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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 네이처> (제럴드 에델만) - 우리의 의식은 진화한다.| 우리들의 이야기
17세기 데카르트는 존재의 실체를 연장과 사유로 규정하며 물질계와 정신계를 이분법적으로 접근했다. 그리하여 연장인 물질계는 부피를 갖는 것으로 과학으로 다가갈 수 있으나 부피를 갖지 않는 정신계는 철학의 영역으로 남겨 놓았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연장과 사유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사유는 몸(물질)을 통제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몸과 사유를 이어주는 부분을 ‘송과선’으로 보았는데, 데카르트 이후 철학자들은 이 송과선을 몸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데카르트는 추상적이지만 ‘송과선’을 말함으로써 사유가 몸(연장)과 관련됨을 초보적으로 암시함으로써 우리의 사유작용이 뇌와 관련될 수 있다는 탐구의 길을 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인간 중심의 관념적 주체에 의한 계몽과 자유는 칸트를 거치고 헤겔에 이르면서 ‘절대 이성’에 와서는 절정을 이룬다. 스피노자는 근대서양사상사에서 아웃사이더였다. 스피노자는 신과 세계의 관계, 마음과 몸의 관계, 자유의지에 의해 일어난 사건 등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데카르트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인간의 감정(아펙투스)을 강조했다. 외부적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희노애락하는 감정적 인간, 그러한 지점들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노력(코나투스)하는 인간을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적 인간들의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생명성을 강조했다.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뇌 과학 연구서인 그의 저작을 <스피노자의 뇌>라 이름붙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스피노자 이후의 심신 - 몸과 마음의 화두는 이분법적인 평행선을 걸은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고, 인간은 원래부터 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과학적 인식 전환의 길을 열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상대성 이론이 대두됨으로써 인간(몸)이 보는 세계가 자신(몸)이 자리한 위치와 시간에 따라 가변적으로 지각된다는 과학적 원리가 밝혀졌다. 그리고 양자역학을 통해 미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길이 열였고, 미시 세계를 관찰할 수 있는 측정 도구들이 발명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인간은 사유하는 주체, 인간 자신에 대한 과학적 탐구에 나선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추상적인 질문에 응하는 관념적 해답이 아니라, ‘物’로서의 인간 실체를 해부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윈 이후 진화론은 생물의 종의 문제를 넘어서 지구의 생태적 문제, 불치의 선을 넘으려는 치료를 위한 첨단의학 문제, 그리고 인간을 규명하는 문제와 관련되면서 여러 갈래의 학문으로 분화되고 그 속에서도 다양한 논쟁점을 제기하고 있다. 유전공학,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뇌과학 등등. 20세기 물리학의 시대에서 이제 21세기 생명과학 시대로 진화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도 든다. 제널드 에델만. 그는 1975년에 최초로 뇌의 회로에서 발달하는 신경세포 사이의 대화를 담당하는 분자의 존대를 규명했다. 이후 그는 뇌의 조성, 연결, 구조, 기능, 그리고 진화에서 얻은 통찰을 통해 ‘신경다윈주의’를 주장한다. 우리 뇌의 대뇌피질에는 정확한 수는 아니지만 약 300억 개의 신경세포 뉴런이 있고 100조개의 신경연접(시냅스)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는 우리가 확인한 우주의 별들보다 훨씬 많은 수이다. 이처럼 한량없이 많은 수의 신경 인자나 연접이 기억과 느낌, 감정, 생각, 의식 등 우리의 사고 작용에 지금 이 순간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입력 신호의 시간적 배열에 따라 기계적 논리와 계산을 통해 작동하는 컴퓨터와는 다르다. 뇌는 일련의 테이프처럼 부호화 되지 않은 ‘세계’를 다양한 감각수용기를 통해 해석한다. 어떤 사람의 뇌도 다른 사람과 동일하지 않다. 신경구조 발달하고 신경세포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시스템은 카오스적이다. 아무리 뇌가 규칙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우리 뇌의 출력을 조절하는 논리나 정확한 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침팬지와 다른 우리 인간 뇌 체계는 우리의 유전자네트워크에 기인한다. 하지만 헤아릴 수없는 신경세포 뉴런간의 상호작용 - 시냅스 상의 복잡한 작용을 지정하는 유전자는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들의 유전자네트워크 자체도 다양한 발현 양상이 환경적인 맥락과 개별적인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에 대단히 가변적이다. 더 나아가 뇌 또한 유전자네트워크에 의해 복제된 기계적 장치가 아니라 다양한 개별적 경험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발현된다. 이렇듯 우리 인간의 뇌는 기계적이 아니라 우주 만큼이나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이다. 일단 뇌는 몸과 일체이며, 몸은 환경(자연)의 일부로 깊이 묻혀 있다. 즉 뇌와 몸과 생태적 지위는 따로 분리해 말할지라도 어쩔 수없이 유기적 통일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러한 유기적 통일 관계 속에의 생물적 법칙을 다윈은 자연선택 이론으로 설명한다. 자연선택 이론으로 보면, 종 내부와 종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이 평균적으로 다른 개체들보다 더 적합한 개체가 생존하고 번식하는 결과를 낳는다. 진화는 차별적인 재생산이다. 이 이론은 ‘선택적 시스템’이 한 개체 안에서도 유효함을 포함한다. 제럴드 에델만은 1977년 진화와 면역에서 개체 외내부에 작동되는 선택적 시스템을 뇌에도 처음으로 적용한 사람이다. 이것을 ‘신경다윈이즘’이라 명명한다. 신경다윈주의에는 3가지 원리가 있다. 1. 뇌 신경회로의 발달은 지속적인 선택과정을 거친 결과 엄청난 수의 미세한 해부학적 변이를 초래한다. 2. 이미 형성되어 있는 해부학적 회로의 레파토리가 동물의 행동이나 경험에 따른 신호를 받게 되면 일련의 부가적이면서 중복되어 있는 선택적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다. 3. 마지막으로 ‘재유입(reentry)’이 중요한 개념이다. 재유입이란 고등한 뇌에 편재하는 대량의 축색돌기를 통해 뇌의 한 영역(지도)으로부터 다른 영역으로 전해졌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연속적인 신호의 흐름이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이건 나의 예기 때문에 오류가 수반될 수 있다), 다른 포유류에서도 의식은 보인다. 그 의식은 종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인간을 제외한 종들에겐 대부분 찰나적이고 희미하다. 하지만 인간은 그 의식함을 의식한다. 즉 인간에게는 복합적인 재유입의 뇌회로적 작용이 있다. 에델만은 의식을 1차의식과 고차의식으로 나눈다. 1차의식은 자각이나 의식적인 계획은 기억된 현재로 제한되는 것이다. 1차의식만 지닌 동물은 과거에 대해 명시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을 갖지 못하며, 먼 미래를 위한 광범위한 계획을 세울 수도 없고, 구체적으로 명명할 수 있는 사회적 자아도 갖지 못한다. 고등 영장류가 진화하면서 새로운 쌍방적 경로가 발달하고 이 회로를 통해 개념적 지도(mapping)와 상징적, 의미론적 참조를 담당하는 영역 사이의 신호의 재유입이 가능해졌다. 침팬지 같은 경우 희미한 형태의 고차의식이 엿보이나, 고차의식은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언어가 출현 했을 때 비로소 만개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인간은 자신을 의식하고 과거, 미래 사회적 자아에 관련된 풍부한 개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의식은 더 이상 기억된 현재에 제한되지 않고 의식에 대한 의식함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고차의식의 진화에 의거해서 우리는 우리가 언어적 존재, 역사적 존재임을 과학적으로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비정상적인 사고나 신념의 원인과 발달과정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언어나 고차의식을 비롯한 모든 수준에서 뇌의 구체적인 기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인식 활동은 이러한 뇌의 활동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에델만은 이를 ‘뇌기반인식론’이라 이름하였다. 지각적 범주화나 개념, 사고 등의 기원이 뇌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뇌는 몸과 세상 사이의 상호작용을 함을 전제로. 인간의 모든 학(學)과 교(敎), 언설과 담론- 말하기와 쓰기-들은 뇌의 의식 작용에 기초한다는 주장이다. 당연한 말일 수 있지만 에델만은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거한다. 과학 자체는 객관성을 확보하는 방법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과학이 갖고 있는 정치적 편향의 함의나 이데올로기적인 요소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 있다. (특히 리처드 토킨스나 에드워드 윌슨에 대한 리처드 르원틴, 스티븐 로즈 등의 비판들) 그렇다고 에델만은 과학적 환원주의(물리학에서의 대통일장 이론, 사회생물학자인 윌슨 등의 통섭: 인간역사의 여정을 물리적(생물적) 역사의 과정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다)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에델만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간극을 수렴시키고자 한다. 신경다윈주의는 ‘뇌기반인식론’에 기초하여 다양한 창조성을 이야기 한다. 의식과 무의식적인 두뇌 작용이 어떻게 새로운 아이디어나 미술, 음악 문학창작품을 만들어내는 지에 새로운 이해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창작과정이나 창작물을 통해 인간의 ‘제2의 자연’을 드러낸다. 외부세계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제1의 자연과 관련된다면 창조성은 ‘제2의 자연’을 생산해내는 우리 뇌의 능력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모든 지각은 어느 정도 창조적인 활동이며 모든 기억은 어느 정도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성숙한 뇌는 자기 자신과 대화하며, 다양한 지향적 상태들은 의식적 처리과정의 기초가 되는 우리 뇌의 엄청난 재조합과 통합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수학적 논리나 물리적 논리로 우선 사고하지 않는다. 우리의 창조적 사고 과정에는 축중성, 모호성, 복잡성을 반드시 필요로 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인문적, 역사적, 철학적 문제를 접근하는 것이다. 과학에 필요한 상상력의 생물학적 기원은 인문학적 체계의 형성에 필요한 근원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 속에 스며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스러운 우리’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보고 이해한다. 전자는 자연이고 우리는 후자를 ‘제2의 자연(second nature)’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전자에 대한 공부와 사유를 자연과학이라 하고 후자의 제2의 자연에 대하 공부와 사유를 인문학이라 분리시켜 왔다. 하지만 그간의 뇌과학의 연구성과들로, 과학과 인문의 학문적 탐구와 사유의 토대인 정신적 현상의 정점에서 작동하는 ‘의식’이 진화과정의 산물임이 밝혀지고 있다. 의식이 뇌의 물질적 활동으로 가능하다고 하지만 물질적 작용으로만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 가지고 있는 예언력과 발명의 힘이 강력하긴 하지만, 과학이 세상을 복제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환원 가능하기도 불가능하기도 한’ 인간의 정신적 현상은 결국 우리 뇌의 구조와 기능에 토대를 둔다. 의식이 생물적인 선택의 원리에 따르지만 그 선택의 원리는 우리가 겪는 경험의 복잡성, 비가역성, 역사적 우연(이 우연은 결정론에 상대되는 의미이다)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바탕을 제공해 준다. 인간의 사고 과정에서 역사적이고 창조적인 차원을 인정하는 신경다윈주의의 모델에서는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분열은 불필요하다고 에델만은 결론짓는다. 에델만의 <세커드 네이처> 말미의 글을 인용한다. “과학은 여러 문화적 사건들에서 비롯되며, 보통 이러한 사건들을 계획해서 촉발시키거나 예언하지 않는다. 과학 이론은 특성상 완성이 불가능하지만 그 정도면 우리가 할 수 있을 만큼은 성취할 수 있다. 과학은 이 세계와 우리 자신의 존재를 보장하는 구조적 조건을 규정해준다. 더 나아가 과학은 우리가 이 세계나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구조적 조건도 규정해준다. 의식을 분석하기 위한 최근의 과학적 탐색이 인간의 지식에 대한 우리의 미래상을 확장하고 변형시킬지라도, 제2의 자연의 기원과 한계를 심화시켜 드러낼 것임을 자신 있게 기대해 볼 수 있겠다.”
우리는 배고프고 아프면 괴로워한다. 우리는 진화의 저 먼 생물적 업을 뛰어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배고픔과 아픔도 진화한다. 배고픔과 몸아픔은 생물적이지만 또한 사회적(상대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고독'이나 '구원', '운명' 같은 은밀한 말글들, ‘양극화’나 ‘생존경쟁’, '성공' 같은 통념적 말글들, '우정'이나 '가족애', '존경' 같은 친밀한 말글들을 헤쳐봐야 한다. '겸손'이나 '절제', '안분지족' 같은 삼가함의 말글들, '정의'나 ‘배려’, ‘공존’과 같은 말글들도. '민주'나 '평등', '해방' 같은 말글들까지도. 그것들을 찬반(贊反)으로 오호(惡好)로 힘주어 말하는 그 일차적 의식구조를 살펴야 한다. 因地의 發心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가를 ‘의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러저러한 잡설들의 너머를 ‘의식’해야 한다.
우리는 생‘物’이 아니라 생‘命’이다. 제1 자연의 ‘物’에 기반해 ‘命’이 나왔지만 그 命은 제2의 자연이다. 우리는 배고픔을 즐거움으로 은유할 수 있다. ‘초인’을 설파했던 니체가 ‘병을 친구처럼 반가워 하라’ 말하며 열정의 메시지를 전한 것처럼 우리는 몸아픔을 기꺼이 전복할 수 있다. 우리는 기쁨 가운데 슬픔을 의식하며, 슬픔 가운데서 기쁨을 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슬플 때에도 노래하며 기쁠 때에도 노래한다. 즐거움이나 기쁨의 정점에서 미끄러지며, 암울한 절망의 끝자락에서 거듭남을 소망하고, 지쳐 앙상한 의식의 밑바닥에서 부활의 몸짓으로 새롭게 의식을 틔운다. 그것은 하나하나 物에 대해 있는 그대로 치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의식에 대해 의식적 노력을 거쳐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몸 밖에서 난무하는 환상이나 우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몸에서, 우리의 뇌에서, 우리의 고차의식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그리고 우리의 사유는 그저 물질덩어리 공간에 있지만, 세상을 바라보고 구성하고 해체하는 또 바라보고 또 구성하고 또 해체하는 세상 안이면서도 세상 밖이다.
우리는 억겁의 인연으로 우리의 몸과 뇌에 있지 않을 수없다. 우리의 뇌를 일차적 의식에 가둬 놓기에는 이 삶은, 이 몸은 한량없이 소중할 지 모른다.
다시 고타마 붓다의 말씀이다.
"제행은 무상하니,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너 자신(몸과 뇌)에 의지해서 끊임없이 수행(공부)하라"
그지없이 반성되는 말씀이다. 한량없이 자비로운 말씀이다. 텅 빈 아픈 말씀이다. 안팎이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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