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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경새재(하늘재) 애플(apple) 농장 원문보기 글쓴이: 천명용
문경시의 깊은 산골짜기에 서 있는 규모가 작고 아담한 3층 석탑이다. 이 절터의 유래나 규모는 알 수 없으며, 발견 당시 3층 몸돌이 근처에 새로 지은 제실의 주춧돌로 사용되고 있는 등 탑의 각 부분이 흩어져 있었다. 1960년 9월에 전부 수습하여 복원하였다.
탑은 1단의 기단 만을 두어 특이한 형태이며,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세우고 있다. 기단은 남북면에만 모서리에 기둥을 새겨두었고, 동서면에는 남북면의 사잇돌을 밀어 넣어 맞추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구성하였으며,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의 모양을 본떠 새겨두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 약간 치켜오르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머리장식으로는 네모난 노반(머리장식받침)만 남아있는데, 노반을 아래의 3층 지붕돌과 한 돌로 짠 것이 특이하다.
기단 맨윗돌 위의 괴임대가 생략되고, 기단이 1층으로 처리되는 등 시대적 특색을 보이는 석탑으로, 정치·사회적 혼란이 석탑의 양식에도 반영되었던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석탑을 복원하면서 1층 몸돌에서 네모난 형태의 사리를 담는 공간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두었을 사리장치는 일제시대에 도둑맞았다.
2.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종 목 보물 제13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봉암사
시 대 통일신라
지증대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로 봉암사 대웅전 왼쪽에 서 있다. 지증대사(824∼882)는 이 절을 창건한 승려로, 17세에 승려가 되어 헌강왕 7년(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이듬해인 882년에 입적하였다. 왕은 ‘지증’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적조’라 하도록 하였다.
이 부도는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를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다.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모양은 8각이다. 밑 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를 도드라지게 조각하였으며, 윗단을 괴는 테두리 부분을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 두툼하게 하였다. 윗단은 각 모서리 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조각을 세우고, 사이 사이에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는데 그 모습이 우아하다. 가릉빈가는 불교에서의 상상의 새로, 상반신은 사람 모습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이다. 가운데받침돌의 각 면에는 여러 형태의 조각을 새겨 넣었는데,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다. 윗받침돌은 윗면에 탑신을 괴기 위한 굄대를 두었으며, 모서리마다 작고 둥근 기둥 조각을 세워 입체감 있는 난간을 표현하였다.
탑신은 8각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고, 앞뒤 2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다. 그 양 옆으로는 불교의 법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나머지 두 면에는 보살의 모습을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 역시 8각이며, 아래에는 서까래가 두 겹으로 표현되어 겹처마집을 보고 있는 듯하다. 처마는 살짝 들려 있으며, 낙수면의 각 모서리선은 굵직하고 끝에 꽃장식이 알맞게 돌출되어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연꽃받침 위로 머리장식이 차례로 얹혀 있다. 지붕돌의 일부분이 부서져 있으나 각 부분의 꾸밈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품격이 느껴진다.
이 부도는 전체적인 비례가 잘 어우러져 있으며, 지붕돌이 조금 넓어 보이기는 하지만 안정감이 있다. 부도 옆에는 탑비가 나란히 서 있어서 지증 대사의 생애와 행적을 알 수 있으며, 비문의 기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헌강왕 9년(883)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3.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종 목 보물 제13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봉암사
시 대 통일신라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비로, 최치원의 4산비 중 하나이다.
지증대사(824∼882)는 17세에 부석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파를 창시하였다. 헌강왕 8년(882)에 입적하자, 왕은 ‘지증’이란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은 ‘적조’라 하였다.
거북모양의 비받침은 머리는 용의 형상이고 몸은 거북 모양이며, 등 위에는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갖추고 있다. 비몸 위로 올려진 머릿돌에는 연꽃무늬와 함께 서로 다투듯 얽혀 있는 8마리 용이 장식되어 생동감이 느껴진다.
비문에는 지증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데, 통일신라 후기의 문장가인 최치원이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인 승려 혜강이 글씨를 썼다. 글씨는 왕희지체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꾸밈이 없고 우아하다.
이 비는 통일신라 경애왕 원년(924)에 세웠으며, 조각과 비문의 글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4.봉암사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16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봉암사
시 대 통일신라
봉암사에 자리잡고 있는 3층 석탑이다.
탑은 건물의 댓돌에 해당하는 기단부, 탑의 중심이 되는 탑신부,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은 기단이 2단이나, 현재 땅 위로 드러나 있는 이 탑의 기단은 1단이다. 특이한 것은 지면과 맞닿아 있어야 할 탑의 받침돌 밑면에 또 하나의 받침이 있어 혹시 이것이 아래층 기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넓어 보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머리장식 모두가 완전히 남아 있어서 한국 석탑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유례라는 점이다. 탑의 머리장식은 인도의 탑에서 유래했으며 인도탑의 소형화가 우리나라 탑의 머리에 적용되었다. 탑의 가장 윗부분에 놓이며 여러 개의 구성요소가 차례로 올려져 가장 장식적으로 마련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9세기 통일신라 헌덕왕(재위 809∼826)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기단 구조가 특이하고, 탑신의 각 층 비례와 균형이 적절하여 아름답다.
5.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
종 목 보물 제17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봉암사
시 대 고려시대
봉암사에 있는 정진대사 긍양의 사리탑으로, 경내에서 벗어나 사찰 입구 북쪽 산중턱 가까이 자리하고 있어 경승지를 택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진대사(878∼956)는 통일신라 효공왕 원년(897)에 개초사에서 수도한 후, 효공왕 3년(899)에 당에 다녀왔다가 경애왕 원년(924)에 귀속하여, 백암사를 거쳐 봉암사에 와서 이 절을 크게 번영시켰다.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는 이 탑은 탑신을 받치는 기단 곳곳에 꽃무늬조각과 구름·용·연꽃무늬 등의 불교 세계를 상징하는 각종 장식을 화려하게 두었다. 탑신의 높직한 8각 몸돌은 면마다 모서리에 기둥조각이 있고, 앞쪽면에 자물쇠 모양의 조각이 있을 뿐, 다른 7면은 조각이 없다. 지붕돌은 지나치게 두꺼워 둔중한 느낌을 주며,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머리장식만이 남아 있다.
고려 광종 16년(965)에 세워진 탑으로, 양식상 절 안에 남아있는 지증대사 적조탑을 모방하고 있으나 기본구성과 비례감, 조각수법 등이 다소 떨어진다.
6.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종 목 보물 제17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봉암사
시 대 고려시대
봉암사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 전기의 사리탑으로, 정진대사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정진대사(878∼956)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로, 효공왕 4년(900) 당나라에 들어가 25년간 유학하고 경애왕 1년(924)에 돌아와 신라 경명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고려 태조 18년(935)에는 봉암사를 두번째로 크게 짓고, 불교의 중흥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 전기의 태조·혜종·정종을 선문에 들게 한 장본인으로,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왕은 ‘정진’이라는 시호와 ‘원오’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리돌을 올린 모습으로, 거북의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이 두드러지게 커 보인다. 꼭대기에는 불꽃무늬에 휩싸인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또렷하게 조각되어 우뚝 솟아있다.
고려 광종 16년(965)에 세워진 비로,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화되었으며 조각 기법이 퇴화하였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이몽유가 짓고, 명필 장단열이 글씨를 썼다.
7.대승사 목각탱부관계문서
종 목 보물 제575호
지 정 일 1973.12.31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8
시 대 조선시대
이것은 원래 부석사에 모셔져 있던 것을 대승사로 옮겨 놓은 것으로, 후불탱화를 나무로 깎아 돋을새김, 또는 뚫을새김으로 표현한 것이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서 거는 불화의 일종으로, 대개 법당 본존불의 뒤에 후불탱화로 걸린다. 조선 후기에는 이런 목각탱이 꽤 유행하였는데, 이것은 그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아미타후불탱화를 조각한 것으로 중앙에는 광배와 연꽃을 새긴 대좌를 새기고, 여기에 별도의 나무로 깎은 아미타불상을 안치하고 있다. 이 좌우로 5단에 걸쳐 협시상들을 안치하고 있다.
또한 이 목각탱 이외에도 대승사로 옮기기 전에 부석사와의 분쟁관계를 적은 문서들이 남아 있다. 그것은 「상주대승사외사사승도등장」, 「상주사불산대승사승도등장」, 「도내상주사불산대승사제승등장」, 「완의」등이다.
이것은 조선 후기 불교조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8.대승사 금동보살좌상
종 목 보물 제991호
지 정 일 1989.04.10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8 대승사
시 대 조선시대
진평왕 9년(587)에 세운 대승사에 모셔진 보살상으로 유리상자를 씌워 모셔 놓았다. 불상 속에서 나온 관음보살원문(觀音菩薩願文)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조선 중종 11년(1516) 불상에 새로 금을 칠하기 이전인 1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있으며, 양쪽 귀에 걸친 머리카락은 여러 가닥으로 흩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귀는 약간 짧고 목에는 3줄로 새겨진 삼도(三道)가 명확하게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팔에 걸쳐 내려 무릎을 덮고 있으며, 전신에 걸쳐 화려한 구슬 장식이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있고, 왼손은 팔꿈치와 수평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다.
가슴, 배, 무릎에 표현된 구슬 장식이 경상북도 영덕의 장육사 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호)과 흡사하지만 어깨와 등의 번잡한 장식이 옷속에 감추어진 점이 다르다. 특히 띠매듭 바로 위의 치마상단이 긴 상체의 가운데에 표현되어 마치 보살상을 둘로 나눈 것처럼 보이게 한 것 또한 이 불상만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9.봉암사 마애보살좌상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지 정 일 1979.01.25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산54-1
시 대 고려말 또는 조선초
경상북도 문경의 봉암사 근처에 있는 마애불이다.
마애불은 절벽의 거대한 바위면이나 돌에 선이나 돋을새김 기법 등으로 조각한 불상을 말한다. 이 불상은 머리 주위의 바위면을 얕게 파서 불상이 들어 앉을 자리를 만들어 머리 부분만 돌출시키고 몸체는 가는 선으로 새겼다.
신체에는 속옷에 매어진 띠매듭이 매우 뚜렷하고, 옷주름은 자연스럽게 밑으로 흘러내렸다. 왼손은 배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 대좌에 앉아 있는 자세로 무릎이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이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탄력과 힘이 감소되고 형식화되어 가는 고려말 조선초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10.갈평리 오층석탑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5호
지 정 일 1984.12.29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 564-3
시 대 통일신라
갈평출장소 내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에게 빼앗겼던 것을 이웃주민들이 다시 찾아 이 곳에 옮겨 세웠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을 1층으로 두고, 그 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4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 떠 새겼다. 탑신의 두꺼운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머리장식받침)과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시)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있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나, 5층을 이루면서도 안정감이 느껴진다. 세련된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탑으로 추정된다.
11.대승사 마애여래좌상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
지 정 일 1988.09.23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산38-1
시 대 고려시대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의 대승사 뒤쪽 큰 바위에 새긴 높이 6m, 폭 3.7m의 마애석불여래좌상이다. 이곳에 미륵암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불상을 새긴 바위가 약간 앞으로 숙여져 있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고 또한 갓바위가 설치되어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특이하게 마애불의 머리 위에 연꽃무늬를 한 뿔처럼 생긴 것이 2개 솟아 있다. 이러한 모양의 마애불은 불교양식 변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갸름한 얼굴에 눈은 거의 감고 있고, 입술은 두터우며 귀는 길다. 목에 3개의 주름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마애불은 2줄만 있어 일반적인 양식을 벗어나고 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고 왼손은 팔을 수평으로 하고 있다.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서 있으며 광배(光背)에는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고려시대에 대규모로 만들어졌던 마애불상계열이라 할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우람한 형태에 조형미나 세부의 조각수법이 고려 마애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12.봉암사 극락전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5호
지 정 일 1991.03.25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시 대 통일신라
봉암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5년(879)에 지증국사가 처음 지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건물들이 모두 불타서 이 극락전과 입구에 세워진 일주문만이 남아있다.
보통 극락전은 아미타불상을 모신 법당으로 사용되나, 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이 피난할 때 조상들을 모시고 명복을 비는 건물인 원당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 내부에는 ‘어필각’이라고 쓴 현판이 있다. 또한 일제시대에 지붕 보수가 있은 듯 지붕 끝에 있는 기와에 소화 16년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서까래 모양이나 건물의 짜여진 구조가 특이하며, 특히 법주사 팔상전과 더불어 현존하는 목조탑으로 알려져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13.김용사 괘불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3호
지 정 일 1998.04.13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산북면 김용리 410
시 대 조선시대
괘불은 옥외에서 법회를 행할 때에 밖에 내다 걸 수 있게 만든 걸개그림으로, 임진왜란 이후 많은 사찰이 복원되면서 괘불 제작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김용사 대웅전에 보존되어 있는 이 괘불은 중앙의 본존불을 화폭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표현하였고, 그 아래쪽에 2구의 보살과 사천왕을 배치하였다. 사천왕 뒤쪽으로는 다시 6구의 보살을 일렬로 배치하고 본존불의 머리 좌우로 5구씩의 십대제자를 그려 넣었으며, 보살상의 외곽에 인왕과 팔부중 등을 배치하였다. 외곽의 괘선 밖에는 범(梵:불교문자)자를 원 속에 써서 배열하고 있다.
화폭의 아래에는 그림의 제작동기와 그 시기를 적은 29줄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의하면 이 괘불은 숙종 29년(1703)에 상주 북면에 위치한 운달산 운봉사의 괘불로 처음 만들어졌다 한다. 이곳 김용사로 옮긴 과정은 알 수 없으며 다만 운달산과 김용사가 상주의 관할 아래 있었다는 사실만이『성주읍지』에 나타나 있다.
거대하면서도, 비교적 섬세하고 다양한 선을 사용하여 돋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14.문경 봉정리 약사여래좌상 및 관세음보살입상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8호
지 정 일 1999.03.11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산양면 봉정리 산56
시 대 통일신라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봉서사의 절터에 3층 석탑과 함께 서 있는 불상이다. 2구의 불상은 산의 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약사여래좌상은 큰 바위의 한면에 조각되어 있고, 관세음보살입상은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10m 정도 아래쪽에 위치한 작은 바위에 조각되어 있다. 관세음보살입상은 원래 약사여래좌상의 협시보살로 가까이 붙어 있었는데, 2차에 걸친 도난이 미수에 그쳐 현 위치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약사여래좌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 있는데, 왼손에 약병을 들고 있으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싼 형태이다. 관세음보살입상은 머리 위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에 올리고 오른손은 아래로 내리고 있다. 본존불인 약사여래좌상보다 크게 조각되었으며, 왼쪽 윗부분의 광배에 총탄에 의한 흔적이 있다. 약사여래좌상의 오른쪽에 다른 협시보살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의 행방은 알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들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형태·문양 등의 여러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15.김용사 명부전 복조지장삼존상 및 제상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85호
지 정 일 2006.06.29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시 대 조선시대
김용사 명부전에 봉안된 불상은 지장보살삼존상을 비롯하여 시왕상, 판관, 사자, 인왕상 등 총 21구의 목조상이다. 주존인 지장보살이 대좌 위에 앉아 있고 그 양옆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의 협시가 서 있으며 이 지장삼존상의 좌우에 시왕상이 배열되어 있다. 무독귀왕의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의하면 이 상들은 1714년(숙종40)에 조성된 것이 확실하며, 이들 목조상에 입혀진 채색은 18세기 당시의 것으로 물감흔적이 선명하게 잘 남아 있다. 이처럼 제작연대가 뚜렷하며 각 시왕상에 그 명칭이 적혀 있는 등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 판단된다.
16.환적당 지경탑
종 목 문화재자료 제133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산1-1
시 대 조선시대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둔다. 봉암사 뒤쪽 기슭에는 3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부도도 그 중 하나로, 조선시대 중기의 승려인 환적당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환적당(1603∼1690)은 ‘지경’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16세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고 팔공산 동화사에 들어가 성현대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21세에는 청량산에 들어가, 그 곳에서 31년간 곡식대신 솔잎·밤·대추 등을 먹으며 지내었다. 88세에 해인사의 백련암이라는 암자에서 생을 마치었다.
부도는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며,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 중에서 아래받침돌은 8각에 맞추어 연꽃을 하나씩 새기고 그 사이마다 잎을 새겨두었다. 가운데받침돌과 윗받침돌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 놓았다. 탑신의 몸돌 한 면에는 ‘환적당지경지탑(幻寂堂智鏡之塔:환적당 지경의 탑)’이라 새겨 그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지붕돌은 윗면에 여덟 모서리 선이 표현되어 있고, 처마의 여덟 귀퉁이는 위로 들려 있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룬다. 꼭대기에는 2단의 8각받침 위로 꽃봉오리 모양의 둥근 머리장식이 놓여있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세운 것으로, 전체적인 균형이 불안해 보인다.
17.함허당 득통탑
종 목 문화재자료 제134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산1-1
시 대 조선시대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둔다. 봉암사 뒤쪽 기슭에는 3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부도도 그 중 하나로, 조선시대 전기의 승려인 함허당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함허당(1376∼1433)의 호는 득통으로, 21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세종의 부름을 받아 4년동안 대차어찰에 머무르며 교화를 하였고, 봉암사를 새로이 보수하기도 하였다. 이 절에서『금강설의』를 지었으며, 세종 15년(1443)에 입적하였다.
부도는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로,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 하였는데,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기단에서 아래받침돌은 연꽃무늬를 둘러 새겼다. 탑신의 몸돌에는 ‘함허당득통지탑(함허당 득통의 탑) ’이라 새겨 그 주인공을 밝히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액자 모양의 윤곽을 두른 후 그 위아래에 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지붕돌 윗면에는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으며, 처마는 양끝이 위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일부 없어진 머리장식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조선시대 전기인 15세기 중엽에 세운 것으로, 당시의 8각 부도 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8.봉암사 석종형부도
종 목 문화재자료 제135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산1-1
시 대 조선시대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둔다. 봉암사 대웅전 앞에 놓여 있는 이 부도는 절의 기록에서 승려 지눌의 사리를 모신 곳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승려 보우의 사리를 모신 곳이라는 설도 있다.
부도는 땅 위로 드러난 사각 받침돌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두고, 큼지막한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탑신의 밑둘레에는 선으로 새긴 듯한 연꽃무늬를 두르고 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전한다.
19.문경 관음리 석불입상
종 목 문화재자료 제136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186
시 대 고려시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의 관음사터라고 전해지는 곳에 있는 높이 3.33m의 거대한 돌로 만든 약사여래상이다.
전설이 의하면 충청북도 중원군 상모면 미륵리에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아내와 남매를 거느리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박씨가 큰 병에 걸려 아들이 문경읍으로 약을 사러 갔으나 기다려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가 아들을 마중 나갔으나 아내마저 돌아오지 않게 되자 딸이 다시 마중을 나갔는데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와 아들, 딸이 모두 죽자 이를 가엽게 여긴 부처님이 박씨의 꿈에 나타나 병을 고쳐주었다. 그 뒤 박씨는 아내가 죽은 문막에 미륵불을 세워 평생 죽은 아내와 자식들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때 몽고족의 침입으로 인해 불상의 머리 부분과 몸체가 떨어져 있던 것을 마을 주민들이 다시 붙혀놓았다고 한다. 부분적으로 웅건한 기운이 깃들고 있으나 돌이 많이 닳고, 크게 손상되어 형체가 분명하지 못하다.
20.김용사 대웅전
종 목 문화재자료 제235호
지 정 일 1991.03.25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산북면 김용리 410
시 대 조선시대
김용사는 운달조사가 신라 진평왕 10년(588)에 세웠다고 전하나, 사적기에 따르면 세운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다. 조선 인조 21년(1643)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인조 27년(1649) 새로 복원하여 현재까지 이어진다.
대웅전은 17세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대웅전 건축 양식상 특이한 것은 건물의 기단 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기둥을 세워 높이가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기둥 모두 대웅전의 중심쪽으로 약간씩 기울어져 건물 전체가 안정감을 주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21.대승사 윤필암 후불탱화
종 목 문화재자료 제348호
지 정 일 1998.04.13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17
시 대 조선시대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 걸어두는 불화의 한 유형이며, 보통 사찰 전각의 불상 뒤에 모셔두는 후불화가 대부분이다.
대승사 윤필암에 보존되어 있는 이 탱화는 가로 274㎝, 세로 280㎝의 크기로, 원래는 선실에 두었다가 도난을 우려하여 요사채인 큰방으로 옮겨 놓았다.
아미타여래의 후불탱화로 짐작되는데, 화폭의 중앙에는 아미타불을 배치하고, 좌우에는 관음과 지장, 미륵 등 8대 보살을 두었으며, 윗부분의 좌우에 5구씩의 10대 제자를 그려놓았다. 네 모퉁이에는 동방지국천·남방증장천·서방광일천·북방다문천 등의 4천왕을 배치해 놓았다.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그림의 색상이나 필치에도 손상이 없는 우수한 작품이다.
22.관음리 석조반가사유상
종 목 문화재자료 제350호
지 정 일 1998.04.13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산 60
시 대 통일신라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계립령 아래 밭 언저리에 있는 반가사유상이다. 계립령 아래 관음원이 있었다는 기록과 불상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조각들, 동쪽 200m 쯤 떨어진 곳에 있는 5층석탑 등으로 보아 이 주변을 관음사 옛 절터로 추정하지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작은 바위면에 양각되어 있는 사유상은 머리에 삼면화관을 썼으며, 얼굴은 원만하며 미소가 보인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구부러져 턱을 받치고 있으며 왼손으로는 왼쪽 무릎 위에 올린 오른발을 잡고 있다. 몸에 비해 오른팔이 너무 짧고 무릎 이하는 불분명하며, 왼쪽다리는 생략되어 있다.
사유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선으로 구분되어 있을 뿐이다. 광배는 일부 떨어져 나간 것 같으며, 5개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지만 세부묘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풍화가 심해 세부 표현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조각수법도 뒤떨어진다.
(유교문화재)
1.문경향교 대성전
종 목 문화재자료 제132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교촌리 322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문경향교는 조선 태조 1년(1392) 처음 지은 것으로 보이고,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후 다시 세운 것이다.
뒤로 높아지는 지형에 대지를 3단으로 마련하고 앞쪽에는 교육 공간을, 뒤쪽에는 제사 공간을 배치하였다. 정문격인 외삼문을 통과하여 교육 장소인 명륜당을 지나면 앞면 3칸·옆면 2칸의 대성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소박한데 전체적으로 장식적인 요소가 거의 없는 간결한 모습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2.소양서원
종 목 문화재자료 제505호
지 정 일 2006.06.15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전곡리
시 대 조선시대
소양서원은 가은읍 전곡리 마을 중간쯤 전망이 아주 좋은 곳에 뒷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위치하며, 강학과 제향공간이 각기 별도의 곽을 이루며 앞뒤로 배치하고 있다.
고종 8년(1987) 서원 훼철 당시 사당만 철거되고 강당과 동재는 존치되었으며 강당은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강당의 천장은 양측 청방 간 상부의 종보와 종보사이에 종보폭으로 길게 설치하였고 반자꾸밈은 반자대를 도리방향으로 길게 걸치고 그 사이에 반자판을 끼워 독특한 천장 구성을 이루고 있는 등 건축적 가치를 살필 수 있다.
또한 16세기 가은 인근 지역에서 출생하여 각각 예조좌랑, 형조좌랑 등 중앙관직에 나아가 활동하다가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나암 정언신, 인백당 김낙춘, 고산 남영, 가은 심대부 및 가은 이심 5인을 배향하고 있어 역사적으로도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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