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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
피로한 마음에는 활력이 필요하고 지겨운 밥상에는 별미가 필요한 법이다 도시를 중심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잠시 이탈로부터 재충전의 기회를 삼는다. 일주일간의 여름휴가 중 마음먹고 원주시 단구동 단관택지위에 위치한 문학의 산실 박경리 토지문학공원을 찾았다. 이곳에 찾아가기 전 토지문학관 주변에 살고 있는 평소 알고 지내던 고종구 , 김영경 부부에게 전화로 길을 물었더니 직장에서 조퇴를 하고 안내를 자청하여 함께하게 되었다. 1980년 박경리 선생이· 토지 3부를 끝내고 인기라는 물결로부터 빗장을 지르기 위해 1980년 원주에 온 것은 자연 속에 살고 싶은 기분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사위 김지하 시인이 형무소에 있고 손자와 외동딸의 시가 집이 원주에 있었기 때문에 울타리가 되어주기 위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원주 이곳으로 이주하여 토지 4부 5부를 16년에 걸쳐 집필을 마친 곳이다.
대하 역사소설 토지는 26년간의 집필기간 끝에 완성된 한국 문단 사에 가장 주목받은 작품이며 원고지만도 3만 장이 넘으니 초인적인 힘으로 썼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토지는 1897년 추석날부터 1945년 한가위를 끝으로 소설의 시대가 끝을 맺는다. 숨 막히는 격동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보통사람들의 체험한 역사를 소설화한 역사 대하소설이다. 1990년 5월 박경리 선생의 옛집이 택지개발로 철거될 위기를 모면하고 보존하면서 원주시는 토지문학공원을 꾸며 토지의 혼을 지키기 위해 700여 평의 옛집과 주변 땅을 더해 3000여 평에 섬진강과 평사리를 연상시키는 개울과 백사장 뚝 길이 있는 평사리 마당 주인공 서희가 가족을 이끌고 침략을 피해 옮겨간 간도 용정의 여러 이미지를 살린 용두레벌 토지의 대표적인 꼬마 주인공 홍이를 테마로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도록 홍이동산 3개 주제공간이 있고 관리사무실 2층에 토지전시관과 16년 동안 4부 5부를 완성한 박경리 선생 옛집으로 이루어졌다.
소설 토지 속에 주인공 서희 길상이 봉순이 용이 월선이 홍이등 낯설지 않은 이름들을 기억하며 평사리 마당을 지나 관리 사무실을 경우 해 2층 토지문학 전시관으로 향했다. 다른 문학관을 기행 할 때처럼 카메라를 꺼냈더니 해설가로부터 제재를 당했다. 이곳은 촬영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 여성 관리소장이신 고창영 소장께서 문학지에 기고할 취재이니 촬영하여도 된다고 漫낡÷?제재를 풀어 주었다. 그렇다면, 일반 관람객은 전시실과 옛집전시관에서 촬영을 할 수 없도록 한 원주시의 방침인 모양인데 그 해명은 너무도 궁색하게 들린다. 아무튼, 우리 일행은 촬영이 허락되었고 이순녀 이곳 해설가로부터 안내를 받으며 전시실을 돌아보았다. 1973년 문학사상 토지 1부 전 5권 1979년 삼성출판사 제1부에서 3부 전 9권 1988년 4월 토지제 1부 4부 전 12권 1988년 12월 지식 산업사 제1부에서 제4부 전 12권 1994년 9월 제5부 전 16권 솔 출판사에서 발행한 책과 내용을 안내하고 있다. 1부에서 3부까지 서울 정능에서 집필 하고 원주에 내려와 출판사를 달리하며 제5부 16권이 완성될 때까지의 과정이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전시실을 돌아보면서 “삶은 영위하는데 삶의 본질인 것이 문학이다. 생존하는 것이 보다 더 문학적이다 “ 라는 박경리 선생의 글귀를 가슴에 담아본다. 한국문학사의 살아있는 전설로서 자연과 함께한 16년 동안의 원주의 삶이 배어 있는 선생의 옛집으로 향했다. 손수 가꾸어온 마당 길은 둥글둥글한 자연석으로 정성스럽게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현대식 2층 건물 조금은 세월이 흐른 듯 한 건물을 들어서기 전 오른쪽으로 앙증맞고 소담스런 조그만 연못 같은 곳이 있다. 이는 외손자 물놀이 공간으로 손수 귀여운 자연석을 하나하나 박아 만들었다고 해설가가 전해준다 외손자라 함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선생의 사위 시인 김지하와 외동 딸 김영주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를 말한다.
외손주를 위해 손수 만든 물놀이 연못
선생의 옛집 1층은 거실에는 4분짜리 박경리 선생 관계 영상물을 관람하게 되었으며 선생의 집필실과 식사와 차를 마시는 부엌과 공간 서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필실에서는 창을 통해 치악산 비로봉이 운무에 묻힌 채 보이며 옛집 내부는 작가로서 또한 자연인으로의 박경리 선생의 삶과 문학을 오롯이 드러내는 공간이다. 선생의 집필실을 나와 서재에 그냥 높이로 책을 쌓아 두었다. 물론 관람객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다. 몇 권의 책을 뒤적이다 보니 더 머물고 싶었지만 해설가께서 기다리고 있어 선생의 머물고 있을 듯한 그 분위기를 곁눈질을 하면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층은 선생의 평소 소망대로 세미나나 워크 샆 등을 할 수 있다. 문인들의 토지문화 사랑방으로 꾸몄으며 특히 청소년 글짓기 교실로 활용한다는 해설가의 말이다. 옛집 옆으로 글을 쓰면서 가꾸었다는 텃밭은 방울토마토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고추며 채소가 예사 텃밭이 아닌 특별한 느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자연과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시는 선생의 손길이 일군 텃밭이기 때문이다. 비가 오다 그쳐 구름 사이로 비친 햇빛을 한가득 머금은 채소들이 형광 빛에 가까운 초록빛물감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 같다. 수학공식처럼 그려진 머릿속에 문학관의 모습이 아니고 전시보다는 공원 쪽에 더 무게를 둔 느낌이다. 텃밭 옆으로 홍이 동산을 산책하듯이 몇 개단 오르니 널따란 바위 네 개가 놓였고 그곳에 앉아 바라다본 주변은 아파트와 상가 전형적인 도시의 모습이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흙길 그리고 잔디 도시민들에게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이끄는 곳으로 가족끼리 친구끼리 정다운 사람끼리 산책하듯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저녁나들이로 홍이 동산에 앉아 고즈넉한 원주 시내를 바라보며 소설 토지를 이야기하고 애송시 하나쯤 읊기에 좋을 도심 속에 문학관 공원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반대쪽 홍이 동산을 내려가면 나무 전신주가 서있고 침목이 깔린 비탈길을 내려가면 평사 리에서 신작로와 철길을 거쳐 간도 용정으로 떠나가던 여정을 그려낸 용두레벌이다 이곳은 좁고도 넓고 짧고도 긴 공간으로 거칠고도 아름다운 간도 용정의 이미지를 살렸으며 이름 지어 용두레벌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송정 소나무와 용두레 우물을 상징적으로 조성해 놓았고 만주벌을 연상하도록 자갈을 깔고 돌무덤으로 황무지를 개척하여 삶의 뿌리를 내린 평사리 사람들의 자취를 느끼게 하려고 애쓴 모습으로 비친다.
작지만 꽉 찬 도심 속에 문학공원 작아서 아름다울 수 있는 공간이다. 열려있는 공간으로 누구나 손쉽게 다가갈 수 있는 문학공원으로 박경리 선생의 문학 혼을 접할 수 있는 곳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상가가 밀집해 있고 택지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선 도심 속이지만 이곳에서는 풀냄새 흙냄새 바람 냄새를 옴 몸으로 느낄 수 있고 토지소설의 시대적 감각과 박경리 선생의 숨 곁이 살아있고 토지의 혼이 살아있는 문학의 산실로 곧 생명의 역사가 숨 쉬고 있었다. 문학공원 답사를 마치며 기꺼이 안내를 해준 고종수, 김영경 부부와 열성으로 설명해 주신 이순녀 해설사 고창영 소장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리움/박경리
그리움은 가지 끝에 돋아난 사월의 새순 그리움은 여름밤 가로수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 그리움은 길가에 쭈그리고 앉은 우수의 나그네 흙 털고 일어나서 흐린 눈동자 구름 보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그네 뒷모습
뻐꾸기/박경리 어릴 적에 뻐꾸기는 동서남북 원근도 모를 소리였다 가도 가도 따라오던 뻐꾸기 울음 가도 가도 도망치던 뻐꾸기 울음 어느 나무 어느 둥지인지 저승에서 우는 가 이승에서 우는 가 알 수 없었다. 분명 산속에 있기는 있을 터인데 나는 아직 그새를 본적이 없다 내 인생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그 많은 것들과 같이 뻐꾸기는 본적이 없다
박경리 연보
1926년 :10월 28일 경상남도 충무시 명정리에서 박수영(朴壽永) 씨 장녀로 출생. 본명 박금이(朴今伊). 1945년(19세):진주고등여학교 졸업. 1946년(20세):1월 30일 김행도(金幸道) 씨와 결혼. 딸 김영주(金玲珠) 출생. 1950년(24세):12월 25일 남편과 사별. 이때부터 창작에 전념. 1953년(27세):환도 후 잠시 신문사, 은행 등에 근무. 1955년(29세):8월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이 김동리에 의해 초회 추천. 1956년(30세):8월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김동리에 의해 추천 완료되어 본격 적인 문단 활 동을 시작. 단편 「군식구」(『현대문학』11월) 발표. 1957년(31세):단편 「호수」(『숙란』숙명여고 학보), 「전도」(『현대문학』 3월), 「불신 시대」(『현대문학』8월), 「영주와 고양이」(『현대문학 10월), 「반딧불『신태양』10월)발표. 단편「불신시대」로 제3회 『현대문학』"신인문학상" 수상. 1958년(32세): 첫 장편 『연가』를 『민주신보』에 연재. 단편 「벽지」(『현대문학』3월), 「도표 없는 길」(『여원』5월), 「훈향」(『한국평론』 6월), 「암흑시대(『현대문학』6~7월) 발표. 1959년(33세):장편 『표류도』를 『현대문학』(2월호∼11월)에 연재하고 대한교과서에서 간행. 이 작품으로 제3회 "내성문학상 수상". 아동소설 「은하수」, 「돌아온 아이」(『새벗』) ,「재귀열」 (『주부생활』),「새벽의 합창」 (『죽순』중앙 여고 학보), 「어느 정오의 결정」(『자유공론』1월), 「비는 내린다」(『여원』10월), 「해동여관의 미나」(『사상계』12월) 등을 발표. 1960년(34세): 장편 「성녀와 마녀」『여원』(4월~1961년 3월)에 연재. 1961년(35세):단편 「귀족」(『현대문학』2월) 「은하」를 (『전남일보』),「푸른 운하」 (『국제신보』)발표. 장편 『내 마음은 호수』『조선일보』에「노을진 들녘을 『경향신문』(10월~1962년 6월)에 연재. 1962년(36세):전작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유문화사) 간행. 중편 「암흑의 사자」『가정 생활』에 발표. 장편「가을에 온 여인」『한국일보』(8월~1963년 5월)에 연재. 중편 「재혼의 조건」『여상』(11~1963년 4월)에 연재. 1963년(37세):단편 어느 생애(신작15인집) 발표. 장편「그 형제의 연인들」을 『전남일보에 연재. 장편 『노을진 들녘』, 『가을에 온 여인』, 『내 마음은 호수』를 신태양사에서, 단편집 『불신시대』를 동민문화사에서 간행. 1964년(38세):장편 「파시」를 『동아일보』(7월~1965년 5월)에 연재. 단편 「풍경·B(『사상계』12월) 발표. 장편 내 마음은 호수』를 신태양사에서 『시장과 전장』을 현암사에서 간행. 1965년(39세):장편 『시장과 전장』으로 제2회 "한국여류문학상" 수상. 단편「녹지대」 (『부산일보』) 「도선장」(『민주신보』) 「풍경·A」(『현대문학』1월).흑백 콤비의 구두」(『신동아』4월), 「외곽지대」(『현대문학』8월) , 「하 루」(사상계 11월)를 발표. 장편 『타인들』을 『주부생활』(4월~1966년 3월에 연재. 장편 『파시』를 현암사에서 간행. 1966년(40세):단편 「집」(『현대문학 4월), 「인간」(『문학』7월), 「평면도」(『현대문 학』12월) 발표. 연작 『환상의 시기』(『한국문학』 3월~12월)를 연재. 수필 집 『Q씨에게』, 장편 『성녀와 마녀』, 수필집 『기다리는 불안』을 현암사 에서 간행. 1967년(41세); 단편 「하루」(『사상계』), 「눈먼 식솔」(『가톨릭시보』) , 「신교수의 부 인」(『조선일보』)「쌍두아」(『현대문학』5월), 「옛날이야기」(『신동아』5월) 발표. 장편 『겨울비』를 『여성동아』에 연재. 1968년(42세):단편 「우화」(『월간중앙』4월 창간호),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월간 문학』11월)을 발표. 1969년(43세):대하소설 『토지』1부를 『현대문학』에 연재(9월~1972년 9월), 「죄인들의 숙제」를 『경향신문』에 연재. 1970년(44세):단편 「밀고자」(『세대』6월호) 발표. 장편 「창」을 『조선일보』에 연재. 1972년(46세):토지』2부를 『문학사상』(10월~1975년 10월)에 연재. 『토지』1부로 제7회 "월탄문학상"을 수상. 1973년(47세):딸 김영주와 시인 김지하 결혼. 『토지』1부(삼성 출판사) 간행. 1974년(48세):장편 『단층』을 『동아일보』(2월 18일~12월 31일)에 연재. 『토지』2부 (삼성출판사) 간행. 1976년(50세):『박경리 단편선』(서문당) 간행. 1977년(51세):1월부터 『토지』 3부를 『주부생활』에 연재. 수필집 『호수』(수문서관) 와 『거리의 약사』(민음사) 간행. 1978년(52세): 장편 『나비와 엉겅퀴』(범우사) 출간. 1979년(53세):박경리 문학전집(전16권)을 지식산업사에서 간행. 작품집 『영원한 반려』(영서각) 간행. 1980년(54세):『토지』 3부(삼성출판사) 간행. 1983년(57세):『토지』 4부를 『정경문화』(7월)에 연재. 『토지』 1부를 8권으로 일본어 판 출간(안우식 역/문예선서). 1984년(58세):『한국일보』창간 30주년 기념 "한국 전후 문학 30년의 최대 문제작" 선정에서 선우휘의 『불꽃』, 황석영의 『잘긴산』과 함께 『토지』가 선정됨. 1985년(59세):수필집 『원주통신』(지식산업사) 간행. 1986년(60세):장편 『단층』(지식산업사) 간행. 1987년(61세):8월부터 『토지』4부를 『월간경향』에 연재. 1988년(62세):『토지』1·~4부를 삼성출판사에서 간행. 시집 『못 떠나는 배』(지식산업사) 출간. 1989년(63세):『토지』1·~4부 개정판을 지식산업사에서 간행. 1990년(64세):제4회 "인촌상" 수상. 중국 기행문 『만리장성의 나라』와 시집 『도시의 고양이들』을 동광출판사에서 간행. 1991년(64세):8월 26일부터 이듬해 2월 28일까지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한국 문학의 이해" 강의. 1992년(66세):9월부터 『토지』5부를 『문화일보』에 연재 시작함. 3월 1일부터 8월 23일까지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소설 창작론" 강의함. 1993년(67세):『토지』1부∼4부, 5부 1권(전 13권)을 솔출판사에서 간행. 1994년(68세):8월 15일, 집필 26년만에 『토지』탈고, 전 5부 16권으로 솔출판사에서 완간. 『토지』 1부(3편 11장)를 프랑스 벨퐁출판사에서 불어판 출간(민희식앙드레 파브르 공역). 8월 27일, 이화여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 수여, 10월 6일,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 "올해의 여성상"수상, 12월 3일, 유네스코 서울협의회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 1995년(69세):3월 1일,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객원교수로 임용. "소설 창작론", "문학 연구방법론"(대학원) 등 강의. 『토지』 1부 영국 키건폴출판사에서 영어판 출판 (홍명희 역). 『김약국의 딸들』 불어판 출간(민희식·지겔메이어 변 공역).『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현대문학사에서 간행 1996년(70세):3월 22일, 제6회 "호암상예술상" 수상. 4월 26일, 칠레 저우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 기념 메달(Gabriela Mistral Commemorative Medal)" 수여. 5월17일, 토지문화재단 창립 발기인 대회. 1997년(71세): 1월, 연세대학교 용재(백낙준) 석좌 교수로 임명됨. 3월, 대학원 "소설 창작론" 강의. 8월 『시장과 전장』 불어판 출간(권순제·올리비에 이코르 공역).8월 15일 "토지문화관" 기공식(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9월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한국 문학의 이해" 강의. 1999년(72세):토지문화관 개관, 산문「다시 Q씨에게」를 『현대문학 3월』에 발표. 2000년(73세):시집 『우리들의 시간』 나남출판사 간행. 2002년(75세):토지』 신판(전 21권)을 나남출판사 간행. 2003년(76세):『청소년 토지』(전12권)와 장편동화 『은하수』를 이룸출판사에서 간행, 장 편 『나비야 청산가자』를 『현대문학 4월』에 연재 시작. 토지 문화관
문학공원에 선생의 옛집이 있다면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회촌마을 오봉산에 위치한 토지문화관은 박경리 선생이 현재 거주하는 집이 있는 곳이며 전시공간이 아닌 문학 예술인과 청소년의 창작과 교류의 공간으로 문화적 소양 충족과 청소년들의 문화 감수성을 개발시키고 순수문학의 저변 확대와 삶과 문학에 대한 공간으로 재단 법인으로 운영되고 있다.
시골은 언제나처럼 늘 조용하다. 토지 문화관으로 가는 길은 농촌마을의 들판도 병풍처럼 둘러싼 오봉산도 자유로움이 공존하고 정겨움이 묻어난다. “토지“의 문학적 성취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이 작품과 관련된 기념시설이나 행사도 무척 다양한 편이다 토지문화관은 작가 박경리 선생이 현재 거주하는 말 그대로 토지의 원형질이 놓인 곳이다. 발길을 멈추고 문학적인 향취에 젖어들면서 아름답다 못해 황홀한 전원 속에 토지 문화관의 주변 풍치에 마음을 홀딱 빼앗겼다. 학자와 예술인들이 모여 발표하고 토론하는데 필요한 첨단설비를 갖춘 회의시설 세미나 참석자 등을 위한 숙소와 연구 및 창작 집필을 위한 장기투숙시설을 갖추어져 있어 일종의 문화 콤플렉스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대지 3천여 평에 연건평 800평 규모의 4층 건물로 대회의실 세미나실 숙소시설 창작 집필실 야외무대 식당 휴게실 도서관 전망대로 이루어져 있다. 박경리 선생은(82세) 고혈압 당뇨로 투병중이라 사무실에는 거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혹시나 하고 집주변을 자연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박경리 선생 새집
문화관 뒤편으로는 짙푸른 생명력들이 울창하게 쭉쭉 뻗어 있고 비가 온 뒤라 신록의 푸르름이 한층 더 짙다. 앞으로는 아늑하고 정겨운 농촌 고향마을을 연상시키듯 선연한 색깔로 한여름을 지키고 있다 홀연히 들길을 따라 걸어내려 오며 이 자연을 내 삶으로 끌어안아 맑은 생명력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