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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판 위 정지용
갑판(甲板) 위
나지익한 하늘은 백금빛으로 빛나고
물결은 유리판처럼 부서지며 끓어오른다.
둥글둥글 굴러오는 짠바람에 뺨마다 고운 피가 고이고
배는 화려한 짐승처럼 짖으며 달려 나간다.
문득 앞을 가리는 검은 해적 같은 외딴 섬이
흩어져 날으는 갈매기떼 날개 뒤로 문짓문짓 물러나가고,
어디로 돌아다보든지 하이얀 큰 팔굽이에 안기어
지구덩이가 둥그랐다는 것이 즐겁구나.
넥타이는 시원스럽게 날리고 서로 기대선 어깨에 유월볕이 스며들고
한없이 나가는 눈길은 수평선 저쪽까지 기폭처럼 퍼덕인다.
바닷바람이 그대 머리에 아른대는구려,
그대 머리는 슬픈 듯 하늘거리고.
바닷바람이 그대 치마폭에 니치대는구려,
그대 치마는 부끄러운 듯 나부끼고.
그대는 바람보고 꾸짖는구려.
별안간 뛰어들삼아도 설마 죽을라구요.
바나나 껍질로 바다를 놀려대노니,
젊은 마음 꼬이는 굽이도는 물굽이
둘이 함께 굽어보며 가비얍게 웃노니.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겨울 정지용
겨울&
빗방울 내리다 유리알로 구을러
한밤중 잉크빛 바다를 건너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고향 정지용
고향(故鄕)&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구성동 정지용
구성동(九城洞)
골짝에는 흔히
유성이 묻힌다.
황혼에
누리가 소란히 쌓이기도 하고,
꽃도
귀양 사는 곳,
절터더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그림자도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백록담, 문장사, 1941
귀로 정지용
귀로(歸路)&
포도(鋪道)로 내리는 밤안개에
어깨가 저으기 무거웁다.
이마에 촉(觸)하는 쌍그란 계절의 입술
거리에 등불이 함폭! 눈물겹구나.
제비도 가고 장미도 숨고
마음은 안으로 상장(喪章)을 차다.
걸음은 절로 디딜 데 디디는 삼십 적 분별
영탄도 아닌 불길한 그림자가 길게 누이다.
밤이면 으레 홀로 돌아오는
붉은 술도 부르지 않는 적막한 습관이여!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그대들 돌아오시니 정지용
그대들 돌아오시니
백성과 나라가
이적(夷狄)에 팔리우고
국사(國祠)에 사신(邪神)이
오연(傲然)히 앉은 지
죽음보다 어두운
오호 삼십육년!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연히 돌아오시니!
허울 벗기우고
외오 돌아섰던
산(山)하! 이제 바로 돌아지라.
자휘 잃었던 물
옛 자리로 새소리 흘리어라.
어제 하늘이 아니어니
새론 해가 오르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연히 돌아오시니!
밭이랑 무너우고
곡식 앗아가고
이바지하올 가음마저 없어
금의(錦衣)는 커니와
전진(戰塵) 떨리지 않은
융의(戎衣) 그대로 뵈일 밖에!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연히 돌아오시니!
사오나온 말굽에
일가친척 흩어지고
늙으신 어버이, 어린 오누이
낯서라 흙에 이름 없이 구르는 백골!
상기 불현듯 기다리는 마을마다
그대 어이 꽃을 밟으시리
가시덤불, 눈물로 헤치시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연히 돌아오시니!
백록담, 문장사, 1941
기차 정지용
기차(汽車)&
할머니
무엇이 그리 슬허 우십나?
울며 울며
녹아도(鹿兒島)로 간다.
해어진 왜포 수건에
눈물이 함촉,
영! 눈에 어른거려
기대도 기대도
내 잠 못 들겠소.
내도 이가 아퍼서
고향 찾아가오.
배추꽃 노란 사월 바람을
기차는 간다고
악물며 악물며 달린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꽃과 벗 정지용
꽃과 벗
석벽 깎아지른
안돌이 지돌이,
한나절 기고 돌았기
이제 다시 아슬아슬하고나.
일곱 걸음 안에
벗은, 호흡이 모자라
바위 잡고 쉬며 쉬며 오를 제,
산꽃을 따,
나의 머리며 옷깃을 꾸미기에,
오히려 바빴다.
나는 번인(蕃人)처럼 붉은 꽃을 쓰고,
약하여 다시 위엄스런 벗을
산길에 따르기 한결 즐거웠다.
새소리 끊인 곳,
흰 돌 이마에 휘돌아 서는 다람쥐 꼬리로
가을이 짙음을 보았고,
가까운 듯 폭포가 하잔히 울고,
메아리 소리 속에
돌아져 오는
벗의 부름이 더욱 좋았다.
삽시 엄습해 오는
빗낯을 피하여,
짐승이 버리고 간 석굴을 찾아들어,
우리는 떨며 주림을 의논하였다.
백화(白樺) 가지 건너
짙푸르러 찡그린 먼 물이 오르자,
꼬아리같이 붉은 해가 잠기고,
이제 별과 꽃 사이
길이 끊어진 곳에
불을 피고 누웠다.
낙타털 케트에
구기인 채
벗은 이내 나비같이 잠들고,
높이 구름 위에 올라,
나릇이 잡힌 벗이 도리어
아내같이 예쁘기에,
눈뜨고 지키기 싫지 않았다.
백록담, 문장사, 1941
나무 정지용
나무&
얼굴이 바로 푸른 하늘을 우러렀기에
발이 항시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 싹은 반드시 위로!
어느 모양으로 심기어졌더뇨? 이상스런 나무 나의 몸이여!
오오 알맞은 위치! 좋은 위아래!
아담의 슬픈 유산도 그대로 받았노라.
나의 적은 연륜으로 이스라엘의 이천 년을 헤었노라.
나의 존재는 우주의 한낱 초조한 오점이었도다.
목마른 사슴이 샘을 찾아 입을 잠그듯이
이제 그리스도의 못박히신 발의 성혈에 이마를 적시며―
오오! 신약의 태양을 한아름 안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나비 정지용
나비
시키지 않는 일이 서둘러 하고 싶기에 난로에 싱싱한 물푸레 갈아 지피고 등피(燈皮) 호 호 닦아 끼우어 심지 튀기니 불꽃이 새록 돋다 미리 떼고 걸고 보니 카렌다 이튿날 날짜가 미리 붉다 이제 차츰 밟고 넘을 다람쥐 등솔기같이 구부레 뻗어나갈 연봉(連峯) 산맥 길 위에 아슬한 가을 하늘이여 초침 소리 유달리 뚝닥거리는 낙엽 벗은 산장 밤 창유리까지에 구름이 드뉘니 후 두 두 두 낙수 짓는 소리 크기 손바닥만한 어인 나비가 따악 붙어 들여다본다 가엾어라 열리지 않는 창 주먹 쥐어 징징 치니 날을 기식(氣息)도 없이 네 벽이 도리어 날개와 떤다 해발 오천 척 위에 떠도는 한 조각 비 맞은 환상 호흡하노라 서툴리 붙어 있는 이 자재화(自在畵) 한 폭은 활활 불 피워 담기어 있는 이상스런 계절이 몹시 부러웁다 날개가 찢어진 채 검은 눈을 잔나비처럼 뜨지나 않을까 무서워라 구름이 다시 유리에 바위처럼 부서지며 별도 휩쓸려 나려가 산 아래 어느 마을 위에 총총하뇨 백화(白樺)숲 희부옇게 어정거리는 절정 부유스름하기 황혼 같은 밤.
백록담, 문장사, 1941
난초 정지용
난초(蘭草)&
난초잎은
차라리 수묵색.
난초잎에
엷은 안개와 꿈이 오다.
난초잎은
한밤에 여느 다문 입술이 있다.
난초잎은
별빛에 눈떴다 돌아눕다.
난초잎은
드러난 팔굽이를 어쩌지 못한다.
난초잎에
적은 바람이 오다.
난초잎은
칩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내 맘에 맞는 이 정지용
내 맘에 맞는 이
당신은 내 맘에 꼭 맞는 이.
잘난 남보다 조그맣지만
어리둥절 어리석은 척
옛 사람처럼 사람 좋게 웃어 좀 보시오.
이리 좀 돌고 저리 좀 돌아보시오.
코 쥐고 뺑뺑이 치다 절 한 번만 합쇼.
호. 호. 호. 호. 내 맘에 꼭 맞는 이.
큰 말 타신 당신이
쌍무지개 홍예문 틀어 세운 벌로
내달리시면
나는 산날맹이 잔디밭에 앉아
기[口令]를 부르지요.
`앞으로―가. 요.'
`뒤로―가. 요.'
키는 후리후리. 어깨는 산고개 같아요.
호. 호. 호. 호. 내 맘에 맞는 이.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다시 해협 정지용
다시 해협(海峽)
정오 가까운 해협은
백묵 흔적이 적력(的歷)한 원주!
마스트 끝에 붉은 기가 하늘보다 곱다.
감람 포기 포기 솟아오르듯 무성한 물이랑이여!
반마(班馬)같이 해구(海狗)같이 어여쁜 섬들이 달려오건만
일일이 만져 주지 않고 지나가다.
해협이 물거울 쓰러지듯 휘뚝하였다.
해협은 엎질러지지 않았다.
지구 위로 기어가는 것이
이다지도 호수운 것이냐!
외진 곳 지날 제 기적은 무서워서 운다.
당나귀처럼 처량하구나.
해협의 칠월 햇살은
달빛보담 시원타.
화통 옆 사닥다리에 나란히
제주도 사투리하는 이와 아주 친했다.
스물한 살 적 첫 항로에
연애보담 담배를 먼저 배웠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다알리아 정지용
다알리아
가을볕 째앵하게
내려쪼이는 잔디밭.
함빡 피어난 다알리아.
한낮에 함빡 핀 다알리아.
시악시야, 네 살빛도
익을 대로 익었구나.
젖가슴과 부끄럼성이
익을 대로 익었구나.
시악시야, 순하디 순하여 다오.
암사슴처럼 뛰어다녀 보아라.
물오리 떠돌아 다니는
흰 못물 같은 하늘 밑에,
함빡 피어나온 다알리아.
피다 못해 터져 나오는 다알리아.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달 정지용
달
선뜻! 뜨인 눈에 하나 차는 영창
달이 이제 밀물처럼 밀려오다.
미욱한 잠과 베개를 벗어나
부르는 이 없이 불려 나가다.
한밤에 홀로 보는 나의 마당은
호수같이 둥긋이 차고 넘치노나.
쪼그리고 앉은 한옆에 흰 돌도
이마가 유달리 함초롬 고와라.
연연턴 녹음, 수묵색으로 짙은데
한창때 곤한 잠인 양 숨소리 설키도다.
비둘기는 무엇이 궁거워 구구 우느뇨,
오동나무 꽃이야 못 견디게 향그럽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딸레 정지용
딸레
딸레와 쬐그만 아주머니,
앵도나무 밑에서
우리는 늘 셋 동무.
딸레는 잘못하다
눈이 멀어 나갔네.
눈 먼 딸레 찾으러 갔다 오니
쬐그만 아주머니마저
누가 데려갔네.
방울 혼자 흔들다
나는 싫어 울었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또 하나 다른 태양 정지용
또 하나 다른 태양(太陽)&
온 고을이 받들 만한
장미 한 가지가 솟아난다 하기로
그래도 나는 고와 아니하련다.
나는 나의 나이와 별과 바람에도 피로웁다.
이제 태양을 금시 잃어버린다 하기로
그래도 그리 놀라울 리 없다.
실상 나는 또 하나 다른 태양으로 살았다
사랑을 위하얀 입맛도 잃는다.
외로운 사슴처럼 벙어리 되어 산길에 설지라도―
오오, 나의 행복은 나의 성모 마리아!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말 1 정지용
말 1&
말아, 다락 같은 말아,
너는 점잔도 하다마는
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 편인 말아,
검정콩 푸렁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잔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말 2 정지용
말 2&
청대나무 뿌리를 우여어차! 잡아 뽑다가 궁둥이를 찧었네.
짠 조수물에 흠뻑 불리어 휙 휙 내두르니 보랏빛으로 피어오른 하늘이 만만하게 비어진다.
채축에서 바다가 운다.
바다 위에 갈매기가 흩어진다.
오동나무 그늘에서 그리운 양 졸리운 양한 내 형제 말님을 찾아갔지.
`형제여, 좋은 아침이오.'
말님 눈동자에 엊저녁 초사흘 달이 하릿하게 돌아간다.
`형제여 뺨을 돌려대소. 왕왕.'
말님의 하이얀 이빨에 바다가 시리다.
푸른 물 들 듯한 언덕에 햇살이 자개처럼 반짝거린다.
`형제여, 날씨가 이리 휘영청 개인 날은 사랑이 부질없어라.'
바다가 치마폭 잔주름을 잡아온다.
`형제여, 내가 부끄러운 데를 싸매었으니
그대는 코를 풀어라.'
구름이 대리석빛으로 퍼져 나간다.
채찍이 번뜻 배암을 그린다.
`오호! 호! 호! 호! 호! 호! 호!'
말님의 앞발이 뒷발이요 뒷발이 앞발이라.
바다가 네 귀로 돈다.
쉿! 쉿! 쉿!
말님의 발이 여덟이요 열여섯이라.
바다가 이리떼처럼 짖으며 온다.
쉿! 쉿! 쉿!
어깨 위로 넘어 닿는 마파람이 휘파람을 불고
물에서 뭍에서 팔월이 퍼덕인다.
`형제여, 오오, 이 꼬리 긴 영웅이야!'
`날씨가 이리 휘영청 개인 날은 곱슬머리가 자랑스럽소라!'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말 3 정지용
말 3
까치가 앞서 날고,
말이 따라가고,
바람 소올, 소올, 물소리 쫄 쫄 쫄,
유월 하늘이 동그라하다, 앞에는 퍼언한 벌,
아아, 사방이 우리 나라로구나.
아아, 위통 벗기 좋다, 휘파람 불기 좋다. 채찍이 돈다, 돈다, 돈다, 돈다.
말아,
누가 났나? 너를. 너는 몰라.
말아,
누가 났나? 나를. 내도 몰라.
너는 시골 듬에서
사람스런 숨소리를 숨기고 살고
내사 대처 한복판에서
말스런 숨소리를 숨기고 다 자랐다.
시골로나 대처로나 가나 오나
양친 못 보아 서럽더라.
말아,
메아리 소리 쩌르렁! 하게 울어라,
슬픈 놋방울 소리 맞춰 내 한마디 할라니.
해는 하늘 한복판, 금빛 해바라기가 돌아가고,
파랑콩 꽃타리 하늘대는 두둑 위로
머언 흰 바다가 치어드네.
말아,
가자, 가자니. 고대(古代)와 같은 나그네길 떠나가자.
말은 간다.
까치가 따라온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무서운 시계 정지용
무서운 시계(時計)
오빠가 가시고 난 방 안에
숯불이 박꽃처럼 새워 간다.
산모루 돌아가는 차, 목이 쉬어
이 밤사 말고 비가 오시려나?
망토 자락을 여미며 여미며
검은 유리만 내어다보시겠지!
오빠가 가시고 나신 방 안에
시계 소리 서마서마 무서워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바다 1 정지용
바다 1&
오․오․오․오․오․소리치며 달려가니
오․오․오․오․오․연달아서 몰아온다.
간밤에 잠 살포시
머언 뇌성이 울더니,
오늘 아침 바다는
포도빛으로 부풀어졌다.
철석, 처얼석, 철석, 처얼석, 철석,
제비 날아들 듯 물결 사이사이로 춤을 추어.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바다 2 정지용
바다 2
한백년 진흙 속에
숨었다 나온 듯이,
게처럼 옆으로
기어가 보노니,
머언 푸른 하늘 알로
가이없는 모래밭.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바다 3 정지용
바다 3
외로운 마음이
한 종일 두고
바다를 불러―
바다 위로
밤이
걸어온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바다 4 정지용
바다 4
후주근한 물결 소리 등에 지고 홀로 돌아가노니
어디선지 그 누구 쓰러져 울음 우는 듯한 기척,
돌아서서 보니 먼 등대가 반짝반짝 깜박이고
갈매기떼 끼루룩 끼루룩 비를 부르며 날아간다.
울음 우는 이는 등대도 아니고 갈매기도 아니고
어딘지 홀로 떨어진 이름 모를 서러움이 하나.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바다 5 정지용
바다 5
바둑돌은
내 손아귀에 만져지는 것이
퍽은 좋은가 보아.
그러나 나는
푸른 바다 한복판에 던졌지.
바둑돌은
바다로 거꾸로 떨어지는 것이
퍽은 신기한가 보아.
당신도 인제는
나를 그만만 만지시고,
귀를 들어 팽개를 치십시오.
나라는 나도
바다로 거꾸로 떨어지는 것이
퍽은 시원해요.
바둑돌의 마음과
이내 심사는
아아무도 모르지라요.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바다 6 정지용
바다 6
고래가 이제 횡단한 뒤
해협이 천막처럼 퍼덕이오.
……흰 물결 피어오르는 아래로 바둑돌 자꾸 자꾸 내려가고,
은방울 날리듯 떠오르는 바다 종달새……
한나절 노려보오 움켜잡아 고 빨간 살 뺏으려고.
미역잎새 향기한 바위틈에
진달래꽃빛 조개가 햇살 쪼이고,
청제비 제 날개에 미끄러져 도―네
유리판 같은 하늘에.
바다는―속속들이 보이오.
청댓잎처럼 푸른
바다
봄
꽃봉오리 줄등 켜듯한
조그만 산으로―하고 있을까요.
솔나무 대나무
다옥한 수풀로―하고 있을까요.
노랑 검정 알롱달롱한
블랑키트 두르고 쪼그린 호랑이로―하고 있을까요.
당신은 `이러한 풍경'을 데불고
흰 연기 같은
바다
멀리 멀리 항해합쇼.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바다 7 정지용
바다 7
바다는
푸르오,
모래는
희오, 희오,
수평선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
정오 하늘,
한 한가운데 돌아가는 태양,
내 영혼도
이제
고요히 고요히 눈물겨운 백금 팽이를 돌리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바다 8 정지용
바다 8
흰 구름
피어오르오,
내음새 좋은 바람
하나 찼소,
미역이 휙지고
소라가 살 오르고
아아, 생강집같이
맛 들은 바다,
이제
칼날 같은 상어를 본 우리는
뱃머리로 달려 나갔소,
구멍 뚫린 붉은 돛폭 퍼덕이오,
힘은 모조리 팔에!
창 끝은 꼭 바로!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바다 9 정지용
바다 9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같이
재재발랐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로 몰아다 붙이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씻었다.
이 앨쓴 해도(海圖)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회동그라니 받쳐 들었다!
지구는 연잎인 양 오므라들고……펴고……
백록담, 문장사, 1941
바람 정지용
바람&
바람 속에 장미(薔薇)가 숨고
바람 속에 불이 깃들다.
바람에 별과 바다가 씻기우고
푸른 묏부리와 나래가 솟다.
바람은 음악(音樂)의 호수(湖水).
바람은 좋은 알리움!
오롯한 사랑과 진리(眞理)가 바람에 옥좌(玉座)를 고이고
커다란 하나와 영원(永遠)이 펴고 날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바람 2 정지용
바람 2
바람.
바람.
바람.
너는 내 귀가 좋으냐?
너는 내 코가 좋으냐?
너는 내 손이 좋으냐?
내사 왼통 빨개졌네.
내사 아무치도 않다.
호 호 칩어라 구보로!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발열 정지용
발열(發熱)
처마 끝에 서린 연기 따라
포도순이 기어 나가는 밤, 소리 없이,
가물음 땅에 스며든 더운 김이
등에 서리나니, 훈훈히,
아아, 이 애 몸이 또 달아오르노나.
가쁜 숨결을 드내쉬노니, 박나비처럼,
가녀린 머리, 주사 찍은 자리에, 입술을 붙이고
나는 중얼거리다, 나는 중얼거리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다신교도와도 같이.
아아, 이애가 애자지게 보채노나!
불도 약도 달도 없는 밤,
아득한 하늘에는
별들이 참벌 날으듯하여라.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백록담 정지용
백록담(白鹿潭)
□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 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 2
암고란(巖古蘭), 환약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 3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白樺)가 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白樺)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 5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
□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읜 송아지는 움매―움매―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 7
풍란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솨―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넌출 기어간 흰 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이 피하지 않는다.
□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대풀 석용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 식물을 새기며 취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촐한 물을 그리어 산맥 위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이겨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 9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백록담, 문장사, 1941
병 정지용
병
부엉이 울던 밤
누나의 이야기―
파랑 병 깨치면
금시 파랑 바다.
빨강 병 깨치면
금시 빨강 바다.
뻐꾸기 울던 날
누나 시집갔네―
파랑 병을 깨뜨려
하늘 혼자 보고.
빨강 병을 깨뜨려
하늘 혼자 보고.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불사조 정지용
불사조(不死鳥)
비애! 너는 모양할 수도 없도다.
너는 나의 가장 안에서 살았도다.
너는 박힌 화살, 날지 않는 새,
나는 너의 슬픈 울음과 아픈 몸짓을 지니노라.
너를 돌려 보낼 아무 이웃도 찾지 못하였노라.
은밀히 이르노니―행복이 너를 아주 싫어하더라.
너는 짐짓 나의 심장을 차지하였더뇨?
비애! 오오 나의 신부! 너를 위하여 나의 창과 웃음을 닫았노라.
이제 나의 청춘이 다한 어느 날 너는 죽었도다.
그러나 나를 묻은 아무 석문(石門)도 보지 못하였노라.
스스로 불탄 자리에서 나래를 펴는
오오 비애! 너의 불사조 나의 눈물이여!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비 정지용
비&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죵죵 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가리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낯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백록담, 문장사, 1941
비극 정지용
비극(悲劇)
`비극(悲劇)'의 흰 얼굴을 뵈인 적이 있느냐?
그 손님의 얼굴은 실로 미(美)하니라.
검은 옷에 가리워 오는 이 고귀(高貴)한 심방(尋訪)에 사람들은 부질없이 당황(唐慌)한다.
실상 그가 남기고 간 자취가 얼마나 향(香)그럽기에
오랜 후일(後日)에야 평화(平和)와 슬픔과 사랑의 선물을 두고 간 줄을 알았다.
그의 발옮김이 또한 표범의 뒤를 따르듯 조심스럽기에
가리어 듣는 귀가 오직 그의 노크를 안다.
묵(墨)이 말라 시(詩)가 써지지 아니하는 이 밤에도
나는 맞이할 예비가 있다.
일찌기 나의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드린 일이 있기에
혹은 이 밤에 그가 예의(禮儀)를 갖추지 않고 올 양이면
문 밖에서 가벼이 사양하겠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비로봉 1 정지용
비로봉(毘盧峯) 1
백화(白樺) 수풀 앙당한 속에
계절이 쪼그리고 있다.
이곳은 육체 없는 요적(寥寂)한 향연장
이마에 스며드는 향료로운 자양!
해발 오천 피이트 권운층 위에
그싯는 성냥불!
동해는 푸른 삽화처럼 옴직 않고
유리알이 참벌처럼 옮겨간다.
연정은 그림자마저 벗자
산드랗게 얼어라! 귀뚜라미처럼.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비로봉 2 정지용
비로봉(毘盧峯) 2
담장이
물들고,
다람쥐 꼬리
숱이 짙다.
산맥 위의
가을 길―
이마 바르히
해도 향그로워
지팽이
자진 마짐
흰 들이
우놋다.
백화(白樺) 홀홀
허울 벗고,
꽃 옆에 자고
이는 구름,
바람에
아시우다.
백록담, 문장사, 1941
산너머 저쪽 정지용
산너머 저쪽
산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뻐꾸기 영 위에서
한나절 울음 운다.
산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철나무 치는 소리만
서로 맞아 쩌 르 렁!
산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늘 오던 바늘 장수도
이 봄 들며 아니 뵈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산소 정지용
산소
서낭 산골 시오리 뒤로 두고
어린 누이 산소를 묻고 왔소.
해마다 봄바람 불어를 오면,
나들이 간 집새 찾아가라고
난만히 피는 꽃을 심고 왔소.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산에서 온 새 정지용
산에서 온 새
새삼나무 싹이 튼 담 위에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산엣 새는 파랑 치마 입고.
산엣 새는 빨강 모자 쓰고.
눈에 아름아름 보고 지고.
발 벗고 간 누이 보고 지고.
따순 봄날 이른 아침부터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산엣 색시 들녘 사내 정지용
산엣 색시 들녘 사내
산엣 새는 산으로,
들녘 새는 들로.
산엣 색시 잡으러
산에 가세.
작은 재를 넘어서서,
큰 봉엘 올라서서,
`호―이'
`호―이'
산엣 색시 날래기가
표범 같다.
치달려 달아나는
산엣 색시,
활을 쏘아 잡었습나?
아아니다,
들녘 사내 잡은 손은
차마 못 놓더라.
산엣 색시,
들녘 쌀을 먹였더니
산엣 말을 잊었습데.
들녘 마당에
밤이 들어,
활 활 타오르는 화톳불 너머
넘어다 보면―
들녘 사내 선웃음 소리
산엣 색시
얼굴 와락 붉었더라.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삼월 삼짇날 정지용
삼월(三月) 삼짇날
중, 중, 때때 중,
우리 애기 까까머리.
삼월 삼짇날,
질나라비, 훨, 훨,
제비새끼, 훨, 훨,
쑥 뜯어다가
개피떡 만들어
호, 호, 잠들여 놓고
냥, 냥, 잘도 먹었다.
중, 중, 때때 중,
우리 애기 상제로 사갑소.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삽사리 정지용
삽사리
그날 밤 그대의 밤을 지키던 삽사리 괴임직도 하이 짙은 울 가시 사립 굳이 닫히었거니 덧문이요 미닫이오 안의 또 촉불 고요히 돌아 환히 새우었거니 눈이 치로 쌓인 고삿길 인기척도 아니하였거니 무엇에 후젓하던 맘 못 놓이길래 그리 짖었더라니 얼음 아래 잔돌 사이 뚫노라 죄죄대던 개울물 소리 기어들세라 큰 봉을 돌아 둥그레 둥긋이 넘쳐 오던 이윽달도 선뜻 나려설세라 이저리 서대던 것이러냐 삽사리 그리 굴음직도 하이 내사 그댈 새레 그대것엔들 닿을 법도 하리 삽사리 짖다 이내 허울한 나릇 도사리고 그대 벗으신 고운 신이마 위하며 자더니라.
백록담, 문장사, 1941
새빨간 기관차 정지용
새빨간 기관차(機關車)
느으릿 느으릿 한눈 파는 겨를에
사랑이 수이 알아질까도 싶구나.
어린 아이야, 달려가자,
두 뺨에 피어오른 어여쁜 불이
일찍 꺼져 버리면 어찌하자니?
줄달음질쳐 가자.
바람은 휘잉. 휘잉.
만틀 자락에 몸이 떠오를 듯.
눈보라는 풀. 풀.
붕어 새끼 꾀어내는 모이 같다.
어린아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새빨간 기관차처럼 달려가자!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석류 정지용
석류(石榴)&
장미꽃처럼 곱게 피어가는 화로에 숯불,
입춘 때 밤은 마른 풀 사르는 냄새가 난다.
한겨울 지난 석류 열매를 쪼개어
홍보석 같은 알을 한 알 두 알 맛보노니,
투명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금붕어처럼 어린 여릿여릿한 느낌이여.
이 열매는 지난해 시월 상달, 우리 둘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작은 아씨야, 가녀린 동무야, 남몰래 깃들인
네 가슴에 졸음 조는 옥토끼가 한 쌍.
옛 못 속에 헤엄치는 흰 고기의 손가락, 손가락,
외롭게 가볍게 스스로 떠는 은(銀)실, 은(銀)실,
아아 석류알을 알알이 비추어 보며
신라 천년의 푸른 하늘을 꿈꾸노니.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선취 1 정지용
선취(船醉) 1
배 난간에 기대 서서 휘파람을 날리나니
새까만 등솔기에 팔월달 햇살이 따가워라.
금 단추 다섯 개 달은 자랑스러움, 내처 시달픔.
아리랑조라도 찾아볼까, 그 전날 부르던,
아리랑조 그도 저도 다 잊었습네, 이제는 버얼써,
금 단추 다섯 개를 삐우고 가자, 파아란 바다 위에.
담배도 못 피우는, 수탉 같은 머언 사랑을
홀로 피우며 가노니, 느긋 느긋 흔들 흔들리면서.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소곡 정지용
소곡(小曲)&
물새도 잠들어 깃을 사리는
이 아닌 밤에,
명수대(明水臺) 바위 틈 진달래꽃
어찌면 타는 듯 붉으뇨.
오는 물, 가는 물,
내쳐 보내고, 헤어질 물
바람이사 애초 못 믿을 손,
입맞추곤 이내 옮겨 가네.
해마다 제철이면
한 등걸에 핀다기소니,
들새도 날아와
애닯다 눈물짓는 아침엔,
이울어 하롱하롱 지는 꽃잎,
섧지 않으랴, 푸른 물에 실려가기,
아깝고야, 아기자기
한창인 이 봄밤을,
촛불 켜들고 밝히소
아니 붉고 어찌료.
백록담, 문장사, 1941
슬픈 기차 정지용
슬픈 기차(汽車)
우리들의 기차는 아지랑이 남실거리는 섬나라 봄날 온 하루를 익살스런 마도로스 파이프를 피우며 간 단 다.
우리들의 기차는 느으릿 느으릿 유월 소 걸어가듯 걸어 간 단 다.
우리들의 기차는 노오란 배추꽃 비탈밭 새로
헐레벌떡거리며 지나 간 단 다.
나는 언제든지 슬프기는 슬프나마 마음만은 가벼워
나는 차창에 기댄 대로 휘파람이나 날리자.
먼 데 산이 군마(軍馬)처럼 뛰어오고 가까운 데 수풀이 바람처럼 불려 가고
유리판을 펼친 듯, 뇌호내해(瀨戶內海) 퍼언한 물 물. 물. 물.
손가락을 담그면 포도빛이 들으렷다.
입술에 적시면 탄산수처럼 끓으렷다.
복스런 돛폭에 바람을 안고 뭇 배가 팽이처럼 밀려가다 간,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나는 차창에 기댄 대로 옥토끼처럼 고마운 잠이나 들자.
청(靑)만틀 깃자락에 마담 R의 고달픈 뺨이 불그레 피었다, 고운 석탄불처럼 이글거린다.
당치도 않은 어린아이 잠재기 노래를 부르심은 무슨 뜻이뇨?
잠들어라.
가여운 내 아들아.
잠들어라.
나는 아들이 아닌 것을, 웃수염 자리 잡혀가는, 어린 아들이 버얼써 아닌 것을.
나는 유리쪽에 갑갑한 입김을 비추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름이나 그시며 가 자.
나는 느긋느긋한 가슴을 밀감쪽으로나 씻어 내리자.
대수풀 울타리마다 요염한 관능과 같은 홍춘(紅椿)이 피맺혀 있다.
마당마다 솜병아리 털이 폭신폭신하고,
지붕마다 연기도 아니 뵈는 햇볕이 타고 있다.
오오, 개인 날씨야, 사랑과 같은 어질머리야, 어질머리야.
청(靑)만틀 깃자락에 마담 R의 가여운 입술이 여태껏 떨고 있다.
누나다운 입술을 오늘이야 실컷 절하며 갚노라.
나는 언제든지 슬프기는 슬프나마,
오오, 나는 차보다 더 날아가려지는 아니하련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슬픈 인상화 정지용
슬픈 인상화(印象畵)
수박 냄새 품어오는
첫 여름의 저녁때……
먼 해안 쪽
길 옆 나무에 늘어선
전등. 전등.
헤엄쳐 나온 듯이 깜박거리고 빛나노나.
침울하게 울려오는
축항(築港)의 기적소리…… 기적소리……
이국 정조로 퍼덕이는
세관의 깃발. 깃발.
시멘트 깐 인도측으로 사풋사풋 옮기는
하이얀 양장의 점경(點景)!
그는 흘러가는 실심(失心)한 풍경이어니……
부질없이 오랑쥬 껍질 씹는 시름……
아아, 애시리(愛施利)․황(黃)!
그대는 상해로 가는구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승리자 김안드레아 정지용
승리자(勝利者) 김(金)안드레아
새남터 욱진어 뽕잎 아래 서서
옛 어른이 실로 보고 일러주신 한 거룩한 이야기―
앞에 돌아 나간 푸른 물굽이가 이 땅과 함께 영원하다면
이는 우리 겨레와 함께 끝까지 빛날 기억이로다.
일천팔백사십육년 구월 십육일
방포 취타하고 포장이 앞서나감에
무수한 흰옷 입은 백성이 결진한 곳에
이미 좌깃대가 높이 살기롭게 솟았더라.
이 지겹고 흉흉하고 나는 새도 자취를 감출 위풍이 떨치는 군세는
당시 청국 바다에 뜬 법국 병선 대도독 세시리오와
그의 막하 수백을 사로잡아 문죄함이런가?
대체 무슨 사정으로 이러한 어명이 내리었으며
이러한 대국권이 발동하였던고?
혹은 사직의 안위를 범한 대역도나 다사림이었던고?
실로 군소리도 없는 앓는 소리도 없는 뿔도 없는
조찰한 피를 담은 한 `양'의 목을 베이기 위함이었도다.
지극히 유순한 `양'이 제대에 오르매
마귀와 그의 영화를 부수기에 백천의 사자떼보다도 더 영맹하였도다.
대성전 장막이 찢어진 제 천유여 년이었건만
아직도 새로운 태양의 소식을 듣지 못한 죽음 그늘에 잠긴 동방일우에
또 하나 `갈보리아산상의 형제'여!
오오 좌깃대에 몸을 높이 달리우고
다시 열두 칼날의 수고를 덜기 위하여 몸을 틀어 다인
오오 지상의 전신 안드레아 김 신부!
일찍이 천주를 알아 사랑한 탓으로 아버지의 위태한 목숨을 뒤에 두고
그의 외로운 어머니마저 홀로 철화 사이에 숨겨두고
처량히 국금과 국경을 벗어나아간 소년 안드레아!
오문부 이역한동에서 오로지 천주의 말씀을 배우기에
침식을 잊은 신생 안드레아!
빙설과 주림과 썰매에 몸을 부치어 요야천리를 건너며
악수와 도적의 밀림을 지나 굳이 막으며 죽이기로만 꾀하던
조국 변문을 네번째 두드린 부제 안드레아!
황해의 거친 파도를 한짝 목선으로 넘어(오오 위태한 영적!)
불같이 사랑한 나라땅을 밟은 조선 성직자의 장형 안드레아!
포학한 치도곤 아래 조찰한 뼈를 부술지언정
감사에게 `소인'을 바치지 아니한 오백 년 청반의 후예 안드레아 김대건!
나라와 백성의 영혼을 사랑한 값으로
극죄에 질안한 관장을 위하여
그의 승직을 기구한 관후장자 안드레아!
표양이 능히 옥졸까지도 놀래인 청년성도 안드레아!
재식이 고금을 누르고
보람도 없이 정교한 세계지도를 그리어
군주와 관장의 눈을 열은 나라의 산 보배 안드레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도
오히려 성교를 가르친 선목자 안드레아!
두 귀에 화살을 박아 체구 그대로 십자가를 이룬 치명자 안드레아!
성주 예수 받으신 성면오독을 보람으로
얼굴에 물과 회를 받은 수난자 안드레아!
성주 예수 성분의 수위를 받으신 그대로 받은 복자 안드레아!
성주 예수 받으신 거짓 질안을 따라 거짓 질안으로 죽은 복자 안드레아!
오오 그들은 악한 권세로 죽인
그의 시체까지도 차지하지 못한 그날
거룩한 피가 이미 이 나라의 흙을 조찰히 씻었도다.
외교의 거친 덤풀을 밟고 자라나는
주의 포도 다래가
올해에 십삼만 송이!
오오 승리자 안드레아는 이렇듯이 이기었도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시계를 죽임 정지용
시계(時計)를 죽임
한밤에 벽시계는 불길한 탁목조(啄木鳥)!
나의 뇌수를 미신바늘처럼 쪼다.
일어나 쫑알거리는 시간을 비틀어 죽이다.
잔인한 손아귀에 감기는 가냘픈 모가지여!
오늘은 열 시간 일하였노라.
피로한 이지(理智)는 그대로 치차(齒車)를 돌리다.
나의 생활은 일절 분노를 잊었노라.
유리 안에 설레는 검은 곰인 양 하품하다.
꿈과 같은 이야기는 꿈에도 아니하련다.
필요하다면 눈물도 제조할 뿐!
어쨌든 정각에 꼭 수면하는 것이
고상한 무표정이요 한 취미로 하노라!
명일(明日)!(일자(日字)가 아니어도 좋은 영원한 혼례!)
소리 없이 옮겨 가는 나의 백금 체펠린의 유유한 야간 항로여!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아침 정지용
아침&
프로펠러 소리……
선연한 커―브를 돌아나갔다.
쾌청! 짙푸른 유월 도시는 한 층계 더 자랐다.
나는 어깨를 고르다.
하품……목을 뽑다.
붉은 수탉 모양 하고
피어오르는 분수를 물었다……뿜었다……
햇살이 함빡 백공작의 꼬리를 폈다.
수련이 화판을 폈다.
오무라쳤던 잎새. 잎새. 잎새.
방울방울 수은을 바쳤다.
아아 유방처럼 솟아오른 수면!
바람이 굴고 거위가 미끄러지고 하늘이 돈다.
좋은 아침―
나는 탐하듯이 호흡하다.
때는 구김살없는 흰 돛을 달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압천 정지용
압천(鴨川)
압천 십릿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여울물 소리……
찬 모래알 쥐어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어짜라. 부수어라. 시원치도 않아라.
역구풀 우거진 보금자리
뜸부기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떴다,
비맞이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렌지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압천 십릿벌에
해가 저물어……저물어……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애국의 노래 정지용
애국(愛國)의 노래
채찍 아래 옳은 도리
삼십육년 피와 눈물
나중까지 견뎠거니
자유 이제 바로 왔네
동분서주 혁명 동지
밀림 속의 백전의병(百戰義兵)
독립군의 총부리로
세계 탄환 쏘았노라
왕이 없이 살았건만
정의만을 모시었고
신의로써 맹방 얻어
희생으로 이기었네
적이 바로 항복하니
석기(石器) 적의 어린 신화
어촌으로 돌아가고
동과 서는 이제 형제
원수 애초 맺지 말고
남의 손짓 미리 막아
우리끼리 굳셀 뿐가
남의 은혜 잊지 마세
진흙 속에 묻혔다가
하늘에도 없어진 별
높이 솟아 나래 떨듯
우리 나라 살아났네
만국 사람 우러보아
누가 일러 적다 하리
뚜렷하기 그지없어
온 누리가 한눈일레
대조(大潮), 1946.1
옛 이야기 구절 정지용
옛 이야기 구절
집 떠나가 배운 노래를
집 찾아오는 밤
논둑길에서 불렀노라.
나가서도 고달프고
돌아와서도 고달펐노라.
열네 살부터 나가서 고달펐노라.
나가서 얻어온 이야기를
닭이 울도록,
아버지께 이르노니―
기름불은 깜박이며 듣고,
어머니는 눈에 눈물을 고이신 대로 듣고
니치대던 어린 누이 안긴 대로 잠들며 듣고
윗방 문설주에는 그 사람이 서서 듣고,
큰 독 안에 실린 슬픈 물같이
속살대는 이 시고을 밤은
찾아온 동네 사람들처럼 돌아서서 듣고,
―그러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어떤 시원찮은 사람들이
끊이지 못하고 그대로 간 이야기어니
이 집 문고리나, 지붕이나,
늙으신 아버지의 착하디 착한 수염이나,
활처럼 휘어다 붙인 밤하늘이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전하는 이야기 구절일러라.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오월 소식 정지용
오월(五月) 소식(消息)
오동(梧桐)나무 꽃으로 불 밝힌 이곳 첫 여름이 그립지 아니한가?
어린 나그네 꿈이 시시로 파랑새가 되어 오려니.
나무 밑으로 가나 책상 턱에 이마를 고일 때나,
네가 남기고 간 기억(記憶)만이 소근소근거리는구나.
모처럼만에 날아온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울렁거리어
가여운 글자마다 먼 황해가 남설거리나니.
……나는 갈매기 같은 종선을 한창 치달리고 있다……
쾌활(快活)한 오월(五月) 넥타이가 내처 난데없는 순풍(順風)이 되어,
하늘과 딱 닿은 푸른 물결 위에 솟은,
외따른 섬 로만틱을 찾아 갈까나.
일본말과 아라비아 글자를 알으키러 간
쬐그만 이 페스탈로치야, 꾀꼬리 같은 선생님이야,
날마다 밤마다 섬 둘레가 근심스런 풍랑(風浪)에 씹히는가 하노니,
은은히 밀려오는 듯 머얼리 우는 오르간 소리…………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옥류동 정지용
옥류동(玉流洞)&
골에 하늘이
따로 트이고,
폭포소리 하잔히
봄 우뢰를 울다.
날가지 겹겹이
모란꽃잎 포개이는 듯.
자위 돌아 사풋 질듯
위태로이 솟은 봉우리들.
골이 속속 접히어들어
이내[晴嵐]가 새포롬 서그럭거리듯 숫도림.
꽃가루 묻힌 양 날아올라
나래 떠는 해.
보랏빛 햇살이
폭 지어 비껴 걸치이매,
기슭에 약초들의
소란한 호흡!
들새도 날아들지 않고
신비가 한껏 저자 선 한낮.
물도 젖어지지 않아
흰 돌 위에 따로 구르고,
다가 스미는 향기에
길초마다 옷깃이 매워라.
귀뚜리도
흠식한 양
옴짓
아니 긴다.
백록담, 문장사, 1941
온정 정지용
온정(溫井)
그대 함께 한나절 벗어 나온 그 머흔 골짝이 이제 바람이 차지하는다 앞나무의 곱은 가지에 걸리어 파람 부는가 하니 창을 바로 치놓다 밤 이윽자 화롯불 아쉬워지고 촉불도 추위 타는 양 눈썹 아사리느니 나의 눈동자 한밤에 푸르러 누운 나를 지키는다 푼푼한 그대 말씨 나를 이내 잠들이고 옮기셨는다 조찰한 베개로 그대 예시니 내사 나의 슬기와 외롬을 새로 고를 밖에! 땅을 쪼개고 솟아 고이는 태고로 하냥 더운 물 어둠 속에 홀로 지적거리고 성긴 눈이 별도 없는 것이에 날리어라.
백록담, 문장사, 1941
유리창 1 정지용
유리창(琉璃窓)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유리창 2 정지용
유리창(琉璃窓) 2
내어다보니
아주 캄캄한 밤,
어험스런 뜰 앞 잣나무가 자꾸 커 올라간다.
돌아서서 자리로 갔다.
나는 목이 마르다.
또, 가까이 가
유리를 입으로 쪼다.
아아, 항 안에 든 금붕어처럼 갑갑하다.
별도 없다, 물도 없다, 쉬파람 부는 밤.
소증기선처럼 흔들리는 창
투명한 보랏빛 유리알 아,
이 알몸을 끄집어내라, 때려라, 부릇내라.
나는 열이 오른다.
뺨은 차라리 연정스레이
유리에 부빈다, 차디 찬 입맞춤을 마신다.
쓰라리, 알연히, 그싯는 음향―
머언 꽃!
도회에서 고운 화재가 오른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유선애상 정지용
유선애상(流線哀傷)
생김생김이 피아노보담 낫다.
얼마나 뛰어난 연미복 맵시냐.
산뜻한 이 신사를 아스팔트 위로 곤도라인 듯
몰고들 다니길래 하도 딱하길래 하루 청해 왔다.
손에 맞는 품이 길이 아주 들었다.
열고 보니 허술히도 반음 키―가 하나 남았더라.
줄창 연습을 시켜도 이건 철로판에서 밴 소리로구나.
무대로 내보낼 생각을 아예 아니했다.
애초 달랑거리는 버릇 때문에 궂은 날 막 잡아 버렸다.
함초롬 젖어 새초롬하기는 새레 회회 떨어 다듬고 나선다.
대체 슬퍼하는 때는 언제길래
아장아장 팩팩거리기가 위주냐.
허리가 모조리 가늘어지도록 슬픈 행렬에 끼여
아주 천연스레 굴던 게 옆으로 솔쳐나자―
춘천 삼백리 벼룻길을 냅다 뽑는데
그런 상장(喪章)을 두른 표정은 그만하겠다고 꽥꽥― 꽥―
몇 킬로 휘달리고 나서 거북처럼 흥분한다.
징징거리는 신경방석 위에 소스듬 이대로 견딜 밖에.
쌍쌍이 날아오는 풍경들을 뺨으로 헤치며
내처 살풋 엉긴 꿈을 깨어 진저리를 쳤다.
어느 화원으로 꾀어 내어 바늘로 찔렀더니만
그만 호접같이 죽더라.
백록담, 문장사, 1941
은혜 정지용
은혜(恩惠)
회한도 또한
거룩한 은혜.
깁실인 듯 가늘은 봄볕이
골에 굳은 얼음을 쪼개고,
바늘 같이 쓰라림에
솟아 동그는 눈물!
귀 밑에 아른거리는
요염한 지옥불을 끄다.
간곡한 한숨이 뉘게로 사모치느뇨?
질식한 영혼에 다시 사랑이 이슬 내리도다.
회한에 나의 해골을 담그고저.
아아 아프고저!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인동차 정지용
인동차(忍冬茶)
노주인의 장벽(腸壁)에
무시로 인동(忍冬)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 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서리다가
바깥 풍설(風雪)소리에 잠착하다.
산중에 책력(冊歷)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백록담, 문장사, 1941
임종 정지용
임종(臨終)&
나의 임종하는 밤은
귀뚜리 하나도 울지 말라.
나중 죄를 들으신 신부는
거룩한 산파처럼 나의 영혼을 가르시라.
성모 취결례 미사 때 쓰고 남은 황촉불!
담 머리에 숨은 해바라기꽃과 함께
다른 세상에 태양을 사모하며 돌아라.
영원한 나그네길 노자로 오시는
성주 예수의 쓰신 원광!
나의 영혼에 칠색의 무지개를 심으시라.
나의 평생이요 나중인 괴롬!
사랑의 백금 도가니에 불이 되라.
달고 달으신 성모의 이름 부르기에
나의 입술을 타게 하라.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장수산 1 정지용
장수산(長壽山) 1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랬거니 아람드리 큰 솔이 베어짐직도 하이 골이 울어 메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직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멧새도 울지 않아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종이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다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줍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 내―
백록담, 문장사, 1941
장수산 2 정지용
장수산(長壽山) 2
풀도 떨지 않는 돌산이오 돌도 한 덩이로 열두 골을 고비고비 돌았어라 찬 하늘이 골마다 따로 씌우었고 얼음이 굳이 얼어 디딤돌이 믿음직하이 꿩이 기고 곰이 밟은 자욱에 나의 발도 놓이노니 물소리 귀뚜리처럼 직직하놋다. 피락 마락하는 햇살에 눈 위에 눈이 가리어 앉다. 흰 시울 아래 흰 시울이 눌리어 숨쉬는다 온 산중 내려앉은 휙진 시울들이 다치지 안히! 나도 내더져 앉다 일찍이 진달래꽃 그림자에 붉었던 절벽 보이얀 자리 위에!
백록담, 문장사, 1941
절정 정지용
절정(絶頂)&
석벽에는
주사(朱砂)가 찍혀 있소.
이슬 같은 물이 흐르오.
나래 붉은 새가
위태한 데 앉아 따 먹으오.
산포도 순이 지나갔소.
향그런 꽃뱀이
고원 꿈에 옴치고 있소.
거대한 주검 같은 장엄한 이마,
기후조가 첫번 돌아오는 곳,
상현달이 사라지는 곳,
쌍무지개 다리 디디는 곳,
아래서 볼 때 오리온성좌와 키가 나란하오.
나는 이제 상상봉에 섰소.
별만한 흰 꽃이 하늘대오.
민들레 같은 두 다리 간조롱해지오.
해 솟아오르는 동해―
바람에 향하는 먼 기폭처럼
뺨에 나부끼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조약돌 정지용
조약돌&
조약돌 도글도글……
그는 나의 혼의 조각이러뇨.
앓는 피에로의 설움과
첫길에 고달픈
청제비의 푸념 겨운 지줄댐과,
꾀집어 아직 붉어오르는
피에 맺혀,
비 날리는 이국 거리를
탄식하며 헤매노나.
조약돌 도글도글……
그는 나의 혼의 조각이러뇨.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조찬 정지용
조찬(朝餐)
햇살 피어
이윽한 후,
머흘 머흘
골을 옮기는 구름.
길경(桔梗) 꽃봉오리
흔들려 씻기우고.
차돌부터
촉 촉 죽순 돋듯.
물소리에
이가 시리다.
앉음새 갈이어
양지 쪽에 쪼그리고,
서러운 새 되어
흰 밥알을 쪼다.
백록담, 문장사, 1941
종달새 정지용
종달새&
삼동내―얼었다 나온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리리……
왜 저리 놀려 대누.
어머니 없이 자란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리리……
왜 저리 놀려 대누.
해바른 봄날 한종일 두고
모래톱에서 나 홀로 놀자.
백록담, 문장사, 1941
지도 정지용
지도(地圖)&
지리(地理) 교실(敎室) 전용(專用) 지도(地圖)는
다시 돌아와 보는 미려(美麗)한 칠월(七月)의 정원(庭園).
천도(千島) 열도(列島) 부근(附近) 가장 짙푸른 곳은 진실(眞實)한 바다보다 깊다.
한가운데 검푸른 점(點)으로 뛰어들기가 얼마나 황홀(恍惚)한 해학(諧謔)이냐!
의자(椅子) 위에서 다이빙 자세(姿勢)를 취(取)할 수 있는 순간(瞬間),
교원실(敎員室)의 칠월(七月)은 진실(眞實)한 바다보담 적막(寂寞)하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진달래 정지용
진달래&
한 골에서 비를 보고 한 골에서 바람을 보다 한 골에 그늘 딴 골에 양지 따로따로 갈아 밟다 무지개 햇살에 빗걸린 골 산벌떼 두름박 지어 위잉위잉 두르는 골 잡목수풀 누릇불긋 어우러진 속에 감추어 낮잠 듭신 칡범 냄새 가장자리를 돌아 어마어마 기어 살아나온 골 산봉에 올라 별보다 깨끗한 돌을 드니 백화가지 위에 하도 푸른 하늘……포르르 풀매……온 산중 홍엽이 수런수런거린다 아랫절 불 켜지 않은 장방에 들어 목침을 달구어 발바닥 꼬아리를 슴슴 지지며 그제사 범의 욕을 그놈 저놈하고 이내 누웠다 바로 머리맡에 물소리 흘리며 어느 한곬으로 빠져나가다가 난데없는 철 아닌 진달래 꽃사태를 만난 나는 만신(萬身)을 붉히고 서다.
백록담, 문장사, 1941
천주당 정지용
천주당(天主堂)
열없이 창까지 걸어가 묵묵히 서다
이마를 식히는 유리쪽은 차다
무료(無聊)히 씹히는 연필 꽁지는 떫다
백록담, 문장사, 1941
촛불과 손 정지용
촛불과 손
고요히 그싯는 손씨로
방 안 하나 차는 불빛!
별안간 꽃다발에 안긴 듯이
올빼미처럼 일어나 큰 눈을 뜨다.
□ ※
그대의 붉은 손이
바위 틈에 물을 따 오다,
산양(山羊)의 젖을 옮기다,
간소(簡素)한 채소(菜蔬)를 기르다,
오묘한 가지에
장미(薔薇)가 피듯이
그대 손에 초밤불이 낳도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춘설 정지용
춘설(春雪)&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숭거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워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 기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
꽃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백록담, 문장사, 1941
카페 프란스 정지용
카페 프란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비뚜루 선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뻐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뚤은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오오 패롯[鸚鵡] 서방! 굳 이브닝!'
`굳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려!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파라솔 정지용
파라솔
연잎에서 연잎내가 나듯이
그는 연잎 냄새가 난다.
해협을 넘어 옮겨다 심어도
푸르리라, 해협이 푸르듯이.
불시로 상기되는 뺨이
성이 가시다, 꽃이 스스로 괴롭듯.
눈물을 오래 어리우지 않는다.
윤전기 앞에서 천사처럼 바쁘다.
붉은 장미 한 가지 고르기를 평생 삼가리
대개 흰 나리꽃으로 선사한다.
원래 벅찬 호수에 날아들었던 것이라
어차피 헤기는 헤어나간다.
학예회 마지막 무대에서
자폭(自暴)스런 백조인 양 흥청거렸다.
부끄럽기도 하나 잘 먹는다
끔찍한 비―프스테이크 같은 것도!
오피스의 피로에
태엽처럼 풀려왔다.
램프에 갓을 씌우자
도어를 안으로 잠갔다.
기도와 수면의 내용을 알 길이 없다.
포효하는 검은 밤, 그는 조란(鳥卵)처럼 희다.
구기어지는 것 젖는 것이
아주 싫다.
파라솔같이 채곡 접히기만 하는 것은
언제든지 파라솔같이 펴기 위하여―
백록담, 문장사, 1941
파충류 동물 정지용
파충류 동물
시커먼 연기와 불을 뱉으며
소리지르며 달아나는
괴상하고 거―창한 파충류 동물
그년에게
내 동정의 결혼반지를 찾으러 갔더니만
그 큰 궁둥이로 떼밀어
…털 크 덕…털 크 덕…
나는 나는 슬퍼서 슬퍼서
심장이 되구요
옆에 앉은 소러시아 눈알 푸른 시악시
`당신은 지금 어드메로 가십나?'
…털크덕…털크덕…털크덕…
그는 슬퍼서 슬퍼서
담낭이 되구요
저 기―다란 짱골라는 대장(大腸).
뒤처졌는 왜놈은 소장(小腸).
`이이! 저 다리 털 좀 보아!'
털크덕…털크덕…털크덕…털크덕…
유월달 백금 태양 내려쪼이는 밑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화 기관의 망상이여!
자토 잡초 백골을 짓밟으며
둘둘둘둘둘둘 달아나는
굉장하게 기―다란 파충류 동물
바나나 한 쪽 떼어 들고
가만히 생각하노니
`내가 가는 길도
이 바나나와 같구나`
아아 산을 돌아
몇만리 물을 건너
남쪽 나라 바나나가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의 입에 씹히네.
씹히네.
몇천리 물을 건너
데굴데굴 굴러 온 몸이
밤으로면 자근자근 시름이 씹히네.
바나나 한 쪽 떼어 들고 오늘밤에도
몇만리 남쪽 땅
바나나 열릴 나무를 생각하면서
흐릿한 불빛 아래 내 몸이 누웠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폭포 정지용
폭포(瀑布)&
산골에서 자란 물도
돌 베람빡 낭떠러지에서 겁이 났다.
눈뎅이 옆에서 졸다가
꽃나무 아래로 우정 돌아
가재가 기는 골짝
죄그만 하늘이 갑갑했다.
갑자기 호숩어질라니
마음 조일 밖에.
흰 발톱 갈가리
앙징스레도 할퀸다.
어쨌든 너무 재재거린다.
나려 질리자 쭐삣 물도 단번에 감수했다.
심심산천에 고사리밥
모조리 졸리운 날
송화가루
노랗게 날리네.
산수 따라온 신혼 한 쌍
앵두같이 상기했다.
돌뿌리 뾰죽뾰죽 무척 고부라진 길이
아기자기 좋아라 왔지!
하인리히 하이네 적부터
동그란 오오 나의 태양도
겨우 끼리끼리의 발꿈치를
조롱조롱 한나절 따라왔다.
산간에 폭포수는 암만해도 무서워서
기염기염 기며 나린다.
백록담, 문장사, 1941
풍랑몽 1 정지용
풍랑몽(風浪夢) 1
당신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려십니까.
끝없는 울음 바다를 안으올 때
포도빛 밤이 밀려오듯이,
그 모양으로 오시려십니까.
당신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려십니까.
물 건너 외딴 섬, 은회색 거인이
바람 사나운 날, 덮쳐 오듯이,
그 모양으로 오시려십니까.
당신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려십니까.
창 밖에는 참새떼 눈초리 무거웁고
창 안에는 시름 겨워 턱을 고일 때,
은고리 같은 새벽달
부끄럼성스런 낯가림을 벗듯이,
그 모양으로 오시려십니까.
외로운 졸음, 풍랑에 어리울 때
앞 포구에는 궂은 비 자욱히 들리고
행선배 북이 웁니다, 북이 웁니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할아버지 정지용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담뱃대를 물고
들에 나가시니,
궂은 날도
곱게 개이고,
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
들에 나가시니,
가문 날도
비가 오시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해바라기 씨 정지용
해바라기 씨
해바라기 씨를 심자.
담모롱이 참새 눈 숨기고
해바라기 씨를 심자.
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
바둑이가 앞발로 다지고
괭이가 꼬리로 다진다.
우리가 눈감고 한밤 자고 나면
이슬이 나려와 같이 자고 가고,
우리가 이웃에 간 동안에
햇빛이 입맞추고 가고,
해바라기는 첫 시악시인데
사흘이 지나도 부끄러워
고개를 아니 든다.
가만히 엿보러 왔다가
소리를 깩! 지르고 간 놈이―
오오, 사철나무 잎에 숨은
청개고리 고놈이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해협 정지용
해협(海峽)
포탄으로 뚫은 듯 동그란 선창으로
눈썹까지 부풀어오른 수평이 엿보고,
하늘이 함폭 내려앉아
크나큰 암탉처럼 품고 있다.
투명한 어족이 행렬하는 위치에
흣하게 차지한 나의 자리여!
망토 깃에 솟은 귀는 소라 속같이
소란한 무인도의 각적(角笛)을 불고―
해협 오전 두 시의 고독은 오롯한 원광(圓光)을 쓰다
서러울 리 없는 눈물을 소녀처럼 짓자.
나의 청춘은 나의 조국!
다음날 항구의 개인 날씨여!
항해는 정히 연애처럼 비등하고
이제 어드매쯤 한밤의 태양이 피어오른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향수 정지용
향수(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호랑나비 정지용
호랑나비&
화구를 메고 산을 첩첩 들어간 후 이내 종적이 묘연하다 단풍이 이울고 봉마다 찡그리고 눈이 날고 영(嶺) 위에 매점은 덧문 속문이 닫히고 삼동(三冬)내―열리지 않았다 해를 넘어 봄이 짙도록 눈이 처마와 키가 같았다 대폭(大幅) 캔바스 위에는 목화송이 같은 한 떨기 지난해 흰 구름이 새로 미끄러지고 폭포소리 차츰 불고 푸른 하늘 되돌아서 오건만 구두와 안신이 나란히 놓인 채 연애가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날 밤 집집 들창마다 석간(夕刊)에 비린내가 끼치었다 박다태생(搏多胎生) 수수한 과부 흰 얼굴이사 회양 고성 사람들끼리에도 익었건만 매점 바깥주인 된 화가는 이름조차 없고 송화가루 노랗고 뻑 뻑국 고비 고사리 고부라지고 호랑나비 쌍을 지어 훨훨 청산을 넘고.
백록담, 문장사, 1941
호수 1 정지용
호수(湖水) 1&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하니
눈감을 밖에.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호수 2 정지용
호수(湖水) 2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꾸 간지러워.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홍시 정지용
홍시
어저께도 홍시 하나.
오늘에도 홍시 하나.
까마귀야. 까마귀야.
우리 남게 왜 앉았나.
우리 오빠 오시걸랑.
맛 뵐라구 남겨 뒀다.
후락 딱 딱
훠이 훠이!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홍역 정지용
홍역(紅疫)&
석탄 속에서 피어나오는
태고연(太古然)히 아름다운 불을 둘러
십이월 밤이 고요히 물러앉다.
유리도 빛나지 않고
창장(窓帳)도 깊이 내리운 대로―
문에 열쇠가 끼인 대로―
눈보라는 꿀벌떼처럼
잉잉거리고 설레는데,
어느 마을에서는 홍역이 철쭉처럼 난만하다.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홍춘 정지용
홍춘(紅椿)
춘(椿)나무 꽃 피 뱉은 듯 붉게 타고
더딘 봄날 반은 기울어
물방아 시름없이 돌아간다.
어린아이들 제 춤에 뜻 없는 노래를 부르고
솜병아리 양지쪽에 모이를 가리고 있다.
아지랑이 졸음 조는 마을 길에 고달퍼
아름아름 알아질 일도 몰라서
여윈 볼만 만지고 돌아오노니.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황마차 정지용
황마차(幌馬車)
이제 마악 돌아 나가는 곳은 시계집 모퉁이, 낮에는 처마 끝에 달아 맨 종달새란 놈이 도회바람에 나이를 먹어 조금 연기 끼인 듯한 소리로 사람 흘러 나려가는 쪽으로 그저 지줄지줄거립니다.
그 고달픈 듯이 깜박깜박 졸고 있는 모양이―가여운 잠의 한점이랄지요―붙일 데 없는 내 맘에 떠오릅니다. 쓰다듬어 주고 싶은, 쓰다듬을 받고 싶은 마음이올시다. 가엾은 내 그림자는 검은 상복처럼 지향 없이 흘러 나려갑니다. 촉촉히 젖은 리본 떨어진 낭만풍의 모자 밑에는 금붕어의 분류(奔流)와 같은 밤 경치가 흘러 나려갑니다. 길 옆에 늘어선 어린 은행나무들은 이국 척후병의 걸음새로 조용히 흘러 나려갑니다.
슬픈 은(銀) 안경이 흐릿하게
밤비는 옆으로 무지개를 그린다.
이따금 지나가는 늦은 전차가 끼이익 돌아 나가는 소리에 내 조고만 혼이 놀란 듯이 파닥거리나이다. 가고 싶어 따뜻한 화롯가를 찾아가고 싶어. 좋아하는 코란경을 읽으면서 남경콩이나 까먹고 싶어, 그러나 나는 찾아 돌아갈 데가 있을라구요?
네거리 모퉁이에 씩 씩 뽑아 올라간 붉은 벽돌집 탑에서는 거만스런 12시가 피뢰침에게 위엄 있는 손가락을 치어들었소. 이제야 내 모가지가 쭐 삣 떨어질 듯도 하구려. 솔잎새 같은 모양새를 하고 걸어가는 나를 높다란 데서 굽어보는 것은 아주 재미있을 게지요. 마음놓고 술술 소변이라도 볼까요. 헬멧 쓴 야경순사가 필름처럼 쫓아오겠지요!
네거리 모퉁이 붉은 담벼락이 흠씩 젖었소. 슬픈 도회의 뺨이 젖었소. 마음은 열없이 사랑의 낙서를 하고 있소. 홀로 글썽글썽 눈물짓고 있는 것은 가엾은 소―니야의 신세를 비추는 빨간 전등의 눈알이외다. 우리들의 그 전날밤은 이다지도 슬픈지요. 이다지도 외로운지요. 그러면 여기서 두 손을 가슴에 여미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리까?
길이 아주 질어터져서 뱀눈알 같은 것이 반짝반짝거리고 있소. 구두가 어찌나 크던동 걸어가면서 졸음이 오십니다. 진흙에 착 붙어버릴 듯하오. 철없이 그리워 동그스레한 당신의 어깨가 그리워. 거기에 내 머리를 대이면 언제든지 머언 따뜻한 바다 울음이 들려오더니……
……아아, 아무리 기다려도 못 오실 이를……
기다려도 못 오실 이 때문에 졸리운 마음은 황마차(幌馬車)를 부르노니, 휘파람처럼 불려 오는 황마차(幌馬車)를 부르노니, 은으로 만들은 슬픔을 실은 원앙새 털 깎은 황마차(幌馬車), 꼬옥 당신처럼 참한 황마차(幌馬車), 찰 찰찰 황마차(幌馬車)를 기다리노니.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