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고현철 교수 투신/항거 이후
부산대에서의 일주일 (2015.8.17 - 8.21)
2015.08.30.
부산대 교수회
2015년 8월 17일(月)부터 8월 21일(金)까지 청천벽력 같은 일이 부산대에서 일어났다. 부산대 국문과 故 고현철 교수의 투신 이후 총장 사퇴, 직선제 복귀 합의문 발표, 매일 저녁 집회, 21일 거행된 "민주화의 불꽃, 故 고현철 교수 전국교수장(全國敎授葬)"에 이르기까지 상황은 급격히 전개되었다. 故 고현철 교수는 총장직선제로 상징되는 대학의 자유, 자율성, 민주화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하여 스스로 희생을 감당하였다.
그동안 교육부가 "국립대 선진화 정책"이라는 미명으로 대학의 자율성(自律性)을 겁박(劫迫)하고 침해(侵害)한 결과, 사상 초유의 대학교수 투신(投身)이라는 항거(抗拒)를 가져왔다. 교육부는 그 동안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대학의 자율권을 재정 지원을 무기로 간섭하고 침해하였다. 부산대를 제외한 모든 국립대가 직선제를 포기하고 임의추출(로또식) 총추위 방식으로 넘어갔고, 부산대마저 총장이 임의추출 총추위 방식으로 바꾸어 확정하려 하였다. 교수회장의 12일에 걸친 단식농성에도 불구하고 끝내 부산대마저 넘어갈 판이었다. 그 때 17일 오후 3시경 故 고현철 교수의 항거는 국면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매일 밤 부산대 본부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故 고현철 교수의 글이 낭독되면서, 그 분이 대학인에게 일깨워주고자 한 것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바로 총장직선제로 상징되는 대학민주화, 대학의 자율성, 대학의 사명, 교수들의 교육자로서의 본질적 역할을 수호하라는 것이었다. 점점 "무디어져" 가는 교수들의 의식에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고, 교수들을 일어나게 만들었다. 교수들은 집회장에 자발적으로 모이고 분향소에 헌화하며 눈물을 삼켰다.
각종 공론이 나오고, 교수들 사이에 공감과 연대가 형성되었다. 전국의 교수들이 찾아오고 조문하였고, 국립/사립을 막론하고 각 대학의 교수들 사이에 전국적인 연대가 며칠 만에 확산되었다. 각종 사회단체, 예술단체, 부산대 민주동문회 등 각계각층에서 지지하는 글과 방문이 이어졌다. 학생들도 방학중인데도 점차 본관 앞과 본관 로비 아고라 집회에 찾아오고 발언하였다. 故 고현철 교수의 영전에 헌화하며 흐느끼는 학생들도 많았으며, 분향소를 지키기도 하였다.
언론들도 처음에는 양비론 등 호도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점차 바뀌며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보도하는 언론들이 늘어나고 있다. 국회 교문위 배재정 의원은 분향소에 조문을 하고 국회에서 황우여 장관을 조목조목 질타하고, 그 동안 국립대에 대한 교육부의 부당한 강압 사실을 밝히며, 교육부의 국립대 선진화 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였다. 21일 부산대 10/16기념관에는 700명 남짓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모여 고인의 가시는 길을 함께 하였다. 이렇게 수많은 교수들이 방학 중임에도 자발적으로 모인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후 화장, 추모공원 안치까지 이어진 길에서 역시 많은 교수들이 고인이 마지막 가시는 여정을 지켜보았다. 고인의 사모님은 교수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하시고 남편의 뜻을 교수들이 마음을 합하여 이루어달라고 하셨다. 엄청난 슬픔을 꿋꿋하게 견디는 모습이었으며, 강건한 정신을 가진 분이고 남편의 유지를 잇겠다고 하셨다.
故 고현철 교수는 "무뎌진"이라는 표현을 많이 남겼다. 그 분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대학정신(大學精神), 자유(自由), 자율화(自律化), 대학민주화(大學民主化)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民主化를 웅변하고 계심을 행간에서 문맥에서 깨달을 수 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