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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18강 사무엘상 사무엘, 사울이야기 -
(3) 빼앗긴 하나님, 빼앗긴 예배, 사무엘상 5장 1-6절
사무엘상 4장에는 3장까지 조용하던 이스라엘에 닥친 첫 번째 전쟁, 아벡전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전투가 참으로 멋진 승리와 영광의 전투였으면 좋았을 것을,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패배합니다. 그때 죽임을 당한 군사가 4천명이라고 기록합니다. 읽어볼까요?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삼상4:1b~2)
패배의 원인을 분석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로에 있었던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와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언약궤야말로 광야 40년의 생활과 계속되는 가나안 정복전쟁에서도 백성들 앞에 행하시며 놀라운 이적과 함께 승리를 얻게 하셨던 하나님 임재하심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함께 하신다면 한 번의 승리로 오만방자한 블레셋은 게임도 안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요, 그 대적 블레셋을 오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완벽하게 궤멸해보려는, 놀라운 승리를 재현해보려는 의도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읽어볼까요?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삼상4:3b)
그런데 어떻습니까? 법궤가 진중에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전체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전체적으로 곪아 터져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전쟁도 아니요, 하나님께 기도해보고 나간 전쟁도 아니요, 그저 자신들의 패배에 분노해서 궁여지책, 하나님을 억지로 끌고 나간 전쟁, 심하게 표현하면, 자신들의 복수를 위해 하나님을 싸우도록 만들려했던 전쟁,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했던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당연한 결과가 임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삼상4:10-11)
실로의 성소에 머물던 하나님의 법궤가 마침내 도착한 전투, 언약궤가 진 가운데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이 울리도록 환호하고, 블레셋 사람들도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라며 두려워하였던 전투에서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 3만이 죽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깁니다. 법궤를 메고 나아갔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합니다. 그 뿐인가요. 전투의 소식과 법궤의 소식을 듣던 중, 엘리 제사장까지도 목이 부러져 죽고 맙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 5장 1절은 이렇게 기록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삼상5:1)
여러분,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가늠이 되십니까? 사사시대의 마지막, 이스라엘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자기 소견의 옳은 대로만 행하던 시절, 어휴! 저 잔소리하고 군소리하는 이들,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 싶었던 이들이 다 사라집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은 예언하신 대로 죽고, 엘리 제사장마저도 죽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법궤마저도 아스돗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보십시오. 총체적인 지도자의 부재입니다. 정말 이제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내 소견에 옳은 대로 마음껏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좋은 일인가요?
엘리의 며느리는 이 상황을 이렇게 평가했었지요? 읽어보겠습니다.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삼상4:21-22)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보이십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던 이스라엘을 이제 하나님께서 버리시는 것입니까? 포기하시고 영영 떠나버리시는 것입니까?
여러분, 여기에 우리 인생의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은 잘못하고 배신을 하면 떠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잘못하고 배신해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이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그릇된 평가를 남발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도 버리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렇게 밖에 보지 못하는 못난 우리를 안타까워하시며, 우리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더욱 일하십니다. 당신이 더욱 우리에게 믿음직한 존재가 되시기 위해서 수고하시는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시는데, 그 사랑을 그 헌신을 그 수고를 우리만 모를 뿐입니다.
자,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당신을 이용만 하려고 했던 이스라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함께 확인해보시지요.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삼상5:1)
사람들의 눈에는 이렇게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에벤에셀로부터 아스돗으로 옮겨가시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포로로 전리품으로 끌려가신 것 같지만 아뇨,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방인들의 손을 명하셔서 이스라엘로부터 블레셋으로 옮겨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못난 이스라엘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이 보기에는 전무후무한 총체적인 위기가 임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보기에는 영영히 하나님을 잃어버린 듯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로서는 하나님의 법궤를 되찾아올 힘도 능력도 배짱도 어떠한 정치력도 영향력도 없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을 영영히 떠나버리셨던 것이 아니었음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신 이유가 분명하게 기록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오늘 5-6장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홀로 블레셋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 당신을 이용하려고만 했던 이들이지만, 그들을 위해 혼자 블레셋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외로우셨을 전투의 장면을 오늘 성경은 5장, 6장 두 장에 걸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하는, 아스돗에서 싸우신 하나님의 모습, 블레셋으로 하여금 처절하게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의 경험을, 오늘 블레셋이 없었다면 어쩌면 저와 여러분도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진면목이 담긴 장면, 장면을 5장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먼저 5장 2-3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삼상5:2-3)
하나님께서는 당장에 하나님을 전리품으로, 포로로 여겨 끌고 간 시건방진 블레셋에 큰 재앙을 내리실 수도 있으셨지만 블레셋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깨닫게 하시십니다. 조금씩 조금씩 당신을 드러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로 하신 일은 다곤 신상을 넘어뜨려서 그 얼굴을 땅바닥에 닿게 하신 일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감히 하나님 앞에 생명도 없는 우상이 고개를 쳐들고 있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곤이 넘어져 있는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을 다시 일으켜 세워두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나님의 궤 앞에 다시 고개를 쳐들었던 다곤은 박살이 납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삼상5:4)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실 때, 엎드려 있으면 삽니다. 그러나 다시금 고개를 쳐들면, 남은 생명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곤이 살해당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머리와 손이 끊어진 것, 누군가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블레셋은 이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 줄 몰랐습니다. 밤 사이 짐승이 들어왔다 나갔나? 바람이 세게 불었나? 지진이 있었나? 정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요? 참 신이신 하나님을 자기들이 만들어 세워놓은 다곤처럼 우상정도로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다곤 신상이 왜 넘어집니까?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의 우상들처럼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아무 것도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하며 이적을 행하시고, 물을 가르시며, 성을 무너뜨리시고, 우박을 던지시고 해와 달을 멈추시며 전쟁을 이기게 하셨던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지금까지 저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구별하여 오늘까지 이끌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계약과 갱신을 거듭하며, 배반하고 배신하고 패역한 저들을 끝내 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으로 그릇행하고 악을 일삼는 저들을 오히려 더욱 긍휼히 여기시며 여기까지 오셨기 때문입니다. 정말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두고 두고 고통스럽게 할, 그리고 오늘 저 이스라엘을 삼만 사천 명을 도륙한 블레셋을 그냥 둘 수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일 먼저 저들의 신을 파괴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곤신상을 파괴하신 하나님은 이제 아스돗 사람들을 향해 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 손을 엄중히 더하셔서 독종을 내리셔서 아스돗과 그 지경을 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상이 망가지는 것을 가지곤 모르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재앙이 임하니까 드디어 깨닫는 것입니다. 7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그렇게 깨달은 대로 법궤와 함께 못할 줄을 알았더라면, 얼른 이스라엘로 돌려보냈으면 좋았을 것을 애써 빼앗아 얻은 전리품을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는 싫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이제 가드로 옮기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발생하나요? 9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삼상5:9)
가드 사람들은 아스돗 사람들이 보내는 여호와의 궤를 덥석 받았습니다. 승리의 전리품, 하나님의 궤라고 하는 것을 자신들도 한번 보고 만지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가드사람들에게 아스돗보다 더한 재앙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 후에도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지 않고 에그론으로 보냅니다. 그랬더니 에그론 사람들은 궤를 보자마다 우리를 다 죽이려고 하는 거냐며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리곤 온 블레셋이 모여서 이렇게 결정을 내립니다.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삼상5:11b)
여러분, 오늘 블레셋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들에게도 복이 되는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웬걸?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법궤를 빼앗긴 이스라엘이 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법궤를 빼앗아온 블레셋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입니다. 블레셋의 다섯 도시, 온 성읍이 망해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기록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시고 잘 섬길 때 이웃나라 블레셋도 강해지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도리어 이스라엘을 핍박하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도록 법궤를 빼앗아 오니까, 온 블레셋이 사망의 환란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 나라에 당한 위기와 어려움이 해결되는 일은 다른데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지금,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법궤를 빼앗아가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만들지 말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당 문을 닫아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만들지 말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정한 시간 신령과 진정으로 잘 드릴 수 있도록 지원하고 도와야 합니다. 모든 크리스천들 집에 있지 말고, 산에 가지 말고, 교회 가서 예배드리라고 호소해야 합니다. 장정만 가지 말고, 남녀노소가, 짐승들까지 다 가서 예배드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를 방해하지 말아야합니다. 기왕이면 더 잘 드릴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만들어주어야 모두가 사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이 다 나라를 위해서, 위정자들을 위해서 가난하고 힘들고 아프고 병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일진대 예배를 방해하고 기도회에 가지 못하게 만들어서는, 될 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방해하지 않고 예배를 돕고 지원하는 일,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깨닫고 해줘야할 일이라면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아마 이것이 안전한 삶을 위한 훨씬 더 중요한 방법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크리스천들이, 특별히 우리 하일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도로서의 사명을 확인하고 하나님 받으시는 참 예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준비하고 구별하고 헌신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요청하신 대로 정직하게, 정확하게,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으로 정성을 다해 하나님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아주셨던 것처럼,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제사드리고,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위해 제사를 드렸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 많은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아가 저와 여러분이 그들을 위해 드려지는 산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못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다가, 어렵고 힘들 때만,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도구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요? 하나님을 이용하는 짓을 할 수 없도록, 세상이 하나님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막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오래토록 예배를 빼앗겨 오고 있습니다. 왜 빼앗겼을까요? 모든 것의 원인은 우리 역시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하고 이용해왔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려울 때만, 힘들 때만, 하나님을 앞세워 하나님을 싸우시게 해서 우리의 어려움을 극복해내려고만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도 하나님을 이용해서, 정치를 하려하고, 교회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고 힘을 가지고 사람들의 섬김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아벡전투를 보면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을 돌아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왜 예배를 빼앗겨야 하는지, 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왜 저 엘리 제사장이 목이 부러져서 죽는 지를 말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겼다면, 예배를 빼앗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땅의 교회들이, 오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짐승들의 집합소로, 환전소리가 가득한 곳으로 만들지 않기를 원합니다. 늘 실로에 묶어두고 필요할 때만 불러 제끼는 헌 궤짝처럼 그분을 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새벽, 다윗이 자신을 한 마리 양으로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무지하고 연약하고 미련한 정확한 실상을 확인하고,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 함께 하셔야하는 나의 목자로, 나의 앉고 일어섬과 출입을 책임지시는 유일한 주인으로, 우리네 양의 참 문이 되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며 섬기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모든 일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이상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을 때였습니다. 제사장이 퍼질러 자고, 자신의 직무에 관심이 없고 자기 배불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던 때, 어린 소년이 그들을 대신하여 성소의 등불을 밝히고 있을 때였습니다. 불빛이 흐려지면 어둠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살펴보십시오. 약해지고 희미하고 흐릿해지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지식이 더욱 우리를 온전하게 세워가는 것입니다. 늘 등불을 켜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괜찮겠지 하며 오늘도 또다시 오늘도 말씀을 멀리하고 예배를 등한시 하면, 어느 새 허탄한 신화와 귀신의 가르침에 이끌려, 양심에 화인을 맞고 외식하며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딤전4:1-2)
연일 보도되는 뉴스를 보면서 참으로 ‘악이 극에 달한 시대’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불빛이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져가니 어둠이 기승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파리 목숨만큼도 되지 않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존재들이 교회 마당에 키우는 유기견보다도 못하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살려고, 온 세상이 혈안이 되어 그렇게 남은 예배의 불씨를, 말씀의 불빛을 찾아 꺼뜨려가는 시대 같습니다.
멀리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쩍 우리 곁에 가까워졌습니다. 요즘 계속 서산 태안에서의 이야기들이 들려오고 있는 것이지요. 범위가 점점 좁혀져 오던 아간의 집 사람들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우리 주변이 계속해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아간이라는 사실을 언제까지 숨기시려고 합니까? 저 세상 사람들처럼, 증거를 들이밀어도 아니라고 우기는 우리는 결코 되지 마시고, 내 지파, 내 족속, 내 가문, 내 집, 내 이름을 부르실 때까지 버티지 마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넉넉하게 기회를 주실 때, 얼른 아직 거리가 남아 있을 때 얼른 하나님께 자백하는 우리가 되길 축복합니다.
아직 큰 고난, 큰 박해, 견딜 수 없는 부당한 대우를 겪질 않아서, 아직은 괜찮겠지, 우리는 괜찮겠지 하지 마시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 포도나무 열매가 없기 전에, 아직 은혜가,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 때, 지금 더욱 깨어서 예배드리며, 기도하고, 말씀으로 교회와 우리를 세워 가시는 참된 성도, 오늘도 성실하게 기름을 준비하여 우리의 등불을, 그렇게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빛을 이 어둔 세상에 들고 비추어내시는 하나님의 일꾼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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