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종두를 도입한 지석영
지난 2009년 우리나라 사망원인 1위는 암이었다.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자살, 당뇨병 등이 그 뒤를 잇는다. 그러나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암은 사망원인으로 고려할 대상조차 아니었다. 전염병이라는 강력한 사망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암이 한국인의 사망원인 1호가 된 배경에는 한국의 보건 수준이 높아져서 전염병의 위협이 줄고 평균수명이 늘어난 덕이 크다.
전염병과의 싸움에서 잡은 승기(勝氣)
전염병은 인류의 역사를 여러 번 바꾸어 놓을 정도로 큰 위력을 발휘했다. 고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아테네를 멸망시킨 일등공신 중 하나는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아테네 역병이었고, 중세의 흑사병은 유럽의 발전을 늦추고 원나라의 멸망을 불러왔다. 홍역은 대항해시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절멸시켰다. 20세기에도 전염병은 맹위를 떨쳐서 1918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스페인 독감은 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원인이 되었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전염병이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얼마 전 사스나 조류독감 소동이 있었지만, 과거의 대규모 전염병과 비교하면 거의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을 만큼 피해가 작었다.
<그림 1> 1796년 최초의 종두 접종에 성공한 에드워드 제너(1749~1823).
사진 제공: Medicina Geriatrica
인류가 이처럼 전염병을 이겨낼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1796년 5월 14일,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가 소의 천연두(우두)에 걸린 하녀의 손바닥 종기에서 고름을 채취하여 여덟 살 난 제임스 핍스에게 주사를 한 사건이었다. 아이가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자 제너는 6주 후 소의 천연두에서 직접 뽑은 고름을 주사했다. 아이는 우두 접종으로 면역력이 생겼기 때문에 천연두를 앓지 않았다. 세계 최초의 백신인 종두법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천연두가 종두법 덕분에 말 그대로 ‘사라졌다’. 이 종두법을 도입하여 마마(천연두의 우리말 이름)로부터 한국인을 해방시킨 사람이 바로 지석영이다.
한국 최초의 종두법을 시행하기까지
지석영은 서울 낙원동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학교육을 받은 경험은 없었으나 일찍부터 서양 학문에 관심을 두고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의학책을 탐독했다.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이 일본과 체결되면서 지석영의 스승인 박영선이 그 해 수신사로 가게 되자 종두법에 관심이 많던 지석영은 박영선에게 간청하여 일본인 구가가 쓴 <종두귀감 種痘龜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림 2> 지석영이 우두시술에 사용한 우두침과 유리판. 사진 제공: 동아일보
종두귀감으로 종두법의 이론을 공부한 지석영은 1879년 서울에 천연두가 유행하여 조카딸과 많은 어린이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종두법을 본격적으로 배울 결심을 한다. 그는 일본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에서 종두법을 배우려고 엽전 10냥을 가지고 부산까지 먼 길을 떠났다. 1879년 9월, 지석영의 나이 25세였을 때였다. 지석영은 제생의원 원장 마츠마에와 군의(軍醫) 도즈카로부터 2개월 간 종두법과 우두 제조법을 배우고 우두침 2개를 얻을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던 1879년 12월 6일,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에 들른 지석영은 2살 난 처남에게 우두를 놓아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종두법을 실시했다. 이듬해 서울에서 시행된 종두법은 천연두를 막는 데 크게 이바지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두묘의 공급이 문제였다. 종두를 시행하려면 천연두에 걸린 소에서 뽑아낸 유백색의 체액이 필요한데, 이것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석영은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건너가서 도쿄 위생국 우두종계소장 기쿠치에게 두묘의 제조법과 저장법을 배운 뒤 귀국하여 안정적인 두묘 공급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82년 임오군란 중 종두법이 일본에서 도입되었다는 이유로 애써 만든 종두장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한반도를 전염병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노력
난리 중에 잠시 피신했던 지석영은 정국이 바뀌자 서울로 돌아와 종두장을 재건했다. 또한, 전라도 어사 박영교의 초청을 받아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이듬해에는 충청도 어사 이용호의 요청에 의하여 공주에도 우두국을 만들어 종두법을 널리 보급했다. 이렇게 종두법의 보급에 진력하면서도 1883년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성균관전적과 사헌부 지평을 역임했다. 1885년에는 그간 쌓은 지식과 경험을 종합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우두법 저서, <우두신설 牛痘新說>을 쓰고 우두교수관으로서 전라도 지방을 순회, 종두법을 시행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림 3 지석영 선생이 사용했던 의료기구(1879년). 사진 제공: 동아일보
한편, 지석영은 후학 양성에도 힘을 써서 학부대신에게 의학교의 설립을 제의하여 1899년 설립된 의학교의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1902년에는 그의 제창으로 훈동에 의학교의 부속병원이 설립되어 이듬해 배출된 첫 의학교 졸업생 19명이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했다. 지석영의 관심은 천연두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황성신보’에 〈양매창론 楊梅瘡論〉을 발표하여 매독의 해독을 대중에게 알렸고, 온역(瘟疫:봄철에 유행하는 급성전염병), 전염병, 양매창(楊梅瘡:악성 매독으로 인한 발진)의 예방법을 만들 것을 주장했다.
1907년 의학교가 대한의원 의육부로 개편되면서 학감에 취임하였는데, 대한의원 의육부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이어지니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의대 학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지석영은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일본인들에 의해 학감에서 강제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와 함께 일본은 종두법이 일본으로부터 도입되었다는 점을 선전하기 위해 지석영의 종두 도입을 기념하는 행사를 일부러 크게 열어 선전 수단으로 활용했다.
우리나라에서 천연두는 1951년에도 4만 3,000명이 걸려 1만 1,000여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될 정도로 극성을 부렸지만 1960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보고는 없다. 한때 인류를 위협하고 선조들이 두려워했던 전염병인 천연두는 지석영과 같은 선각자의 노력으로 퇴치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교육팁]
왜 걸리지도 않은 질병 때문에 예방접종을 맞아야 하는 것일까?
과거에는 두창(천연두)이나 홍역과 같은 전염병이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백신이 개발되고 예방접종이 실행되면서 전염병 환자의 발생이 큰 폭으로 줄었다. 하지만 이 외에도 우리를 위협하는 전염병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기 위해 예방접종을 꼭 맞아야 한다.
이외에도 예방접종의 필요성과 백신의 접종방법, 주의사항 및 전염병의 종류는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 홈페이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
질병관리본부 홈페이지(www.cdc.go.kr)를 방문해 질병에 대한 정보와 예방방법 등을 알아보자.
[교육 과정]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1단원 우리몸
중학교 2학년 5단원 소화와 순환
고등학교 1학년 4단원 생명 · 자극과 반응
글 / 서홍관 국립암센터 가정의학과 의사 hongwna@ncc.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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