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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계 여행 유감(有感)
지난 11월 중순 중국 호남성 장가계를 여행할 기회를 가졌다.
워낙 널리 알려진 유명 관광지라서 사진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 눈에 익힌 곳이라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안 사람과 그 친구들이 계획한 것이어서 카메라 봉사라도 할 요량으로 따라 나서게 된 것이었다.
3박 5일!
여행 경비를 줄이기 위해 오며가며 밤 비행기를 타기로 한 모양이었다. 두 시간
남짓 비행 후 호남성의 성도인 장사에 도착하여 바로 호텔 투숙, 눈을 붙였나
싶게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고 장가계로 향했다. 4 시간 정도의 긴 버스 여행이었는데, 중국 교포 출신의 여행 가이드가 말씨는 좀 이상해도 서글서글해 보이고
나름의 유머도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에 따르면 호남성의 넓이가 우리나라 남북한 넓이와 엇비슷한 정도라고 하니 중국이 대국임에는 틀림없다. 북쪽의 호북성과의 경계가 동정호라는 말에 고교
시절 배웠던 두시언해 중 “동정호 네 일홈을 듣다니 오늘 악양루에 올라라”로
시작되는 “등악양루” 기억이 떠올랐다. 지도를 보니 호수가 길게 뻗어 있는 것이,
옛 삼국지 시대의 오나라와 초나라 사이의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갈 길이 바쁘니 그렇게 멀지 않을 것 같은 동정호 물과 악양 땅을 그냥 지나치는 수 밖에 없다. 허기야 날씨가 안개로 가득 차서, 간다고 해 봐야 잘 볼 수도 없을
터였다. 장가계에 도착한 후 점심을 먹은 후에도 안개 상황이 계속되는 바람에 원래 계획했던 천문산 탐방을 뒤로 미루고 보봉호수를 먼저 구경키로 하였다. 우리
나라의 산정호수와 비슷한 인공호수인데 유람선을 타고 둘러보는 것이었고 대단해 보이지는 않은 곳이었다.
다음 코스는 안개의 영향을 받지 않을 동굴 탐사. 황룡동굴은 석회암 동굴로서 내부에서 배를 탈 정도로 아시아 지역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했다. 동굴이야 다
비슷하겠지 하며 입구로 향하는데, 책 더미 위에 원숭이가 올라 앉아 사람의
해골을 들고 있는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괴이쩍다 싶어 아래를 보니 한문이
새겨져 있어 일단 포기하고, 옆으로 돌아보니 한글 번역문이 새겨져 있어 반갑게
읽어보았다. 그런데 몇 번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요즘
항간에 널리 소개된 VIP의 어법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이해를 포기하고 앞서 간 일행을 서둘러 따라가 동굴을 구경하고 배도 타보고
코스를 다 돌아 나오니 어느 새 잔등에 땀이 배었다. 안개가 그대로임을 확인하고
아까의 원숭이 동상을 지나쳐 오는데, 다른 쪽 면에 영문 번역본이 새겨져 있었다.
오늘 우리는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을 다른 데서 가져올 수 없고
내일 그들도 강과 산을 다시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인 즉
지구의 자연 자원을 남용하지 마시오.
안 그러면, 모레엔 원숭이들이 오늘의 인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될 테니까.
- 2008년 세계 지구의 날에 바침
영문을 읽고 나니 한문 원본도 이해가 되는 것 같더군요.
맨밑에 “지구의 날에 준다”라고 번역한 것으로 봐서 영문을 보고 번역한 듯 한데,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한글 번역을 하고 조각토록 한 그 용감성에 경의를
표하면서, 차후 관광객을 위해서라도 주중 대사관 같은 관계 기관들로부터 합당한 조치가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첫날 일정의 마지막은 맛사지 체험.
전에도 중국 여행 도중 한 번 발 마사지 서비스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 적은 돈으로 피로를 풀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어린 여자 아이들의 서비스를 받으며 몸을
맡긴다는 게 여간 마음에 걸리는 게 아니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동료들과 동행한 터라 혼자 몸을 빼기도 눈치 보이는 일이었고, 이번엔
전신 마사지라고 하니 경험 삼아 한 번 더 해보기로 했다.
지난 번 발 마사지 때보다는 더 나이들어 보이는 여자들이 들어와 서비스를
했는데, 우리는 중국어를 못하고 그들은 영어를 못하니 간단한 질문을 주고받는
데도 제대로 소통이 안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결혼한 여자도 한 사람 끼어
있었는데 이런 일이라도 해야 돈을 벌어 가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건 뻔하고
우리는 푼돈으로 여행 피로를 풀 수 있으니, 서로가 만족할 만한 거래라고 볼 수도 있으리라.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내 마음 속 한 구석엔 스멀스멀 싫은 감정이
피어오르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또,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내 경우는 마사지
효과가 대단한 것 같지도 않았다. 하여, 다시는 마사지라는 걸 받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는 기회가 되고 말았다.
다음 날도 안개는 마찬가지. 장가계를 대표한다는 천문산을 마지막 날 코스로 남겨두고 오늘은 대협곡으로 가서 최근에 만들었다고 하는 유리다리를 구경하기로 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 지역이 3모작, 4모작이 가능할 정도로 온난
하지만, 안개 낀 날씨가 다반사라고.
협곡에 걸쳐져 구축된 유리다리를 구경하러 가는데, 카메라를 일체 못 가지고
들어가게 하는 바람에 크게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혹시 떨어뜨려 다리의 유리
상판을 상할까 염려함이겠지만, 카메라맨을 무장해제하다니! 괘씸한 마음을 안고
다리에 올라봤지만 유리 바닥 밑에 선명하게 드러나야 할 계곡이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질 않는다. 무거운 카메라를 놔두고 온 게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어서 탐방한 곳은 십리화랑(十里畫廊).
시간을 아끼기 위해 모노레일차를 타고 둘러보았지만 구름/안개가 계곡을 휘감고
있어서 바람이 구름을 잠깐씩 치워줄 때에야 겨우 우뚝우뚝 솟아있는 봉우리들을
식별해볼 수 있었다. 십리화랑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산수화 경치일 것 같은데,
제대로 구경을 할 수 없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어서 케이블카를 타고
천자산을 둘러볼 때는 더 짙어진 안개 때문에 발 아래 있을 좋은 경치를 내려다
볼 수 없어 그 안타까움이 배가 되었다.
천자산 일대에 아쉬움만 남기고 돌아나오는 도중 가는 곳 마다 나타나는
장사꾼들 중 한 노파가 장가계 화첩을 들고 2천원이라며 사라고 졸랐다. 제대로
경치 구경을 못한 데다 마침 지갑에 천원짜리 두 세 장이 있음이 생각나 얼른
지불하고 앞서 간 동료들을 급히 쫓아 갔었다. 앞서 간 동료들을 따라잡고 나서야
아차 하는 후회가 드는 것이었다. 그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아쉬움이 이만저만
아닐 텐데, 그들에게도 한 권씩 선물할 생각을 왜 못했을꼬? 비싼 것도 아닌데---.
다음 날엔 꼭 그렇게 하리라 마음 먹고, 근방에서 저녁을 먹은 후에는 중국 소수민족 전통극 하나를 관람할 수 있었다. 내용은 잘 알 수 없지만 그런대로 볼만
했었다. 그러나 내용보다는 오히려 등장 인물들의 가무 솜씨와 극장 무대시설이
내게는 더 흥미로웠던 게 사실이다. 또 그 전 여행 때 관람했던 장한몽과 인상여강
쇼가 생각키우고, 이런 무대 연극이 중국에서는 많이 발달한 것 같아 부럽기도
했었다.
관광 마지막 날이 밝았으나 날씨는 나아진 게 없으니---!
해외여행을 여러 번 해봤지만 이렇게까지 날씨 불운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어쨌거나 그 동안 남겨두었던 천문산 관광에 나섰다. 세계 최장이라는 케이블카
(7.45 킬로미터, 40분 소요)를 이용하여 천문산으로 이동, 먼저 천문산사 절을
둘러보았으나 공산국가이다 보니 스님들은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이어서 잔도
코스로 접어들어 1000미터 낭떠러지에 구축된 잔도를 따라 걷게 되었는데,
일부 구간에는 유리로 된 잔도도 있었다.
잔도는 중국 역사에서 진나라 때나 삼국시대 때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가 오래 된 것임을 알 수 있고, 그 건설에 따른 위험을 생각하면 인명을 소모품 정도로 여기는 절대 왕권 하에서나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옛날보다는
건설기술이 많이 발전되었다고는 하지만 현재에도 관광을 위해서 그런 위험한
잔도가 건설되고 있다는 것은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관광을 위해서 중국 당국이 과감한 투자를 하는 예는 천문동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천문동은 산에 구멍이 뻥 뚫린 모습인데, 여기에서도 안개/구름에 가려서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하산을 해야 했다. 하산 코스는
1000개 정도의 계단을 내려가는 방법과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우리는 나이를 생각해서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했는데, 그 것은 지하 암석층을
60~70도 정도의 경사로 1000미터 이상 굴착해서 만든 대형 연속 에스컬레이터
시스템이었다. 이런 난공사를 해치운 그들의 집념과 기술력, 자금력 등이 놀라울
뿐이었다.
천문산을 내려와 천문동을 올려다 볼 때도 구름/안개의 방해는 여전했다.
그래서 莫謂山高空仰止 此中眞有上天梯(산이 높다고 헛되이 우러러 보지만 마라.
이 안에 실로 하늘 오르는 사다리가 있나니)라고 새겨진 동판 글씨만 확인하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얘기하는 하늘 사다리는 돌계단을 지칭함인지,
아니면 에스컬레이터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아직 의문으로 남아 있다.
여기서부터 장가계 시내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 심한 급경사 길이어서 사진 찍기에 좋은 곳일지는 몰라도 실제로 셔틀버스를 탄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아슬아슬하기만 한 길이었다.
천문산 구경도 마쳤으니 이번 여행도 끝이 난 셈이다.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 데 일등공신으로 치켜세워졌던 장량이 현명하게도 모든 관직과 녹봉을 마다하고 이 곳에 내려와 말년을 보냈고, 후사를 걱정한 유방이 그를 해치우려 했을 때 관군의 수색을 피해 숨어 살 수 있었다는 고사로 유명한 장가계의 지형과
산세는 이번 안개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이 쯤 해서 중국이 대국임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땅 덩어리가 넓고 인구가 많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풍부한 천연자원에 엄청난 물산과 금융자원, 그리고 최근 부각되고 있는 과학기술력에다 수 많은 관광자원까지, 실로 엄청난 대국이오
부국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관광 부국인 이 나라가 자랑하는 장가계에 서양인들이나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인 관광객을 찾아보기가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이 시끄럽게 중국말을 하는 사람들이고 거기에 조금 덜 시끄러운 한국인 상당수가 끼어 있을 뿐, 다른
언어나 인종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날씨 때문이거나 특정 기간에만 그럴 수도
있겠으나, 기억을 더듬어봐도 내가 경험한 다른 중국 여행의 경우에도 대개
비슷했었던 것 같다.
왜일까?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첫째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경제 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많은 중국인들이 관광에 나서게 되어 관광지가 너무 복잡하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들이 사용하는
말이 너무 시끄러워 주변 사람들은 자연히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는 점이다. 셋째로 의사소통에 세계 공용어인 영어도 잘 안 통하니 아마 여행 가이드 구하기도 어려울 거라는 점이다. 넷째로는 불편한 화장실 사용 문화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깔끔하지 못한 숙식이 문제일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사람을 상대로 식당 음식이 대부분 성의없이 준비되어 제공되는 것 같았고, 숙박 호텔은 방음
설비나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밤중에도 거리의 소음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귀로! 장가계에서 다시 장사로 이동, 밤 비행기 탑승을 기다렸으나,
심해진 안개 상황으로 결국 비행 불가 결정이 내려지게 되었다. 공항에서 밤을
지새는 경우가 내게도 오나 싶었는데, 탑승권을 불손한 공안요원들에게 반납한 후 공항 버스로 전원이 호텔로 안내되고 방을 배치 받게 된 것은 불행 중 다행!
밤 2시를 넘긴 시점이었으나 100여 명 정도(?)를 한 호텔에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항공사 대표로 나와 상황 처리를 하는 직원이나 호텔 직원들이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해 아주 불편했던 것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한 두 시간 눈을 붙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깨어 호텔 직원들이 들고 온 종이 쪽지를 보니 아침 7시까지 공항에 나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날씨가 약간
호전되어 겨우 이륙할 수 있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13시간 지연 출발한 셈이었다. 불편하고 불쾌한 경험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항공사의 상황 처리와 안내가
매끄럽지는 않았어도 나름대로 필수 기본적인 조치를 할려고 노력한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결국 이번 장가계 여행 기간 안개/구름만 구경하고 돌아온 셈이 되었으니 큰
아쉬움, 유감(遺憾)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패키지 여행에 비행 예약까지 미리
해야 하는 점을 고려할 때 장가계 지역 날씨 예보를 미리 받아보고 여행 결정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 실은 본인도 앱을 통해 5일간의 예보를 사전에 살펴보았지만 이미 그 때는 여행 계약이 끝나 출발 일자를 기다리는 상태였던 것이다.
아마 안개가 가장 덜한 계절을 찾아보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 모르겠다.
참고로, 이 글을 쓰는 지금 장가계 날씨를 체크해봐도 5일 내내 흐리고 비가 오는
것으로 예보가 나온다.
사진첩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다시 붙잡지 못해 동료들에게 선물을 못하고 만 것 또한 유감(遺憾)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날 사진첩 장사를 만날 수 있길 기대했으나 실패했기 때문이다. 행운의 여신에겐 머리털이 앞쪽에만 나 있어서 지나간 다음엔 잡을 수 없다고 한 게 그리스 신화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