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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 공부하는 인문학 여행을 위해서 강원도 홍천을 찾았다. 홍천은 18개 시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국에서 면적이 가장 넓고, 서울의 세 배에 해당하며 洪川이라는 이름은 넓은 강이라는 뜻이다. 그 뜻처럼 홍천강은 서석면 생곡리에서 발원하여 동서로 흐르는 143km나 되는 강으로 수심이 낮고 수온이 따뜻하며 다양한 물고기가 서식하는 강으로 타지역 물이 전혀 흘러들어오지 않고 홍천지역의 물만이 흐르다가 청평호로 흘러들어 결국은 한강으로 간다는 것이다. 근처 횡성의 옛 이름이 횡천이었는데 홍성과 헷갈린다고 횡성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홍천강 정경
한참 만에 인문학여행을 하였다. 보통은 여행이라고 하면 여기저기 좋다는 곳을 두루 둘러보는 관광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여행도 좋지만 공부하는 여행을 더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인문학 여행은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배움은 끝도 없고 장소도 가릴 것이 없다. 언제 어디서나 배워야 하고 누구한테든지 가능하다면 배우는 것이 나를 살찌우며 노년에 삶의 보람을 찾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항상 배우는 자세로 공부를 하고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지며 배운 것을 다시 읽어 봄으로 나의 뇌 활동도 활성화 되고 정신건강에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4월은 1년 중 그 어느 달보다도 아름다운 계절이다. 특히 신록의 아름다움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다들 좋아하지 않은 수 없는 계절을 대표하는 아름다움이라고 하겠다. 누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최승희 아버지 최준현의 서당이 있던 자리
이런 아름답고 멋진 계절에 인문학 여행이란 나에게는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명약과도 같은 것이다. 이른 새벽에 잠을 깨어 서둘러 준비를 하고 깔깔한 눈과 입을 양치와 세수로 달래고 밥 몇 숱 가락을 먹고는 발걸음도 가볍게 길을 나섰다. 가는 길에 같은 버스를 타는 이 선생님을 만나서 같이 정해진 장소에 도착하니 예정된 시간보다 30분 정도가 남은 이른 시간이다. 봄이라고 하지만 아침 날씨는 쌀쌀하여 추위를 느낄 정도라 옷을 여미며 옛 어른들이 하던 속담이 생각난다. “보리 누럴 때 반늙은이 얼어 죽는다“라고 했던 속담이 그냥 예사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옛 사람들의 지혜를 알 수 있다. 버스로 가니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제법 많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들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을 하며 차에 오르니 자주 만나던 분들이 눈에 띄어서 반갑게 악수를 하면서 제일 뒷좌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7시30분 정확한 시간에 차는 출발을 하였다. 그런데 자리가 많이 비어있다. 인원을 대충 헤아려보니 20여 명밖에 안 된다. 이래가지고는 주관하는 입장에서는 곤란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은 염려가 되었다. 이른 아침이라서 차는 대체로 소통이 잘 되었다. 한 시간 정도 가서 홍천휴게소에 잠시 쉬었는데 휴게소치고는 참 희한한 곳이다. 휴게소에 아무 것도 없다. 가게도, 화장실도 없어서 계단으로 내려와서 도로 밑으로 뚫린 길을 따라 으슥하고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반대 편 휴게소로 가서 볼일을 보고 다시 돌아왔다. 휴게소 한 쪽에서 단체가 맨바닥에 앉아서 준비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벗어나서 홍인희 교수가 승차를 하여 동행하였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최승희 생가다.
최승희 생가 터. 강원도 홍천군 남면 제곡리에서 1911년에 태어나서 1969년에 북한에서 돌아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최준현 씨로 어머니 밀양 박씨 박성녀 사이의 2남 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최참봉으로 불리던 아버지는 호방하고 한시를 즐기며 술과 춤을 좋아하는 풍류객으로 자식 교육에 상당히 개방적이었다고 한다. 일제하의 토지조사 사업에 따라 전답을 잃고 가세가 기울자 포목상, 약방운영, 서당훈장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최승희가 5살쯤에 서울로 가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가기 전까지 고향마을에 살면서 아버지가 서당 훈장을 하던 시절 그 서당이 있었다는 곳으로 가니 허름한 집 한 채가 서있을 뿐이다. 서당 터를 보고 있는 중에 고라니 한 마리가 뛰어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산골 마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근처에 최승희 생가가 있었던 곳이라는 팻말이 하나 서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팻말도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고 낡은 것이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고 초라하였다. 많은 아쉬움이 생기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200m 거리에 어머니를 따라 우물터에 갔다가 동네 아주머니들이 보는 앞에서 작은 바위에 올라가서 춤을 추었다고 하는데 그 장소는 지금도 초라하게 산자락에 덩그렇게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고, 우물과 돌 주변에 쇠로 된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 때 최승희가 추었던 춤이 5살짜리 자신이 창작한 물동이 춤이라고 한다. 엄마가 물동이를 이고 가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추는 창작춤으로 특히 훗날 유럽에서 공연할 때 추어서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고 하니 역시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승희가 5살에 물동이 춤을 추었다는 바위
그는 서울로 가서 15살에 오빠 최승일을 따라서 문우인 김영랑과 만나는 자리에 함께 갔다가 김영랑이 최승희에게 반해서 서로 연정을 품고 몇 번을 만났지만 상처를 한 21살의 김영랑과 15살 어린 최승희 결혼은 양가의 반대로 무산되고 결국 크게 실망한 김영랑은 전남 강진, 자신의 집 뒤 뜰에 있는 동백나무에 목을 매 자살을 하려던 순간에 발각이 되어 살아났다고 한다. 최승희는 15살에 영친왕의 어머니 엄귀비가 세운 숙명학교를 두 차례나 월반을 하여 전교 2등으로 졸업을 하였다고 한다. 키가 169cm에 늘씬한 몸매와 뛰어난 미인으로 춤을 잘 추어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가정이 어려워서 학비를 제대로 내지도 못하는 딱한 상황에 처하자 학교 측의 배려로 무사히 다닐 수가 있었고, 일본의 현대무용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이시이 바쿠’라는 사람이 최승희의 공연을 보고 그를 일본으로 데려가서 일본 유학을 하게 되었으며 이름을 이긴다는 뜻의 ‘승자‘로 개명을 하고 일본 궁전 참배시에는 강요에 의해서 ’내 조국은 일본‘이라고 하며 일본군 위문 공연단에 차출되기도 하여 만주와 중국일대를 돌아다니던 중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친일파로 몰리게 되었고,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1등을 하하여 일장기를 달고 시상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최승희는 시대적 상황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와 친했던 손기정이 일장기를 단 나도 체포해야 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18살에 귀국하여 개인 무용소를 차리고 1934년 일본 동경에서 무용발표회를 하였을 때는 ’설국‘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와바다 야스나리로부터 일본 최고의 무용수라는 격찬을 받았다고 하며, 프랑스 파리 공연에서는 장콕도. 로맹롤랑 등도 관람을 하였고, 특히 피카소는 춤추는 모습을 스케치를 해서 주었는데 지금은 국내의 누군가가 소장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뉴욕 공연에서는 로버트 테일러가 헐리우드 진출을 제의하며 연정이 담긴 편지를 전달하였으며 역시 국내의 모 인사가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천재 춤꾼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던 중 20살에 와세다대 출신의 안막(본명은 안필승)과 결혼을 하였는데 안막은 골수 사회주의자로 플로레타리아 예술동맹(카프) 활동을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최승희까지 요시찰 대상이 되어 국내 생활이 여의치 않았으며, 국내에서는 친일파로 낙인이 찍히고 또 공산주의자와 결혼을 하여 결국은 남편을 따라 북한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러시아를 비롯하여 중국에서 공연을 하여 많은 호평을 받았으나 안막이 반당 종파분자로 몰려서 제거 되자 함께 몰락을 하였다고 한다. 후에 그는 집단농장에서 노동에 시달리기도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지하철 공사장에서 강제노역을 하다가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북한 측 발표로는 1969년 향년 58세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또한 최승희는 경희대 무용과 김백봉 교수와 동서지간으로 나이는 얼마 차이가 나지 않지만 언제나 형님이 아니라 선생님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만큼 최승희의 춤의 경지를 알게 하는 호칭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은 1988년 북한 작가들에 대한 해금 조치로 최승희도 해금이 되었지만 그를 기리며 복원하려는 일은 아무도 하지 않는 가운데 초야에 묻혀서 잊혀 져 가고 있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참으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어느 점쟁이가 최승희를 보고 북으로 가면 안 된다고 했다는데 그 때 그 말을 들었으면 세계적인 춤꾼으로 이름을 날렸을 것이며 헐리우드로 진출하였다면 역시 유명한 인물로 살았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던 풍습 때문에 그는 조혼을 하였고 시대적 상황으로 친일로 몰려서 그는 피할 수 없는 길을 따라 가다가 자멸하고 만 참으로 아까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괄암과 산성이 있었다는 산의 모습
이괄은 불운한 시대의 희생양이 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이 본관은 고성이고 자는 백규로 병조판서를 지낸 육의 후손이라고 한다. 13살에 승지가 되었고 무관이었지만 글도 많이 읽었다고 한다. 원래는 철성 이씨였으나 난 이후에 보신책으로 본관을 고성으로 바꾸었는데 철성은 고성의 옛 지명으로 같은 집안이라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당시 문중에서는 살아서는 고성이씨, 죽어서는 철성이씨라는 말이 나돌았다고 한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를 하여 형조좌랑과 태안군수를 지냈다. 1622년(광해군 14)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임명이 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신경유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여 1623년 3월의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반정의 주도 세력인 거의대장 김류의 우유부단한 처사에 크게 반발하여 불화가 생겨 1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2등 공신을 추서하여 한성부 판윤이 되어, 본인은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1623년(인조1)에 포도대장을 지낸 뒤에 평안도 부원에 임명되었고, 평안도 연병에 출진해서 군사훈련에 힘쓰는 한편 북쪽 오랑캐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성벽을 쌓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던 반대파들이 이괄이 모반을 도모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인조가 믿지 않자 아들까지 끌어드려 일을 꾸미기 되었다. 1624년 정월에 외아들 전(栴)이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았고, 인조는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모함하는 세력들의 끈질긴 모의로 결국 아들을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상소를 올리기까지 하므로 결국은 아들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서울에서 선전관과 의금부도사가 그의 아들을 붙잡아 사실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영변에 내려오자 그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12000명으로 조정을 장악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기세를 떨쳤으나 무학재에서 관군에 대패하여 피신을 하고 있던 중에 부하 장수에게 피살되어 그의 3일 천하는 끝이 나고 말았다.
그이 목은 공주로 보내져 효수되고 나서야 이괄의 난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의 나에 38세였다. 참으로 꽃다운 나이요,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임에도 시대를 잘 못 만난 탓으로 결국은 대역적이 되어 삼족이 멸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괄의 부하들이 청나라로 귀화하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가이드 역할을 하였다니 참으로 역사는 아이러니 하다 하겠다. 그 이후 인조는 이괄의 흔적 지우기를 하여 그 흔적을 제대로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홍천읍 검률리에는 이괄 산성과 이괄 암이 있다. 한길에서 고개를 높이 들고 쳐다보아야만 하는 높은 절벽을 이루고 있는 커다란 바위가 이괄암이고 그 위에는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산성에서 애첩과 내기 바둑을 두어 자신이 지면 높은 절벽에 줄을 매고 건너가는가 하면 애첩이 지면 절벽에서 집어 던져놓고 떨어지기 전에 내려와서 받았다고 하며 또 말을 타고 화살과 누가 빠른가를 내기를 하여 도착점에 도착하여 보니 화살이 보이지 않자 말이 늦게 도착한 것으로 알고 말을 그 자리에서 칼로 쳐 죽이니, 그 때 활살이 날아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에게 미안하여 무덤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 무덤 근처만 짐작할 뿐 개발에 밀려서 무덤은 사라지고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그는 역적으로 몰려서 죽었지만 그의 나라를 위하는 정신과 뛰어난 무예와 인물됨을 기리기 위해서 지금도 홍천군 동면 덕치리에서는 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괄은 평소에 아버지의 말씀을 늘 제대로 듣지 않고 역으로 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풍수에 뛰어났는데 그가 죽으면서 자신의 몸을 강물 쪽으로 향하게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였으나 자식 된 도리로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다며 마지막 죽음의 길에서나마 효도를 한다는 마음으로 바로 묻었는데 물 쪽으로 묻었으면 넋이 물로 들어가서 훗날 임금이 날 것이었지만 바로 묻어서 아들이 역적으로 몰려서 죽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양평읍 오빈리와 양근리 사이의 떠드렁산과 홍천읍 매미산과 홍천읍 양덕원 근처 야산에서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청개구리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수타사 전경
느티나무 식다에서 곤드레 밥으로 시장한 배를 달래고 잠시 쉬다가 오후 일정을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간 곳이 수타사다.
수타사는 우적산 월정사의 말사로 공작이 알을 품은 형상을 한 공작산 속에 자리를 잡은 고찰이다.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사실은 그 이전부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는 일월사라고 하다가 후에 水墮寺로 개명을 하였으나 물이 떨어진다는 뜻을 가진 것처럼 계곡의 물에 쓸려서 절이 피해를 입게 되자 壽陀寺로 글자를 바꾸었다고 한다. 수타사를 둘러 싼 공작산은 세조비였던 정의왕후의 태가 묻힌 곳으로 왕후의 아버지가 홍천현감으로 있을 때 왕후가 태어나서 태를 묻었다는 것이다. 그런 연고로 세조가 자주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수타사에는 복장유물로 1459년에 세조가 발간한 우리나라의 귀중한 보물인 월인석보 17, 18권을 소장하고 있다. 수타사박물관에서 직접 내 눈으로 확인을 하였다. 인쇄나 보존된 지질이 깨끗하여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이유는 수타사 정문을 지키는 사천왕상의 배속에 감추어졌던 것을 1970년 대 초에 수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보존이 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보물은 수타사 동종이다. 뜰에 서있어서 쉽게 볼 수 있다.
용소와 활짝 핀 진달래
수타사 계곡의 용담으로 가서 시원하게 흘러가는 물과 아직도 활짝 피어있는 진달래, 그리고 신록의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며 잠시 쉬다가 다음 장소로 옮겼다.
자작공원의 동학군 기념탑
동학의 성지 자작고개. 홍천읍 풍암리에는 자작고개가 있다. 고개라고 할 정도도 되지 않는 작은 야산 모퉁이를 돌아서 약간 내려가는 길이 있어서 고개라고 붙인 것 같다. 지금은 고개마루 일대를 공원으로 꾸며놓았고, 길 건너편에는 작은 사당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동학란에 싸우다가 죽은 넋을 기리는 사당이라고 한다.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동학란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폭정을 견디다가 못한 농민들이 전봉준을 필두로 일어난 민족 대운동이었다. 그러나 무장을 제대로 하지도 않고 훈련도 받지 않은 농민들이 농기구를 들고 관군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은 패하게 되었고 충남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동학혁명은 막을 내렸다. 그런 와중에 강원도 홍천에서도 차기석을 대장으로 하여 동학운동에 가담을 하였으나 지평현감이며 관군 총사령관인 맹영재와 싸우다가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당시에 죽은 사람이 30명이라고 하지만 기록과 증언에 의하면 살아있는 사람도 같이 구덩이에 몰아넣고 생매장을 하여 모두 800여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 마을에는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 있고, 그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자작고개의 이름의 유래는 피를 많이 흘려서 자작자작하였다는 설과 피가 땅을 적셔서 땅이 자작거렸다는데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생각만 하여도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관리들이 정직하고 선정을 베풀어야 하는데 자신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한 파렴치한 관리들은 모두 지구를 떠나게 하여야 할 것이다. 현장에서 주현미의 자작고개라는 노래를 감상하니 마음 깊이 그 때의 처절한 장면이 눈이 보이는 것 같고 애절한 가락이 가슴을 울렸다.
이항로가 만들었다는 연못
이항로 은거지. 마지막으로 홍천군 화촌면 외삼포리의 화서 이항로가 8년간 은거하였다는 곳을 찾아갔다. 생가 터라고 짐작하는 곳에는 다른 집에 있고, 근처에는 10여 평정도 될까 말까 하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물은 썩었고, 가운데 한 평 정도 되는 동산에는 아카시아가 서 있었다, 그것도 거의 죽은 상태로 말이다. 개발에 밀려서 역사적 흔적은 다 사라지고 생각이 있는 분이 연못이나마 그것이라도 살려야 된다고 하여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니까 근처에서 당나귀 목장을 하는 어떤 아주머니가 쫓아오더니 자기 아버지가 연못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현지의 주소와 내력을 잠시 들려주었다. 이항로 선생님이 금강산 가는 길에 너무 아름다워서 돌아오다가 그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 때 면암 최익현과 8도 의병대장 의암 유린석이 같이 살았다고 한다. 그들은 이항로 선생을 중심으로 화서학파를 이루었으며 마을 개화운동을 전개하여 잘 살기 운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화서학파는 극단적 보수주의로 개화파를 쓰레기 취급을 하였고 존화양이론으로 中華를 존경하고 夷를 배척한다는 이론을 지향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화운동은 지금으로 말하면 새마을 운동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8년을 살면서 마을의 개화운동을 하던 이항로 선생은 아들의 죽음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올해 들어서는 처음으로 한 인문학여행, 홍인희 선생님과 함께한 쏙쏙체험의 공부하는 인문학 여행을 마무리 하였다. 하루 동안 홍천군의 곳곳을 찾아다닌 인문학 여행으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하였지만 언제나 아쉬운 것은 돌아서면 잊어 먹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햇빛에 바래고 달빛에 물든 사연들은 내 가슴에 젖어서 서서히 물들 것이라고 믿고 싶다.
마지막으로 4행시 발표를 하였다. 나도 우수작으로 선정되어 ‘배움도 깨달음도 길위에 있다’는 책을 선물로 받다.
일:일구월심 기다리던 인문학여행
광:광명한 햇살은 천년을 바래고
월:월색에 물든 수많은 사연과 더불어
색:색깔 곱고 맛깔 나는 역사와 신화가 되도다.
2015. 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