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벽면 중앙에 철제의 텔레폰 박스가 세어져 있다. 아름다운 색의 전화통이 얼굴처럼 붙어 있다. 텔레폰 박스에서)
도무지 부끄럽고 미친 짓입니다. 아내가 오늘 아침 상머리에서 그래요. 여보 아시지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시작했어요. 아내뿐만이 아니라고 누구나 여자라면 한 달에 한번씩은 그것을 시작하는데 아내는 요때는 당신을 사랑할 수가 없고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는 죽어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나 혼자 죽어 있고 당신은 살아있다는 것은 불공평하고 억울하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처럼 죽어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한 달에 한번씩 불가피하게 일심동체. 가사상태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게 돼있고 이번 달의 가사상태가 마침내 오늘 시작이
[페이지] 002
되었노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서부터 지금까지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열 일곱 번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제 입에 올리고 있는 그 미친 짓이라는 게. (끄덕) 로미오와 줄리땛입니다. 이것을 수상하게 읽어 가지고는 로오렌스 신부한테 약을 구해다가 수상한 줄리땈과 수상한 로미오가 되어 깜박 죽어 넘어갔다가 나흘이나 닷새 뒤 다시 사랑을 할 수 있게 될 때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래가지고 아내는 요때는 수상한 운전사를 고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게서 받아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아내의 영문학의 잘못입니다만 그 수상한 운전수를 천 번째로 고용한 사람은 오오, 귀신이 쓰였던지 바로 저 옳습니다.
(딸랑하는 벨 소리 F.O. 텔리폰 박스의 왼쪽 옆구리를 떼어 발판을 만들고 주머니에서 왼쪽으로 밟고 박스 쪽으로 오른다. 박스가 현관문이 된다.
[페이지] 003
텔레폰 박스 안에서 획 돌아서 관객을 정면으로 보며 과장하여 무서운 꼴을 만들어 도리어 우스워지게 이승만씨의 어투를 닮으며) 나를 써 보시겠다구요? (끄덕) 어디 갑니까? 부산 왕복이라구요? (끄덕) 해드리죠. 해드려야겠지요. 물론 나를 부르셨으니 내가 값이 굉장히 비싸게 먹히는 줄은 아시겠지? (끄덕) 내가 운전하고 가는 도중에 열흘이나 어떤 때는 이삼일만에 일어나는 내 사랑스런 병의 지진계가 바늘을 움직여도 용서하시오 나는 상대에 따라서 내 가슴속의 알록달록 살모사 같은 불덩어리가 화산처럼 지열을 흔들면서
[페이지] 004
분출한다고도 하는데 오늘 당신을 보니 그닥 심통을 부리고 싶은 생각이 없어 그저 사랑스러운 지진계라고 그러기는 합니다만 물론 아시겠지 운전도중 발작이 일어나면 그 뒤에 벌어지는 일이 그렇게 사랑스러운지는 못 말리라는 점 말이요. 간질이란 그렇게 간질간질한 것이 못돼요. (하고 간단히 게거품 무는 시늉) 보는 사람한테는 간지러울지 몰라도 당하는 사람한테는 직통 황천행이 간지러움의 운전도중에 일어난다면 말입니다. (끄덕. 부시럭거리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붙여 무는 시늉을 하고) 아, 태우시겠지요? (끄덕, 도루 넣는다) 물론 아시겠지 그날 기분에 따라서는 단 한시간 걸리는 일거리도 말지를 않고 또 손님들 보고서는 차를 타기만 하면 영락없이 간질이 발작할
[페이지] 005
것처럼 엄살을 부려 거절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 당신은 내가 가슴속에 단지 아름다운 지진계의 은빛바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제법 훈장처럼 자랑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만들어주셨단 말씀이야. 나를 믿어주시는군. 좋은 징조요. 그러니까 내가 모실 손님은 선생이 아니시겠지? (부끄러운 듯 웃는다) 그럴 줄 알았지 누구요? 부인이오? (끄덕) 부인은 알고 계십니까? 내가요 가슴속에 바늘을 (고개를 젓는다) 모르고 계시는군 (손을 젓는다. 일어서며)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오 잘됐지, 고마운 노릇이라니까 물론 자청하고서 하는 일이기는 하면서도 어떤 부인을 보며는 떨다가
[페이지] 006
못해 숫제 이 사람의 무릎을 베고서 쳐 웁니다. 어떤 사람은 내 얼굴 한 번 보고 창 밖에다 게워 넘기고 내 얼굴 다시 보고 게워 넘기고 그렇게 열심히 게워 넘기면서 왜 자주 내 얼굴은 보시오? 하였더니 안 보면 죽을 것 같답니다. 그 사람 나만 보고 있으면 내 가슴속의 발작이 기생 다릿목처럼 쏙 들어가는 줄 알았던 모양인데 게워도 나을게 없어지니까 나중에는 딸꾹질을 그렇게 해댑디다. 부산까지 (딸꾹질) 부인께서는 이놈의 못생긴 얼굴을 그렇게 열심히 보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 역시 고마운 일이오. 그런데 왜 두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잘 안되던가요? 아니면 너무 잘 돼가셔? 아아 미안하오 우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대개는 (라이프 컷 아뚛) 아니 왜 불을 끄십니까? 여보세요? 아 알았습니다. 가지요 곧
[페이지] 007
(라이트 인하면 텔리폰 박스의 옆 날개가 붙어 있고 등장인물은 운전수의 역에서 자기로 돌아와 있다)
머리가 없으면 좋겠다는 말을 아내가 하였기 飁문이라고 운전수에게 그런 말을 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머리의 대뇌 부분이 있지요? 응, 있지 그걸 고대루 들어냈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잠시) 운전수에게 이런 말을 우리 부부가 주고 받았다. 귀염을 해주었더라면 운전수는 으응 이건 정신이상의 증세가 보이는군. 간질병과 정신이상. 둘이서 타고 가는 차가 무사하기를 바랄 수는 없겠는걸. 미안하오만 고만두겠오. 불현듯 발작하는 병을 가진 두 사람이 여덟시간이나 찻 속에 동행이라면 무슨 짓이 벌어지고 말지 그 내용이 뻔하잖습니까. 흥미가 없오이다. 아시겠지만 나는 단지 내가 일으키는 발작에만 책임 짓기로 작정이 돼 있으니까.
[페이지] 008
남의 발작까지는 (고개를 젓는다) 당신네들은 애 발작을 이용하기만 하면 되는 거요. 내가 전적으로 이용당할 때에 내 발작은 사랑스러운 의미를 내게 줄 것이오. 아시겠지. 나 자신 누구보다도 살아있기를 바란다는 점을 이 발작의 기회를 남에게 뺏기고서는 핸들을 잡을 수 없오. 나는 무서워서 아마 시속 오마일 정도의 속력도 내지 못할 것이오. 고속도로상의 오마일이라. (고개를 젓는다) 불러주어서 고마웁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유감이오. (나가는 사람의 옷 뒷자락을 잡는 시늉.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돌려보낸다는 것이야말로 나의 유감이 될 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발작의 기회 못지 않게 내게는 대뇌 부분이 고대로 들어내어지는 아내의 상태에 대한 이해의 기회가 소중하였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나는 아내가 암시하는 "요즈음"을 간파 그것이 체증으로 판명이 되면 소화제를. 두통이면 신경안정제 바랄긴을 치통 요통 복통이면 치요복통 진통제를 준비하여야 될 일.
[페이지] 009
(끄饢) 아내를. 언제 발작을 일으킬지 모를 간질의 운전수 곁에 태워 놓고 경부간 왕복 여덟 시간 동안을 지켜보고 앉았노라면 아마도 내 머리 속은 내뇌를 들어내놓은 정도가 되어버리겠지.
(텔리폰 박스의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든다) 왔습니다.
[필타] 부인께서 승차하시었습니다. 발차여부 지시를 바랍니다. 지금 당신은 본인과의 계약을 취소하실 수 있습니다.
(감사)
발차 의사로 알고 출발하겠습니다. 이후 정차를 원하신다면 당신은 수원 톨 케이트에 지시 본인에게 연락하실 수 있습니다. 항시 본인은 당신의 의사를 존중하는 피고용인 인물 상기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찰칵 수화기를 놓는다)
[페이지] 010
원 세상에 이건 숫제 공갈이로군 피고용인이라니 피고용 (끄덕. 가상의 인물에게) 피고용이지 내가 고용을 한 건 사실이니까 허지만 이보게 내가 고용을 한 것은 내 아들을 태우고 여덟 시간 드라이브를 시켜주면 되는 그놈의 생명까지 고용하지는 않았단 소릴세 (끄덕) 그 기능이 발작이라는 뜻밖의 사태에 의해서 정지될 수도 있는 기능. 그렇기 때문에 상상할 수도 없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그 기능을 고용한 것이 아닌가 말이야 알고 있겠지 그 기능이 갑자기 정지될 때에 시속 백키로 내외로 질주하고 있는 고속도로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자네는
[페이지] 011
(끄덕) 아내의 생명이 그 안에 있네 (고개를 젓는다) 세상에 그 이상의 대가란 것은 없지. 그런데 이건 뭔가? 피고용인을 상기하라니. 그래 내가 그 따위 여딧 왔는지도 모를 간질 병자를 상기할려구 아내를. (버럭 소리 지른다) 상기하라구! 못해! (끄덕) 자네도 느낄 수 있겠지? 당신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말 밑에 깔려 있는 비열한 기피의식 말일세. 생명을 맡긴다구. 맡겨놓구 벌벌 떨구 있네
[페이지] 012
이건 내가 아내를 죽일려고 차에 태웠단 말인가? 차에 탔다. 그러니 지시를 바란다. 떠나기만 하면 차가 벌렁 뒤집힐 기세네. 그러니 제 생명을 날 보고 어쩌라구! 내가 시킨 일인가. 상기하라니! 무어 불손한 기미가 느껴지지 않나? 어딘가 작당한 듯한 구석이 없지 않는가 말야. (귀 기울이는 듯하다) 기회! 애가 기회를 주는 거란 말이지! 자네는 내가 맹자나 공자. 뭐 그 비슷한 사촌이나 오촌. 호형호제하고 지내는 위인인 줄 알고 있는 모양인데 부끄럽군.
(끄덕) 나도 그렇게 믿고 싶어지네. 운전수에 관한 것은 일체 불문에 부친다. 아내. 내가 지금부터 해야 될 일은 아내의 대뇌를 고대로 들어내었으면 하는 상태가 되어보는 것이다. (끄덕. 흥겨움을 동반)
[페이지] 013
오늘아침 운전수가 깜빡 왼쪽 바른쪽 양말을 바꾸어 신었다. 그랬대서 그것이 불길한 징조라고는 할 수 없지. 안 그런가? 요새 양말이란 것이 옛날 목양말하고는 달라서 엄지 발가락 쪽이 높고 새끼 발가락 쪽은 낮고 그런 것 없이 늘었다 줄었다 제 마음대로니까. 운전수가 새벽길에 앞서 건너가는 고양이쯤 보았다고 일을 고만두고 들어간다면 장의사차를 끄는 운전수는 무엇을 보고 그날 일을 고만 둘 수 있겠는가? 등록금을 내고 은행문을 나서던 처녀가 별안간 흘러 내려온 철제 겻타에 머리꼭지가 터져서 꽃 같은 청춘의 막을 내리고 그 처녀의 어머니의 말씀이 작년 가을에 사 가지고 와서는 아무래도 이걸 칠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것 같다고 붓을 도루 거두고 거두고 하는 모양을 서너번 모아 두었더니 오늘 얘가 그걸 칠하길래 가슴이 뜨끔 내가주고 올까나 했더니 웃으면서 나가더라며 울더라. 여러분 이 불길한 메니큐아를 삼갑시다.
[페이지] 014
(끄덕) 다섯 마디를 만들어 부쳤더니 작년 가을 무색 투명 메니큐어의 매상고가 다섯 배로 올라 뛰더군. 지금 선전부는 또 다른 불길한 색깔을 연구중이지. (가볍게 오간다) 아내가 여천. 곡립문 영천 출신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자네 접혀져 있는 병풍을 본 적이 있나? 그것을 메고 팔러다니는 사람 먼발치로 본다면 자네도 꽤 놀랠걸 (끄덕) 영락없는 관이야. 사변 전후해서 홍제동 고개 너머에는 병풍을 만드는 마을이 있었다네 지금은 전략도로가 누어 있지. 새벽같이 채소가 고개를 넘어오는 시간에는 이 병풍을 등에 진 무리가 떼지어 넘어와서는 황혼녘에 고개를 넘어가고는 했겠지. 병풍이 채소처럼 팔려나가는 물건이 아니니 도루 지고 넘어가는 수밖에. 쉬- 아내가 숨을 죽인 것이 바로 요 대목이었던 모양이야 황혼녘 관을 등에진
[페이지] 015
무리가 혼자서 셋이 줄을 지어 황톳길을 넘어가네. 그리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모락 오르고.아내는 세살 (끄덕 뚜벅뚜벅) 자네 대신 누군가 굉장히 훌륭한 어른이 자네가 알 수 없는 아주 오래고 오랜 옛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었다는 말을 들은 게, 자네 몇 살 땐가? 이듬해 학교엘 들어갔으니까 다섯? 그래 감회가 어떻든가? (끄덕) 한마디로 정나미가 떨어지더군. 아마 그것이 내가 미워진 최초의 사건이었을 걸. 이건 간단히 속아넘어갔구나 속아넘어갔다는 것은 이쪽에서 속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냐. 속였다. 그렇구나 산다는 것은 속이면서 살아가는 것이로구나. 그래서 속이면서 살아왔네. "여러분 이 불길한 메니큐어를 삼갑시다." 제기 다섯 살밖에 안된 것이 별 끔찍한 생각을 다해냈군.
[페이지] 016
(고개를 젓고) 그 어른이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 멸망하였을 터인데 그 어른 때문에 대신 우리가 살아간다니 무슨 일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였더냔 말야. 대신이라니 창피하지도 않아. 그거야 성경의 얘기지. (고개를 젓고) 눈이 끔찍히도 내렸지. 일메타 이십 팔, 나중에 그 부근의 적설량을 조사해보았더니 서울에 그렇게 내린 겨울이 있더구만, 그해가 아닌가 싶은데, 태평로 지금은 외식 집이 되어버린 행길 건너 덕수궁 대한문이 2시 40분방향으로 보이는 이층 베란다에서 종소리를 들으며 나는 대신 살고있는 어머니를 죽였지. 끽-, 히히. 다섯 살짜리가- (끄덕) 굴뚝 쑤시어-. 대나무를 동그랗게 메고 창 밑을 지나가는 그 무서운 깜장 할아버지를 보면서 맹세하였지. 오늘밤 도망쳐서 굴뚝이나 쑤시리라.
[페이지] 017
끄름을 까맣게 칠한 어른이 되어 어머니가 앉았는 창 밑에 나타난단 말일세. 굴뚝 쑤시어-. 히히 그래 그날 밤 도망을 쳤나? (끄덕 다시 고개를 젓는다) 아내가 홍제동 고갯길을 넘어가는 것이 죽음의 행렬이 아니고 병풍의 무리라는 것을 알고 하루의 일과 중에서 숨을 죽이는 대목을 지워버리고 그 황혼녘에 한마디로 정나미가 떨어진 게 몇 살 때인 줄 아는가? 다섯 살. (고개를 젓고 잠시) 아내한테 그랬더니 고개를 젓더군. (뚜벅뚜벅) 지금까지 아홉명의 여자한테 다섯 살에 죽인 어머니의 이야기를 했는데, 모두 어머니가 되어주어서 모두 죽어버렸지. 옳지 그래서 지금 아내를 또 죽일려구 그러는구나. (고개를 젓고)
[페이지] 018
당초 죽어가지고 왔더군. 뭐라구? 하루의 일과 중에서 숨을 죽이는 대목이 지워져 있더라니까. 그래서? 간지름을 태워주었지 간질, 간질. 웃더라 쥴리 쥴리에드. 애기 염소야. (텔리폰 박스 안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고 다이알을 돌린다. 명쾌하다) 난데 염소 아주머니 오늘 무슨 색깔인데? 무슨 색? 알았어. (급히 다이알을 돌리고) 선전부로 돌려. 올 가을의 색깔은 수박색이다. 오늘을 기념해서. (수화기를 놓고) 이보게 들었지? 오늘 아침 아내가 손톱에 들인 물이. (급히 왔다갔다하다가) 불현듯 내가 만들어 내는 메니큐어에는 수박색이 없다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헤어질 때에 마치 그렇게 될 때를 준비해서 마련해 놓은 듯한
[페이지] 019
아름다운 색깔의 옷을 차려입는 저 여자들의 마지막 미덕. 아내의 미덕은 수박색의 메니큐어가 아니냐. 그리고 이 미덕은 내가 고용한 운전수의 정체와 내 고용의 의도가 아내한테 간파 됐음을 뜻했습니다. (끄덕) 아내는 경부간 고속도로상에서 이미 그 자취를 감춘 뒤. 당초 71년식 베이지색 코로나를 타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 오호. 세상에 이럴 수가! (전신의 힘이 쏙 빠지는 듯 그 자리에 쭈구려 앉는다. 기도 드리는 듯하다) 이건.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지? 여보. 그건 오해요. 대뇌를 들어내다니. 사람의 전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목 윗 부분이요. 그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대뇌요. 눈 하나 없어도 살지. 코가 삐뚤어지면 못사나. 사랑니가 붓으면 아스피린 얹혀 물고. 귓속이 울면 콧소리를 내지. (콧소리를 낸다)
[페이지] 020
그러니. 대뇌! 대뇌에는 두 알의 약. 그 한 알은 죽음이요 그 한 알은 사랑이요. (고개를 젓는다. 텔리폰 박스를 잡고) 당신은 알고 있지. 내가 빈혈이 잦고 비위가 약해서 욕지거리를 물 먹듯이 하는 줄을 당신은 알고 있지 왜! 당신에게는 비밀로 하였는데. 십칠에의 사랑에 수면제 정사가 미수하여 윗 속을 버린 뒤로 오호 사랑은 먼저 윗 속부터 둘러노는 순서를 밟는다오. 가증한 노릇이오 윗 속을 통과하다니! 그래서 당신 몰래 윗 수술을 할려구 (욕지기를 겨우 겨우 참아 넘긴다) 차마 이 사실을 실토하지는 못하고 남의 자식 버리듯 숨겨 버린다는 노릇이 당신을 운전수 곁에 태워 보내놓고 (고개를 젓는다.) 아니오. 오해요! 물론 간질병자라는 건 사실이지 그런데 십칠 년 동안
[페이지] 021
무사고였오. 십칠 년 동안이나 발작이 없었다는 사람한테나 옮아와 발작을 일으키게 하지 당장은 핸들을 잡으면서 잊어버리는 병이 아닌가. 그러니까 발작을 일으키는 것은 여기 있는 나지 당신이나 운전수는 기왕의 십칠 년 동안처럼 아무 일 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마치 잡고 있던 텔리폰 박스가 발길질을 하였고 그것에 채이기라도 한 듯 물러선다.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든다)
[필타] 수원 톨 게이트. 별도 지시가 없으므로 통과로 간주함. 이후정차를 원하신다면 천안 톨 게이트에 지시 본인에게 연락하실 수 있습니다. 별도 전달사항. 부인께서는 생명보험에 가입하셨습니다.
(버럭 소리지른다) 뭐라구! 그럼.
[페이지] 022
[필타] 물론 부인께서는 모르는 일입니다. 당신이 본인에게 지불한 금액 중에 부인의 가입금이 가산되어 있었고 그것으로 본인의 의무를 이행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으로부터 당신은 유고 시 보험료 천 이백 만원에 대한 권리를 갖습니다. 보험증서는 곧 배달 될 것임. 별도전달 이상. 항시 본인은 당신의 의사를 존중하는 피고용인임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이봐. 지금 분명히 해두는데 내가 고용을 한 것은 간질병을 수반한 자네의 운전기능이야. 자네의 생명이 아니란 말야. 그러니까 자네의 기능이외의 어떤 것도 내게 넘기지 말아. 넘긴다고 받지도 않을 테니까. 무슨 소린지 알겠지. 아내는 내가 책임을 지네. 이후는 아내를 가지고 이러구 저러구 말아. 아내한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넨 참견할 수가 없네. 자네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되는 일은 운전이야. 자네의 기능에 대한 별도지시는 내 임의로 결정할 터이니 제발 부탁이네. 멋대로 이쪽을 불러내지 말아. (수화기를 놓는다. 형용할 수 없으리만큼 얼굴이 비틀어진다)
[페이지] 023
이건 숫제 날강도 취급이로구나. 내가 언제 보험에 들라고 돈을 주었어! 간질병자 곁에 사내를 앉혀놓은 공로금이 천 이백 만원이라. 이게 무슨 짓이야! (끄덕) 사고가 벌어지기를 기다려라. 수원과 천안 사이에서 차가 뒤집히기를 이러구 기다려라.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 (고개를 젓는다) 맘대로. 저희들 맘대로.
(순간 누구에게 멱살이라고 잡힌 듯 난폭하게 밀쳐지더니 텔리폰 박스 안으로 등으로부터 넘어지듯 밀려들어간다. 박스의 텔리폰 밑에 있는 부분이 앞으로 떨어지면서 의자가 된다. 거기 앉혀진다. 가능한한 라이트가 의자 위에만 떨어진다. 가능하겠지)
[페이지] 024
[필타] 피고가 만 십일세 당시 피고에게는 다섯 살 먹은 누이동생이 있었는가? (끄덕) 그 사실이 피고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사이) 당시 피고 혼자 집을 보게 되었고 따라서 피고의 누이가 들어 있는 방의 열쇠도 피고의 수중에 맡겨졌고. 장질부사란 비록 회복기에 있었다하나 약간의 자극제를 섭취한다하더라도 그것이 장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리라는 점. 십분 납득이 갔을 터인데 누이가 죽은 것은 다량의 김치 섭취에 기인하였다고. 사실인가?
[페이지] 025
(끄덕)
피고가 날랐나?
(잠시 끄덕)
왜?
(잠시)
잠시 폐정한다. 땅.
(라이트 컷 아웃. 이 동안 텔리폰 박스의 좌우 날개를 편다. 가운데 의자와 합하여 침대의 길이가 된다. 거기 눕는다. 라이트 인)
[필타] 피고인. 만 십칠 세, 짝사랑 끝에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 기사회생하여 제 삼일 피고의 맞은편 침대에는 목의 성대를 절단하고 제 오일 째 된 삼십사세의 환자가 입원 중이었음. 사실인가?
(끄덕)
방화사건 당일 부인이 동침 중.
[페이지] 026
(몸을 일신다)
동침이 아니라 자정이 지나면 환자는 고양이로 둔갑. 창틀에 올라앉아 열심히 웁니다. 떨어져 죽는다는 거죠. 그럴 때마다 부인은 나를 흔들어 깨웠고 첫날 저녁에만 일곱 번 그 난리를 치뤘습니다. 이튿날은 다섯 번. 나를 깨우기가 안 되었는지 부인은 그저 그때마다 훌쩍거리는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기다렸습니다. 남작 떨어지는 소리를 기다렸습니다. 스스로 떨어지든지 여자가 밀든지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개념치 않으리라 작정하고 기다렸습니다. 수면제 자살이라고 죽음의 흉내를 내다 낙방한 신세라 그 사람이 죽기를 질투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저의 부끄러운 낙방이 그의 죽음으로서 덮어지도록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사건당일 저녁에는 신통하게도 잠잠해서 이제 싸움은 그쳤는가 보다. 잠이 들었는데. 어떻게 잠이 깼는데 부인이 내 자릿 속에서 훌쩍거리고 오들오들 떨고. 맙소사 옷을 벗었어! 떨어졌어요. 떨어지다니. 방금 떨어졌어요.
[페이지] 027
아이쿠 놓쳤구나! 그럼 사람을 불을 일이지 이러시면 어쩝니까! 무서워서 사람들이 들어오면 내가 밀어서 그렇게 됐다고 할지 모르잖아요. 그래두 이러구 있으면 그 사람들 그런 소리 안할테구 (급히 가상의 창틀 있는 데로 가서 밑을 본다) 나 보았어요. 그분이 떨어지는 것을 보구 가만히 있었어요. 무서워서 꼼짝 못했어요! 내려다 볼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보여요? (고개를 젓는다) 어서 옷을 입으시오 (하고 사람을 부를 셈으로 문 쪽으로 가는 듯 하는데 무엇이 후려치기라도 한 듯 벽에 가 앞으로 부딪친다.
[페이지] 028
[페이지] 029
뒤에 업힌 물체를 떼어내려고 실랑이한다 마침내 두 손을 떼었는지 양어깨를 잡아 앞에 세운 듯한 거동. 텔리폰 박스에 와 앉는다)
문득 그런 상태로 숨을 두 번만 더 내쉬었다가는 방안의 문이란 문은 일시에 자물쇠 소리를 내면서 잠기고 일단 잠기면 평생을 그러고 서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종잇장처럼 되어버린 저의 위장에 찍어지는 듯한 통증을 일으켰습니다. 순간. 부인을 밀어 부치고 뛸가 하였는데. 저 사람이에요. 제 남편을 밀어 부쳤어요. 하는 부인의 소리가 복도를 쟁쟁 울리며 건반 두드리는 듯 차례로 열리는 문과 문의 한가운데로 뛰고 있는 제 등어리가 휙 지나가면서 나를 막고 있는 것은 문이 아니라 부인의 눈이여. 한발자국이라도 떼어놓을려면 부인이 나를 믿을 수 있게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 돌처럼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통성명도 없는 사람과 사람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렇게 우스울 수가 있겠습니까. 무슨 짓이든 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래 성냥을 찾아 불을 질렀고 비로소 부인은 울음을 터뜨리며
[페이지] 030
나를 놓아주었습니다.
[필타] 피고는 피고가 아니고 부인이 남편을 밀었다고 주장하나?
(고개를 완강히 젓고) 나는 사람의 재주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중이오.
[필타] 재주라니?
그날 밤 세 사람은 같은 입원실을 쓰고 있다는 점에 일치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하자 한 사람은 창에서 떨어지고 한 사람은 옷을 벗고 한 사람은 불을 질렀습니다. 마치 한 달 동안 연습한 세 명의 배우가 맡은 역을 해내듯이 그렇게 재빠르고 충실하게.
[필타] 무엇을 암시하는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가볍게) 떨어진 사람이 나일 수도 있겠구나 하였습니다.
[필타] 재판부는 피고의 본 진술을 피고가 누이동생에게 갖다준 김치보시기와
[페이지] 031
일치시켜주기 바랍니다. 땅. 폐정.
(라이트 컷 아웃)
(텔리폰 박스의 좌우날개를 접고 다이알 돌리는 소리와 함께 라이트인)
이봐 자네 급히 좀 와줘야겠어. 궁지에 몰렸어. 협박을 당하고 있어. 전화로는 길고 일종의 유괴라고 할 수 있는데. 처지. 내 처. 처만 살려내면 되는 게 아냐. 자기 생명의 보장도 요구하고 있네. 응. 남녀지. 이건 단수가 높아 처 명의로 된 보험증서도 송부해 왔다니까. 처는 모르지. 글쎄 아직 모르고 있다니까.
[필타] 이보게. 만의 하나. 자네 처가 동조하고 있다면 이건 유괴로 수배할 수는 없는 일이네. 업무계통상.
-유괴가 아니면 그럼?
[필타] 현장을 잡아야지. 남녀가 단지 걸어가고 있대서 잡아 세울 수는
[페이지] 032
없지 않은가? 그래 어디 짐작이 갈만한 데라도 있나?
-이거 봐 자넨 내 처가 너덧명 되고 그 중의 하나를 찾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하나야 하나 다음에 자네 처가 없어지거든 나를 찾게 현장을 보여줄테니. (수화기를 놓는다)
이건 감옥이로군. 두 달을 살았죠. 부인의 유리한 증언으로 실화죄만 적용 받아 두 달을 살고 나왔더니 부인이 데리고 가 나흘 밤을 재워줬습니다. 남편은 불길을 피하려다가 실종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부인은 나의 첫 번째 여자가 자기라는 사실을 앞에 놓고 밤새 울었습니다. 나도 무언가 감격할만한 것을 가져야겠구나 해서 당신의 남편을 밀어버린 장본인은 나요, 하고 비장하였더니 귀신을 보듯 똥그랗게 보더니 또 하나의 비밀, 내가 여섯 번째 남자라고 일러주어 나는 당초 첫눈에 반하였노라 하였고 여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니 안심하다라 하고 나흘째, 비밀로 나보다 다섯 살
[페이지] 033
많은 아들을 데리고 와서는, (전화 벨 소리 급히 가서 수화기를 든다)
[필터] 장의삽니다. 고속도로에서 연락이 와서 연락을 올립니다만, 만약의 경우 저희가 주선할 터이오니 염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사고가 나는 즉시 이쪽으로 기별이 오게 돼 있읍죠, 신분에 응당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뭐. 별로 준비하실 것이 있으시면. (끄덕)
잘 들어 둬. 두 사람의 관이다. 도로상에 있는 당신네 사람하고 당신의 것. 내 처의 것은 필요 없다. 여기 철제로 아주 잘 만들어 놓은 것이 있으니까. 내 말은 만일.
[필타] 처음엔 다 그렇게들 말씀하십니다. 막상 일이 벌어져 보십시오. 저희들의 고마운 친군 줄 아실 겝니다. 그럼 후에 뵙겠습니다.
(수화기를 놓는다. 마치 도망치듯 나온다. 중얼거린다)
[페이지] 034
다시 보라구!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대체 다시 본다는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이냐 그럼! 갑자기 오후 두 세시쯤 하늘이 짝 갈라지고 낮 밤이 바뀌는 일은 있을 수 있는지 몰라도 (날카롭게 가상의 인물에게) 비열하다. 야비한 짓이다. 저들은 나를 이용하고 있다.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일을 벌여놓고 나보고 정지시키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 방금 들었지. 장의사를 데리고 와서 다시 뵙자고! 빈곤하고 유치한 노릇이다. 십칠 년간 무사고 주행의 비법이 지금 한꺼풀 두꺼풀 사기행위로 판명되고 있다. 피고인이다. 횡설수설하더니 보험증서를 보내놓고 이제 장의사를 들이댄다. 뭔가 이거 너무 뻔하잖은가? 단계적 압력이다. 사람들이 어디서 녹았는지 짐작이 되잖아? 보험증서를 보구서 기겁. 차를 돌려세운 사람들도 있겠지. 보험금에 정신이 어릿하여 깜박 넘어간 사람도 있겠고. 그런데 이 시꺼먼 장의사! 이건 꾹 찔리는 데가 심리학적 배려가 돼 있어. 직감
[페이지] 035
적인. 잔인한 노릇이군 자네도 동의할게네만 이 고비를 넘기는 사람이 별반 없을걸. 그런데 차는 어디까지나 갔는지 아나? 채 천안도 못갔어! (시계를 보고) 톨게이트를. 오분에서 십분가량 남겨 논 지점에서 차가 있단 말이네. 어떤가 장의사를 지금 갖다 찔러 넣는 것이. 사람들이 천안으로 연락. 차를 돌려세우기에 적당한 시간을 택해주고 있지 않은가? 빈틈없는 수작야. 천안까지 한시간 십분. 왕복 두시간 이십분. 설사. 지독한 간질이라고 치세, 주기가 두 세시간 안쪽에 드는 간질이 어디 있나? 샐리란 몸을 파는 여자한테는 삼사 년 지나면 임신거부 현상을 일으켜 준다는군. 핸들을 잡고 십칠 년야. 어떤 정도의 거부현상이든 몸에 붙었겠지. (끄덕) 어쨌든 중도에 돌리라는 말이 없다고 이따위 압력을 가해오고 그에 못 이겨 차를 정지시킨다는 건 둘 다 몰염치한 짓들임에 틀림없어 내 당초
[페이지] 036
계획은 변경 않겠네.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렇게 시시하게 시작한 일이 아니야! 두 사람 처와 나 두개의 생명이 걸려 있어! 내가 지금 할 짓을 하고 있는 줄 알아! 뭐야 건방지게 어디다 대고 누군 줄 알아 이일이 중도에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 줄이나 알아! 누가 지금 장난을 하재!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 아네. 자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할려구 그러는지 알고 있어. 아내의 생명. 지금 곧 정차시키는 것보다 위태로운 상태가 된다는 건 사실이네. 천안을 지나치자마자 발작이 일어나 뒤집혀 버릴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저들 압력대로 이번이 아내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되는 셈이지 그러나 이보게 지금 아내를 정차시킨다. 저 전화통으로 걸어가 수화기를 들기만 하면 되는 일이네. 쉬운 일이지. 그런데 뭐라고 하면 되겠나?
[페이지] 037
내 말은 기회를 주어서 고마웁소 아내를 돌려보내 주시오. 그렇게 하면 되겠나? 제가 죽을까보아 벌벌 떨다 정차시켜 달라고 애걸복걸하다 그도 안되니까 장의사 차를 문전에 세워놓고 치사한 짓을 벌이고 있는 전놈들한테 두 손 모아 빌란 말이지. 저놈들이 날 어떻게 취급 하는지 아나? 보험금 천 이백 만원을 타 먹을려구 아내를 내 논 작자로 만들어 버렸어! 네가 매니큐어 장사라지 몇 개나 팔면 천 이백 만원이 되느냐? (끄덕) 간질병. 병을 팔아먹고 사는 놈들이야. 대체 부산한번 왕복에 얼마나 받아 내는지 아나? 돈이라면 제 아이도 팔아먹고 남을 작자들이지. 그래서 아내를 팔아먹은 작자로 취급해 버린단 말야. 이 나를. 그리구 자네는 나보구 빌라고 그리구 있어. 저놈들 앞에 가서. (급히 스테이지를 돈다. 끄덕) 빈다고 치세. 내가 아내를 팔아먹으려다가 까시처럼 걸리는 데가 있어
[페이지] 038
취소 도루 돌려달라고 백배 사죄하였다 하고 아내한테는 대체 뭐라고 이 급작스런 우회전을 납득시키면 되겠나? (고개를 젓는다) 설마 운전수의 정체를 아내한테 고해 바치라고는 않겠지. (뚜벅뚜벅) 아내는 지금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네. 혼자일 뿐만 아니라 내 사업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어. 메니큐어 선전판이 세워지기에 가장 적당한 자리를 체크하고 있는 중일세 빨간 연필을 가지고. (뚜벅뚜벅 끄덕) 모티브가 있어야해. 어떤 극적이며 유쾌한 반전의 계기 없이 저 상태의 아내를 돌려세운다는 것은 아내를 희롱하는 것이며 따라서 아내를 참혹한 심경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을 나보고 지켜보고 묵묵부답 우이독경 마의동풍의 형상을 짓고 곁에 앉아있으란 소린가?
[페이지] 039
(고개를 젓는다) 당초 이 일을 왜 시작했나? 병풍의 무리. 홍제동 고개를 넘어가는 병풍의무리를 데려다가 아내의 하루 일과 중에 숨을 죽이는 대목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어서! (손짓으로 말머리를 꺼내려고 애를 쓰다가 급히 고개를 젓는다 격렬히) 이보게 뭐 속 시원한 말 하나 없나? 그 말 한마디면 당장 아내가 뛰어올 수 있고 아내한테 운전수의 정체며 내가 얼마나 떨고 있었으며 다 말을 하고, 이보게 어디 있나? 이보게! (급히 문 있는 데로 뛰어간다. 멈춰 선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급히 가서 수화기를 들지 않고 다이알을 돌려본다. 그때마다 해당하는 숫자를 중얼거린다. 여섯 번 일곱 번. 이윽고 수화기를 들려다가 무엇이 스쳐서 그러기타도 하듯 퍼득 뒤를 (객석으로) 돌아본다. 천진한 웃음이 번진다. 스테이지 끝까지 걸어 나온다. 커다란 유리문을 밀어 여는 시늉을 한다.
[페이지] 040
창 밖으로 상체를 내미는 듯 하고 위를 올려보며 명쾌하게) 어이. 이 친구야. 어딜 보구 있어. 자네 바지 오른쪽 뒷 주머니 밑에. 뭘 하고 있지 거기서? 유릴 닦는지 누가 모른대 내려 오라구 이리 내려 와 (하며 손짓) 조심해서. (창문 넘어 들어오는 것을 거두는 시늉을 하고)
편한 데 앉게. (담배 케이스를 내주며) 태우지 괜찮아. (케이스를 넣고 뚜벅뚜벅) 내가 하는 소리 재밌던가? 아니 앉게. 자네 애가 있겠지? 몇 살인가? (끄덕) 나도 하나 있네. 내 열일곱 때 다섯 여섯 위였으니까 그때 스물 셋이었지 아마.
[페이지] 041
(부드러운 손짓을 하며) 앉으라니까. 지난번 제 어머니하고 식을 올리마고 청첩 보내왔어. 이십여 년만에 정식으루. 왜 안 놀래나? 그게 놀래는 건가? 끽이든가 꾹이든가 무슨 소리를
(끄덕) 그런데 일이 꼬여서 가보지를 못했지 애비라고 모자간에 올리는 식장엘 못 가다니. (고개를 젓는다) 갔더라면 아들놈이야 뵈기 싫어 보지 않았겠지만 제 어미는 신랑한테 데려다 주었겠지. 하긴 벌써 모자간에 상의를 거듭 이 애비 취소 선언하였을지도 모를 일. 각설하고 자네가 대신 좀 가줘야겠네. 자네를 보자 그대로 넘겨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하는 부탁이니 어려웁겠지만, 가만 그 청첩장이 (하고 한쪽 구석에 있는 탁자에서 가져오는 듯한 시늉을 하고)
[페이지] 042
응. 여讶군 방금 아주 중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시주가 되는 셈인데 (하고 지환을 빼어주는 듯한 시늉을 하고) 이게 주소고 이것 손에 끼고 가게 애비지만 내가 제일 어렸기 때문에 늘 받아만 왔지 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 웬 반지냐 무슨 불길한 소식이냐. 뭐 그 비슷한 소리를 하거든 휘파람 불면서 유리를 닦더라 그러게 (끄덕. 유리를 닦는 시늉을 하며) 자네가 내 대신 내가 자네 대신, 자아 잠깐 이 윗저고리 뒤 좀 뜯어주겠나. 양쪽으로 잡아 쥐고 쫙 찢어발기라니까. 어서 (자신의 손으로 북 찢는다. 팔뚝 양 겨드랑이 밑 역시 뜯어내며) 자구책이라는 걸세 나를 만나야 하는데 만나서는 안 되는 여자한테서 배웠지 뭐라구? 이 사람 이러구서야 어데 밖에 나가겠나. (끄덕) 그 사람들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짓구 나온 사람들이라 유별난 데가 많지.
[페이지] 043
자네도 속아가면서 배워두게 유익할 때가 많아. 나는 그 사람들의 지식을 훔쳐서 살아가는 게 아닌다 여겨질 때가 다 있네 그래서 (끄덕) 매니큐어로 밥을 먹지. 아니 이 사람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나? (끄덕) 내 말이 자네 발의 족쇄로군. 자 입 다물지 어서 가게 (한쪽으로 배웅하고 문을 닫는 시늉을 하고 돌아선다. 초침 소리가 유난하다. 급히 가서 한쪽 벽면에 액자처럼 걸쳐있는 녹음기의 녹음 스위치를 돌린다)
천안 톨게이트 착 일 이분 전. 일 이분 뒤에 나는 당신과 통화를 하게 되든지 못되든지 할 터인데 그건 그때 일어나는 일이겠고 우선은 이 중요한 시간에 관한 기록을 당신을 위해 남겨두는 것이 내 임부라고 생각한다. 71년식 베이지색 코로나에 의한 고속도로상의 여행에 관하여 중간보고. 일 당신은 경부간 고속도로 좌 우변에 스물 네 개의 메니큐어 선전판을
[페이지] 044
세우기에 가장 적당한 시계점을 선정하는 것을 여행의 임무라고 하고있다. 일. 본 여행의 부차적 의도로서 본인은 이 기록을 위한 모종의 조치를 취했던 바. 단, 모종의 조치는 후에 구두로 약술함. 그 부차적 의도의 경과. 일. 접촉할 수 없는 일단의 물리들로부터 수 삼차의 전화협박을 받음. 일. 백금 지한 일개 피탈. 상의 일벌 파손. 그 평가 유괴의 일종으로 간주함. 따라서 부차적으로 대뇌 개두 수술은 중간보고 이후에나 기도될 수 있기를 앙망. 이상.
(스위치를 끄고 뒤로 돌려 다시 튼다)
녹음- 사는 것은 논리학이 아니다. 그래서 논리가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 피탈된 백금지환은 전달되거나 안된다. 백금의 논리는 피탈이다.
蝡 아니 이건 어대루 갔지?
[페이지] 045
(고개를 갸웃둥. 빨리 돌게 하고 다시 튼다)
녹음 蝡 증인은 운전수가 간질병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가? 그건 아닙니다. 간단하게 답하게. 증인은 차가 떠난 뒤에라도 아내에게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가?
蝡 보고. 지금 막 보고가 어디루 갔냐니까!
(스위치를 끈다. 잠시, 다시 다른 곳을 튼다)
녹음 蝡 (여자의) 당신은 느낌표형입니까? 물음표형입니까? 저는 하트형입니다.
(스위치를 끈다. 끄덕)
당신이 그러기를 바란다면 운전수의 정체를 알려줄 수도 있지. 지금처럼 즐거운 여행은 못될지 몰라도 충실한 여행이 될 수 있을지 몰라. 뒤에 당신의 기록과 내 기록과 내 기록을 대조해보면 재밌을걸. 물론 당신이 바라지 않는다면 거기서 하차해야지. 천안에서 내리구려. 그럼 내 데릴러 갈 테이니. 가지.
[페이지] 046
우리 참 오랜만에 즐거운 여행을 하게 됐군. 생각나나 생각나?
(로오미와 줄리땈)
(급히 텔리폰 박스로 뛰어가 밑으로 앉아 숨고. 인형극을 하듯 두손을
올려 남녀를 만든다. 손 하나가 갑자기 넘어진다)
이런 또 넘어졌어?
무릎이 션찮아요. 아홉 살에 관절염을 앓고부터 나이가 나이이니 이제는 뒤로 넘어져야지. 안 그래 쥬울 아가씨?
당신은 그럼 넘어질 때 뒤로 넘어져요?
나는 앞으로 넘어지지 (넘어진다)
싫어 나두 앞으로 넘어질래 (넘어진다)
(이때 전화벨이 울린다)
오 왔어! 여보! (앉은 채로 손을 뻗쳐 수화기를 든다)
[페이지] 047
아, 천안 내 아내 좀 바꿔. 71년식 베이지색 코르나 자 1예 1971 뒷자리의 오른쪽 아니면 왼쪽에 앉아있는 수박색 메니큐어. 그게 내 아내요.
[필타] 여기 금은방입니다. 이상한 신분의 청년이 백금지환 넘버 1971번을 팔려구 가져 왔기에 선생님의 보증을 받을까 합니다. 혹 선생님의 도난품이 아니지요. 청년은 저희가 통화중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蝡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반지가 아니고 아내야 아내.
[필타] 아 그럼 청년과 같이 온 여자 분이 선생님의 부인이십니까? 알겠습니다. 선처하겠습니다. 부인을 바꿔드리죠.
(여자의) 선생님 고마워요, 곧 병원으로 가겠어요. 넉달 열 이틀 됐어요. 의사 말은 손등의 티눈처럼 간단히 될거라구요. 티눈이 없어지면 우리는 헤어진답니다. 그때 선생님한테두 가겠어요. 빠이 빠이 찰칵.
-손등의 티눈이라니? 이건 또 무슨 암시지? (하며 수화기를 놓다가 손등을 잡아본다. 깜짝 놀랜다)
[페이지] 048
그렇군-. 내 손등에 있구나. 요것이-. (춤을 추는 듯 하다. 즐거웁게) 하늘의 북극성이 폭풍우에 가리워지면 또 하나의 북극성이 인체의 구석에서 빛나느니-, 제 왼손 등허리 검지와 무명지 사이 골자기에 숨어있던 티눈이 반짝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아내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사이 하루 밤새 불쑥 튀어나온 이 거북한 살덩어리가 아내의 손등에는 없다는 사실 때문에 아내의 질투를 자아냈던 장본인-. 아내의 질투가 즐거웠던 만큼 나 의 사랑을 받아오던 이 물건의 제거야말로 아내를 불러 세우기에 가장 합당한 구실을 제게 주었습니다. 이야말로 대뇌를 들어내는 상태라고 아내가 암시하고 있는 것의 요체인지도 모릅니다. 오오, 여보 잠깐만. (급히 급히 다이알을 돌리고) 아, 천안 톨게이트. 71년 베이지색 코로나 자1971번의 정차를 요구하오. 분명히 해두는데 당신들의 전화에 시달리지도 않았고 기다리다 지친 것도
[페이지] 049
아니고 나는 다 알지 내 손등에 있는 티눈을 제거해야 될지 말지를 아내하고 상의해야 되겠어서 다이알을 돌린 것이오. 아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오.
[필타] 천안 톨게이트임은 틀림없습니다만 선생님께서 무슨 착각을 하신 것이 아닌지요. 본인의 의견으로는 선생님이 찾고 계신 차량은 서울 톨게이트 아니면 부산 톨게이트에 있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는 수원이나 조치원 톨게이트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이봐 아까 수원 톨게이트에서 통화가 있었는데.
[필타] 이쪽에는 없었습니다.
(수화기를 놓는다. 급히 다이알을 돌린다)
수원 톨게이트, 좀 전에 71년식 베이지색 코로나 지의 1971번이 통과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확인해봐 주시겠오?
[필타] 오늘 중으로는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페이지] 050
-이봐 좀 전에 거기서 통화를 해왔는데.
[필타] 기록에는 없습니다. 혹 선생께서 착각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닌지요. 부산방면의 통화를 잘못 들으셨거나 아니면 날짜를 잘못 계산하셨거나-.
-날짜라니 오늘 아까 정확히 해서 삼십 칠 분전에 그러니까 두 시 십 분에 수원 톨게이트에서 통화가 있었는데 날짜가 무슨.
[필타] 선생님의 꼭 그렇다는 게 아니고 종종 그렇게 착각하시는 분들의 문의가---아, 여기 기록에 있습니다. 두시 십분이라고 그러셨죠. 유월 이십 칠일 두 시 십분 71년식 베이지색 코로나 자의 1971번 서울로 통화.
-그게 오늘이 아니란 말이오 그럼?
[필타] 오늘은 구월 일일입니다. (그 때 그 때 따른 날짜)
그를 리가-. 이봐 여기. (수화기를 놓칠 뻔하며 손 등허리를 수화기에 보이며) 손 등허리에 티눈이 그냥 있는데 그럴 리가 없어. 이 보오 이게 보이오? 까칠까칠하니--- 이것 봐요. 부탁이오. 거기 장부의
[페이지] 051
기록을 다시 한번 확인해봐 주시겠어요? 여보-. 응 오늘 아침에 출발하였지 내 처가 그랬오. 오늘 아침 상머리에서 시작하였다고. 그리고 티눈이 여기 이렇게 그냥 있고 여보 그럴 리가 없오 어서.
[필타] 아침에 출발하셨으면 부산방면을 알아보시지요. 여기엔 오전 중 근무자가 교대했기 때문에 오전 중에 관한 기록은 확인해드릴 수 없었습니다.
(전화 끊기는 마찰음)
이봐요. 이봐-. 그럼 내 아내는 아, 거기 부산 톨게이트. 베이지색 코로나 자 1971번이 거기 있는지 확인해 주시겠오?
8978. 5469. 7568. 아 이건 좀 전에 말씀 드렸고 9477. 8462. 6357. 1974. 저 이보세요 19 몇 번 이라셨지?
(탕 전화를 끊는다. 급히 다이알을 돌린다)
이봐요, 대구.
(하는데 다른 통화와 점선이 된다. 여자의 소리)
[필타] 요. 유모. 이 일을 어떡하면 막을까? 내 남편은 있지만 내 맹세는 하늘에 가 있어. 그러니 그 남편이 아 세상을 떠나 하늘에 되돌아올 수 있을까? 날 좀 도와줘. 하늘조차 나같이 연약한 사람에게 수단을 부리다니. 이봐 유모-.
[페이지] 053
(수화기를 놓는다. 다시 다이알을 돌린다)
[필타] (여자의) 네, 네, 대굽니다.
-톨게이트 좀 부탁하오 아주 급하오-.
[필타] 통화 중이니 기다리세요.
(망연히 수화기와 티눈을 잡고 서있다. 티눈과 수화기를 번갈아 본다. 이윽고 수화기를 놓는다) 제 손등에 이 거북한 티눈이 상존하고 있다는 것은 유월부터 구월 석 달 동안 아내가 고속도로상에 한반도 정지된 적이 없다는 사실의 반증이었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아내는 그러니까 매번 경부선 왕복 여덟 시간을 꼬박꼬박 간질병자 곁에 앉아 지내왔던 것입니다. (얼굴을 세수하듯 싸쥐고 박스에서 나온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부끄러운 일은 없습니다. 석 달 동안 제 손등에 티눈이 있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대체 무엇을 하였는지.
[페이지] 054
(문득 찢어져버린 옷을 만져 본다. 끄덕) 옷을 찢었죠. 매번 한 벌씩! (급히 급히 벗어 텔리폰 박스에 쳐 넣는다) 유리를 닦고 (와서 가상의 유리창을 만진다) 그리고--- (고개를 젓는다)
[필타] 그리고?
(후딱 놀란다. 천정을 본다. 주위를 둘러본다)
[필타] 계속하게. 그리고?
(둘러본다. 고개를 젓는다)
[필타] 그리고?
(말을 할려고 하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를 않는다. 마침내)
[페이지] 055
蝡 재판극을 했습니다.
[필타] 蝡 어떻게?
아내가 여기 (텔리폰 박스) 앉고, 저는 왔다갔다 합니다.
[필타] 왔다갔다 하게.
(왔다갔다 한다)
[필타] 계속하게, 뭐라고 시작을 하나
(말을 하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필타] 다시 크게
(무서운 기세로 돌아선다. 그리고 텔리폰 박스를 가리키며 꾸며진 검사가 되어)
피고는 남편이 접촉할 수 없는 일단의 무리들로부터 협박을 받고 송달 되어오는 보험증서를유서를 만지듯 슬픔으로 챙기고 장의사의 전화를 받고 종일 착압기를 두 손에 들고 있는 것 같아져버린 전화 벨 소리에
[페이지] 056
자신을 덜덜덜 흔들고 있는 동안, 피고는 71년식 베니지색 코로나에 앉아 남도 천리를 오락가락 하였다는데 사실인가?
[필타] 계속하게
(끄덕)
피고는 경부간 고속도로상의 톨 게이트 여기 저기다가 두 시 십분, 네 시 오십분, 다섯 시 십 칠분, 일곱 시 십 사분 등등의 무질서한 시간을 무질서하게 헤쳐놓고 남편이 그 행적을 알아 볼 수 없도록 하였는가?
(끄덕, 열띠고 빠르게)
여덟 시간이면 영화가 네 편이지, 하는 소리를 남편으로부터 듣고 피고는, 아이구 그 짓을 하라면 저 못해요. 죽어두라 답하고, 남편이 영화보다 재밌군 하니까. 그저 한편의 뉴스죠. 십분 짜리라고 피고가 답하였다는데, 그러면 피고에게는 스물 네 시간이 삼십분이고 거기서 수면시간과 오락가락 시간을 제하면 십분 남짓한 시간이 남는데 거기서 남편에게 바쳐진 시간은 몇 분이나 되나?
[페이지] 057
[필타] 피고의 답변이 몇 분으로 나왔나?
蝡 삼 분 이십 촙니다. 제가 매일 삼분 이십 초 삶은 계란 두개씩을 어김없이 먹고 있습니다.
[필타] 계속하게.
蝡 (준열히)
피고는 일단의 무리가 남편에게 간질병을 옮겨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고용, 그들과 동조하므로써 남편을 사실상 간질병자로 만들어 놓았다는데 사실인가?
[필타] 그거야 아내를 만나기 전부터 자네한테 있던 증세가 아닌가. 태초에 자네에게 간질병이 있었지.
(이상한 동물의 소리를 지르며 텔리폰 박스 안으로 들어가 밑에 숨어 앉자 텔리폰 박스가 사시나무 떨듯 떨린다)
[페이지] 058
[필타] 하하 됐어, 잘하는데 자네 부인도 꼼짝 속아넘어가고 말걸. 후회의 눈물을 끌어낼 수 있을 걸세. 아내는 이제는 경부간 오락가락을 끝낼 걸세. 축하하네. 헌데 앞으론 유리닦기는 조심해야겠군. 유리를 닦다가 그 짓이 하고싶어지면 곤란하지. 의사의 등장이 늦군 내가 대신을 하지. 자리에 앉게. (싱긋 웃으며 올라와 텔리폰 박스 안의 의자에 앉는다. 라이트 집중)
(딸랑하는 초인종, 소리, 문 여닫히는 소리, 무거운 발자욱 소리, 이를 쫓는 텔리폰 박스 안의 눈)
[필타] 두개의 가죽 주머니를 가져 왔는데, 하나는 불행한 일이며 하나는 불행한 얘기를 한 뒤에 펴보도록 돼있습니다.
(이어서 자리에 앉아 중얼거리듯 다음 대사를 받아하며 차츰 일어서 의사로 변모한다) 당신이 유리닦기 한데 주어보낸 지환을 받고 부인은 태아를 없애라는
[페이지] 059
지시로 알고 청년을 시켜 지환을 없애고서는 병원에 왔습니다.
(이 때쯤이면 나와있고 텔리폰 박스 자기가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옳지 못한 일입니다 한 생명을 창 밖으로 밀어 뜨리고서 얻은 생명인데 (끄덕) 병원으로서도 드문 일로 경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시계를 보고) 십칠 분전에 제가 거기를 떠나기 직전 운명하셨습니다. (주머니를 펴보는 시늉을 하고) 또 한 개의 주머니에는 당신을 지키고 있으라는 지시가 들어있습니다. 고속도로 순찰차가 그런 내용의 급전을 병원으로 가져 왔습니다. 곧 제2의 지시가 있을 줄로 압니다. (잠시 뚜벅뚜벅) 부인께서는 당신이 왜 전의 남자들을 창 밖으로 밀어뜨렸는지 모르겠다는
[페이지] 060
말을 두 번 반복했습니다. 제가 세 번째가 되겠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전화벨이 울린다. 가서 수화기를 든다)
[필타] 수원 톨게이트에서 피고용인으로부터 마지막 전달. 부인께서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위태롭습니다. 진작에 수면제 복용을 알고 있었으나 선생의 각별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맨 처음의 여행은 즐거운 것이었습니다만 두 번째로부터 부인은 자리에 앉으며 수면에 들어갔습니다. 부인은 현재 수원 피고용인의 의무를 반납합니다. 이상.
(전화 끊기는 소리 수화기를 놓는다 순간 크게 놀라며 가상의 유리창으로 뛰어들며 가상인물의 다리를 잡는 듯한 거동으로) 안돼! 오, 이봐요. 약물중독이란 쉽게 건져낼 수 있는 것이오. (채인 듯 그러나 다시 매달린다)
[페이지] 061
미친 짓이야! 이봐 좀 더 기다려봅시다. 곧 연락이 있을께요, 아직은.
(순간 발길에 채인 듯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싸쥐며 저만치 나뒹군다. 일어날려다가 다시 쓰러진다. 라이트 컷 아웃. 동시에 M-로미오와 줄리엣이 흐르는 가운데 텔리폰 박스 시트를 덮는다. 음악 BG로 깔리면서 라이트 인, 죽음에 임박하였으나 마지막 불가사의한 힘과 슬기로 천장을 향해 나직히 끊일듯 이어가며)
이제 농담이 진담이 됐거니하면 정말이지 내가 천년을 살더라도 이 말은 안 믿을 걸입쇼. 우리집 영감이 안 그래. 쥬울 아가씨? 라고 하니까 귀염둥이가 울다가도 응, 했어요. 이마에 병아리 불알만 한 혹을 냈겠죠. 험한 상처이기 때문에 엉엉 울다가도 우리 집 영감이 이봐요. 아가는 앞으로 넘어졌어. 나이 들면 뒤로 넘어지겠지, 안 그래. 쥬울 아가씨? 라고 하니까 애기는 울다 말고, 응. 했어요.
[페이지] 062
유모도 그만해요. 제발 좀.
(웃는 듯하다. 고개를 가눌 힘이 없다. 이때 전화벨이 울린다. 처음에는 벨의 소리가 들리지 못한 것 같다. 두 번 세 번 거퍼 울린다. 고개를 움직인다. 손을 든다. 닿지 않는다. 상체를 일신다. 안된다. 전력을 다해서 수화기를 손끝으로 친다, 두세 번 뛔둥거릴뿐 떨어지지 않는다. 일셨던 몸이 앞으로 엎으러져 쓰러진 채 잠잠하다. 전화벨 계속되는 가운데 로미오와 쥴리땈이 흐른다. 전화벨 소리, 마치 꺼져 가는 숨결인 듯 점차 미미해진다. 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