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 슈피란델리Zoltan Spirandelli의 데뷔작『신과 함께 가라, Vaya Con Dios<2002>』는 그닥 짜임새 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런데 거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팔베개를 한 채 하품을 참아가며 무덤덤하게 보다가도, 이 장면에 이르면 여지없이 몸은 곧추 세워지고 보일러 파이프에 온수가 관류하듯 나의 누선淚線은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하니 말이다.
대체 그 까닭이 뭘까? 지금부터 주절대는 내용은 그 이유를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이다. 동시에, 이 글 곳곳에 투영된 자의식은 스스로에게 건네는 내밀한 독백이기도 하다.
아르보, 타실로, 벤노… 이 세 명은 독일 남부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에 위치한 ‘칸토리안’ 교단의 수도사들. ‘칸토리안’은 cantus, cantor 등 라틴어에서 유래된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찬송讚頌’ 그 자체를 신에 대한 최고의 경배로 여기는 개신교의 한 종파이다.
위쪽 사진의 왼쪽부터 아르보, 수도원장, 타실로, 벤노. 칸토리안 수도사들에게는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종교적 행위의 시작이자 끝이다. 아무튼 아침에 깨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존나게 불러댄다. |
종교개혁의 횃불이 유럽 전역에서 피어오르던 때, 독일에서는 ‘칸토라이Kantorei’라고 불리는 성가대가 조직되어 노래로써 프로테스탄티즘 운동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30년 전쟁’이 끝난 후, 그러니까 17세기 말쯤에 칸토리안파는 교황으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아 파문을 당한 후 교세가 급격히 약화된다.
현재는 이탈리아 한 곳과 슈바르츠발트 이렇게 두 군데의 수도원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나마 독일 수도원은 재정 지원이 끊긴데다 원장마저 노환으로 세상을 뜨자 폐쇄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영화는 이제 달랑 하나 남은 이탈리아 수도원으로 향하는 수도사들의 발걸음을 뒤쫓아간다. 로드무비의 뻔하디뻔한 공식대로 세 사람의 자잘한 사연과 ‘물을 벗어난 물고기Fish out of Water’ 식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버무려 놓는다.
비록 양념이 고루 섞이지 않아 맛이 균질하진 않지만, 그래도 콧등에 땀방울이 맺힐 만큼 정성을 다하려는 조리 솜씨가 곰살궂고 갸륵하다. 풍성하진 않아도 달달한 유머와 짭조름한 눈물 몇 방울로 차려진 밥상은 제법 오밀조밀한 맛이 감돈다고 할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타실로는 고향 집을 들르더니 도무지 노모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덥수룩한 수염에 산적 두목 같은 인상이지만 효심만큼은 지극 정성이다. 숫총각 꽃미남 수도사 아르보는 여정 중에 만난 기자 키아라와 사랑에 빠진다. 특히… 아르보로서는 홀랑 벗은 여체를 보는 것도 난생 처음이거니와 결국 속살까지 섞고 말았으니, 환장할 노릇이었을 게다. 아랫도리는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고, 덜컥 고기 맛을 알아버린 땡추처럼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첫사랑의 열정에 휩싸인 소년 수도승의 기세는 앞뒤 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마냥 분기탱천하는데….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일화는 내겐 별로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양복 차림의 늙수그레한 수도사 벤노 이야기를 해볼까!
그는 우연히 클라우디우스를 만나게 된다. 이 두 사람은 젊은 시절 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 사이였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세월만큼이나 둘 사이의 간극은 벌어져 있었다. 신학교를 중퇴하고 자신의 믿음에 따라 칸토리안을 선택했던 벤노는 이제 땡전 한 푼 없이 노숙자들 속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초라한 신세. 반면에 클라우디우스는 벤츠를 굴리고 다니는, 제도권 가톨릭에서도 잘 나간다는 예수회 신학교의 교장 신분이다.
박식하기로 소문난 벤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노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식을 줄 몰랐다. 클라우디우스가 운영하는 대학 도서관을 둘러보던 중 서가에 빽빽이 꽂힌 동서고금의 문헌과 희귀 악보집은 다시금 벤노의 학구열과 출세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학창 시절 라이벌이었을 법한 클라우디우스는 그러한 점을 이용한다. 득의만면의 미소를 머금고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자네가 원한다면, 연구를 위한 편의 제공은 물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네.”
그러나 그것은 여태까지 벤노가 근근히 지탱해왔던 종교적 신심의 틀을 근본부터 허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럼 위에서 보았던 장면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기로 하자.
그동안 숱하게 연습했던 찬송가를 부르면 당나귀 뒷다리처럼 요지부동인 벤노의 마음이 과연 돌아설 것인가! 아르보와 타실로는 클라우디우스가 주관하는 가톨릭 예배에 참석해 성가 <주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자(Wer nur den lieben Gott lasst walten)>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르보의 하이 소프라노와 타실로의 중후한 테너… 천상에서 들려오는 듯한 화성和聲에 일반 미사객들의 목소리는 차츰 잦아들고, 마침내 성당 안에는 두 사람의 노랫소리로만 가득 울려 퍼진다.
이어 카메라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당혹감과 번민으로 뒤엉킨 벤노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아주 느릿느릿 미세하게 줌인(zoom in, 혹은 tracking in)해 들어가면(* 인물의 내면을 탐구하는 전형적인 카메라 움직임이다!), 그 표정에는 온갖 갈등의 격랑이 휘몰아치고 있다.
짧은 순간이나마 벤노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까?
조금만… 더 안면몰수하면 된다. 그래야 여기 눌러앉을 수 있을 테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비루한 칸토리안으로 또 다시 궁상이나 떨어야 하는가?
청빈한 것도 좋지만, 고생은 할 만큼 했다구. 이제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
이곳 서고의 풍부한 자료를 생각해봐, 맘껏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잖아!
이참에 나도 잘난 친구 덕 좀 보자는데, 누가 뭐라고 그래?
그런데… 지금껏 걸어왔던 노력은 이제 한낱 헛지랄이 되고 마는 건가?
타실로는 몰라도 아르보는 내가 업어 키운 녀석인데… 이제 남남이 되는 건가?
좀만 더 참아봐, 까짓거 눈 한번 질끈 감고 모른 체 해버리라고!
………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벤노는 어려운 길을 선택한다. 자기 앞에 놓인 안온한 삶, 보장된 미래를 박차고 우직하다 못해 ‘바보 같은 결단’을 내리고 만다. 달콤하긴 하지만 한낱 허울에 불과할 수도 있는 미망을 벗어 던져버린다. 테두리쳐진 온실의 안락을 거부하고, 스스로에게 부여한 소명이 아우성치는 광야로 내달음질친다.
이러쿵저러쿵 말도 필요 없었다.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선 벤노는 타실로와 아르보에게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베이스로 화답한다.
2층 발코니에서 이들 세 명을 지그시 바라보던 키아라는 눈물을 떨구며 자리를 뜬다.
그녀의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진정한 아름다움은 떨림을 동반한다더니, 세 사람의 멋들어진 화음에 도취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르보를 향한 연정이 키아라의 진짜 본심이든, 얄팍한 호기심이었든, 세속적인 관계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이제 희미하게나마 자신과 이어진 속세의 끈을 잘라내고 연인 아르보를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뜻의 ‘작별 인사’가 아니었을까?
목소리만큼이나 결이 고운 아르보의 심성은 육화肉化된 사랑보다 어떤 초월적 존재가 보듬어 주는 것이 낫겠다는….
아르보의 진정한 동반자는 ‘인간’이 아니라 바로 ‘신’이어야 한다는….
하긴… 에스파냐어 ‘Adios’는 ‘Vaya Con Dios(신과 함께 가라)’의 줄임말 아니던가!
영어의 ‘God be with you’가 줄어 ‘Good Bye’가 되었듯이…
살다 보면, 이따금 기로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어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든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의 행보에 시시콜콜한 윤리적ㆍ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어떤 정치사상적 명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외골수마냥 ‘마이 웨이’를 부르며 서슴없이 뚜벅뚜벅 발을 내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경계인(!)’임을 자처하며 이쪽저쪽을 기웃거릴 수도 있을 게다.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거리는 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자, 그들 내면의 거울에 비쳐진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원작을 장-자크 아노Jean-Jacques Annaud가 영화화한『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1986>』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수도원에서 발생한 의문의 연쇄 살인사건! 그 용의자로 지목된 돌치노Dolcino파 수도승들에 대한 종교재판이 한창 진행 중이다. 재판을 주재하고 있는 사람은 교황청에서 파견된 이단심문관 ‘베르나르도’. 원래 종교재판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피의자를 잡아 놓고 다짜고짜 “네가 네 죄를 알렷다!” 식의 호통과, 듣고자 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무턱대고 주리를 틀고 단근질을 해대는 형국이니 멀쩡한 보통 사람이라도 결국에는 ‘이단’이나 ‘마녀’로 둔갑될 수밖에 없다.
법정에서 윌리엄은 수도원장과 함께 이단심문관이 내린 판결의 정당성을 심사하는 보좌 신부로 선정된다. 하지만 이 또한 ‘짜고 치는 고스톱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교황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단심문관의 논고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 역시 이단의 혐의가 덧씌어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윌리엄과 베르나르도 사이에는 악연이 있었으니… 한때 윌리엄도 이단심문관이었다. 하지만 윌리엄은 성서의 교리에 어긋난 희랍어 서적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한 성직자를 변호하던 사건에서 베르나르도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에 회부된 적이 있었다. 이때 갖가지 고문을 동반한 취조에 결국 굴복하여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던 기억을 씻겨지지 않을 상흔傷痕으로 지닌 채 살고 있다.
프란체스코파의 대표선수인 윌리엄과 베네딕트파의 핵심관계자 베르나르도, 혹은 지지리 궁상의 지식인과 당대의 세도가, 또는 변방의 비주류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메인스트림. 어쩌면, … 이 두 사람은 벤노와 클라우디우스의 전생(前生)의 모습 아니었을까. |
꼼짝없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될 위기에 처한 돌치노파의 수도사들은, 원래 스스로 ‘부자들의 적’임을 자처하며 중세의 한계 내에서나마 급진적인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돌치노파의 주의ㆍ주장이 공공연히 거론되는 것 자체가 중세사회에 크나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을 터.
극 중에서는 이들이 사술을 일삼고, 떠돌이 여자와 간음한 것이 발각되어 체포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베네딕트Benedict파를 중심으로 하는 기득권 세력들은 윌리엄이 좌장으로 있는 프란체스코Francesco파보다는 돌치노파를 더 불온하게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 이 재판은 돌치노파를 첫 번째 제거 대상으로 삼아 종교적 숙청을 감행하려는 음모라고 볼 수 있다.
살인사건을 며칠 동안 조사해 온 윌리엄은, 그들이 진범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 섣불리 나섰을 때 돌아올 결과가 두렵기만 하다. 십중팔구 교황청으로 소환되어 다시 한 번 혹독한 사상검증의 족쇄에 옭아매이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다고 무지막지한 고문에 의해 살인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덮이는 현재의 상황을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다. 자신의 비겁함을 질타하는 내면의 또 다른 목소리가 너무나 크게 공명共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엇!… 그런데 뜻밖에도 윌리엄은 이들의 유죄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죄악시하는 것은, 복음서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여 빈민에 대한 애정과 부자를 향한 증오를 구별하지 못한 돌치노파의 종교적 관점에 관한 비판일 뿐, 수도원을 피로 물들인 연쇄살인에 대해서는 무죄를 주장한다. 그는 추기경, 수도원장, 이단심문관 등 썩어빠진 당대의 주류 세력들에 대한 자신의 응축된 분노를 마치 포효하듯 대갈일성大喝一聲으로 토해낸다.
심문관 베르나르도의 반응은 어땠을까? 예상했던 대로 그는 윌리엄이 또 다시 이단을 옹호하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한다며, 아비뇽에 있는 법정에 출두할 것을 명령한다.
“에구 쯧쯧… 웬만하면 그냥 모른 척 묵과해도 그만인 것을….”
“안 그래도 그놈의 고지식함 때문에 답답해 죽을 뻔했는데, 확실한 왕따가 되려고 작정했나 보구만….”
동료 수도사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두 가지 길의 분기점에 서 있었던 윌리엄!
그는 왜 시원하게 뚫린 포장도로를 마다하고, 자갈투성이의 험난한 비탈길을 택하고 말았을까? 뻔히 손해 보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러한 선택이 결국 자신에게 겨누어진 회한의 화살로 되돌아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윌리엄 수도사의 얼굴에는 고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제 진실과 위선, 실존적 번민과 허위의식, 소신을 지키기 위한 자기 성찰과 얍삽하게 발호하는 기회주의의 갈림길에 선 자의 고뇌는 장발장Jean Valjean의 표정과 오버랩된다.
발장은 가석방 상태에서 잠적해 버렸다.
몇 년 후, 그는 마들렌으로 이름을 바꾸고 ‘비구 시市’의 시장이 된다. 어떻게 시장이 될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미리엘 주교에게 감화된 이후 갖은 고생을 다해가며 착실히 부와 명성을 쌓았다고 짐작할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 시청에서 재판이 열린다. 그 중에는 장발장으로 오인받아 그의 죄를 고스란히 떠안고 감옥으로 압송될 처지에 놓인 ‘잡범’도 한 명 끼어 있었다.
장발장 역시 윌리엄 수도사가 직면했던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다. 양심이 지시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자니 자신의 처지는 한순간에 도망자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요, 모른 척 하자니 자기 대신 죄 없는 엉뚱한 사람에게 어쩌면 평생 동안 지속될지도 모를 차꼬와 수갑을 채우는 일이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는,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레미제라블》을 미국 배우들이 나와 영어로 주고받는 대화를 듣는 것처럼 기묘한 체험이 있을까. 그건 영어로 수다를 떠는 모차르트(『아마데우스, Amadeus<1985>』)를 보는 것만큼이나 고역이다. 마치 일본어로 듣는 판소리 ‘춘향전’ 같다고 해야 할까. 리암 니슨(Liam Neeson)이 맡은 영어 버전의 장발장보다 아무래도 한때 프랑스 누아르 영화를 대표하던 배우 리노 벤추라(Lino Ventura, 이탈리아 출신이긴 하지만 거의 프랑스에서 활동했다)의 1982년 판 장발장이 훨씬 더 낫다. |
낯짝이 두꺼운 사람이었다면 이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태연스레 미소 지으며 수고했다고 자벨Javert 경감의 어깨라도 다독여줬으면 그냥 무사 통과였을 걸….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장까지 소유한 사장이니 적어도 삼대는 떵떵거리며 살수도 있었을 텐데….
망설임의 긴 터널을 통과한 끝에, 마침내 장발장도 바보 같은 결단을 내리고야 만다. 앞으로 자신을 굴곡진 삶으로 몰아가게 될 그 순간의 선택으로. 시장 마들렌에서 다시 ‘죄수 번호 24601’로….
기 또 한 사내가 있다. 그의 이름은 ‘김선명’.
앞서 살펴본 벤노와 윌리엄, 장발장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우직한 인물이다. 원칙을 고수한다기보다 차라리 ‘똥고집’이라 일컬어 마땅한 노인네다. 거의 10년 만에 새 영화를 선보인 홍기선 감독은『선택<2003>』에서 김선명의 일대기를 그려낸다.
김선명이 누구냐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무려 43년하고도 10개월 동안 가두어놓았던 사람이다.
43년이라!… 쓰바~ 강산이 네 번 하고도 반 가까이 바뀔 장구한 세월이다. 예를 들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랑잠농원’의 회원이 40대 초반이라면, 태어나자마자 감옥에 들어간 뒤부터 현재 이 순간까지 주구장창 철창 안에 갇혀 있는 꼴이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이번 기회에 여러 작품 속에 등장했던 내로라하는 장기수들을 한번 한자리에 집합시켜 보자. 이들과 비교를 해봐야 그 기나긴 세월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홍기선 감독의『선택<2003>』[위↑]이 전향서 작성을 거부하는 옥중투쟁을 그리고 있다면,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송환<2003>』[아래↓]는 장기수들이 석방된 이후 북으로 송환될 때까지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아래 사진은 실제의 김선명 선생과 병상에서 죽기 직전에 해후한 그의 노모. |
흔히 무기수의 대명사로 불리는 ‘빠삐용’은 실존 인물이었던 앙리 샤리에르Henri Charrire의 별명이었다. 그는 1931년 살인죄로 수감됐다가 이른바 악마의 섬에서 탈옥에 성공, 베네수엘라에 정착한 때가 1944년이었느니 수형 기간은 고작 13년에 불과할 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짧지 않은가?《몽테크리스토 백작(Le Monte Cristo)》, 핏덩이었을 때《암굴왕》이라는 제목으로 읽었던 알렉산드르 뒤마Alexandre Dumas의 소설. 여기서 에드몬 단테스Edmond Dantes는 14년 만에 탈출하여 복수의 칼을 휘두를 수 있었다. 14년이라… 김선명 선생과 비교하면 그저 ‘새발의 피’일 수밖에 없다. 또한『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1994>』에서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슨)이 자유를 꿈꾸며 조각용 망치로 땅굴을 팠던 기간은 대략 20년 남짓 걸렸다. 세계 최장기수였다는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를 볼까. 그래봤자 김선명이 복역했던 기간의 60% 정도인 27년 만에 영어囹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과잉된 비장함이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김선명이 반세기를 지탱할 수 있었던 힘의 일단이나마 보여주고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한갓 종이쪼가리나 다름없는 ‘전향서’ 작성을, 김선명 일행은 왜 그렇게 극구 거부했던 것일까? 하루가 멀다 하고 거듭되는 온갖 회유 공작과 무자비한 폭력의 횡일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말이다.
그 잘난 양심과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 나라면 그렇게 버텨낼 수 있었을까?
벤노는 자기 믿음을 지켜냈기에 행복했을까?
진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윌리엄은 뿌듯했을까?
그렇게 북녘으로 돌아간 김선명 일행은 결국 안식과 평화를 얻었을까?
Scheisse! Auswahl essen Seele auf(씨~바~! 선택은 영혼을 잠식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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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금 이순간 모든 일들이 몇시간전 몇일전 몇년전에 자신이 고심하여 선택한 길이라는것을 잊기때문에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한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선택의 순간 자신에게 절실했던것을 잊었다는것이죠. 어제 아침 잠시 텔레비젼에 나온 박칼린이 한 이야기다.공룡이랑 둘이 보다가...내가 선택한 당신과 행복하게 잘 살아야겠다고하면서 뽀뽀...^^ 화들짝 놀란 공룡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ㅋㅋ 본문은 다시 돌아와보지요.순전히 제목만 보고 단 답글입니다.
내용도 보고 단 답글, 궁금하오.ㅋㅋ
버들치를 오랜 시간 보아왔지만... 참으로 양처요. 현모~까지는 모르겠고...ㅎㅎ
하루에 줄잡아 스무 번씩… 아니, 오며가며
마주칠 때마다 낭군님에게 뽀뽀해주시구려. ♥~^ε^
크아~ 그저 감탄만....
고개도 끄덕끄덕~
그치만, 가끔 얄밉기도....이유는? 다음에...
질시(疾視, ‘嫉視’가 아님!)는 하도 많이 받아서리,
이제 웬만해서는 끄떡도 안 한다오. ~(˘ε˘)~♪
저또한 늘 기로에 서서 양쪽을 기웃거리는 인간인지라....어떤순간 어떤 선택을 할지는...가능하다면 인간적 자존심을 지키는 쪽으로다가 기울기를 바라기는 하지요.ㅎㅎ 활자로 된 책보다 훨 재미있고 감동적인 호면당 다운 글입니다요.
주저와 결기, 좌고우면과 무데뽀, 실리와 명분,
동요(動搖)와 신심(信心), ……
양 극단과 그 사이에 놓인 무수한 스펙트럼이
모호하게 공존하는 게 인간의 마음일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