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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의 정신으로 가만이 전도(6) http://youngsaing.or.kr/index.php
-바나바의 모범을 따라-
사도행전 11 : 24 - 26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각각의 부모님을 통하여 우리를 이 땅에 내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를 이 땅에 있게 한 부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우리가 좋은 부모가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보스턴의 한 보호소에 앤(Ann)이란 소녀가 있었습니다. 앤의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아빠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다 보호소에 함께 온 동생마저 죽자 앤은 충격으로 미쳤고 실명까지 했습니다. 앤은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고 괴성을 질렀습니다. 결국 앤은 회복 불능 판정을 받고 정신병동 지하 독방에 수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앤은 신문광고를 봤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돌볼 사람 구함!” 앤은 그 아이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국 앤은 사랑으로 그 아이를 20세기 최대 기적의 주인공으로 키워냈습니다. 그 아이가 ‘헬렌 켈러’이고, 그 선생님 앤이 바로 앤 설리번(Ann Sullivan)입니다.
로라는 사랑으로 앤을 정상인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앤도 헬렌이 세계적인 인물이 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우리는 헬렌 켈러와 함께 늘 앤 설리번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로라가 있었기에 앤이 있었고, 앤이 있었기에 헬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도 이런 원리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의 뒤에는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동생 안드레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핍박자 사울이 전도자 바울이 되는데도 뒤에서 그를 도왔던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 사람이 다메섹의 아나니아였습니다. 아나니아는 말씀에 순종하여 사울을 찾아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사울은 아나니아를 통하여 세례 받고 예수님을 전하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제자들과 사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 두려워하여 사울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때 바나바가 나서서 사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습니다(행 9:26-30).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바나바가 사울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음은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있게 한 그 분들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그 역할을 하여 우리를 통하여 누군가가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바나바, 그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I. 인품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가둘 때, 많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졌습니다(행 8:4, 11:19). 흩어진 제자들은 흩어져 간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중에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전도하였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하여 안디옥에 내려갔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이르러 그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하였습니다.
바나바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왜냐하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왔습니다. 바나바의 인품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착한’[ajgaqov"/아가도스]이란 ‘좋은 성품이나 기질’입니다. 이것은 주위 사람들이 경탄하고 높이 평가할 정도로 성품이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1. 그는 훌륭한 성품의 사람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특히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재능은 뛰어난 데 악한 사람이라면 그 뛰어난 재능으로 여러 사람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능보다 성품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착한 사람이겠습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자 훌륭한 사람입니다.
앤 설리번을 세워 준 간호사 로라는 정신과 치료보다는 그냥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날마다 과자를 들고 가서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쏟았습니다. 로라의 사랑이 앤에게 웃음을 찾아주었습니다.
역시, 앤의 사랑이 헬렌을 세워주었습니다. 앤은 헬렌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헬렌을 가르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앤은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결국 사랑이 승리하였습니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착한 성품의 사람이어야 다른 사람을 세워줄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 위하여 훌륭한 인품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세워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착한 사람, 훌륭한 인품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부족한 사람들이 어떻게 훌륭한 사람의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것입니까? 역시 바나바에게서 배웁니다. 바나바는 두 가지가 충만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충만하다[plhvrh"/플레레스]는 말은 ‘가득 찬’으로 물이 가득 차서 넘치는 정도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까?
2. 그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살피십니다(고전 2:10).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결국 성령 충만은 사랑 충만 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려는 것은 우리가 노력하여야 하지만,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다만 사모하여야 합니다. 많은 경우, 성령님은 간절히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사랑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사랑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나바는 또한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돕고 특히 사울을 세워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믿음[pivsti"/피스티스]은 ‘진리에 대한 확신’입니다. 또한 ‘충성’이자 ‘성실’입니다. 바나바는 하나님께로 부터 오시는 성령으로 충만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하나님께로 향하는 신실함이 충만하였습니다.
3. 그는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감동시키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또한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이 있어야 힘들고 어려운 일에도 불구하고 힘 있게 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더욱 맡겨야 합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내려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할 수 있었던 것은(행 11:23), 그가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또한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원해야 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하였고, 나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고 손을 놓아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순종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착한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 믿음 충만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착한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 믿음 충만한 사람 바나바는 드디어 사울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키는 놀라운 행동을 하였습니다.
II. 행동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의 파송을 받고 안디옥에 왔습니다. 그의 섬김으로 안디옥교회가 부흥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에게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25절 말씀입니다.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바나바는 자신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 혼자 힘으로 그들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 바나바는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하였습니다. 그 후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하자 형제들이 그를 멀리 떨어져 있는 그의 고향으로 내려 보냈습니다.(행 9:30) 다소는 안디옥에서 약 240km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만일 걸어서 갔다면 거의 일 주일이나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더욱이 지금 안디옥에 믿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야말로 눈 코 뜰 사이가 없었을 것임에도 바나바는 다소로 갔습니다. 바나바는 다소에까지 가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1.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갔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가서 만나는 것입니다. 거리가 멀다고 가지 않는 것은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가기가 어렵다고 가지 않는 것 역시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힘들고 어렵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찾아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찾아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소망신자(태신자)를 만나고, 사랑신자(마이너리그신자)를 만나려고 할 때 지불하여야 할 값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만나기 위하여 가는 것입니다. 가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래서 ‘가보자’, ‘만나보자’, ‘이야기 하자’가 중요합니다. 가, 만, 이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왜 바나바는 멀리 다소까지 간 것입니까?
다시 25절 말씀입니다.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멀리 다소까지 간 것은 사울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찾다[ajnazhtevw/아나제테오]는 ‘파헤치다’ 또는 ‘애써 찾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사울을 찾으려는 바나바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안디옥에서 이방인의 회심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사울이 필요한 때라는 것을 바나바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사울을 반드시 찾아내기 위해서 먼 곳까지 갔습니다.
2. 적절한 일꾼을 찾았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거리가 멀어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꼭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전도하려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얼마나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을 찾아가야 합니다. 비록 그 사람이 이 땅에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겉으로 드러나게 큰 일을 못할 사람이라고 해도 그 영혼은 구원받아야 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천하를 얻는 것보다 귀한 일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사랑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을 찾으러 다소까지 간 바나바는 그 후 어떻게 하였습니까?
26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26a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간 바나바는 사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여기에서 ‘데리고 오다[a[gw/아고]’는 말은 ‘인도하다’, ‘이끌다’는 말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안디옥으로 이끌어왔습니다. 여기에서 생각하여야 하는 것은 사울이 얼마 동안 다소에 머무르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회심한 사울은 바나바의 소개로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그의 고향 다소로 내려와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그의 고향 다소에 와서 머문 기간이 얼마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한 것이 14년 만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갈 2:1). 그렇다면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활동한 1년을 빼면(:26), 약 13년 정도의 시간이 남습니다. 그동안 사울이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였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울은 바나바가 그를 찾으러 올 때까지 약 10년 이상을 다소에 머물렀습니다. 어째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바나바는 10년이란 시간이 지난 뒤에 사울을 찾아가 만나서 데려왔습니다.
3. 만나서 데리고 함께 왔습니다.
10년! 아니 20년, 30년이라도 좋습니다. 교회를 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어렸을 때 교회에 다녔던 사람을 다시 찾고 부르는 일에 우리는 헌신하여야 합니다. 오래 전에 교회를 떠난 사람을 다시 예수님께로 초청하는 일에 우리는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기억하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안디옥으로 데려와 무엇을 하였습니까?
다시 26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26a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여기에서 ‘모여 있어[sunavgw/쉬나고]’라는 말은 본래 ‘함께 인도하다’는 말입니다. ‘함께 모으다’, ‘함께 끌어당기다’, ‘함께 가져가다’ 즉,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안디옥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바나바는 사울과 함께 안디옥의 많은 신자들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4. 둘이 함께 공동으로 사역하였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전도에 대하여 배워야 할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소망신자(태신자)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는 다른 성도를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사랑신자(마이너리그신자)를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망과 사랑이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교회로 초청을 하고나서 교회에 나온 그 사람을 환영하고 박수치는 것으로 끝낸다면 이것은 자신이 낳은 아기를 키우지 않고 스스로 자라라고 버려두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미국의 교회성장 전문가 챨스 안이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새신자들이 등록한 후 수 주내에 대다수가 떠나며, 다음에는 6개월 정도가 지나서 떠나고 1년이 되어서 상당수가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는 분들의 80%는 등록한지 1년 내에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 1년이 문제입니다. 등록한지 수주일 만에 교회를 떠나는 것은 교회 시설이나 안내, 예배 등의 문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6개월 후에서 1년 사이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는 교회내에서 친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자신이 그 교회에 별로 필요한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가 되어 함께 일하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다소까지 사울을 찾아가서 데려왔지만 함께 일하지 않았다면 사울이 다시 전도자로 나서는데 얼마나 시간이 더 걸렸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함께 일함으로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도는 우리가 전도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일하고 봉사하고 섬김으로 또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게 되어야 완성됩니다.
우리의 소망신자(태신자)와 사랑신자(마이너리그신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함께 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간단하지만 매우 강력한 힘이 ‘가보자’ ‘만나보자’ ‘이야기하자’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데리고 와서’ ‘함께 일하는’ 것으로 전도가 완성됩니다. 그 결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III. 결과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 데리고 와서 함께 섬김으로 일어난 놀라운 결과는 이 땅에 모든 교회들이 보고 배워야 할 내용입니다.
26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26b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이 말씀은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컬음을 받다[crhmativzw/크레마티조]’는 말은 ‘공적인 일로 인해 이름을 얻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유대교의 한 종파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확실히 유대교인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추종하는 대상의 이름을 따서 그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헤롯을 따르는 사람은 헤롯당이었습니다(막 3:6).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에게 붙여진 지극히 당연한 호칭이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교회가 누구를 따르는 사람이냐고 하는 것을 물어야 합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기독,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돌아가야 할 모습이 바로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의 사람으로 불리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 여기에 있게 된 것은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그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부모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행여 부모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할지도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고 하였습니다. 행여 자신을 낳은 부모는 어쩔 수 없는 형편 때문에 자식을 버렸을 지라도 하나님을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부모님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찾아가서 만나서 데리고 와서 함께 일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람임을 온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가서, 만나서, 이야기하여, 데려와, 함께 일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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