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과 땅 사이의 相生 조화
땅이 좋아야 뛰어난 인재가 태어난다는 뜻의 ‘인걸은 지령地靈’이란 말은 3세기 중국 동진 시대의 곽박이 쓴 교과서적 풍수서 《금낭경錦囊經》에 처음 나온다. 따라서 풍수에서는 본래부터 자연 환경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왔다고 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서양에서도 있었던 지리 사상이다. 그러니까 풍수건 서양지리건 자연과 인간의 관련성에 의심을 품은 쪽은 없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위인 전기에는 그가 산천이 빼어난 곳에서 태어났음을 첫머리에 붙이고 있지 않은가.
다만 서양 지리학이 환경결정론적 시각에 매달려 왔다면―물론 이것은 제국주의에 악용된 측면이 있는 것이지만, 예컨대 열등한 환경이 열등한 민족을 배출했다는 식으로―풍수는 오히려 자연과 인간의 상호교감에 중점을 두어왔다.따라서 풍수, 즉 자연풍토가 인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분명 인정하지만 어느 한쪽의 주도主導를 인정치 않고 서로가 맞느냐 맞지 않느냐 하는 문제에 풍수사상은 주로 관심을 쏟게 된다.
엄밀히 말해서 풍수에 좋고 나쁜 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맞느냐 맞지 않느냐의 문제만 있다는 것은 이런 논리에서 나온 말이다.흔히 풍수를 좋은 땅 잘 골라 그 음덕蔭德 좀 보자는 술법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생적 풍수 사상의 원류인 도선풍수道詵風水는 그런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지리학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선풍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땅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은 홀로 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사랑은 훌륭한 것, 좋은 것만을 상대하는 일이 아니다. 훌륭하고 좋은 것이라면 나 아니라도 사랑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오히려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사랑이란 다른 것에 비해서 떨어지는 것, 문제가 있는 것,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일 때 의미가 있다. 도선풍수에서의 땅 사랑은 그런 근본적인 인식 속에서 출발이 된다. 명당明堂이니 승지勝地니 발복發福의 길지吉地니 하는 것은 도선풍수의 본질에서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개념들이다.
결함이 있는 땅에 대한 사랑이 바로 도선풍수가 가고자 하는 목표이며 그것이 바로 비보풍수裨補風水이기도 하다. 앞으로 많은 사례들을 들겠지만 구체적으로는 두 개의 큰 물이 모이는 합수合水 지점으로 홍수 때 침수 위험이 상존하는 곳, 낭떠러지 밑이나 바로 위여서 산사태의 위험이 있는 땅을 골라 절을 세워 비보를 하는 식이다. 절에 상주하는 스님으로 하여금 경계와 일단 유사시 노동력 역할을 맡게 하자는 의도이다. 마치 병든 어머님께 침을 놓아드리는 듯한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란 말이 있다. 완전한 땅이란 없다는 뜻이다. 사람이건 땅이건 결함이 없는 것은 없다. 결함 없는 곳을 취함은 사랑이 아니다. 일부러 결함을 취하여 그를 고치고자 함이 도선풍수의 근본이다. 그래서 도선풍수는 우리 민족 고유의 ‘고침의 지리학, 치유治癒의 지리학’이 되는 셈이다.
풍수는 기본적으로 사람과 땅(人間과 自然) 사이의 상생 조화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경제적인 측면이 어느 정도 간과看過되는 것은 사실이다. 경제적 개발에 대하여 인식론적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풍수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풍수가 현대의 국토 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지니고 있는 건전한 지리관, 토지관, 자연관 때문이다.
풍수는 땅을 어머니 혹은 생명체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단순한 물질로 생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땅이 소유나 이용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누가 감히 어머니(땅)를 이용할 수 있으며 누가 어머니(자연)를 소유한다는 패륜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풍수가 국토 재편再編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풍수의 공도적公道的 자연관에 있다고 본다. 개발을 어머니에게 의지한다고 생각하고 자연보전을 어머니에 대한 효도의 관념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지혜를 오늘의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고 본다는 뜻이다. 의지한다는 것과 이용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의지는 신세를 지는 일이며 은혜를 입는 일이다. 그런 사고 방식이라면 누가 감히 땅을 함부로 대하고 많이 소유하려 할 수 있겠는가.
개인적으로는 풍수가 현대인들을 소박한 자연주의로 몰아갈 우려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도선풍수가 가지고 있던 자연과의 조화, 대동적 공동체 관념에 배치되는 일이다. 도선은 적극적으로 어머니인 국토의 병통을 고치기 위하여 비보의 방법을 고안한 사람이다. 그의 지리철학을 오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바 “치유의 지리학”이 되는 것이고, 이는 바로 살아있는 땅으로 재생시키자는 운동 원리가 되기도 한다.
자연의 길(自然之道)을 방해하지 말라.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라. 아마도 이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풍수가 해줄 수 있는 말일 것이다. 국토 재편은 이 지리철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 생존을 위한 싸움터로서의 국토가 아닌, 삶터로서의 국토를 가지게 되는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게 모르게 느끼고는 있다. 다만 그것을 분명하고도 합리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청주에 살 때와 전주에 살 때, 그리고 관악산 아래 봉천동에서 살고 있는 지금의 사고 방식이 다름을 느낀다. 세월의 변화에 의한 나이 탓도 있겠지만 그것 말고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성격의 변화를 느낀다는 뜻이다. 청주에 살 때는 무심천변이었다. 길게 뻗은 둑길을 보며 언제나 저 길이 끝나는 곳까지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전주에 살 때는 조경단 부근 숲에서 살며 세상으로부터 가려진 어떤 것을 추구했었다. 지금은 관악산의 바위 봉우리를 보면서 쓸모도 없는 투쟁심에 젖어 몸과 마음을 상하고 있다.
대륙의 벌판에서 느끼는 마음은 허망함과 고적감이다. 간접적으로 경험한 히말라야 설산을 보며 느끼는 감상은 삶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신비에의 동경심이다. 그래서 대륙인들은 사람과 땅과의 관계에서보다는 인간 관계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교에 자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주장하는 바 요체는 인간 관계에 대한 규정이다. 설산을 보며 살아가는 티베트인들은 그러한 신비감을 종교적 성취욕으로 풀어가려 한다.
누구나 산을 보면 그 너머에 있는 땅을 그리게 된다. 하지만 실제 넘어가 보면 그곳에도 별 게 없다는 것을 체감한다. 허망과 고적과 신비는 그렇게 쌓여 간다. 그들은 삶의 본질과 실체를 잃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한반도를 살고 있는 우리들도 점차 그들을 닮아가고 있다. 자연을 잃고 인간 관계에 집착하며 있지도 않은 신비를 찾아 나선다. 그래서 자연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얽혀서만 사람을 사귀고 광신적 종교에 휘말려 드는 것이다.
자연은 본래 있는 그대로의 것을 받아들이는 데 뜻이 있다. 나이를 먹어 가며 허망과 고적과 신비를 넘어 자연을 온 몸으로 맞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풍수적 삶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길고 복잡한 과정을 경험하지 않고도 자연을 맞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풍수적 삶이란 것도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2) 자생풍수에서 터잡는 방법이란?
여기서 좀 구체적으로 자생풍수의 터잡기 방법을 정리해놓고 얘기를 풀어나가기로 하자. 그래야 독자들이 왜 내가 그런 식으로 땅을 바라보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한 우리의 자생풍수는 전제前提한대로 철저히 “어머니인 땅”이란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터(基地)가 있을 때 그 터가 있게 되는 까닭은 우리나라의 경우 당연히 산에서 비롯된다. 그 주된 산, 즉 주산主山이 바로 어머니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큰 어머니인 백두산으로부터 이 어머니인 산, 엄뫼까지 이어지는 내룡맥세來龍脈勢가 진짜인지 가짜인지(眞假), 순리대로 흘러왔는지 흐름을 거슬렀는지(順逆), 평안하게 내려왔는지 불안감을 주지는 않았는지(安否), 심지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生死) 등을 살피는 일로 터잡기는 시작된다. 소위 풍수 용어로 간룡법看龍法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말하자면 어머니의 가계家系를 살피는 일인데, 온화유순溫和柔順하고 조화안정調和安定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변화變化와 생기生氣를 아울러 갖춘 맥세를 좋은 것으로 삼는다.
이제 그 어머니가 품을 벌리게 된다. 어머니의 품안이 유정하고 온순하며 생기 어린 곳인지를 판단하는 일이 다음에 이루어지는데 중국풍수식으로 말하자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를 가려 밝혀내는 장풍법藏風法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어머니의 품안이라고 모두 명당明堂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어머니라 하더라도 피곤할 때도 있고 짜증이 날 때도 있다. 물론 병환이 드시는 경우도 있다. 그런 품안은 고되고 무정하기 때문에 모양새가 어머니 품안처럼 생겼다 하더라도 명당이 되지는 않는다. 정신이 바르지 못한 어머니라면 그 품안에 살기殺氣가 들 수도 있다. 당연히 그런 품안(명당)은 피해야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 자생풍수에는 그런 무정한 어머니를 달래거나 고쳐드리고 나서 거기 안기는 소위 비보裨補의 방법이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품안이 그 생김새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어머니다운 유정함으로 가득 찼다면 그곳은 명당이다. 이제 그 품안에서도 어머니의 젖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젖을 빨아야 직접 생기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소위 정혈법定穴法 또는 점혈법占穴法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이때 젖무덤을 혈장穴場, 젖꼭지를 혈처穴處라 하거니와, 사실 명당을 찾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정혈을 하기는 쉽지가 않다. 어머니의 품안에서 젖꼭지를 찾는 일이 바로 구체적인 터잡기가 되는 셈이다.
다음은 어머니의 품안에서 물과 바람의 유동流動을 살핀다. 이 문제는 우리 풍수에서는 그리 크게 관심을 두는 분야는 아니다. 그러나 중국풍수에서는 소위 득수법得水法과 좌향론坐向論이라 하여 대단히 어려운 기술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중국은 반건조지역이 많으므로 중국풍수에서의 물은 그것이 실질적인 소용에도 닿지만 富의 과시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술법화術法化되는 것이고, 그들 풍토의 상대적 악조건 때문에 미세한 방위方位의 차이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좌향에 큰 신경을 쓰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풍토는 그렇지가 않다. 우리의 경우는 심지어 북향北向도 풍토에 따라서는 마다할 까닭이 없는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최종적으로 이 터(어머니의 품안)가 무엇을 닮았는지를 판별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의 품안이란 것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어머니를 보고 공작孔雀 같은 기품이니 순한 양과 같은 온순함이니 하고 얘기하는 것처럼 땅, 즉 품에 안긴 터에 대해서도 그 형국形局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터를 잡은 당사자와 그 후손들에게 환경심리적環境心理的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다. 내가 살고 있는 땅이 좋은 곳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는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형국론形局論은 그런 환경심리의 작용력을 응용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여기서 좀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도선의 풍수 방법론, 즉 중국풍수와 다른 우리 자생풍수를 정리해보기로 하자. 도대체 우리 자생풍수의 기본 자세는 무엇인가? 땅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대한다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더 나아가서 땅을 곧 어머니로 대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강조한 말이다.
땅이 살아 꿈틀거리는 용龍으로 혹은 어머님의 인자한 품으로 보이기 시작해야 풍수를 말할 수 있다. 흔히 도안道眼의 단계에 이른 풍수학인風水學人이라 일컫는 것이지만 그 역시 땅과 사람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사랑이 그를 도안에 닿게 할 수 있다. 도안에 이르면 그 전까지는 그저 단순한 돌과 흙무더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던 山이 지기地氣를 품은 삶의 몸체(유기체)로 보이기 시작한다.
설악산 한계령에서 점봉산, 가칠봉에 이르는 일대는 다양한 수종樹種과 식물이 남한에서 가장 풍성하게 자라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곳의 자연 지세地勢는 토양 조건, 경사도, 기반암, 국지 기후 등에서 열악하기 짝이 없는 땅이다. 그런데 어떻게 나무들은 그토록 잘 자랄 수 있을까?
이것은 그곳의 식생植生이 땅과 상생조화相生調和를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자생풍수는 이해한다. 여기서 나무 대신에 사람을 대입시키면 바로 우리 풍수의 정의가 나올 수 있다.
결국 좋은 땅이란 없는 셈이다. 있다면 땅과 사람이 상생의 조화를 이루었느냐 그러지 못했느냐의 문제만 남을 뿐이다. 좋은 땅, 나쁜 땅을 가리는 것이 자생풍수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맞는 땅, 맞지 않는 땅을 가리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바로 풍수가 되는 것이다.
땅과 생명체(특히 인간)가 서로 맞는,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터를 구하고자 하는 경험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지혜가 돼 풍수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발복發福을 바라는 이기적 음택풍수(陰宅風水, 즉 墓地風水)는 후대 사람들의 욕심이 만들어 놓은 잡술雜術일 뿐이다.
풍수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그것은 안온한 삶, 즉 근심 걱정 없는 안정 희구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터를 잘 잡는다는 것은 땅과 생명체가 氣를 상통相通시킬 수 있는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다. 잘 잡힌 터에 뿌리를 내린 생명들은 보기에도 조화스러운 감정과 안정을 선사한다. 그런 곳에서 느끼는 평안함이 모든 사람이 바라는 마음의 지향성이다.특히 현대 도시 생활이 비인간적인 잡답雜踏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평안을 추구한다.
바로 그런 곳. 산, 나무, 개울, 옛집, 돌, 사람까지도 서로가 제자리를 잡고 제 구실을 하는 곳. 풍수는 그런 곳을 찾아 나선다. 그곳은 바로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땅이다. 이것이 자생풍수에서의 터잡기의 기초이다.
그래서 땅을 혹은 산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어머니의 품안과 같은 명당을 찾아낼 수 있다. 구태여 풍수의 논리나 이론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의 자생풍수 연구가 드러내 준 우리 풍수의 방법론적 본질은 본능本能과 직관直觀과 사랑, 바로 이 세 가지로 요약이 가능하다.
순수한 인간적 본능에 의지하여 땅을 바라본다. 거기에 어머니의 품속 같은 따스함을 추구하는 마음이 스며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걸 좇으면 된다. 성적性的 본능에 의한 터잡기도 자생풍수는 마다하지 않는다. 본래 성적 본능이란 것 자체가 종족 보존의 본능이 발휘된 현상 아닌가. 거기에 음탕淫蕩과 지배支配의 욕망이 끼어 든 것은 본능이 아니라 부자연不自然의 발로일 뿐이다. 그래서 자생풍수의 명당 지명地名 중에는 좆대봉이니 자지골이니 보지골 같은 것들이 심심찮게 있는 것이다.
직관은 순수함을 찾아가는 일이다. 이성理性과 지식知識, 따짐과 헤아림 따위가 직관의 순수함을 마비시키는 것인데 지금 우리들은 오히려 그런 것들을 따르고 있다. 직관은 그저 문학적 상상력이나 시적詩的 이미지의 범주에서나 찾으려 한다. 하지만 풍수에서 땅을 보는 눈은 다르다. 결코 이성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본능의 부름에 따라 직관의 판단을 따르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하지만 이 직관은 결코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직관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랑.
이는 땅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그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 대한 것까지 포함한다. 나중에 실제 사례에서 말하겠지만 도선국사가 찾아 나섰던 땅들이 모두 병든 터였다는 점을 상기할 일이다. 괴로운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참된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땅도 좋은 것만 찾을 일이 아니다. 그저 어머니이기만 하면 된다. 특히 이제 늙고 병들어 자식에게는 줄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어머니의 품을 찾는 것이 풍수라는 뜻이다. 어른이 된 뒤에도 어머니를 떠올리면 고향 같은 포근함이 뭉게구름 일 듯 일어나는 것은 그 어머니가 무언가를 우리에게 주어서가 아니다. 그냥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들어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그냥 방치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우리 풍수에서는 그런 어머니를 고치고 달래기 위한 비보 책이란 것이 있다. 우리나라 어느 마을을 가나 만날 수 있는 조산造山 또는 조탑造塔이라 불리우는 돌무더기는 그런 비보책의 대표적인 예이다. 마치 병든 이에게 침이나 뜸을 시술하는 것과 같은 이치를 땅에 적용한 것이 자생풍수의 비보책이다.
땅에 대한 풍수의 의미는 마치 병든 사람에 대한 의사醫師의 역할과도 같다. 땅의 건강을 살피고, 건강이 좋지 않으면 그 이유를 찾고, 이유를 알았으면 치료를 한다. 일컬어 의지법醫地法, 구지법救地法이라 하는 것이다.1)
이 책에서 자생풍수라는 용어는 위에서 말한 도선풍수를 총칭하는 개념으로 썼다. 신라 말의 승려 도선국사가 정리를 했기 때문에 도선풍수라는 용어도 섞어 쓰기는 하겠지만, 우리의 자생풍수는 그의 독창적인 지리관인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자생풍수’라는 말을 앞으로 관용어로서 정착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이 말을 주로 쓰기로 하는 것이다.2)
2. 풍수사상 연구의 현대적 의의
東西古今을 불문하고 지리학자들은 항상 이중적인 난처한 입장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自然과 人文을 모두 다루어야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땅이 지니고 있는 합리성과 신비성을 다함께 유념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현대의 과학적 지리학은 매우 불투명하고 불명료한 해결책을 제시하여 주고 있을 뿐이다. 원래 땅(보다 엄밀하게는 삶터)의 의미를 해석한다는 것은 개인이 지니고 있는 땅의 主觀的 意味를 풀이하는 것인데, 그 개인은 지역 속에서 개조되고 변화에 대응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이라고 명명된 西歐 地理學은 主觀主義的인 부드러운 요소를 배제하고 있다. 완전한 객관성의 保持와 對象으로부터의 초연함이란 사실상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이 가능한 것으로 전제하고 지리학을 전개하였다.
이런 조류의 결정판이 아마도 論理實證主義的 地理學의 입장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물론 그것대로의 장점과 업적을 남긴 것이 사실이고, 또한 아직까지도 지리학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적 기반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지리학의 경향성이 결국 人間과 自然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철학적 정당성과 지역적 접근방법의 인간미를 빼앗아가 버렸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여기에 대한 반동으로 60년대 이후 西歐에서 제안된 地理思想이 휴머니스트 地理學이다. 그들은 당시 서구 사회를 풍미하던 實存主義, 構造主義, 現象學, 마르크시스트 휴머니즘, 歷史解釋學 등을 빌어 非人間化된 땅의 논리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뚜렷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징조는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이들 휴머니스트 지리학자들은 지식에 관하여 역사적인 입장과 시각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그들에게 주어진 주관적인 의미에서의 삶터를 해석하는 일이 명백히 개인적인 경험들에서 암시된 연습문제 정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단지 관찰자의 경험에 의하여 고수되는 편협한 개인적 시각으로부터 가능한 한 크게 초월해야 한다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의 지리학은 서구의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임과 함께 그들의 고민까지도 남김없이 수입하는 愚를 범하고 있다. 땅이 다르면 거기에 얹혀 사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이루어 놓은 공간구조도 달라야 할 것인데, 맹목적인 객관성의 추구와 일반적 법칙의 적용이라는 공간 논리는 그것을 인정할 아량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학에서의 지리학 연구는 이런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며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인 바, 풍수사상은 그 중의 매우 중요한 대안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우리나라만의 사정이기는 하지만 점차 일반적인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풍수사상은 극단적인 두 가지 평가가 병존한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통적 지리관의 가장 중요한 지혜 중의 하나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그것 때문에 나라가 망해버릴 미신이라는 평가 또한 엄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필자는 여기서 이러한 논쟁의 어느 쪽을 지지하며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그 논쟁 자체가 무의미해서가 아니라, 워낙이 중대한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연구 업적이 쌓인 다음에야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오늘의 우리 삶터는 일부 섬세한 사람들은 절망을 느낄 정도로 막바지에 달한 것이 분명하다. 風水는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기술로서 오늘에 되살려 질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만든 사람들의 지리적 사고구조, 다시 말해서 지리사상의 혁신적 대안으로서 오늘에 기능할 수 있는 것인지를 따져 봐야 할 것이다. 그 前단계 작업으로 풍수가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해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 되리라고 믿는다. 이 글의 목적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