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의 시인을 만나다 | 시집속 대표시 - 김선향
80cm 외 4편
너의 반쯤 감은 눈동자
아니 반쯤 뜬 눈동자
너를 잊을 수 없게 하네
나를 견딜 수도 없게 하네
어린이집에 간 지 겨우 닷새째
이불을 씌우고 베개를 올린 거대한 그림자 아래
너의 발버둥과 파닥거림이 이어지던 14분
네 어미 보티늉은 네가 누운 작은 관에
털신과 장갑을 함께 넣었단다
영상통화로 입관식을 지켜보던 네 외할머니는
베트남 하띤에서 오열하는구나
나는 어쩌자고 너의 뺨에 손을 댔을까
얼음장 같아 얼른 손을 뗐지만
손바닥엔 화인이 찍히고 말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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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여자들의 방
어머니집에 오니 거실은 물론이고
안방까지 난방을 끄셨다
아직 입춘이 지났을 뿐인데
어머닌 겨우내 이렇게 지내신 셈인가
따뜻한 곳은 내가 머무는 방뿐
식탁에 노트북을 펼치자
손가락이 곱아
끙끙거리며 교자상을 방으로 옮긴다
시를 얻으려 소설을 낳으려 저마다
토지문화관에 연희문학창작촌에 예버덩문학의집에
저멀리 땅끝 해남까지도 가고 제주도로 가파도로도 건너가고
호텔 프린스로도 간다
나는 여태껏 그런 델 가보지 못했다
그래서 시를 제대로 못 쓰는 셈인가
교자상은 뭔가 불편하고
냉골에 누워 계신 어머닌 마음에 걸리고
고관절염 때문에 콜레트는 침대에 접이식 책상을 올리고
장지에張潔는 변기 위에 널빤때기를 올려놓고*
앨리스 먼로는 세탁실에서 소설을 썼다
여자들은 서재 대신 아무 데서나 쓴다
도박에 빠진 아버지를 찾으러 가서든
아픈 아이를 어르던 병실에서든
쓰는 여자들은 벽이 없다
* 타니아 슐리, 『글 쓰는 여자의 공간』, 남기철 옮김, 이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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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이 없는 집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생긴 버릇이 있다
길가에 맞닿은 지붕 낮은 집
쪽창 하나에 현관문 하나
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집
외면하려 고개를 돌리거나 숙여 보지만
악다구니가 고스란히 들린다
이 부부에게도
마음 밖에 가난한 마당 하나 있어야겠다*
고욤나무도 좋고 대추나무 한 주도 좋겠지
눈부신 파초 그늘도 좋고
수북이 쌓인 눈 덮고 튤립 구근이 숨쉬는 마당에
부부의 허밍이 번지는
그런 마당 하나 있어야겠다
*백무산,「마당이 있는 집」에서(『그 모든 가장자리』, 창 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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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튤립들
지난 연말에 강원도 횡성인지 사북인지 어디 먼 데서 프란치스코 신부님인지 요셉 신자인지 누군가 튤립 구근을 가마니째 들고 오셨다는데, 우리 동네 금촌 성당 안드레아 신부님은 튤립 구근 가마니를 얼떨결에 받으셨다는데, 신부님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간이 화단이며 담장 아래며 뒤꼍이며 흙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튤립 구근을 심으셨다는데,
생각을 해보세요?
한 자루도 아니고 한 가마니예요!
넉살 좋은 안드레아 신부님은 미사 강론 중에 예의 그 따발총처럼 빠른 목소리로 생색을 내셨다는데, 맨 앞에 앉은 연령회 어르신이 우리 신부님 욕보셨다며 추어올리셨다는데, 봄비 그친 주일 아침 촉촉해진 흙을 뚫고 튤립들이 아기의 첫 아랫니처럼 일제히 고갤 내미셨다는데,
생각을 해보세요?
한 자루도 아니고 한 가마니예요!
저 환한 기쁨의 묵언(默言)들이 성당 안팎에 가마니째 새하얗게 피어나셨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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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입니까?
저는 베트남에서 온 응웬 두안 썬 NGUYỄN TUẤN SƠN입니다. 한국 이름은 원도산입니다. 서른여덟 살입니다. 2021년 11월 29일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에 온 지 10개월이 되었습니다. 지난 8월 17일 한국어능력시험 3급에 합격했습니다. 여전히 한국어는 어렵지만 그만큼 재미도 있습니다. 저는 결혼을 했으며 딸 두 명, 아들 한 명이 있습니다. 큰딸은 여덟 살, 작은딸은 여섯 살, 아들은 네 살입니다. 큰딸은 저를 닮아서 키가 크고 작은딸은 엄마를 닮아서 키가 작습니다. 제 고향은 베트남 중부 응에안입니다. 빈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했습니다. 베트남에 있는 한국 회사에 다니며 한국 사람을 만날 기회를 얻었습니다. 친절한 한국 사람들 덕분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생겨 유학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양시에 있는 국제법률경영대학원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해 한국어와 문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 성격은 내향적이고 수줍음이 많습니다. 친구를 사귈 때 먼저 다가가진 못하지만 한번 사귀면 오래 우정을 나눕니다.
귀 회사에서 일할 기회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지금은 한국어가 서툴지만 한국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한국어 실력도 기르고 보람도 얻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년 10월 30일 응웬 두안 썬
언젠가 한국에서 취직할 때 쓰려고 선생님과 같이 미리준비했던 ‘자기소개서’입니다.
저는 청주시 오송역 파라곤 센트럴시티 2차 아파트 건설 현장 25층에서 추락했어요.
전날 온종일 일을 한 후 저녁부터 밤 10시까지 계절학기 수업을 온라인으로 들었죠. 그러고도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했어요. 3일 후에 한국어능력시험이 있거든요. 특히 쓰기 공부가 너무 어려웠어요. 그래서 선생님에게 밤 10시 30분쯤 메시지를 5개나 보냈는데 읽지 않으셨어요. 조금 섭섭했어요. 오늘 새벽 6시에 선생님이 답장을 해 주셨는데 저도 읽지 않았어요. 조금 후회스럽네요. 선생님이 제 걱정을 많이 하셨을 텐데요. 선생님은 눈처럼 차갑게 구셨지만 얼마나 따뜻한지 저는 잘 알아요.
50m 높이에서 추락하는 찰나의 시간을 저는 헤아릴 수 없었어요. 저는 혼자 추락하지 않았어요. 동료인 응웬 응옥 꽝 NGUYỄN NGỌC QUANG과 같이, 대형 거푸집과 같이 떨어졌죠. 그래서인지 덜 쓸쓸했어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하지만 언뜻 이런 광고 문구를 본 것도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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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웃음이 나오려 해요. 파라곤 아파트 시공사인 동양건설산업은 인명 사고가 끊이지 않았더라고요. 2020년 10월에도 2021년 4월에도 근로자가 죽었다는 기사를 봐요. 누군가는 또 죽어 나가야 했는데 마침 우리였던 거네요. 이럴 때 한국 사람들은 재수 없다고 하죠.
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한국에 돈 벌러 왔어요. 가난이 너무 싫었어요. 네, 맞아요. 건설 현장에 불법 취업을 했어요. 부모님까지 가족 6명이 제 등에 매달려 있으니까요. 고향에 매달 생활비를 보내야 하고 유학 올 때 브로커에게 들어간 빚도 갚아야 했죠. 택시비를 아끼려고 한겨울 새벽길을 30분씩 걸어 기숙사에 가곤 했어요. 옷도 사지 않았어요.
오늘 죽은 우리 두 사람이 한국 사람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일까요. 보상금이 몇 배나 적게 들겠죠. 가족이 없으니 성가신 일도 없겠죠. 제 목숨값이 얼마나 될지 저도 너무너무 궁금해요. 과연 건장한 30대 베트남 사내의 몸값은 얼마일까요.
2023년 7월 6일 오전 11시 12분 원도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