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형의 수필 돼지가 웃은 이야기
돼지가 웃은 이야기
姜 浩 馨
청계로변 y 동 어구에 오래된 순대국집이 있었다.
허름한 유리 문짝에 붉은 페인트로 '순대국 전문' 이란 간판 겸 안내문이 씌어 있기도 하지만, 출입구 옆에 놓인 연탄 화덕 위에서 더운 김과 구수한 냄새를 내뿜고 있는 큼직한 국솥이 오히려 더 효과적인 간판 구실을 하는 집이었다.
손잡이에 기름때가 번질거리는 미닫이 출입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역시 기름때가 밴 나무 탁자 두 개와, 구멍 뚫린 철판을 얹은 드럼통 두개에 겨우 궁둥이를 붙일 수 있는 동그란 의자들이 시설의 전부인데, 한쪽 벽면에 걸린 선반 위에는 상처 난 뚝배기들이 엎어 있고, 그 옆 채반에는 이 집의 전문 메뉴인 순대와 내장과 돼지머리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돼지머리는 간단없는 식칼의 공격을 받아 참혹한 형상일 때도 있지만, 아직 손을 타지 않아 온전할 때는 갓 세수라도 한 듯 멀끔한 얼굴에 살짝 눈웃음까지 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덩달아 미소를 금치 못 하게 하는 것이었다.
주모는 환갑 진갑을 넘긴 노파였다. 이십여 년 동안 줄곧 그 자리를 지키며 순대 국밥만을 팔았다는 주모는 알맞게 뚱뚱한 몸매에 후덕하고 수더분한 인상이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다. 한 우물만 판 덕에 손님의 대부분이 단골이었는데, 단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는 몇 분의 바깥 노인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정의가 두터워 손님이라기보다 친구처럼 지내는 터였다. 내가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집을 드나들게 된 것도 실은 이 노인들의 무사무욕(無邪無慾)한 우정을 엿보는 데 재미를 붙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정이 그렇고 보니 노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날은 모처럼 들린 것이 헛걸음이 된 기분이기도 했다.
그날은 마침 드럼통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은 노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한쪽 자리에 순대국 한 뚝배기에 소주 한 병을 받아놓고 노인들의 화제에 귀를 기울인다.
" 저 돼지 눈웃음을 치는 쌍판 좀 보게. 꼭 쥔(주인) 마누라 소싯적 같으네 그랴".
부실한 치아 때문에 입에 든 머릿고기가 부담스러워 공들여 우물거리는 다른 노인과는 달리, 가장 기력이 있어 보이는 충청도 말씨의 노인이다. 말이야 짐짓 좌중에게 동의를 구하는 척 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걸려온 농지꺼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주모다.
" 앗따, 왜 조용한가 했더니 인제야 시작이구먼? 저 웬수```". 그러나 말과는 달리 주모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 저걸 보라니께? 닮아두 쬐금만 닮은 게 아니구 아주 판에다 박았다니께". 다른 노인들의 얼굴에도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돈다.
" 저 돼지가 어떤 돼지인줄 알구 하는 소리유?" " 어떤 돼진 어떤 돼지여. 홀애비 돼지길래 과부 집에 와서 선웃음 치고 있지 ```. " 돼지두 당신처럼 과부라면 사죽을 못쓰는 줄 아는 가베? 저게 처녀 돼지라우. 처녀두 보통 처년가? 꼭 가둬 기른 숫처녀지```."
노인들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고 보니 과연 그럴 듯도 하다고 동의하는 노인도 있었다. 또 다른 노인이 어조를 사뭇 누그려, 허긴 저 마누라도 젊어선 꽤 쓸만한 얼굴이었느니라고 회고하자 노인들은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침묵을 깨고 어디선가 확성기 소리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내용인즉 김 00 선생의 연설회가 있으니 애국 시민들은 모두 모이라는 것이었다.
가두방송이 멀어져 가자, 자연 화제는 '누구를 찍느냐'로 번지고 있었다." 오번(요번)에는 영샘이가 될 기라'하고 자신의 의중을 먼저 내 보인 것은 한복 바지에 양복저고리를 입은 노인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일 먼저 농을 걸었던 노인이 나섰다.
" 나는 누가 뭐래도 '죙필'일 찍을 테요. 여태껏 경상도 사람이 해 먹었으니 충청도서두 대통령 한번 나얄 것 아닌감?" 다음에는 말쑥한 양복 차림의 노인이 점잖게 나섰다. " 어쩌니 저쩌니 해도 될 사람을 찍어야지 무슨 소리들을 허는 거요. 누구니누구니 허구 떠들어들 대지만 그 사람들 돼 봐야 허구헌날 싸움질이나 허지 뭐가 제대로 될 것 같아?" 그 노인은 그곳 토박이로서 과거 여러 해 동안 통장을 지낸 일도 있는 유지라고 했다. 이리하여 갑론을박이 한창일 때, 이제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던 단정한 한복 차림의 노인이 밭은기침을 하며 나섰다. 좌중에서는 가장 연장일뿐 아니라, 허리춤에 달린 황소의 고환을 연상케 하는 안경집과 코에 걸린 안경이며, 노안에서 풍기는 위엄이 출신 가통의 만만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 시방 자네들 뭔 야그들 허고 있는가? 누가 될 사람이고, 누굴 찍는다고? 선거는 허도 않고 어떻해서 될 사람은 정해졌당가? " 이제까지 선비적 침묵과는 달리 노인의 음성에는 노기까지 깔려 있었다. 그리하여 일장의 훈시(?)끝에 내려진 결론은 ' 대중이 선생'이 대통령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결론이 도출되기까지 노인의 논리와 표정이 너무나도 정연하고 진지하였으므로 감히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동안의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뜻밖에도 여전히 기분 좋아 보이는 주모였다. " 그냥반두 잘한 건 읍지 뭘, 양보하기 싫다고 딴 살림 차려 나간 건 잘한 건가 뭐? " 그리고는 자신도 '될 사람을 찍겠노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노인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니 결판은 이미 난 셈이다. --노씨 두 표, 세 김씨가 각 한 표.
어쩔 수 없이 부동표가 된 나는 난감한 심사가 되어 문득 바라보니 선반 위의 '처녀 돼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essaykorea)
수필가 강호형(姜浩馨) : 1938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남. 어릴 적 조부로부터 한문 교육을 받았으며, 성균관대 법률학과를 졸업함. 월간 《문학정신》으로 등단 했으며, 제15회 현대수필문학상을 수상함(1997).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부회장, 계간 《에세이문학》 편집위원. 심사위원, 수필문우회 회원, 사단법인 '생활철학연구회' 운영위원 및 MBC문화센터 수필강사임. 수필집으로 《돼지가 웃은 이야기》(1996), 《바다의 묵시록》(1999)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