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佛敎) 개관
석가모니(釋迦牟尼) 즉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를 교조로 삼고 그가 가르친 교법을 신봉하는 종교. 붓다는 동사어근 Budh(자각하다, 깨닫다)에서 유래한 말이며 <자각한 사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이 중국에 전하여져 불타(佛陀)·불(佛)·부도(浮屠) 등과 같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표기하게 되었다. 불교의 역사상 붓다란,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형상으로 표현되어졌기 때문에 실제로 많은 붓다가 신앙의 대상으로 되어 왔다. 그러므로 역사적 존재인 불교의 개조(開祖)를 다른 모든 부처로부터 구별하기 위하여 <고타마 붓다>라고 이름하였다. 고타마란 석가모니의 성(姓)을 말한다. 그리고 석가모니(sakyamuni)는 석가(sakya)라고 하는 부족출신의 성자(聖者, muni)를 의미하며, 석가세존(釋迦世尊)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줄여서 석존(釋尊) 또는 세존(世尊)이라고 한다. 불교는 석가모니의 입멸 후 제자들에 의한 불설(佛說) 편찬인 불전결집(佛典結集)과 교단의 조직화를 통해 비로소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불설 중 교리와 사건에 관한 부분을 법(法)이라 하고, 출가자들의 행위에 관한 규정과 승가의 운영 및 규율에 관한 부분을 율(律)이라 하는데, 여기서 경(經;stra)·율(律;vinaya) 이장(二藏)이 성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단은 외면상으로는 평온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보수파와 진보파간의 갈등이 심각하여 보수적 상좌부(上座部;Sthavirh)와 진보적 대중부(大衆部;Mahsam·ghika)로 분열되었고, 훗날 진보파들과 재가신도(在家信徒)들을 중심으로 대승불교(大乘佛敎) 운동이 일어났다. 역사적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었던 고대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에 의해 불교는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카니슈카왕대에 이르러 서역제국과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또 다른 경로는 동남아시아 방면으로 전파되었다. 전자는 대승불교, 후자는 소승불교라고 한다. 불교의 전파는 문화의 전파를 수반하여, 당시 선진문명이었던 인도와 중국의 문화가 불교와 합치되어 세계 각국으로 유입되었으며, 각국의 개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불교미술에 있어서는 지역적 특성에 따른 다양한 변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유품으로 남아 있고, 불전문학(佛傳文學)의 내용은 오래전부터 사원이나 탑에 조각과 벽화로서 장식되어 미술적인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현재 불교는 한국·자유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와 불교왕국인 타이 등 동남아시아 및 티베트·유럽 일부, 심지어 미국 등지에까지 널리 보급되어, 그리스도교·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 있다.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특징을 보면, ①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아함경전(阿含經典) 외에 수많은 대승제경전(大乘諸經典)이 고타마 사후 수백년을 지나면서 출현한 대승제불(大乘諸佛)에 의해 창작되어, 성전의 수가 방대해졌다. ② 붓다와 대승제불 등에 대한 경모·숭배는, 심정에 있어서는 동일하면서도 형식과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 ③ <신(神)>을 내세우지 않기에, 깨달음과 구제의 대상으로서 붓다를 무한히 이상화하면서도 창조자·정복자의 성격은 갖지 않는다. 아울러 대승의 불과 그 후보자라고 하는 보살(菩薩)은 수적으로 크게 증대하여 범신론적인 경향을 지닌다. ④ <깨달음>으로서의 지혜(智慧)가 강조되고, 불교도의 구제기원(救濟祈願)이 반영되면서 자비(慈悲)가 강조되었다. ⑤ 관용유화(寬容宥和)가 넘쳐, 일반적으로 광신적 태도는 지니지 않는다. ⑥ 스스로 행하는 것이 중시되는데, 이때 욕망과 집착을 멀리하는 쪽이 <무아(無我)>로서 강조된다. ⑦ 일체를 시간적으로 절단한 <무상(無常)>과 공간적으로 이어놓은 <연기(緣起)> 등이 축이 되어, 얼마 뒤 실체적 사고를 버린 <무아>설과 함께 <공(空)>의 사상을 완성한다. ⑧ 평안이 있고 어지러움이 없는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해탈(解脫)이 달성되며, 적정(寂靜) 그 자체의 열반(涅槃;nirvna)을 이상으로 한다. 불교의 교리나 이론은 자연히 <인간적 삶>의 문제해결이라는 실제적 목적이 우선되기 때문에,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형이상학적 이론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인도불교〕
인도불교사를 초기·중기·후기로 나누면, 초기는 고타마 붓다가 불교를 창시한 때부터 그가 입멸(入滅)한 뒤 100여 년(또는 200여 년)까지의 교단분열기이다. 중기는 부파불교(部派佛敎)가 번영하고, 조금 뒤에 대승불교가 일어나서, 초기대승의 시대를 더한 불교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4세기 초에 힌두적 색채가 매우 짙은 굽타왕조가 등장하여 불교도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 이후를 후기로 보면, 이 시기에는 부파와 중기·후기의 대승이 병행한다. 그러나 7세기 후반을 지나면 밀교(密敎)가 두드러지게 늘어난다. 곧이어 이슬람교의 침입이 시작되고, 1203년 비크라마실라 대사원이 이슬람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소각되었으며, 그 뒤 교단의 쇠퇴와 함께 1600여 년의 전통을 지닌 인도불교는 막을 내렸다.
<초기불교>
원시불교라고도 한다. BC13세기 무렵, 북서쪽에서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인에 의해서 인도문명은 열린다. 신들을 찬양하는 베다에 이어 그 주석문헌(註釋文獻)이 만들어지고, 다시 BC7세기 이후는 갠지스강 일대에 진출하여 우파니샤드문헌이 나타났다. 초기의 옛 우파니샤드에 처음으로 신화를 뺀 철학이 탄생되었는데, 여기서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추구하고 개인의 내재적 원리를 탐구한 다음, 양자의 합일을 주장하였다(이 철학은 2∼3세기 이후에 부흥해서 정통 인도철학을 형성하였다). BC7∼BC6세기 무렵에는 농촌의 성장과 함께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고 군소국가가 성립하여 그들의 합병에 의한 16대국이 발전하고 도시도 건설되어 인도사회는 일대 전기(轉機)를 맞았다. 그 중에서 자유롭고 청신한 사상가들이 잇따라 등장하였다. 그들은 오로지 새로운 사상에 몰두하여, 출가해서 모든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 사문(沙門;팔리어는 사마나, 산스크리트는 슈라마나, <노력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활동하여, 세상의 환영과 존경을 받았다. 베다를 신봉하는 브라만교의 권위를 오히려 부정했던 이 새로운 사상 중에는 상당히 과격한 것도 적지 않다. 새로운 사상에 대해, 초기 불전(佛典)은 62종, 자이나교는 363종을 들어 설명하였다. 그 중에도 불전이 전하는 6종이 잘 알려졌으며, 흔히 육사외도(六師外道)라 한다. 그것은 도덕부정(道德否定)-쾌락주의·유물론·허무주의·결정론·회의론·금욕-고행주의로 개괄(槪括)될 수 있다. 고타마 붓다는 그와 같은 새로운 자유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은 뒤, 45년 동안 거의 갠지스강 중류 일대를 끊임없이 돌아다녀 80세에 입멸(人滅)하기까지 그 가르침을 계속하였다. 불멸(佛滅) 후 불제자들이 더욱 광범위하게 흩어져서 그 가르침을 퍼뜨렸는데 수백년 동안은 모두 구송(口誦)의 형식으로 전승되었다. 아가마(Agama)는 전승(傳承)을 뜻하는데, 처음에는 마가다어로, 이어서 그것이 표준어인 산스크리트로, 중서부 일대의 속어인 팔리어로 옮겨졌고, 현재는 산스크리트로부터 한역(漢譯)된 것과 팔리어 문헌이 전해져 있다. 다만 현재의 형태로 고정된 것은 다음 대인 부파불교의 초기, 즉 불멸 후 약 200년 이상이나 후대이며, 이 여러 문헌에서 붓다의 직접적 가르침을 끌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적어도 여러 자료에 관한 문헌학이 없어서는 안된다. 한역에는 사아함(四阿含;長·中·雜·增―의 각 아함)과 이들 일부분의 이역(異譯)이 있으며, 팔리어로는 장·중·상응(相應)·증지(增支)·소(小)의 5니카야〔五部〕가 있다. 위의 최초의 사부(四部)와 한역의 사아함은 각기 다수의 불경으로 되어 있으며, 공통된 것이 많지만,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없다. 팔리어의 소부(小部)는 15개의 텍스트를 포함하고, 그 중에서 《수타니파타(經集)》 《담마파다(法句經)》와 그 밖에 몇 종류 중 시(詩;韻文) 형식의 불경이 초기의 불교를 잘 전하고 있다. 이상의 전체를 <경장(經藏)>이라 하고, 그 밖에 교단의 규율을 기록한 <율장(律藏)>, 좀 늦게 성립된 주석문헌인 <논장(論藏)>이 있고, 합해서 삼장(三藏)이라 하며, 이것이 후대에 더욱 발전, 증가하여 일체경(一切經) 또는 대장경(大藏經)이 되었다. 붓다는 <현실은 고(苦)다>라는 탐구에서 출발하여, 그 해결을 찾아서 수행하고, 고로부터의 해탈을 깨달아 불교를 수립했다. 고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고 그것을 깊이 탐구해 가면 자기의 밖의 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기보다는 차라리 자기의 안에 있는 것이 자기를 배반함을 뜻한다. 예컨대, 생(生)·노(老)·병(病)·사(死)로부터의 해방과 같이 자기의 뜻대로 안되는 것을 자기가 바란다는 것에 고의 본질이 있으며 이것은 자기 모순이나 자기 부정이 된다. 이 고(苦)의 탐구를 둘러싼 설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삼법인(三法印):법인은 불교의 상징이며, 일체개고(一切皆苦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셋을 말하는데, 뒤에 일체개고 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게 되었다. 현실은 모두 고에서 출발하고, 특히 죽음을 포함한 인생의 여러 상(相)이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생멸·변화하고 유동한다. 그에 대한 일종의 영탄(詠嘆)이 <무상>으로서 파악된다. 물론 자기는 실천의 중심이며 깨달음의 주체이나, 한편 많은 욕망과 번뇌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것들의 밑바닥에 있는 집착(특히 我執)을 버리는 것이 <무아(無我)>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실의 양상을 밝혀서 깨달음이 열리고, 해탈이 완성되었을 때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열반의 적정(寂靜)이 실현된다. ② 사제(四諦):제(諦)는 진리라는 뜻이며,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의 4가지를 말한다. 일체는 고라는 진리, 고는 무엇에 의해 생기느냐는 진리, 고의 원인을 알고 그것을 없애는 진리, 고를 없애는 실천에 관한 진리이다. 도제의 내용은 팔정도(八正道), 즉 8가지 바른사상·사고·말·행위·생활·노력·의식집중·정신통일로 이루어진다. ③ 중도(中道):고와 낙, 상(常)과 단(斷), 유와 무, 허무주의와 쾌락주의 같은, 한쪽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느 쪽의 극단도 적극적으로 버리는 양상을 말하며 이것은 거의 팔정도의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④ 무기(無記):세계의 시작과 종말 등의 이른바 형이상학적인 물음은 다만 논쟁을 일으킬 뿐으로 실천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우선 비근한 실천을 할 것을 가르친다. ⑤ 법(法):산스크리트의 다르마(dharma) 또는 팔리어의 담마(dhamma)의 역어이며, 일체의 현실존재를 성립시키고 있는 결정·형(形)·가르침·규범 및 그 존재를 말하며, 이 법으로 일체의 존재를 설명하고, 그 밖의 유일절대의 신이나 원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법에서는 색(色;감각적·물질적인 것)·수(受;意識의 感受작용)·상(想;의식의 表象작용)·행(行;잠재적·능동적 작용)·식(識;인식작용)의 오온(五蘊;5가지 積聚)을 설명하고, 또는 눈·코·귀·혀·몸·마음의 육입(六入;감각기관)과, 그에 대응하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對象)을 설명한다. ⑥ 십이연기(十二緣起, 十二因緣):원인과 조건을 분석하면서 종합한다는 일종의 논리적 반성 위에 연기설이 세워져 항상 인생의 현실에 관해서 설명한다. 즉 고는 노사(老死)에 의해, 노사는 생(生)에 의한다고 그 생기(生起)의 양상이 탐구되며, 그것이 어디에서 오느냐 하는 계열을 더듬어가서 애착에 이르며, 나아가서는 근원적인 무지에 상당하는 무명(無明)에 이른다. 이 현실탐구에 의하여 여러 가지 연기설이 있고, 그 완성태(完成態)는 열 두 부분(支)을 헤아리는 십이연기인데, 그 밖에 여러 가지 연기설이 있다. ⑦ 심(心):종교의 중심은 각자의 마음에 있다. 또 마음에 있는 것은 반드시 밖으로 나타난다. 마음에서 바른 것과 청정(淸淨)을 찾고, 생명의 존중과 평등을 알며, 정진을 서약하고, 원한·분노·집착·탐욕·우둔을 버린다.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받은 1000명이 넘는 제자들은 불(佛寶)을 중심으로, 그 법(法寶)을 실천하는 교단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삼가(sam·gha;僧伽로 음사하고 僧이라고 약칭한다. 僧寶)가 되었다. 교단은 크게 나누어 출가한 남성(比丘)과 여성(比丘尼), 재가신자(在家信者)의 남성(優婆塞)과 여성(優婆夷)으로 이루어졌으며, 재가신자는 출가자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출가자는 전심하여 법을 배우고 실천하며 설도했다. 교단은 항상 열려 있어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고, 또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져 있었다.
<부파불교>
붓다의 입멸 후, 교단은 차츰 확대·발전하고, 특히 BC3세기 전반에 인도에 처음으로 출현한 통일국가인 마우리아왕조, 그리고 그 황금시대를 쌓은 아소카왕의 불교 신앙은 불교의 세력을 전인도에 비약적으로 늘렸다. 교단의 확대와 함께 아소카왕 때보다 조금 앞서서 교단은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으로 인해 분열되어, 각기 상좌부와 대중부라고 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 사이에 대중부가 다시 분열되어 전부 약 20개의 부파가 성립되었다. 뒤에 일어난 대승불교도(大乘佛敎徒)는 이것을 소승이십부라고도 했다. 각 부파는 저마다 구전의 가르침(阿含)을 불경으로 고정시킨 뒤에, 각자의 해석에 따라 그 교리·교의를 조직화, 체계화했다. 이 정밀(精密)한 교의대계(敎義大系)는 아비다르마(abhidharma;阿毘達磨, 또는 阿毘曇)라고 하며, 서양의 신학 특히 스콜라철학과 대등하다. 현재 아비다르마는 남방불교가 전하는 상좌부의 칠론(七論)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有部)의 한역인 칠론이 전해지며, 그 밖에 소속불명의 한역이 2∼3개 있다. 부파불교는 거의 출가자의 독점에 맡겨져서 그들은 오직 자기의 수행에 정진하고, 교단에 속하는 장원(莊園)에 의존하였다.
<대승불교>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데가 많다. 마우리아왕조 붕괴(BC180년 무렵) 이후, 북인도는 200년 이상이나 외래 민족들의 침입으로 사회적 대혼란이 계속되었고, 불교 내부에서는 출가자에게 치우쳤던 부파불교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재가신자를 중심으로 혁신운동이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이미 초기불교 당시부터 세워졌던 불탑(stpa) 숭배가 한층 성해지고, 붓다를 찬양하는 문학작품 등도 관계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중국·티베트·일본 등의 북방불교는 모두 대승불교가 주류이다. 그것은 일체 집착의 철저한 포기를 요구하고, 공(空)의 사상을 내세우는 《반야경(般若經)》, 광대한 부처(毘盧遮那佛)의 세계 속에 10가지의 수행단계를 가르치고, 유심(唯心)을 주장하는 《화엄경(華嚴經)》, 재가의 세속생활 속에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유마경(維摩經)》, 피안의 극락세계를 찬미하고 아미타불(阿彌陀佛)에게 구제를 바라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일승사상(一乘思想) 으로써 관용과 방편을 제시하고 구원(久遠)의 본불(本佛)을 수립하는 《법화경(法華經)》, 선정(禪定)에 몰입하여 부처를 눈앞에 보려고 하는 각종 <삼매경전(三昧經典)>, 주문을 외워서 사람들에게 종교적 신비성을 호소하는 <다라니성전(陀羅尼聖典)> 등이 잇따라 등장한다. 그것은 기원전후로부터 3세기 무렵까지의 약 200∼300년 동안의 일이며, 마침내는 이러한 경전들을 논리적으로 표현한 나가르주나(Ngrjuna, 龍樹)가 등장한다.
⑴ 불·보살의 확대:부처가 종래의 고타마 붓다 한 부처에서 과거불(7불)·미래불(彌勒佛), 그리고 현재의 다방불(多方佛)로 확대되며, 그중에서도 구제불로서 아미타불·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등이 경모(敬慕)된 외에 절대자의 성격을 강화한 비로자나불·대일여래뷸(大日如來佛) 등이 확립되었다. 보살은 원래 불타가 되기 이전의 단계를 나타냈는데, 많은 부처의 등장과 함께 보살도 확대되어서, 관세음(觀世音;觀音, 觀自在)·문수(文殊)·보현(普賢)·세지(勢至)·지장(地藏) 등의 여러 보살이 세워지고, 최후에는 불도에 힘쓰고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중생 전반으로 넓혀졌다. 이들 대승의 불·보살들은 아함의 고타마 붓다와는 직접 관련이 없고, 이름없는 새로운 제불에 의해서 앞에 열거한 대승의 방대한 여러 경전이 새로이 만들어졌다.
⑵ 이타(利他):부파교단의 폐쇄적·이기적·독선적인 양상을 냉엄하게 비판하고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다 서로 남과 깊이 관계한다고 보아 보시(布施)하는 등 자비를 으뜸으로 한다.
⑶ 공(空)의 사상:공은 부파불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서 제창되었고 일체의 존재를 상관(相關)·상의(相依)·상대(相待)의 이상적인 상태에서 이해하고 그 연관을 어디까지나 확대시킴으로써, 존재는 물론 법 그 자체의 실체(自性)를 빼앗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자유롭고 장애가 없는 세계를 전개한다.
⑷ 바라밀(波羅蜜):본래는 완성을 뜻하나, 이것을 <피안(彼岸)으로 건너간다>고도 해석한다. 보살의 실천을 명확하게 한 것이며, 보시·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선정·지혜(智慧)의 육바라밀설(六波羅蜜說)이 중심이 되고, 여기서도 특히 집착을 배제하는 것이 강조된다. 3세기 이후에도 경전은 잇따라 만들어져, 《승만경》 《열반경(涅槃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능가경(楞伽經)》 등이 있으며, 한편 마이트레야(Maitreya;彌勒), 아상가(Asanga;無着), 바수반두(Vasubandhu;世親)와 같은 논사(論師)가 나타난다. 여기서는 유식설(唯識說)과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이 중심이 된다. 유식설은 일체를 우리들의 경험상에서 파악하고, 그것을 순수한 정신작용, 즉 식(識)으로 환원한다. 반대로 말하면 식의 분별작용에 의해 모든 현상과 존재가 나타난다고 한다. 먼저 눈·귀·코·혀·몸·뜻의 6가지 식이 일상적인 식이나, 그 안에는 말나식(末那識)이 있어서 여러 식을 통일하여 자아의 축(軸)이 된다. 그리고 그 근거에 잠재하는 아뢰야식을 세워, 여기에 과거가 집적되고 미래의 가능성이 수용(受容)되어 있다고 한다. 여래장은 여래의 곳간이며, 불성 즉 부처의 소질이라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으로 태어나면서 갖추고 있으며, 평소에 방황하고, 괴로워하고, 번민하는 중생 누구나가 여래·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5세기 무렵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이 유식설과 여래장사상을 교묘하게 통일시켜 논한 것으로, 최적한 대승불교입문서라고 했다. 그 뒤, 인식론을 포함한 불교논리학이 확립되고 디그나가(Dignga;陳那)·다르마키르티(Dharmakirti;法稱)가 특히 유명하며, 그들은 중국 등에서 <인명(因明)>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밀교>
7세기 이후의 후기대승불교는 다라니(dhran;陀羅尼)와 만트라(mantra;眞言)를 중심으로 하는 밀교가 주류가 되어, 《대일경》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이 만들어져서 그 가르침을 확립하고, 그 뒤에도 다수의 밀교경전이 만들어졌다. 여기서는 특정한 영역이 성역인 만다라(mandala;曼茶羅)를 쌓고, 특수한 범절을 행하면서 여러 가지 주문(呪文)에 빠져들 때 대일여래를 위시한 제존(諸尊)이 나타나는데, 참가자만이 도취의 극으로 그 공덕을 차지한다. 이때 현실적으로 그대로 부처에게 가까워질 뿐 아니라 부처가 된다(卽身成佛)고 주장한다. 그러나 밀교를 후기대승에서 독립시켜 다루는 설도 있다. 밀교는 불교의 민중화에 수반한 것이지만 도리어 힌두교와의 구별이 모호해져서 불교는 그 독자성을 잃고 힌두교 속으로 흡수되어 갔다. 불교는 11세기 이후, 이슬람교의 인도진출로 인하여 차츰 사라져 13세기 이후에는 급격하게 쇠멸되었다.
〔중국불교〕 <전도(傳道)시대(4세기 말까지)>
불교 전래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으나, 대략 기원 전후 무렵, 서역(西域)을 경유해서 중국에 전해졌다. 물론 중국은 이 시대까지는 벌써 고도의 문화를 확립하였으며, 또 문자의 표현과 기록의 보존을 중히 여겼으므로, 이국의 문화는 반드시 한자로 옮겼다. 안세고(安世高)·지루가참(支婁迦懺)·축법호(竺法護)·불도징(佛圖澄) 등의 외국 승려 외에 주사행(朱士行)·도안(道安)·혜원(慧遠) 등의 중국인 학승들이 여러 경전을 번역해서 중국인에게 불교를 전하는 한편, 그 이해를 깊이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불교사상의 독자성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전설상의 황제(黃帝)나 노자(老子) 수준으로 신봉되었고, 특히 반야(般若, 智慧)의 공(空)을 노자의 무(無)로서 해석하는 융합·절충이 성행하였고, 격의불교(格義佛敎)라는 일종의 혼효사상(混淆思想)이 시행되었다.
<연구시대(580년까지)>
5세기 초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서역으로부터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이후 9년 동안 여러 대승경전을 훌륭하게 번역하였고, 또 3000여 명의 제자를 교육했다. 여기서 중국불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번역한 한문경전만으로 충분히 불교교리를 연구, 사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밖에 불타발다라(佛馱跋陀羅)·담무참(曇無讖)·진제(眞諦)·보리유지(菩提流支) 등의 도래승에 의하여 뛰어난 한역불전이 완성되었으며, 이들 여러 경과 논(論)의 연구가 진척되고 많은 학파가 형성되었다. 한편, 이 시대에는 역경서(譯經書)가 정리되어 경록(經錄)과 전기 등 신뢰할 만한 불교사의 여러 자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혼란이 계속된 이 시대에 불교는 겨우 민중 속으로 들어가 한민족의 습속과 융합하여 우란분회(盂蘭盆會)같은 법회(法會)가 성행하게 되었다. 때로는 왕조에 의한 폐불(廢佛)이 있었으나, 불교는 즉시 부활하였다. 다퉁〔大同〕·윈강〔雲崗〕의 석불과 룽먼〔龍門〕의 석굴 등은 열렬했던 불교신앙을 말해주고 있다.
<독립시대(8세기 중반까지)>
300년에 가까운 분열에서 중국은 마침내 통일되고, 수(隋)나라·당(唐)나라의 왕조가 계속되어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통일과 종합을 가져왔다. 불교의 여러 학파는 이른바 종파로서 독립하여 중국불교의 황금시대를 출현시켰으며, 수나라의 3대법사라고 하는 정영(淨影;慧遠)·천태(天台)·가상(嘉祥;吉藏)이 나타났다. 먼저 혜원은 그의 저서 《대승의장(大乘義章)》으로 유명하고, 지론종(地論宗)의 기초를 열었으며, 지의는 천태종(天台宗)의 개조로서 알려졌고,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교판(敎判, 敎相判釋)의 원형을 제시하여 《법화경(法華經)》을 여러 경전의 최상위에 두었으며, 또 지관(止觀;정신의 集注)에 힘써 많은 제자를 육성하였다. 길장은 용수(龍樹) 계통을 이어 받아 삼론종(三論宗)을 확립시켰다.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에 걸쳐 삼계교(三階敎)가 행해졌는데, 말법사상(末法思想)의 고취가 과격하였기 때문에 즉시 탄압되었으며, 그 가르침은 정토교(淨土敎)에 흡수되었다. 담란(曇鸞)·도작(道綽)·선도(善導)와 같은 승려가 나와, 오로지 아미타불 신앙을 주창하는 정토교가 확립되었다. 645년, 17년 동안의 인도―서역 여행으로부터 귀국한 현장이 당시의 인도에서 번영했던 불교를 중국에 전했다. 그 방대한 번역경전 중 아비다르마·유식·논리학(因明) 등에 귀중한 것이 많고, 특히 유식설(唯識說)은 그 문하인 자은대사(慈恩大師)에 의해 법상종(法相宗)으로 성립되었다. 한편, 현수대사(賢首大師) 법장(法藏)은 화엄경의 번역에 참가하여, 그 이전부터 내려온 화엄종(華嚴宗)을 확립했고 오교십종(五敎十宗)의 교판을 세움과 동시에, 일체의 것이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연기설(緣起說)을 그 가르침의 중심으로 했다. 또, 이미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의해서 전해져 있던 선(禪)은 그 6대째라고 하는 혜능(慧能)과 그 동문인 신수(神秀)에 의해서 종풍(宗風)이 확립되고, 많은 우수한 후계자가 나와 엄격한 수행을 철저하게 하여 선종은 중국에서 안정된 지위를 쌓았다. 이 시대에 마지막으로 전래된 것이 밀교이며,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이 인도에서 당나라로 와서 밀교의 여러 경전을 번역하였고, 밀주(密呪)의 염송(念誦)과 가지기도(加持祈禱) 등 독자적 수법(修法)이 특히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 유행하였으며, 곧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실천시대(12세기 초까지)>
이 시대 중반에 다시 폐불이 있어서 여러 경전이 소각되고 종파도 중절되었으나, 실천에 전념하는 정토교와 선종 그리고 민간신앙에 동화된 밀교가 번창하였다. 그 중에서도 선종은 충분히 중국화된 불교로 발달되고, 탁월한 승려가 배출되어 그 가르침이 계승되어감과 동시에, 그들의 어록이 편집되었다. 또 선종의 사원에서는 자급자족적인 생활규정이 생겨, 그것을 청규(淸規)라고 했다. 송(宋)나라. 이후, 대장경이 개판(開板)되고 경전이 간행됨으로써 널리 읽히게 되었다.
<계승시대>
송나라가 북방민족의 압력을 받아 이동하여 남송(南宋)이 되자 특히 선이 유행하였는데, 천태·율(律)·정토 등도 부흥하여 정토교에서는 결사(結社)를 만들어 염불을 재가자사이로 넓혀 갔다. 몽골에서 일어난 원(元)나라는 티베트에서 티베트교를 도입하였기 때문에 정치와 종교가 유착되어 그것이 여러 가지 폐해를 낳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명(明)나라 때는 불교에도 국가통제가 엄격하여 중국불교사상 일찍이 없었던 불교교단의 중앙집권적 통제가 이루어져서, 활발한 불교활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유(儒)·불(佛)·도(道)의 3교 융화가 활발히 논의되었다. 다음의 청(淸)나라 때에는 일시적으로 티베트교가 부활하였으나 이미 국가 통제하에 안주해 온 불교에는 이제 지난날의 활력은 없었다. 재가불교의 부흥도 있었으나 원래 중국불교는 출가불교가 주류였으므로 전반적으로 불교는 쇠퇴하여 갔다. 제2차세계대전 후 중국대륙으로부터 불교는 그 모습이 거의 사라졌으며 최근에 조금씩 부흥되어 가고 있다. 한편, 타이완에는 불교의 여러 종파가 전해져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일본불교〕
<초기>
오래 전부터 대륙불교는 한반도를 거쳐 전해졌고, 처음에는 도래인(渡來人)을 중심으로 민간에 전파되었으나,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538년 이후라 한다. 그 뒤 숭불(崇佛)과 배불(排佛)의 찬반론이 있은 뒤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불교수용을 확정함으로써 일본에 불교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 쇼토쿠태자는 불교에 깊게 귀의하고 불경을 배워 《법화경》 《유마경》의 의소(義疏)를 썼다.
<나라〔奈良〕불교>
중국불교의 황금시대에 대응하여 중국에 성립된 여러 종파가 잇따라 전해져 이른바 남도육종(南都六宗)이 성립했다. 즉, 삼론종(三論宗)·법상종(法相宗)·성실종(成實宗)·구사종(俱舍宗)·율종(律宗)·화엄종(華嚴宗)이 그것이다.
<헤이안〔平安〕불교>
중심이 되는 사이초〔最澄〕와 구카이〔空海〕는 교토〔京者〕로 천도한 간무천황〔桓武天皇〕의 신임을 얻어 새로운 불교를 열었다. 사이초는 순수한 구도의 성격이 강하여 일찍이 천태종을 배우고 교토를 떠나 히에이산〔比叡山〕에 들어갔다. 뒤에 칙허를 얻어 당나라에 들어가 천태를 비롯하여 밀(密)·계(戒)·선(禪)을 합쳐 4종합일의 천태법화종(天台法華宗)을 창립했다. 이와 같은 종합적인 학풍은 일승사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중국의 천태와는 달리 일본불교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구카이도 당나라의 장안(長安)에서 혜과(惠果)로부터 진언밀교를 배우고 귀국 후 진언종(眞言宗)을 창설하고 고야산(高野山)의 공고부사〔金剛峰寺〕, 교토의 도사〔東寺〕를 세워, 호국불교의 근본도량으로 했다.
<가마쿠라〔鎌倉〕불교>
진정한 뜻에서 불교가 민중과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시대이다. 불교 전래 후 600여 년을 거쳐 비로소 일본불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탄생하였다. 민중이 불교를 찾았고, 종교적 지도자가 나타나 이에 응했다. 헤이안 중기부터 번영한 호넨〔法然〕의 정토종(淨土宗), 에이사이〔榮西〕에 의해 확립된 선종 등이 그것이었고, 가마쿠라시대 마지막에는 니치렌〔日蓮〕을 개조로 하는 니치렌종〔日蓮宗〕이 출현, 《법화경》을 근본으로 한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 등을 주장하였다.
<무로마치〔室町〕에서 메이지〔明治〕까지의 불교>
가마쿠라 신(新)불교는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에 대응해서 단시일에 민중 속에 퍼졌다. 임제선(臨濟禪)은 아시카가바쿠후〔足利幕府〕의 비호를 받으면서 교토와 가마쿠라의 고산〔五山〕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조동종(曹洞宗)에는 에도〔江戶〕시대에 만잔도하쿠〔卍山道白〕·멘잔즈이호〔面山瑞方〕 등이 나와서 가르침을 바로 잡았으며, 다이구료칸〔大愚良寬〕도 이 종에 속한다. 메이지유신 후 일본정부는 처음에 신불분리(神佛分離)에서 폐불정책(廢佛政策)으로까지 나아갔으나, 일본인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불교는 현대에도 일본인의 풍속습관과 사고 한 구석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상당히 깊이 깃들어 있다. 또한 최근에는 이른바 신종교가 니치렌계통〔日蓮系統;예컨대 創價學會·靈友會·立正成會 등〕 외에 천태·진언계통에서도 많이 나와 다수의 신자를 얻고 있다.
〔남방불교〕
사서(史書)에 의하면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BC 3세기 중엽으로, 인도에서 아소카왕의 왕자 마힌다가 부파불교의 보수파에 속하는 상좌부(上座部;長老部)의 불교를 전하고, 왕조의 보호와 민중의 귀의를 얻어 온 섬에 퍼졌다. 그 경전은 팔리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팔리불교라고도 한다. 뒤에 한때는 대승불교의 일파도 전해졌으나, 장로부의 번영이 계속되었다. 5세기에는 인도에서 불음(佛音;부다고사)이 와서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 전체의 주석을 완성하였으며, 《청정도론(淸淨道論)》을 저술하여 불교는 대단한 활기를 띠었다. 6세기에 불교는 벵골만을 북상해서 미얀마에도 전해졌고, 11세기에는 파간왕조가 전 미얀마를 통일해서 불교가 번영하였고, 당시 부진하였던 스리랑카로 다시 전해졌다. 이후 스리랑카와 미얀마의 불교는 쇠퇴와 번영을 되풀이하고 있다. 현재 양지역의 불교는 18세기에 타이로부터 재전래된 것인데, 양쪽이 다 그 정치형태에는 관계없이 불교를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다. 타이민족이 독립한 것은 12세기 초인데 그 당시부터 장로부계통의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뒤에 성쇠를 되풀이하면서 현재에 이르렀고 동시에 불교 이외의 인도의 여러 문화도 받아들여서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불교국이다. 캄보디아는 힌두교와 불교를 섞은 종교가 번영했다. 9∼12세기의 앙코르유적이 유명하며, 톰(도성)과 와트(사원)가 늘어서 있다. 이웃나라 라오스와 함께 나중에 타이로부터 전해진 장로부불교가 성하다. 베트남만은 중국과의 관계가 깊어, 중국에서 전래된 대승불교가 신봉되었다. 인도네시아에도 한때 불교가 번성하여 자바에 8∼9세기의 보로부두르 유적이 있으나 뒤에 이슬람권으로 들어갔다.
〔티베트불교〕
티베트불교도는 라마교라는 별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티베트로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통일을 완수한 스롱버트산스캄포왕(재위 581∼649)에 의해서이다. 뒤에 티스롱데찬왕(재위 742∼797)은 인도에서 후기 대승과 밀교에 정통한 3명의 승려, 샨타라크시타(寂護)·파드마산바바(蓮華生)·카말라실라(蓮華戒)를 맞이해서 불교를 흥륭시켰다. 약 100년의 단절 후 11세기에 아티샤가 인도로부터 옮겨온 이후 티베트불교는 전성을 이루었다. 최대의 승려 총카파는 불교의 근본적인 개혁을 이룸과 동시에 현교(顯敎)와 밀교에 통달하였고, 특히 중관파(中觀派)의 해석을 밀교에 철저화시킨 저서를 지었다. 이후 티베트불교는 이 계보가 정통이 되어, 달라이 라마라고 하는 전 티베트의 통일군주가 종교·정치·문화를 모두 통솔하였다. 달라이 라마 5세는 다른 대사(大寺)의 고승에게 판첸 라마의 칭호를 주었으나 그 계보는 하나의 종교적인 권위에 그쳤다. 근세부터 현대에는 영국·러시아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에 의해서 크나큰 탄압 등을 받았으나, 티베트불교의 뿌리깊은 힘은 여전히 남아 있다. 또 이 영향은 티베트 이외에 몽골과 러시아 일부 등지에 남아 있다. 또한 티베트대장경은 특히 대승불교·밀교를 전하는 가장 귀중한 보고로서 세계 각지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불교〕
한국에서 불교문화를 받아들인 때는 삼국시대이다. 한국 불교문화사의 시대구분에 있어서 삼국시대는 최초기가 된다. 이 시기에 한반도의 남쪽 낙동강 유역에 가야(伽倻)가 있었고, 그곳에도 불교문화가 들어왔다는 전설이 있다. 당시 받아들인 불교는 하나의 외래종교였음에는 틀림이 없으나, 불교는 단순한 종교로서만이 아닌, 전반적인 문화현상으로서 민족문화의 모체(母體)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멀리 인도에서 이룩된 불교는 인도의 온갖 문화를 수용·포용하면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였으며, 또 중국으로 전해진 다음에는 중국의 독특하고 우수한 문화와 접촉, 융화되어 풍부하고 다양한 중국적인 불교문화 세계를 이룩하게 되었다. 곧 이와 같은 중국의 불교문화가 한국으로 유입되어 온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불교문화는 육로를 통해서 고구려에 전해졌고, 바다를 건너서 백제로 전해졌는데, 고구려에서 받아들인 불교문화는 주로 전진(前秦)을 비롯한 북방 중국의 불교문화였으며, 백제는 주로 동진(東晉)을 비롯한 남쪽 중국의 불교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는 처음 고구려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고, 그 뒤로는 백제와 중국의 남조·수나라·당나라 등지에서도 전래되었다. 그러나 가야에 전해졌다는 불교문화는 중국계통이 아닌 인도(또는 남방)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받아들여진 불교문화는 고대 신앙이나 고유습속 등 전래의 문화와 잘 융화되어 훌륭한 민족문화로 형성되어졌다.
<고구려>
고구려는 한국에 불교라는 새로운 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이다. 372년(소수림왕 2) 북중국의 전진에서 부견왕(符堅王)이 사신과 승려인 순도(順道)를 보내면서 불상과 경전을 보내왔다. 그 뒤 374년(소수림왕 4)에 다시 중국에서 아도(阿道)가 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최초로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웠다. 이를 한국불교의 초전(初傳)으로 삼고, 또 사원 창건의 효시로 본다. 그러나 동진 때의 고승 지순도림(支遁道林)이 고구려의 고승에게 글을 보냈다는 기록이 《양고승전(梁高僧傳)》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래시기는 상향될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의 불교는 고국양왕을 거쳐 광개토왕 때에 이르면서 크게 융성하여, 평양에 9개의 절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도 많은 절이 창건되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승려들은 해외에서의 구법(求法) 및 전교(傳敎) 활동을 활발히 하였는데,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을 이루게 한 승랑(僧郞)과 일본에서 활동한 혜편(惠便)·혜자(惠慈)·담징(曇徵)·혜관(惠灌) 등이 있다.
<백제>
한반도의 남서쪽에 자리한 백제는 바다를 사이에 둔 중국으로부터 해로를 통해 불교문화를 받아들였다. 백제가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되어 있는 384년(침류왕 1)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백제로 들어왔다. 백제는 낯선 외국의 승려를 크게 환영하고 또 궁중에서 극진히 공경하였는데, 이 점에서 불교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자세가 엿보인다. 마라난타는 백제에 온 이듬해 절을 짓고 승려를 배출하였고, 552년(성왕 30)에는 일본에 백제불교를 전하였으며, 30대 무왕 때에는 전라북도 익산(益山)에 미륵사(彌勒寺)라는 웅대한 절을 세워 백제의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지금도 익산의 그 절터에는 한국 최고·최대의 석탑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백제의 불교에서 특히 겸익(謙益)은 인도에까지 유학을 다녀와 경전을 스스로 번역하여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가 되었으며, 담혜(曇慧)·도심(道深)·관륵(觀勒)·도장(道藏)·법명(法明)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승려들이 일본문화 전반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라>
삼국 가운데 가장 불리한 지리적 조건과 문화적 후진성으로 인해, 대륙으로부터 일어나는 국제정세 동향과 새로운 문화추세 등에 대해 어두웠던 신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들어오는 불교문화의 새 흐름을 무조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교를 전하려고 들어왔던 고구려의 고승 정방(正方)과 멸구자가 희생된 사실이 있었으며, 묵호자(墨胡子)와 아도(我道;阿道) 등의 전도승들 또한 밀실에서 숨어 살아야 했다. 그 뒤 제23대 법흥왕에 이르러 불교가 공인되었으나 이렇다 할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진흥왕대에 들어서면서 흥륜사(興輪寺)·황룡사(皇龍寺) 창건, 승니(僧尼)의 양성과 구법유학 지원, 불사리(佛舍利)와 불상의 조성 및 승통제(僧統制) 마련, 국선화랑(國仙花郞)의 단체 설치 등 불교문화를 진흥시켰다. 이후의 왕들도 진흥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불교문화의 보호와 진흥에 힘썼다. 한편 진평왕 때의 원광(圓光)과 선덕여왕 때의 자장(慈藏) 등의 승려는 교화활동에 공이 컸으며, 현태(玄泰)를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인도 등지로 구법유학을 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불완전하나마 통일을 이룩한 신라는 민족적 불교문화의 완성에 주력하였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으로, 그들은 신라사회의 정신적 기둥이었으며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였다. 또한 원효는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 등의 저소(著疏)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아울러 경흥(憬興)은 《미륵삼부경소(彌勒三部經疏)》를 비롯한 5부 12권의 저서를 내었고, 유식학(唯識學)의 대가 태현(太賢), 참회법과 점찰간자(占察簡子)로서 참회불교인 점찰교법(占察敎法)을 새로 일으킨 진표(眞表) 및 신인비법으로 당군(唐軍)의 침입을 미리 막게 한 명랑(明朗) 등은 신라불교의 번영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밖에도 중국에서 활동하며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존경을 받은 원측(圓測)과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귀중한 자료를 남긴 혜초(慧超) 등을 통해 대외적으로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한편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 및 한국 최대의 범종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등이 이 시대에 이루어졌고, 불교문화·음악도 성행하였다.
<고려>
고려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적극적인 봉불정책(俸彿政策)에 따라 팔관회(八關會)를 베풀어 연례행사로 삼게 하였고, 경유(慶猷)·충담(忠湛)을 왕사(王師)로 삼고 많은 고승 대덕을 존경하여 예우하였다. 태조의 숭불호법(崇佛護法)의 국가적 정신은 역대의 왕들이 모두 계승하여 6대 성종은 송나라로부터 대장경(大藏經)을 들여왔고, 8대 현종과 23대 고종은 불법의 힘으로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대장경을 각판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대각국사(大覺國師)·보조국사(普照國師)와 같은 훌륭한 고승이 배출되었고, 불교의 여러 종파(宗派)가 이때부터 비롯되어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남산종(南山宗)·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시흥종(始興宗)·신인종(神印宗)·총지종(摠持宗)·중도종(中道宗)·도문중(道門宗) 등이 있었다. 특히 《고려대장경》 조성은 고려 불교문화의 집대성인 것이며, 이와 함께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경천사(敬天寺)의 13층탑 및 혜허(慧虛)의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 등이 현존하고 있다. 또 광종 때의 균여(均如)는 불교문화를 통해 불교의 대중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조선>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표방한 조선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태조 때 무학(無學)을 왕사로 삼아 개국 초창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으나, 이후 억불책으로 인하여 상당히 위축되었다. 그리고 세종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종단을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양종으로 하였으나,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들 수양(首陽)에게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게 하는 등 그간의 억불책에서 다소 후퇴하였다. 그러다가 세조는 불교보호정책을 펴 인경간행(印經刊行)과 불전의 번역 및 불교가무(佛敎歌舞)의 창제에 힘썼고, 불교음악인 《영산회상(靈山會相, 靈山會上)》은 조정의 정악(正樂)으로 되었으며, 또 불교 무용인 연화대무(蓮花臺舞)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조 사후 조선의 불교는 유생들에 의해 가혹한 배척을 받아 1566년(명종 21)에는 양종과 승과가 폐지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뒤 산중에 은거하던 승려들은 임진왜란 때 의승군(義僧軍)을 조직, 혁혁한 전공을 세워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은 왜군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조선의 불교문화는 산중에서 이루어졌다는 데 특징이 있다.
<근대>
근대에 들어서면서 불교는 그 핍박의 굴레를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승려에 대한 입성금지령(入城禁止令)의 해제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일본의 니치렌종〔日蓮宗〕 승려의 건의에 따라 당시의 친일내각 총리대신인 김홍집(金弘集)의 결단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1899년(고종 36) 동대문 밖(지금의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원흥사(元興寺)가 세워져, 한국 불교의 총종무소(總宗務所)가 되면서 전국의 사원을 통할하였다. 정부에서도 이때부터 국가행정의 범위 안에서 불교를 보호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오랫동안 관심 밖으로 방치되었던 전국의 사찰 및 승려의 위치는 차츰 개선되어졌다. 한편 1906년에는 최초의 근대적 불교교육기관인 명진학교(明進學校)가 원흥사를 교사로 하여 세워졌는데, 이는 오늘날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의 모체이며 한용운(韓龍雪) 등이 수학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국권이 상실되면서 한국의 불교교단은 일본 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산으로 나뉘어 각각 30군데의 교구로 성립되기에 이르렀으나,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통제하는 기구는 마련되지 않았다. 그리고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朝鮮佛敎中央敎務院)이 설립되어 중앙통제기구로서의 체제를 갖추었으나, 오래가지 않아서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시 총본산(總本山) 운동이 전개되었다. 1941년 봄 태고사(太古寺;지금의 조계사)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이라고 불리던 종단의 이름을 조계종(曹溪宗)으로 결정하였다. 그 뒤 45년 8·15와 더불어 조선불교조계종은 한국불교조계종(초대교정 鼎鎬)으로 재정비,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현대불교의 과제>
한국 불교문화는 민족문화의 근간을 형성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억불로 인해 산중에 은거하면서도 그 문화의 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일제강점기 아래에서도 선교양종 또는 조계종의 정통성을 끝까지 지켜왔다. 8·15는 불교계에도 무한한 비약을 기약하는 자유를 누리게는 하였으나, 그에 따른 많은 과제와 문제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오늘의 한국불교는 그러한 과제와 문제성을 극복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인류가 화합하여 참된 인간을 완성하려는 불교의 목적과 승가(僧伽)의 참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 곧 한국불교의 과제이며 바람이다. 그 동안 한국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에 치우쳐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이상을 소홀히 하였고 다른 종교와의 갈등에 원만히 대처하지 못한 점도 있었으나, 많은 불자(佛子)들의 대승적 노력과 특히 불교방송(佛敎放送;BBS)의 개국 등으로 인해 오해반목을 극복해 나아가고 있다.
〔불교의 현황〕
인도불교는 20세기 중반에 주로 천민계급에서 신불교운동의 움직임이 나타났지만 영향력은 작다. 중국, 기타 공산권의 불교도 거의 폐색상태(閉塞狀態)에 있다. 한편, 전통적인 보수계의 장로부불교는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성하고, 대승불교는 한국·일본·타이완에서 번영하고 있다. 티베트불교는 일시적으로 약화되어 있지만 세력은 뿌리가 깊어 튼튼하다. 또 대승불교의 여러 종파, 특히 선(禪)은 미국 등 세계 각지에 진출하였고, 일부에서는 포교에 성공하고 있다. 대승불교는 그 교의나 범절 외에 사상·예술·문화 및 기타 습속까지도 포함해서 이른바 대승문화로 발전하였고, 특히 한자문화권에 대한 영향은 매우 크다. 다만 그 최대의 특색인 관용이 지나쳐 세속에 영합하여 유행에 빠지기 일쑤이며, 특히 일본에서는 사자공양(死者供養)-장제의례(葬祭儀禮)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교에 일관되는 엄격한 부정-초월의 논리는 과격한 절대화에 등을 돌린 채 다양성의 승인을 진척시켜, 마음의 평정과 평안을 추구하는 불교의 이상과 함께 오늘날 가장 중요한 평화에 대한 정신적 거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현재 세계의 불교계 인구는 약 5억이라고 한다. 불교연구는 불교가 전해진 각지·각국에서 예로부터 왕성하게 이루어져 왔는데, 진정한 의미의 문헌학에 기초한 불교학은 19세기 중엽 이후 유럽에서 시작되어, 곧 전세계로 확대되었다. 중요한 선각자로는 덴마크의 M.파우스뵐·V.트렝크너, 프랑스의 E.뷔르누프·P.펠리오·S.레비·J.바코·P.드미에빌, 독일의 H.올덴베르크·W.가이거·H.뤼더스·발레저·H.글라저나프·발트슈미트, 오스트리아의 M.빈터니츠·프라우발너, 영국의 M.뮐러·T.W.& C.A.F.리스 데이비즈, 이탈리아의 G.투치, 헝가리의 K.초마, 네덜란드의 J.케른, 벨기에의 L.V.푸생·E.라모트, 소련의 P.스체르바츠키, 미국의 F.E.에저턴 등이 있다.
[미륵신앙]
미륵신앙(彌勒信仰)이란 미래의 부처인 미륵의 재림을 믿는 신앙이다.
미륵(Maitreyer)은 석가모니 부처의 뒤를 이어 부처가 된다는 미래의 부처를 말한다. 미륵은 불멸 후 56억 7천만 년 뒤에 투시타(Tusita)1)라는 별에서 인간계로 하강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한다. 성불한 다음 그는 세 차례에 걸쳐 모든 중생을 제도하게 되는데, 이를 '용화삼회설법(龍華三會說法)'이라고 한다. 비록 우리는 말세에 살고 있으나 미래에 이 세상에 재림할 미륵불을 믿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미륵불의 하강 시에 그 용화삼회설법에 참가, 구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미륵신앙의 골격이다.
이 미륵신앙에는 다음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그 첫번째는 『불설미륵하생성불경(佛說彌勒下生成佛經--下生經)』에 그 근거를 둔 설로서 불멸 후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인간계로 내려와 중생을 제도한다는 하강신앙이다. 이어서 미륵불이 하강하게 되면 이 지상은 그대로 정토화(淨土化)한다고 한다. 따라서 시간은 뒤로 밀어두고 '지상의 정토화'라는 입장만 강조하게 되면 "지금 당장" 지상의 정토화가 가능하다는 강렬한 현실신앙이 된다. 여기에서 이 지상을 우리의 손으로 정토화하자는 주장이 나오게 되는데, 이는 민중봉기, 또는 민중운동과 직결되어 왔다. 그러나 난세에는 미륵의 화신이라 자칭하는 사이비 교주들의 출현근거가 되기도 하는 등 부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다. 이와 같은 미륵불의 재림신앙은 기독교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데, 이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에서 서양문화의 색채가 농후하였던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두번째는 승천신앙, 즉 상생신앙으로 미륵불이 하강한다는 56억 7천만 년이라는 긴 시간을 무작정 기다릴 것이 아니라 중생인 우리 쪽에서 능동적으로 미륵불이 머물고 있는 투시타(=도솔천)로 올라가자는 주장이 신앙화한 것이다. 『불설미륵상생성불경(佛說彌勒上生成佛經--上生經)』에서 비롯된 이 승천신앙은 하강신앙을 강조한 나머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일종의 자력신앙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가면서 자력신앙인 '도솔정토왕생신앙'이 타력신앙인 '극락정토왕생신앙'에 점차적으로 흡수, 이전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미륵신앙은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후 300년 사이에 인도의 북서 지방 대승불교도들 사이에서 발생했다. 미륵신앙이 본격화되면서 근본 경전인 미륵경전들(彌勒三部經)이 제작되었는데, 이 미륵신앙을 체계화한 이는 아상가(Asanga)이다. 미륵신앙은 인도의 서북부 간다라 지방을 위시하여 한때 인도의 상당한 지역에까지 파급되어 나갔으며, 중국승 법현(法顯)과 현장(玄裝)에 의해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중국의 미륵신앙은 도안(道安), 법현 등을 거쳐 북위 불교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수·당에 이르러 미륵상생신앙은 미타정토신앙에 흡수돼 버린 반면 하생신앙은 더욱 강화되어 마침내는 이 지상의 정토구현을 내세워 민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의 미륵신앙은 포대화상(布袋和尙)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욕심 많은 복신(福神)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륵신앙을 받아들였던 초기에는 북위의 그것과 유사하였으나 차츰 '미륵국토 구현' 내지는 '미륵인격 구현' 사상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전자의 예로는 백제 무왕의 미륵사 창건을 들 수가 있으며, 후자의 예로는 신라의 '화랑도'를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신라 말의 혼란기가 다가오자 궁예와 같은 자칭 미륵의 화신2)도 나타났다. 고려 시대 초기에는 미륵신앙을 중시한 법상종이 선종이나 화엄종에 밀리면서 신라 시대와 같이 열렬함과 독특함을 갖춘 미륵신앙이 나타날 수는 없었으나 특수사찰을 중심으로 왕실 및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갔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정하였던 고려 후기에는 미륵하생신앙이 크게 성행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하층민을 중심으로 미륵신앙은 이어져 차츰 주술적 성격을 띤 민간신앙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정토신앙]
<정토신앙(淨土信仰>3)이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믿고 따름으로써 그의 나라인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신앙이다.
정토란 일체의 부정한 것이 사라진 청정한 불국토(佛國土)로서 즐거움만이 충만된 세계를 가리킨다. 불교 경전에는 미륵보살의 도솔천정토, 약사여래의 유리광정토 등 여러 가지의 정토가 설하여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승한 곳이 아미타불의 서방정토4)라 한다. 이곳은 지구로부터 서쪽으로 10만억 개의 은하계(國土)를 지나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간적인 고뇌가 없고 영원한 법열(法悅)만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수도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정토에 태어난 사람들은 유혹과 번뇌에서 벗어나 마음먹은 대로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인간 세상은 고통과 고뇌, 그리고 구도의 길을 방해하는 장애들로 가득 차 있으며, 날이 갈수록 이와 같은 현상이 더욱더 심해져 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진리의 길을 가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아미타불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그의 불가사의한 영력으로 다음 세상에서는 극락정토에 태어나서 진정한 구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정토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은 기원 후 100년경 인도의 북서 지방에서 시작되어 중앙아시아와 중국 등지를 거쳐 우리 나라로 전하여졌는데, 선종(禪宗)과 같은 자력신앙과 비교하여 타력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정토신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신라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끊임없는 전란과 사회적 불안이 한 요인이 되어 이 신앙이 아주 성행하였는데, 사자(死者)의 왕생, 타력에 의지한 왕생사상은 대승불교의 대중화와 함께 자력왕생, 현생생불설(現生生佛說) 등을 낳았다. 이 시기가 한국 정토사상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데, 법위, 원효, 현일, 의적, 경흥 등의 불교사상가들이 활약하였다. 이렇듯 신라 시대에 왕성했던 정토신앙에의 열기는 고려로 들어오면서 선(禪)의 한 부분적인 형태로 축소되어 수용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는 주로 선승들에 의해서 변형된 정토신앙(唯心淨土 自性彌陀)이 간헐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특히 태고보우 같은 이는 정토신앙의 기본수행인 칭명미타염불을 공안의 한 방식으로 채택하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대체적으로 선승들에 의해 정토신앙이 고취되기에 이르렀으며, 중기 이후의 정토신앙은 불교를 중흥한 대표적 인물인 휴정에 의해 조명되었다. 그러나 그 주류는 역시 선적(禪的)으로 변형된 정토신앙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극락왕생을 기구하는 정토신앙은 현세보다는 내세를, 차안보다는 피안을, 이승보다는 저승에 중점을 두는 신앙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윤회사상에 대한 해석도 본래적 해석을 떠나서 전개하고 있다. 원래 인도 불교에서 윤회는 끝없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윤회를 부정하는 측면에서 그 사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기복신앙으로서 윤회를 생각한 중국인들은 이를 긍정적 방향에서 받아들였다. 즉, 중국을 거치면서 인도 불교는 중국적으로 변용되었으며, 이같이 변용된 불교를 신라 사회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귀족층이 현재의 복락이 내세까지 연장되기를 바라고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인 것과는 달리 서민들은 현재의 고통과 불안이 끝나고 극락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족층의 사상과 서민층의 사상에는 '연장'과 '단절'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력적이고 능동적인 불교가 타력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화한 것은 미륵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미륵신앙은 도솔천에서 이승으로 '강림(降臨)하는 하생(下生)'의 형태인데 반해 정토신앙은 이승에서 극락으로 '왕생'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두 신앙은 서로 상반된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데, 미륵신앙이 현세 지향적이라면 정토신앙은 내세 지향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타력적인 신앙이란 면에서는 꼭 같다.
정토신앙은 미륵신앙보다 나중에 일어나 크게 성행하였는데 그 기간은 미륵신앙에 비해 짧았다. 사후의 내세적 극락보다는 재림주가 아무래도 더 강렬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 같으며,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귀족층과 서민층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혼선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그토록 정토신앙이 성행하여 정토종이 큰 교단세력으로 등장하였는데 비해 우리 나라에서는 정토신앙이 그다지 깊이 뿌리 박지 못하고 말았다는 사실에서 양국의 서민 신앙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1) 부처가 인간계로 내려와 중생을 제도하기 직전에 머문다는 별. 석가모니 부처도 이 세상에 오기 전에 머물렀다고 한다. 2) 궁예는 머리에 금관을 쓰고 가사를 입고 맏아들을 청광보살, 막내아들을 불광보살이라 칭하며 스스로 미륵불경 20여 권을 제작, 미륵의 하강을 주장하였다. 3) 아미타불의 원어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력을 나타내는 무량수(無量壽;Amitayus)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빛이라는 무량광(無量光;Amitabha),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이는 아미타불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저 영원한 생명력과 그 빛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는 듯하다. 4) 인도에서는 방위를 정할 때 언제든지 동쪽을 기준으로 한다. 즉, 동쪽은 앞면으로서 시간상으로는 과거, 그리고 서쪽은 후면으로서 시간상으로는 미래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정토는 내세에 태어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그 위치를 서쪽으로 정한 것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Amitayus Buddha>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 아미타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을 가진 것)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을 가진 것)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아미타(阿彌陀)라고 음역하였고,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 등이라 의역하였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는,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구도자(보살)였는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겁(劫) 전에 부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처는 자신이 세운 서원(誓願)으로 하여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그 원을 아미타불이 되기 이전인 법장보살 때에 처음 세운 원이라고 하여 본원(本願)이라고 한다. 모두 48원(願)인데, 이 48원의 하나하나는 한결같이 남을 위하는 자비심에 가득한 이타행(利他行)으로 되어 있어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를 이룩하고 있는 이 부처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13번째의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과 15번째의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은 아미타불의 본질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18번째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은 “불국토(佛國土)에 태어나려는 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염(念)하면 왕생(往生)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중생들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정토왕생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두산동아)
[아미타불]阿彌陀佛Amitbha (산스크리트로 '한량없는 빛'이라는 뜻)불교, 주로 정토종에서 숭배하는 구원불. 정토종 근본 경전의 하나인 〈무량수경(無量壽經) Sukhvat-vyha-stra〉에 따르면, 오랜 옛날 법장이라는 비구가 48개의 서원을 세웠는데, 그 가운데 18번째 서원에서 자신이 부처가 되면 그를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그가 건설한 정토에 태어나서 열반에 이를 때까지 지복을 누리며 살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법장은 자신의 서원을 모두 이룬 뒤 아미타불로서 '극락'(極樂 Sukhvat)이라는 서방 정토를 주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믿음을 강조하는 아미타불 신앙은 650년경부터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고, 곧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한국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이 〈아미타경소 阿彌陀經疏〉를 저술하면서 정토신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특정 종파에 한정되지 않고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일본에서는 12세기에 형성된 정토종과 13세기에 형성된 정토진종(淨土眞宗)이 오늘날까지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티베트와 네팔에서는 구세주로서의 아미타불에 대한 숭배가 동아시아에서와는 달리 유행하지 못했지만, 영원히 존재한다는 다섯 구원불(→ 선정불) 가운데 하나로 아미타불은 매우 존중되어왔다. 이 사상에 따르면, 역사상의 부처인 석가모니와 관세음보살은 그의 화현으로 간주된다. 아미타불을 상징하는 색은 빨강, 상징하는 자세는 선정인(禪定印 dhyna-mudr), 상징하는 사물은 발우(鉢盂), 그가 타고 다니는 것은 공작, 배우자는 판다라(Par), 성(姓)은 라가(Rga), 그를 상징하는 요소는 물, 그를 상징하는 음절은 '바'(ba) 또는 '아'(h), 그를 상징하는 온(skandha:존재를 구성하는 근본요소)은 상(sajn:감각적 대상에 대한 지각), 그를 상징하는 방향은 서쪽, 그를 상징하는 감각은 미각, 그를 상징하는 감각기관은 혀, 인체에서 그가 머무는 장소는 입이다. 아미타불은 장수하게 해주는 존재로서 '무량수불'(Amityus:산스크리트로 '무한한 수명'이라는 뜻)이라고도 불린다. 중국과 한국과 일본에서는 '아미타불'과 '무량수불'이라는 2가지 이름이 같은 뜻으로 상호교환되며 사용하기도 하지만, 티베트에서는 명확히 구분하고 있으며, 장수를 기원하는 티베트의 특별한 라마 의식에서는 무량수불을 숭배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 무량수불은 여러 가지 장식에 왕관을 쓰고 영원한 생명의 보석들이 나온다는 신비스러운 항아리를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Avalokitesvara>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한다는 불교의 보살. 산스크리트어로 아바로키테슈바라(Avalokitesvara)이며, 중국에서 뜻으로 옮겨 광세음(光世音)·관세음(觀世音)·관자재(觀自在)·관세자재(觀世自在)·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으로 썼는데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한다. 관세음은 구역이며 관자재는 신역인데,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테슈바라 곧 자재롭게 보는 이[觀自在者]·자재로운 관찰 등의 뜻으로 본다면 관자재가 그 뜻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관세음보살로 신앙되어 왔으며 관음보살이라 약칭하였다. 그래서 《법화경(法華經)》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관음보문품(觀音普門品) 또는 관음경(觀音經)이라 일컫는다.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이며, 관자재(觀自在)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재롭게 관조(觀照)하여 보살핀다는 뜻이다. 결국 뜻으로 보면 관세음이나 관자재는 같으며 물론 그 원래의 이름 자체가 하나이다. 보살(bodhisattva)은 세간과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성자(聖者)이므로 이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구제하는 보살[救世菩薩], 세상을 구제하는 청정한 성자[救世淨者], 중생에게 두려움 없는 마음을 베푸는 이[施無畏者], 크게 중생을 연민하는 마음으로 이익되게 하는 보살[大悲聖者]이라고도 한다.(두산동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Avalokitevara bodhisattva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관세자재보살(觀世自在菩薩) ·관세음자재보살(觀世音自在菩薩)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관음·관세음·관음보살이라고도 함('모든 곳을 살피는 분', '세상의 주인' 등을 뜻함).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 세상의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보살의 서원(誓願)을 가장 잘 보여준다. 불교의 여러 보살들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가장 친숙하며, 팔리어경전을 신행(信行)의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보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좌부(上座部)불교에서조차 숭배할 만큼 모든 불교권에서 가장 널리 숭앙받고 있다. 그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으로서 이 세상에 나타나며, 이 때문에 쓰고 있는 보관(寶冠)에는 아미타불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는 석가모니불의 입적 이후부터 미래불인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난파, 화재, 암살, 도둑, 사나운 짐승들에 의한 피해 등으로부터 세상을 지켜주며, 구제할 중생의 근기(根機:정신적 수준)에 맞추어 33가지의 몸으로 세상에 나타난다.
관세음보살은 무수하게 많은 모습으로 표현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7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성관음(聖觀音):가장 단순한 형태로서 한 손에 연꽃을 든 채, 서 있거나 앉아 있다. ②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머리가 열 하나, 팔이 둘, 또는 넷인 모습을 하고 있다. ③ 천수관음(千手觀音):1,000개의 팔을 가진 모습을 하고 있다. ④ 준제관음(准提觀音):18개의 팔을 가지고 앉아 있는 가장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⑤ 불공견색관음(不空絹索觀音):올가미 밧줄을 독특한 상징으로 하고 있다. ⑥ 마두관음(馬頭觀音):사나운 표정을 한 말의 머리를 하고 있다. 티베트에서 말의 수호자로 부르는 하야그리바에서 나왔다. ⑦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6개의 팔을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여의주를 들고 있다. 이 가운데 성관음이 본신(本身)이며, 나머지는 변화신(變化身)이다.
관세음보살의 공덕과 기적은 많은 불교경전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관음경 觀音經>은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꾸준히 읽히면서 관음신앙의 주요경전으로 자리 잡았으며, 3세기 이후에는 대중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어 있던 〈법화경 法華經〉에 편입되었다.
관세음보살을 신앙하는 관음신앙이 발생한 인도에서 이 신앙은 3~7세기 북부에서 가장 성하였다. 인도에서 서역(西域)을 거쳐 1세기 무렵 중국에 전해진 관음신앙은 6세기경에는 모든 불교사원에서 관음상을 모실 정도로 널리 퍼졌다. 송대(960~1126) 이전에 관세음보살은 분명하게 남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나, 이후에는 남성과 여성의 특성을 함께 갖춘 형태로 표현되었다. 그 이유는 관세음보살이 남성과 여성의 속성을 비롯한 모든 이원성(二元性)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었다. 아미타불을 숭배하는 정토교(淨土敎)에서는 관세음보살을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보살(脇侍菩薩)로 설정하고 있으며, 관세음보살은 죽은 이들을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인도하는 모습으로 곧잘 묘사했다. 이러한 신앙은 3~5세기 무렵에 한역된 정토계 경전들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관음상과 관음신앙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음신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에서 전래된 관음신앙이 6세기 무렵에는 백제와 신라에서 뚜렷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백제에서는 독존적(獨尊的)인 관음신앙이 유포되었으나, 말기에는 관음상이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서 조성된 경우도 있다. 통일신라 초기의 관음신앙은 독존적인 관음신앙으로서 주로 현실적인 이익을 위한 현세적인 성격을 띠지만, 관세음보살이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돕는다고도 보아 정토신앙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나말여초(羅末麗初)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관음보살을 우위에 두는 신앙에서 벗어나 여러 구세신앙(救世信仰)의 하나로서 자리잡게 되었으며,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대중과 가장 친근한 신앙으로서 정착되었다.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전래된 관음신앙은 특정한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일본 전역에 두루 퍼져나갔다. 호류 사에 있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관음상은 7세기에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티베트에는 7세기 무렵에 전해졌으며, 곧 가장 인기있는 보살이 되었다. 티베트에서 관세음보살은 포탈라산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관음상을 산꼭대기에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역대 다라이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받들어졌다.(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대비관세음]
대비관음과 천수관음(千手觀音)의 동의어로, 관세음보살을 통틀어 말합니다.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범어로는 마하스타마프라프타(Mahasthamaprapta)이며 대정진(大精進) 또는 득대세(得大勢). 대세지(大勢至)라 번역한다. 또는 줄여서 대세(大勢). 세지(勢至)라고도 한다. 아미타불에게는 자비문과 지혜문이 있는데, 왼쪽의 보처보살인 관세음보살이 자비문을 맡고 있음에 대비하여 대세지보살은 오른쪽의 보처보살로서 지혜문을 담당하고 있다. 이 보살은 그가 지닌 지혜의 광명으로 일체세계와 일체중생을 두루 비추어 삼도(三途)의 고통을 여의고 위없는 깨달음을 향한 보리의 힘을 얻게 하므로 대세지라고 이름한다. <관무량수경>에서는 대세지보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보살의 크기는 관세음보살과 같고 그 원광의 지름은 125유순이며 250유순을 비춘다. 온몸에서 나투는 광명은 자마금색으로 시방세계의 모든 나라를 다 비추는데 인연이 있는 모든 중생은 다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보살의 한 모공(毛孔)에서 나오는 광명만 보아도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들의 청정하고 미묘한 광명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보살의 이름을 끝없는 광명 즉 무변광(無邊光)이라 한다. 이 보살의 보배관은 500가지의 보배로 장식되어져 있고, 그 하나하나의 보배꽃에는 500여개의 보배꽃받침이 있으며, 그 낱낱의 꽃밭임에는 시방세계의 청정 미묘한 불국토의 드넓은 모습이 다 나타나 있다고 한다. 또 발을 디디면 삼천세계와 마군의 궁전이 진동하고 그 울리는 곳마다 5백억 송이의 보배꽃이 피고 그 꽃은 극락세계의 연못에 핀 연꽃과 같다고 한다. 또한 앉을 때에는 칠보로 된 국토가 한 순간에 흔들리며, 그 울림은 아래쪽으로는 금광불국토까지 이르고 위쪽으로는 광명불국토까지 이른다고 한다. 정수리에 보배병을 얹고 있으며 항상 아미타불의 바른편에 시립한다. 아미타불이 임종하는 중생을 맞으로 올 때 연꽃을 든 관음보살과 함께 합장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보살이다. 한 번 설법을 하게 되면 수많은 대세지보살의 분신들이 극락세계에 모여 들며 이 보살의 형상을 보거나 음성만 들어도 곧바로 교화를 입고 해탈을 하게 된다고 한다. 미타삼존(彌陀三尊)을 일컬을 때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된다.
[윤회(輪廻)]
범어 samsara의 번역으로 승사락[僧娑洛]이라 음역하며 윤회[輪廻]라고도 쓴다. 또한 생사라고도 번역하고 생사윤회. 윤회전생. 유전[流轉]. 윤전[輪轉]이라고도 한다. 수레바퀴가 끝없이 굴러가듯이 중생은 번뇌와 업에 의해 삼계 육도의 미혹한 생사의 세계를 계속하여 돌고 돌아 그침이 없는 것이다. 이 윤회설은 사람이 죽은 후 영혼과 분리되며 풀. 나무. 새. 짐승등에 깃들인다는 전주설[轉住設]에서 발달한 것이다. 이런 사상은 업설과 결합하여 고대의 우파니샤드 시대부터 베단타에까지 계승되었다. 상카라뿐만 아니라 힌두교에도 스며들어 보편적인 사상이나 감정이 되었다. 윤회는 불교에서 윤회전생이라 부른다. 그런데 확실하게 윤회설을 브라만교가 채택한 것은 고대의 우파니샤드시대 부터이며, B.C 5세기경에 배출된 육사외도[六師外道]들도 대부분 윤회설을 수용했는데 적취설[積聚設]이라 불렀다.
[삼계]
(1) 欲界 ( 6 天 )
욕계는 天에 속하나 아직까지 欲을 떠나지 못한 세계이기에 三界로 나눌 땐 欲界에 넣는다.
1. 사천왕천(四天王天) ; 護世天이라고도 하는데 사대천왕이 있어 수미(須彌)의 四州를 수호하며 그 권속들과 살고 있다고 한다.
사대천왕이란 (1) 東州를 주로 수호하는 持國天王 (2) 南州를 주로 수호하는 增長天王 (3) 東州를 주로 수호하는 廣目天王 (4) 北州를 주로 수호하는 多聞天王 의 넷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의 城은 모두 暖寶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에도 남여의 구별이 있어 혼인하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아수라 도리천과 마찬가지로 몸과 몸을 가까이 하여 기운으로써 음양을 이루며 이곳에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1 - 2 세 아이와 같아 자연히 化現하여 天의 무릎에 앉는다고 한다. 우리가 큰 절에 가면 입구에 天王門이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곳은 곧 이 사대천왕을 모신 곳으로 佛法을 수호하고 밖으로부터 오는 魔를 방어하는 뜻에서 세워진 것이다.
2. 도리천(刀利天) ; 四天王위에 있으며 33天이라고도 한다. 이 도리천을 33천이라고 하는 이유는 중앙에 도리천의 왕인 帝釋天이 있는 善見城(혹은 喜見城)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에 8城씩 32城이 있어 도합 33城이 되기 때문이다. 제석천은 사천왕과 32천을 통솔하면서 불법과 불법에 귀의한 이들을 보호하고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한다고 한다. 이 도리천에 대해서는 일찌기 부처님께서 어머니인 마야부인을 위하여 석달동안 올라가 설법을 하고 내려오셨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이상 六欲天 중에서 사천왕천과 도리천의 둘은 수미산을 의지해 있기 때문에 地居天 이라고 하는데 사천왕천은 중턱에 도리천은 정상에 있다고 한다. * 욕계의 6천 (六天) 중 두번째로, 수미산은 정상에 있고, 제석천(帝釋天 : 인드라신)은 여기에 삽니다. 사방에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마다 8천이 있어 32천. 제석천과 함께 33천이 됩니다
3. 야마천(夜摩天) ; 이 야마천부터는 앞의 二天이 地居天임에 반하여 공중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空居天이라고 한다. 야마천은 염마천(焰摩天), 염천이라고도 하며 번역하여 善時天 時分天이라고도 하는데 이 곳에서는 때에 따라 五欲樂을 받는다고 한다. 도리천보다 수승한 하늘로서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3 - 4세 아이와 같다고 한다.
4. 도솔천(도率天) ; 知足天 喜足天 妙足天이라 번역하여 쓰기도 하는데 야마천보다 위에 있는 더 나은 하늘이다. 이 곳에서는 자기가 받는 五欲樂에 스스로 만족한 마음을 내 안정되어 있다고 한다.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4 - 5세 아이와 같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곳엔 내외의 二院이 있는데 외원은 천인들의 欲樂處가 되고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로서 미륵보살은 이 곳에 있으면서 남염주부에 하강하여 성불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시기전에는 이곳 도솔천 내원궁에서 護明보살로서 천인들을 교화하고 계시었다고 전하여 온다. * Tusita의 음역으로 도솔천욕계의 육천(六天) 중 제4천이다. 이 하늘의 내원(內院)은 장래 부처가 될 보살의 주거지로 일컬어지며, 석존도 예전에 여기에서 수행하고, 현재 미륵보살도 이곳에서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곳의 천인(天人)의 수명은 4천년, 그 하루 밤낮이 인간계의 4백년에 해당한다고 한다
5. 화락천(化樂天) ; 化自在天 化自樂天 樂變化天이라고도 한다. 도솔천보다 위에 있는 하늘로서 오욕의 경계를 스스로 변화하여 즐기기 때문에 化樂天이라고 한다. 이 하늘에 처음 태어 났을 때는 인간의 5 - 6세 아이와 같다고 한다.
6. 타화자재천(靑化自在天) ; 靑化天이라고도 한다. 화락천보다 더 수승한 하늘로 욕계 중 가장 높은 데 있는 제일가는 하늘이다. 이 하늘은 남이 변해 나타내는 즐거운 일들을 자유롭게 자기의 쾌락으로 삼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다고 한다. 이 곳에 처음 태어났을 때에는 인간의 6 - 7세 아이와 같다고 한다.
(2) 色界(18天)
색계란 앞의 욕계가 중생의 모든 탐욕을 주로 하여 이룩된 세계이고, 무색계가 순 정신적인 세계임에 비하여 모든 탐욕은 여의었으나 아직 순 정신적인 것은 되지 못한 중간의 세계로 욕계의 상층에 있으며 욕계 보다 수승한 물질로 되어있다.
** 초선천(初禪天) : 初禪定을 닦은 이가 나는 하늘
1. 범중천(梵衆天) ; 초선천의 주인인 大凡王(大凡天王)이 영솔하는 천인이 살고 있다고 한다.
2. 범보천(梵輔天) ; 대범왕의 신하들이 살고 있으며 대범왕이 어디를 갈 적엔 반드시 이 신하들이 앞서 가면서 왕의 이익을 생각한다고 한다.
3. 대범천(大梵天) ; 대범왕이 있는 곳으로 그 누각과 寶臺가 아름답다고 한다.
** 이선천(二禪天) : 제이선정을 닦는 이가 나는 하늘
1. 소광천(少光天) ; 二禪天 중에서 광명을 놓는 것이 제일 적다고 한다.
2. 무량광천(無量光天) ; 이 하늘에서 나면 몸으로 광명을 놓는 것이 한량없다고 한다.
3. 극광정천(極光淨天) ; 광명이 앞의 것보다 더하여 自靑를 비춘다고 한다.
** 삼선천(三禪天) : 제삼선정을 닦는 이가 나는 하늘
1. 소정천(少淨天) ; 이 하늘의 五識은 즐겁고 청정하기에(樂受) 淨이라하며 三禪天 중에서는 가장 저열하다고 한다.
2. 무량정천(無量淨天) ; 樂受가 있으며 소정천에 비하면 훨씬 勝妙하여 한량이 없다.
3. 편정천(遍淨天) ; 이 하늘은 맑고 깨끗하며 즐거움이 가득찼기에 遍淨이라고 한다.
** 사선천(四禪天) : 제사선정을 닦는 이가 나는 하늘
1. 무운천(無雲天) ; 이 하늘부터는 구름위에 있어 구름이 없는 곳에 있으므로 무운이라고 한다.
2. 복생천(福生天) ; 이 하늘엔 수승한 福力으로 태어남으로 복생이라 한다.
3. 광과천(廣果天) ; 사선천 중에서 범부가 사는 하늘로는 가장 좋다고 한다.
4. 무상천(無想天) ; 위의 광과천안에 있는 하늘로 이 하늘에 태어나면 모든 생각이 없으므로 무상이라고 한다.
5. 무번천(無煩天) ; 욕계의 괴로움과 색계의 즐거움을 모두 여의어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 없는 것으로 첫번째 하늘이다.
6. 무열천(無熱天) ; 심경이 依處가 없고 淸凉自 하여 일체의 熱惱가 없다.
7. 선현천(善現天) ; 天衆의 善妙의 果報가 나타나므로 선현이라고 한다.
8. 선견천(善見天) ; 장애가 없어 十方을 보는 것이 자재로운 하늘이라고 한다.
9. 색구경천(色究竟天) ; 색계중 가장 위에 있는 하늘이다.
(3) 無色界 ( 4 天 )
무색계란 無色定을 닦아 受生하는 하늘로 순전히 정신적인 세계이며 三界중 가장 수승한 곳이다. 그리고 무색정에는 四無色定이라고 하여 空無邊處定, 識無邊處定,無所有處定, 非想非非想處定의 넷이 있으므로 자연히 이에 따라 四天이 있게 된다.
1.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 ; 욕계와 색계의 모든 색법을 싫어하고 벗어나려 無色定을 닦되 색의 想을 버리고 虛空觀을 닦는 이가 태어나는 하늘이다.
2.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 ; 앞의 공무변처가 오히려 바깥 허공이라는 대상이 있으므로 이를 싫어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주관인 識이 무변하다는 이치를 알고 수행하여 태어나는 하늘이다.
3.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 ; 앞의 식무변처가 오히려 식이라는 所有感이 있으므로 이 마저도 싫어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空도 識도 전연 所有가 없다는 무색정을 닦아 이 定力으로 태어나는 곳이다.
4.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 ; 삼계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하늘이라는 뜻에서 有順天이라고도 한다. 이 하늘을 비상비비상이라 하는 이유는 식무변처정은 무한한 식의 존재를 觀想하므로 有想이요 무소유처정은 공도 식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관상하므로 非想인데, 이것은 유상을 버리므로 비상이요 비상도 버리므로 비비상 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定을 닦아 그 定力으로 태어나는 하늘 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보불(多寶佛)]
범어로는 프라부타라트나(Prabhutaratna)이며 동방의 보정세계(寶正世界)의 교주다. 번역하여 다보 또는 대보(大寶)라고도 한다. 통상적으로는 다보여래 또는 다보불 이라 한다. 이 부처님이 무한한 과거 보살행자로 있을 때 크나큰 서원을 세우기를 '내가 장차 성불하여 중생들을 제도하고 마침내 입멸하게 되면 온몸 그대로 사리가 되어 어떠한 부처님이든 <법화경>을 설하는 장소에 반드시 출현하여 그의 설법을 증명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부처님이 출현하여 <법화경>을 설할 때마다 보탑(寶塔)의 모습으로 솟아올라 이를 증명하였으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할 때도 적문삼주(迹門三周)의 정종분(正宗分)을 마치고 이어서 그 유통분(流通分)을 설하려 하자 홀연히 땅속에서 다보불의 전신이 그대로 사리가 되어 출현, 그 설법을 증명하였다. 즉 다보불의 전신그대로가 화석(미이라)이 되고 그 화석을 안치한 하나의 보탑이 땅속에서 솟아오른 것이다. 그리고 그 탑속에서 다음과 같은 찬탄의 음성이 새어 나온다.“거룩하시고 거룩하시도다. 세존이시여, 능히 평등한 큰 지혜로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시며, 부처님께서 보호하고 생각하시는 <법화경>으로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시니, 이와 같이 세존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 진실이어라."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하면 다보불이 <법화경>이야말로 가장 수승한 가르침 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설하는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도 칭찬받아 마땅 하다고 한다. 한편 다보불은 일정한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 다보불을 친견하고자 할 때는 최상의 진리인 <법화경>을 설하여 부처님의 분신이 시방세계로부터 다 모여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다보불은 <법화경>과 같은 최상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몸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석가모니 부처님과 다보불은 동일한 연화대에 나란히 앉게된다. 따라서 다보불의 전신사리를 봉안한 보탑, 즉 다보탑은 언제나 석가탑을 쌍으로 안치할 때만 가능하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경덕왕 10년 (751)에 김대성이 세운 불국사의 다보탑이 유명하다.
[인과경(因果經)]
《인과경》은 부처님께서 당신의 전기(傳記)를 설하면서 인과의 실상을 밝혀놓은 독특한 경전입니다. 우리들 자신도 때로는 존경하는 분의 과거를 알고 싶어하듯이 부처님의 과거세에 지은 인연에 관하여 제자들이 듣고 싶어 했기 때문에 설법하신 것입니다. 이 경의 원래 경명은 《과거현재인과경》이라 되어 있지만 이를 줄여서 《인과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의 업인(業因)으로부터 그 결과인 과보를 현세에서 받으면서 또다시 미래의 과보를 현세에서 짓고 있다고 하여 《삼세인과경(三世因果經)》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중생들이 받고 있는 과보가 천차만별인 것은 다 전생에 지은 선악의 업보에 따른 것이라는 의미에서 《선악인과경(善惡因果經)》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경전이 한역된 것은 5c중엽 구나발타라(求那拔陀羅)삼장이 4권본으로 역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부처님께서 기원정사(祇園精舍)의 드넓은 도량에 모인 수많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과거생으로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제1권은 연등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적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선혜라는 선인으로 태어나서 살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선혜는 진흙 땅을 걸어가시는 연등불을 보고 자신의 옷으로 진흙 땅을 덮고 그래도 부족하게 되자 머리카락을 그 위에 깔아서 연등불로 하여금 그 위로 지나가시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인연공덕으로 선혜는 연등불로부터 수기(授記)를 받고 수행을 하여 도솔천에 태어났으며, 그리고는 또다시 중생제도의 염원을 세우고 사바세계에 태어나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과거생의 얘기이고 나머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현세에 있어서의 얘기입니다. 제2권은 싯다르타 태자의 성장과정과 출가하게 되기까지의 내용들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제3권은 6년간의 수행과정과 보리수아래에서 성도를 이루신 후에 녹야원에서의 초전법륜(初轉法輪)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제4권은 야사(耶舍)와 가섭 삼형제를 교화하신 내용을 비롯하여 사리불과 목련존자의 귀의, 교단의 유지에 대한 내용 등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과의 도리'를 배워 알면서도 간혹 '이 정도의 죄는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마치 물이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져 마침내는 큰 물통을 가득 채우게 되듯이, 비록 조그마한 죄라 할지라도 악업을 행하다 보면, 필경에 과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선업을 닦는 것도 이와 같이 똑같은 원리이겠지요. 그러면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큰 돌을, 작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작은 돌을 들고 오라고 한 후에 또다시 그들로 하여금 들고 온 돌을 모두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을까요. 큰돌을 갖고 온 사람은 쉽게 제자리를 찾아 옮겨 놓을 수 있었으나 작은 돌을 여러 개 담아온 사람들은 어디서 가져온 돌인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즉 큰 돌처럼 세상에 드러난 죄업은 참회를 통해 거듭날 희망이 있지만 작은 돌의 제자리 찾기가 쉽지 않듯이,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이 정도쯤이야"하고 묻어둠으로써 오히려 죄업을 키운다고들 합니다. 이와 같이 인과의 여실함을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과경》입니다.
*송나라 때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번역한 4권짜리 경전이다. <열장지진(閱藏知津)>에 의하면 서역의 축대력(竺大力)과 강맹상(康孟詳)이 공동번역한 <수행본기경>, 월지국의 지겸(支謙)이 번역한 <태자서응본기경>, 서진의 섭도진(攝道眞)이 번역한 <보살본기경> 등과 같은 경으로 무두 <과거현재인과경>의 다른 번역이라고 한다. 이 경전은 부처님이 전생에 선혜선인(善慧仙人)일 때 연등 부처님에게 머리를 풀어 진흙탕에 깔아 지나가게 함으로써 수기를 받음을 비롯하여 최후 대가섭을 교화하기까지를 4권으로 나누어 기록한 경이다. 다시 말해 선혜선인의 출가와 보광여래의 예언을 시작으로 하여 도솔천에 재생한 일.이 세상으로의 탄생. 아시타선인의 점상. 삼시전에 대한 이야기. 모후의 생천. 학예를 닦은 일. 데바닷타 등과 무예를 겨룬 일. 태자가 됨. 사색. 결혼. 사문유관. 출가. 왕궁의 슬픔. 태자를 찾아 나섬. 빔비사라왕과의 만남. 두 스승에게 도를 물음. 6년고행. 항마성도. 범천의 권청. 녹야원에서의 귀의. 사리불과 목련의 귀의.대가섭을 교화함에 이르러 끝을 맺고 있다. 특히 문장이 유려하고 때로는 대승적인 사상도 나타나고 있다. 원래 이 경은 부처님 자신이 설한 형식을 갖춘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기이지만,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 과거의 종자인연은 무량겁을 지날지라도 마침내 멸하지 아니함을 알아야 한다.'고 설하여 과거의 종자인연으로부터 현재의 과보를 얻는다고 강조한 데서 '과거현재인과경'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경은 중생이 받고 있는 현재의 과보가 천차만별한 것은 다 전생의 업인이라고 설한 점으로 달리 <선악인과경>이라고도 한다. 이 경전의 영향으로 중국의 당나라 시대 이래, <회인과경(繪因果經)>이라 하여 하단에 경문을 쓰고 상단에 부처님 전기에 관한 그림을 그린 특수한 예술이 성립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경전이 널리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재윤- 불교교양강좌 중에서( 출처 표시가 없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