고, 궁내에는 보물383호인 돈화문, 보물813호인 인정문, 국보225호 인정전과 고종황제가 사용하시던 프랑스제 마차와 순종황제가 타시던 우리 나라 최초의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다.
경복궁(사적 117호)
태 조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건국하고 그해 7월 7일 송도 수창궁에서 즉위하여 1394년 10월 한양으로 새 도읍을 정해 천도하였고, 1395년 9월에 경복궁을 완성하여 정궁으로 사용하였으나 1592년 조선14대 선조 임금때 임진왜란으로 소실 방치되었다가 273년후인 1865년 고종2년 흥선대원군이 백성들의 부역과 과중한 세금, 도한 당백전 등의 발행으로 많은 원망을 들으며 1868년 준공시켜 고종 임금을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시도록 하였지만 1895년 음력 8월 20일 민비가 왜인의 손에 무참히 돌아가시자 이듬해 황태자와 함께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가시니 이름처럼 경복하지 못하였으며, 1910년 한·일 합방후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짓는다는 구실로 근정전, 경회루 등 10여동의 건물만 남기고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좋은 재목은 일본으로 가져가 개인의 집을 짓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궁에는 국보223호 근정전, 국보224호인 경회루, 국보102호 홍법국사 실상탑, 국보86호 경천사10층석탑 등 수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근정전(국보 223호)
경복궁의 정전으로 문무백관의 조하를 비롯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법전으로 서기 1394년 태조3년 창건되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서기 1867년 고종4년에 재건하였다.
2대 정종, 4대 세종, 6대 단종, 7대 세조, 9대 성종, 11대 중종, 3대 명종 등 여러 국왕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경회루(국보 224호)
경 복궁 창건 당시 연못을 파고 다락집을 세웠고, 서기 1412년 태종12년 공조판서 박 자청이 48개 돌기둥을 세우고 기둥마다 용을 새겨 크게 누를 지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1867년 고종4년 복원하였으나 기둥의 용은 새기지 못하였다 하며 연못 가운데 웅장하게 떠 있듯이 서 있는 누는 연꽃과 어울려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중국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기 위해 건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립 중앙박물관
1986 년 8월 21일 구 중앙청을 개축 이전 개관한 박물관은 공사비 277억 원이 들였으며, 대지 30,435평에 연건평 17,991평, 23개 전시실, 대규모 사회교육관, 넓은 야외공간 및 각종 편의시설로 전시내용이나 시설규모에 있어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며 전통문화 보존과 문화창조의 요람이 될 것이며, "전시규모는 국보 및 보물, 유물, 유적 약 7,500여 점이 전시되어있고, 전시물의 화재 및 도난, 훼손방지를 위해 세계에서 자랑할 수 있는 완벽한 사설로 전시실 10mm의 강화유리창이 깨어졌을 경우 즉각 경보가 울리는 감지장치와 전시실을 24시간 감시하는 폐쇄회로 TV장치가 되어있고, 화재가 발생할 경우 비상벨이 울리면서 사람이 대피하는 즉시 철제방화문이 닫히면서 문화재는 손상되지 않으면서 불이 꺼지는 할로겐스가스가 분사되어 자동으로 화재가 진압된다고 한다.
우 리 나라 박물관의 효시는 서기1908년 대한제국 마지막 임금인 순종황제가 창경궁에 이 왕가 박물관을 발족시킨 것이 처음이고, 1913년 경주박물관이 발족되었으며, 1915년 12월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이 발족되었으며, 중앙박물관은 덕수궁 석조전, 경복궁 내의 박물관 등으로 옮겨 다니니다 1986년 8월 21일 구 중앙청 자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중앙청
1916 년 일본이 우리 나라 침략의 근거지로 조선 총독부 건물로 사용하려고 경복궁의 많은 건물을 헐어버리고 착공하여 10년 만인 1926년 10월 준공을 보았고, 총 공사비 6백75만1천9백82운을 들여, 평당 건축비다 620원이 들었다. 이때 쌀 한 가마니에 12원을 하니 평당 쌀 52가마니가 들었고, 설계는 일본인 노무라가 하였다. 화강암은, 창신동과용두산에서 전차로 운반하였고 대리석은 화해도 금천에서 목재는 압록강변의 낙엽송 벽돌은 마포 연화제작소에서 구입하여 연건평 9천4백71평아 외었다. 해방 후 중앙청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한때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의 잔재라 헐어 버리려고 했으나 너무 견고해 철거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포기하였으며, 정부종합청사가 과천에 준공되어 각 부처가 옮겨가, 수리 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보신각 종(보물 2호)
조 선 7대 세조 원년(1995년) 주조되어, 높이가 364㎝ 구경224㎝의 큰 종으로 종로 네거리에 위치 옛날에 밤 10시에 28번 이 종을 타종하여 성문을 닫고 통행이 금지되었고, 새벽 4시 33번 타종하여 성문을 열고 통행을 시작한다고 알렸다.
몇 백년 동안 백성에게 시간을 알렸던 종소리가 청·일 전쟁 이후 폐지되고, 매년 12월 31일 자정이 되면 서울 특별시장이 33번 타종하여 새해가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으나, 종에 금이 가서 그 역할을 다하여 국립박물관에 영구 보존되고, 새 종으로 서울 신문사가 주관 겨레의 뜻을 모아 높이 400㎝ 구경223㎝ 무게 20톤으로, 1985년 8월 15일 구 종과 교체되어 한국 최고의 종으로 부가되었다.
파고다공원
부 지 3,331평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공원이며, 이 공원이 유명해진 것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난 뒤부터이다. 공원 자리에 원래는 조선 세조 12년(1464년) 원각사를 세웠으며, 전각의 지붕은 8만장의 청기와로 덮었고, 10층탑을 건하였으나 폭군 연산이 왕위에 앉자 비운을 맞게 된다. 연산군은 원각사를 폐사시키고 전국 각지에서 뽑아온 기생들의 숙소로 만들었는데 1512년 모두 철거하여, 절터만 남아 있던 것을 고종 34년(1897년) 공원으로 개방하였다.
【전 설】
고 려 충숙왕에게 금동이라는 어여쁜 공주가 있었는데, 명나라 사신이 고려의 수도 개성에 오게 외었을 때, 공주를 보고 아름다움을 칭찬하였다. 이 말을 들은 명나라 황태자 순제는 금동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몇 차례 청혼 사신을 보내 결국은 결혼하여 낯선 이국 따에 시집을 갔으나 늘 어버이가 그리워 눈물을 흘렸다. 어버이를 그리는 마음이 지극한 금동 공주는 유명한 석공에게 부탁하여 2개의 탑을 조각하게 하여, 자기 대신으로 생각하시라고 고국의 어버이에게 보내 드렸다. 충숙왕은 기쁨에 넘쳐 그 탑을 온 백성이 볼 수 하나는, 개성 경천사에 또 하나는 조계종 본사인 흥복사에 세웠다. 그후 흥복사는 폐사가 되어 그 자리에 조선 세조 때 원각사가 세워졌으나, 역시 폐사되고 오늘날 파고다 공원이 되어 10층 석탑은 국보 2호로 지정되었으며, 경천에 있던 한 개의 탑은 구한말 황태자이던 순종이 결혼할 때 축하사절로 온 일본의 궁내 대신 다나까가 일본으로 가져가 우에노 박물관에 두었는데, 탑의 약탈 소식이 국내외에 전해지자 여론이 나빠져 할 수없이 반환되어 1960년 수리 복원되어 경복궁에 세워졌으며, 국보86호로 지정되었다.
세종 문화 회관
화 재로 소실된 시민회관 자리에 우뚝 선 세종 문화 회관은, 1974년 착공하여 1978년 4월에 준공, 대지5,611평에 연건평 16,122평 4242석의 대강당, 530석의 소 강당 지하 3층 지상 6층의 이 건물은 948억 원이 들었으며 세계 굴지의 뉴욕 링컨센터 오페라 홀 그리고, 3천700석 일본 NHK 홀보다 더 큰 세계 유수의 문화 회관입니다.
덕수궁(사적 124호)
조 선 9대 성종의 형인 월산 대군의 사저로 지었던 소규모 궁궐이었으나, 임진란 이듬해인 1593년부터 선조께서 승하하실 때까지 15년을 행궁으로 사용되었으며 광해군과 인조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하였고, 광해군이 선조 계비와 인목대비를 연금 유폐시키면서 경운궁이라 했다가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부터 환궁하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하였고, 고종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남대문(국보 1호)
남 대문이라 불리는 숭례문은,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문이며 1395년 착공, 1398년 2월 태조 7년에 준공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448년 세종 29년에 크게 개축된 것이다. 도성의 정문으로서 왕도의 관문이었으며 오늘날도 서울역에서 내려 도심을 향해 들어가면 북악산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남대문을 바라보면, 서울에 온 최초의 감회를 인상 깊게 하고 있다.
남 대문에는 숭례문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데 이 현판은 양녕 대군과 대 문필가인 한 석봉이 썼다고 전하며 숭례문이라는 세 자중에 례 자는 5행 즉, 화·수·목·금·토 중에 화에 해당하여 불을 상징하며, 5방에 있어서는 남쪽을 뜻한다고 한다.
다른 문과는 달리 현판을 종서로 쓴 것은 경복궁의 안 산인 화산과 관악산을 대립시켜 불을 막으려는 것으로 풍수설이 전하며 6·25때 일부 파괴된 것을 1963년 5월 10일 1,800만원을 들여 복원하였다.
조선호텔
경 정 공주를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 조 대림에게 출가시키면서 지금의 소공동 일대의 땅을 하사하여, 저택을 짓게 하였는데 이것이 소공 주택이며 소공동이란 동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고 그후, 조 대림의 후손이 죄를 지어 땅을 몰수하였으며 선조 때 선조의 셋째 왕자인 의안군이 이곳에 저택을 짓고 남별궁이라 불렀으며, 1913년 일본인들이 이를 헐어 버리고 독일인 괴테란테의 설계로 붉은 벽돌의 서양식 건물 조선호텔을 건축하였는데 1967년 이를 철거하고, 한국의 관광공사와 미국의 아메리칸 에어라인 회사가 합작 투자로 총 공사비 33억으로 지하 2층, 지상18층, 객실 504개의 최신형 맘모스 호텔을 설립하였다.
우리 나라 호텔의 역사
서울에는 크고 작은 호텔이 수없이 많다. 재불 호텔이 처음 들어섰고 그후1900년 독일인 손 닥크 여사가 현재 이화여고자리에 호화판 2층으로 세운 손 닥크 호텔 이후 조선호텔, 반도 호텔이 세워 졌습니다.
한국의 아스팔트
1925년 남대문 앞 아스팔트 공사와 사 하수도 공사는 서울 시민의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이것이 우리 나라 아스팔트 공사의 시초였다.
서울역
중앙청 시청과 함께 서울의 3대 건물의 하나이며 경부선과 호남선, 경인선의 시발지이고 일제시대 건물로서 가장 오래 되었으며, 소련 사람이 설계하였다 한다.
삼각지 로터리
서 울의 명물인 삼각지 로터리는 마포와 제1한강교, 서울역, 이태원을 입체 교차하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로터리로서.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의 노래로 더욱 유명해져 지방에서 오는 관광버스가 돌다가 방향 감각을 잃어 다른 길로 내려가는 웃지 못할 일도 있으며, 시골 노인을 태운 관광 버스는 한 바퀴 돌 때마다 일년을 더 산다고 7번을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육신 묘
조 선 7대 세조 임금이 어린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임금이 되어 단종을 상왕으로 모셔 창덕궁에 있게 하였는데 단종을 보필하던 성삼문, 유응부, 김문기, 박팽년, 하위지, 이개 등의 충신들이 상왕의 복위를 은밀히 전개하다 배신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말로 할 수 없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불의에 항거하니 그들에 대한 처형은 형용하기 어려웠다.
이 에 유성원도 자결을 하니 이들이 이조 500년을 통해 가장 존경받았던 충의들이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의기를 추모하고 져, 1681년 숙종 7년에 민절 서원이, 정조 때는 신비도가 세워졌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헐렸던 것을. 1978년 서울시가 13,000여 평으로 확장하면서 의절사·불의문·홍살문 등을 세웠으며 충효 사상의 실천 도장으로 정화하였다.
아차 고개의 전설
한강 너머 영등포 가는 길에, 사육신 묘 앞 고개를 아차 고개라 하는데 조선 명종 임금때 홍계관이라는 점술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자기의 명을 점쳐보니 모년 모월에 죽을 점괘가 나왔다.
살 길을 찾아보니 용상 아래 숨어 있으면 면 할 수라 임금님께 청하여 용상아래 숨게 되었다. 그때 마침 쥐 한 마리가 지나갔는데 몇 마리인지 점을 쳐봐라 하니 홍계관은 3마리라 대답하였다. 왕은 엉터리 점술가라 하여 크게 노하여 홍계관의 목을 베라고 하였다. 홍계관이 형장에 도착하여 점을 쳐보니 한식경만 기다리면 살 수 있는 괘라 형관에게 사정하여 집행을 조금 연기하였다. 홍계관을 형장으로 보낸 후, 왕은 생각한 바가 있어 그 쥐를 잡아서 배를 갈라 보니 새끼 2마리가 있어 신통한 홍계관의 점에 놀라며 곧 신하를 형장으로 보내어 구하게 하였다. 신사가 급히 달려가 보니 막 형을 집행하려는 순간이었다. 크게 소리쳐 중지하라 하였으나, 못 알아들으니 손을 흔들어 신호하였으나, 집행관은 사형을 빨리 하라는 줄 알고 목을 쳐죽였다. 신하가 왕에게 사실을 아뢰니 왕은 아차 하고 슬퍼하였다.
이때부터 그 형장을 아차 고개라 불렀다 한다.
사직단과 공원(사적 121호)
인 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사직단이란, 임금이 토신과 오곡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인데 조선 태조 2년(1394년) 경복궁 오른쪽에 사직단을 건설하고, 사직서라는 관아를 두어 일년에 4차례 제사를 올렸으며 기우제도 이곳에서 지냈다. 율곡 이이와 그의 어머니 신 사임당의 동상이 있으며. 정문은 보물 177호로 지정되어 있다.
북악스카이웨이
성 북구 아리랑 고개에서부터 자하문까지 11.8㎞의 포장된 서울의 환상도로, 서울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며 삼각산의 경치도 볼 수 있다. 이 관광도로는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1968년 9월 28일 개통되었으며 공사비 3억 원을 들였고, 하와이 잔디와 9만여 그루의 관광 수, 180여 개의 수은등을 설치하여 멋진 드라이브코스가 되었으며, 정상에 오르면 팔각정 전망대가 있고, 해발 350m이다. 이 도로는 걸어갈 수가 없으며, 차량도 주차장 외에는 주 정차를 할 수 없다.
최규식 경무관 동상
1968 년 1월 21일 북괴 특수부대 124군, 김 신조 일당 31명이 청와대 폭파 임무로 청운동 가까이 왔을 때, 청운동 입구에서 발각되어 김 신조만 살고 나머지 모두 사살되었다. 이 전투에서 당시 종로 경찰서장 최 규식이 순직하여 일계급 특진 되였으며 그의 명복을 빌고 져 동상을 세웠다.
독립문(사적 32호)
고 종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선포하자 국민들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져,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서 재필 박사가 영도하는 독립협회에서 각계 각층의 찬조를 받아, 1896년 11월 약 4,000원의 자금으로 러시아인의 설계로 파리의 개선문을 본 따 건립하였고 도로 한 가운데 위치하였으나 1979년 고가 차도 공사로 인하여 현 자리에 옮겨져 공원화 되었다.
무악재 독립문에서 불광동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오른쪽에는 컴퓨터보다 더 빨리 주산을 놓는 학생을 배출시킨 여상의 명문 서울여상이 있으며, 옛날에는 이 고개가 모아재로서, 길이 험하여 여러 사람이 모아서 간다는 뜻이었다.
【전설】
옛 날 효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매일 무악 재를 넘어 고양군 선친 묘소에, 성묘하러 갔다. 어느 날 이 고개에 이르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효자가, 선친 묘에 성묘하러 가는 길이나, 잡아 먹으려면 잡아 먹어라 큰소리 치니 호랑이는 달려드는 것이 아니고 등에 타라는 듯이 뒷걸음으로 다가왔다. 효자가 호랑이 등에 타니 바람처럼 달려가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선친 묘 앞에 당도하였다. 성묘를 하고 돌아갈 때도 무악 재까지 호랑이 등을 타고 왔는데, 호랑이도 효성이 지극한 효자에게 감동하여 매일 매일 태우고 오고 갔다. 세월이 흘러 효자가 나이 들어 죽으니 고양군 그의 선친 묘 옆에 묻었는데, 얼마 후 그의 집안에서 이곳에 와보니 효자 묘 앞에 큰 호랑이가 죽어 있어 그 옆에 묻어주고 매년 같이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하며, 이 이야기가 임금님께 전해지자, 그의 묘 옆에 사당을 짓게 하니 그의 묘 부근 동네를 효자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절두산
조 선시대 사형장이던 새남터이며 세조2년 사육신을 처형하기도 했고, 고종 3연(1866년) 대원군이 천주교 박해로 한국 최초의 신부 김 대건을 비롯 많은 천주교도들이 순교하여, 새남터와 가까운 하천 부지에 순교 기념탑을 세우고, 성당과 수녀원을 세웠다.
봉은사(강남구 삼성동)
신 라 원성왕 10년(794년) 연회 국사가 창건하였고, 조선 연산군 때에 정현 왕후가 성종의 선릉을 위하여 중창하고 봉은사라 불렀으며 명종 임금때 문정황후의 도움으로 선종의 수사찰로 지정하여, 보우 대사로 하여금 판사가 되게 하여 승과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후에 사명대사와 서산대사도 이곳에서 시험을 치르고 등과 하였다.
한양성
조 선조 500년을 말없이 지켜본 이 한양성은, 이 태조 4년 도성 축조도감을 두고, 장정 19만 7천 여명을 동원 4년 걸려 쌓았던 당시 18㎞였던 것이 수 백년 을 흐르는 동안 파괴되었고, 또 6·25로 무너진 것을 1975년 남아 있는 약 11㎞를 완전 복구하였다.
【서울의 유래 전설】
한 양이 도읍지로 결정되자 사방으로 성을 쌓기로 했는데, 위치를 어디로 하느냐 고심하였다. 눈이 많이 오는 밤 이 성계가 꿈을 꾸었는데, 하얀 옷을 입은 도승이 나타나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울타리처럼 왔을 것이니 그곳을 따라 성을 쌓으면 500년은 무사할 것이라고 이르니, 과연 날이 새어 밖을 보니 하얀 눈이 쌓여서 눈 울타리처럼 되어다.
명동
서울 최고의 번화가이며 유행을 만드는 패션의 중심가 이다. 파리의 최신 패션이 일주일이면 선을 보인다는 곳이며, 상주 인구는 천명 정도인데 하루 수십만의 인파가 밀리며 오고 가는 곳이다.
워커힐
1963년 4월 8일 개관한 워커힐의 객실 수는 806실이고, 이곳의 하니비 쇼는 너무나 유명하며, 남북한 고향 방문단이 이곳에서 만나 눈물바다를 이루었던 곳이기도 하다.
북한산성
일 명 삼각산 또는 화산이라 부르는데, 서기 132년 고구려의 개루왕이 이성을 쌓았으며 신라 진흥왕이 북경 관내를 순시하였을 때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웠으며 1232년에는 몽고 군과 격전이 있었고, 조선 숙종때 크게 축성하여 난이 있을 때 왕이 피난을 하였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사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이 시는 조선 인조때, 김 상현이 청나라로 붙잡혀가며 읊은 시이다.
진흥왕 순수비(국보 3호)
북한산 비봉에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웠는데 비바람에 마멸되고, 깨어져 더 이상 손상을 막기 위해 경복궁 화랑으로 옮기고 비가 있던 자리에 그 자리를 표시하기 위하여 모방품을 세우고 사절 228호로 지정하였다.
금호대교
국내에서 폭이 제일 넓은 다리다. 길이 1,161m 총 공사비 3백40억 원이 소요되었고 84년에 준공되었다.
영동교
길이 1040m이며 폭 25m 73년에 준공되었으며, 다리 아래 뚝섬유원지가 있고 가수 주 현미가 불러 히트한 비내리는 영동교가 더욱 구성지다.
뚝섬
조 선시대에는 말을 가르던 곳이었고 연산군의 놀이터였으며, 옛날에 한 어부가 고기를 낚았는데, 크기가 작은 배 한 척만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도 잉어, 붕어 등이 많이 잡혀 태공들을 부른다. 1975년 20역원을 투입 유원지를 정비하였으며, 경마장과 유기시설 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태릉
조 선 11대 중종의 계비 문정 왕후 윤씨의 능이다. 윤 지임의 딸로 중종 12년 장경왕후가 승하하자 계비로 책봉, 명종을 낳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명종이 즉위하자,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불교를 잘 믿고 보우대사를 신임하여 승과를 두어 스님들에게도 벼슬을 주었으며, MBC-TV 풍란에서 난정이와의 사건들을 엮어가던 주인공이기도 하다
태릉선수촌
국가대표 선수들의 훈련의 요람인 선수촌은 1971년 완공되어, 오늘도 나라를 빛낼 대표 선수들이 비지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어린이 대공원
1973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념하여 개원한 어린이 대공원은 서울 컨트리 클럽자리에 창경원보다 5배정도 크며 어린이의 자연 학습과 놀이 시설 등이 마련되어 있다.
망우리
망우리 하면 공동 묘지가 연상되는 곳이며 춘천과 팔당 그리고 홍천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추석이 되면 성묘 객으로 사람 홍수를 이루며 차량 행렬로 교통이 마비되는 곳이다.
【전설】
태 조 이 성게가 자기가 묻히고 왕가가 번영할 묏자리를 물색하였으나, 선택한 터가 아차산 기슭의 동구릉 터였다. 어느 날 이재조가 풍수와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묘터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에 이르러 잠시 쉬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멀리 아차산 기슭을 바라보며 아! 나는 이제 오랫동안의 근심을 잊을 수 있구나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후 마을 이름이 근심 우 잊을 망 해서 망우리가 되었다.
정능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 성게의 게비 선덕왕후 강씨의 능인데, 선덕왕후는 태조의 7자 방번과 8자 방석 두 형제 및 경순 공주를 낳고 1396년 8월 13일 돌아 가셨습니다.
본 래 이 능은 지금의 정동에 모시고 능관리를 위해 홍천사를 세웠는데, 서기 1409년 태조 이 성계가 돌아가시자 방번과 방석 또한 정도전 등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 임금이 계모인 선덕왕후 능을 옛부터 능을 도성 내에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핑계 삼아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긴 것이다.
서울대공원
경 기도 시흥군 과천면 청계산 기슭에 총 공사비 약 1,000억 원의 막대한 돈을 들여 1978년 착공하여, 1984년5월에 동물원 식물원이 개원되었으며 약 200만평의 부지에 1988년 서울 랜드가 완공되면, 미국의 디즈니랜드나 일본의 도꾜 랜드보다 더욱 크고 최신 놀이 시설이 갖추어 질 것이다. 현 동물원에는 창경원에서 이사온 동물과 수입종을 합쳐 400여종 4,000여 마리가 사육되고 있으며, 특히 돌고래 쇼가 선보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강 종합개발
한 강 종합 개발은 관련 사업까지 합쳐 총 7천 2백 64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행주대교에서 암사동까지 36㎞ 강변도로를 4차선에 8차선으로 늘여 교통체증을 없애고, 한강 바닥의 모래자갈을 10톤 트럭으로 200만대 분을 파내고, 저수로 정비 및 고수부지 정이 또한 분류 하수관 건설 등으로 깨끗한 한강을 만들어 유람선을 띄우고, 고기를 살게 하며 철새들의 낙원으로 만들어, 여름에는 수영을 할 수 있게 하는 역사상 서울 지하철공사와 더불어 국내 최대의 토목 공사이다. 도한 국내에서 제일 긴 노량 대교는 길이2,070m로 동작대교에 한강철교까지 이어지는 최대 난공사로서 수심 2∼3m의 물 속에 52개의 교각을 세우고, 받침대 없이 다리 상판을 만드는 거푸집 공법으로 국내외 새로운 맹물로 등장하였고 1986년 5월 2일 오후 5시 개통 되였다.
잠실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대비하여 총 공사비 457억 원을 들여 1977년 착공, 1984년 9월 준공되었으며, 김수근씨가 설계를 맡은 이 운동장은 지하 1층 지상 5층으로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고 둘레가 830m로 15층 건물의 높이와 맞먹는 거대한 타원형 건물이며, 77개의 출입구를 만들어 10만의 관중이 15분 안에 경기장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설계로 세계 굴지의 대 운동장이 되었다.
월림픽 공원
1984 년 4월 착공하여 1986년 5월 준공되었고, 총 공사비 1,688억 원이 들었으며 부지 50만 6천 5백 평에 연인원 약 90만 명, 연장비 약 6만6천대가 투입되었고 사적 297호인 모촌토성을 2,285m를 복원하였다. 공원 내에는 3만 6천 평의 인공호수와 첨단과학을 총동원하여
세 계 최고 수준의 역도, 싸이클, 펜싱, 수영 경기장 등이 들어섰으며, 경기장의 외벽에는 반투명 섬유유리 파이버 글라스를 사용하였고, 특수 패브릭 천장은 태양광선을 10%만 투과하고 채광 정도에 따리 자동으로 조명이 조절되며, 우리 나라 최초로 관람석을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싸이클 경기장은 아프리카산 특수 목재로 눈, 비를 맞아도 30년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성농단과 설렁탕의 유래 (구. 서울대 뒤편)
성 농단은 역대 임금이 백성들이 농사의 소중함을 알고 풍년 들기를 기원하는 제단인데, 조선 9대 성종 임금은 제삿날에는 몸소 재단에 행차하여 제를 지내고 농부들과 어울려 점심을 드실 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따뜻한 점심을 먹기 쉽게 쇠뼈를 우린 국물에 밥을 만 음식이 만들어져 제를 지낼 때마다 맛있게 자시고 선농단의 이름을 따서 선농탕이라 불리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설렁탕이 되어 서울의 향토 음식이 되었다.
약주의 유래
우리 나라 사람이 주로 마시는 술은 막걸리와 청주, 그리고 소주가 있는 데 막걸리는 맑은 술을 떠내지 않고 그대로 걸러 짜는 것이고, 약주 또는 청주는 술독에 용수를 박아서 떠낸 맑은 술인데 약주로 불리 우는 유래는 이러하다.
조선 중종때 성리학의대가인 서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고성 이씨로 장님인데 그의 부모가 속여 서해에게 시집을 보냈다.
첫 날밤에 아내가 장님인 것을 안 서해는 그녀를 불쌍히 여겨 더욱 사랑하였으나, 아들 하나를 둔 후 23살의 젊은 나이로 죽어버리니 그의 아내는 남편의 깊은 의리와 정에 감사하며, 은혜를 갚는 길은 가난하고 기울어진 서씨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라 깊이 생각한 장님 과부는 친정에서 돈을 조금 얻어와 청주를 제조하여 술장사를 하였는데 얼마나 맛이 좋았던지 얼마 안가 온 장안에 소문이 났다. 그대 그 집이 서울 약현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약주라는 애칭을 붙여 부른 것이 오늘날 약주이며, 그후 과부는 많은 돈을 벌었으며 외동아들을 잘 키워 선조때 병조좌랑을 지냈으며, 손자는 우의정 벼슬까지 했다는 이야기이다.
조계사
대 한 불교 조계종 중앙 총무원으로, 1910년 한용운 스님이 창건 각황사라 하였고 한때는 태고사라고도 하였던 것을 1954년 불교 정화 후 조계사로 개명 오늘에 으르며, 1914년 실론의 달마파라 스님이 모시고 온 부처님 진신 사리 1과를 봉안하였다.
경내에는 불교 중앙회관이 있고 수령 500년의 수송백송이 있다.
넘 많은건 아닌지 근데 숙제가 똑같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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