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멸망 (高句麗滅亡)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듯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국가도 멸망한다. 모는 제국이 멸망할 시기에는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고 부패가 만연하는 등 망국의 기운이 퍼지기 마련이다. 고구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당시 수와 당에 맞서 70여년간 전쟁을 수행하면서 수의 100만 대군 당의 30만 대군을 물리치는 등 대군에 맞서 한 번도
대패하지 않는 등 국가를 굳건히 지켜내고 있었다.
중국의 강력한 통일왕조인 당나라의 침략에 맞서 연개소문은 강경한 지도노선과 통수력으로 고구려를 이끌었다. 645년
당태종은 대군을 동원하고도 양만춘과 연개소문에게 치욕적인 참패를 당했으며, 아들인 당고종은 전면전을 피하고 국경을
넘나들며 국지전과 소모전을 펼쳐 고구려를 지치게 하는 전략을 택한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군의 계속된 침공과
신라군의 협공의 위기 속에서 주된 방어선인 수도인 평양성까지 밀린 상황에서도 그는 고구려의 최고집권자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하지만 당나라의 계속된 침략에 맞서 승전을 거듭하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666년 사망하였다. 이 때 까지 고구려는 수,당과의
70여년간의 전쟁, 신라와의 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당당한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손실로
이미 국력이 상당히 소모된 상태였다. 연개소문의 사망은 고구려의 중심축이 없어진 상태에서 그의 맏아들 남생이 그의 직을
계승하였고 남건·남산 등이 권력을 나누어 맡아 고구려가 제모습을 찾는듯하였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아들 형제간의 분쟁으로 내분이 심화되었으며, 마침 국경을 순시하던 남생이 동생들의 대막리지직 찬탈
소식을 듣고 당에 망명하였으며,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12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는 등 고구려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민심도 흉흉하게 되어 국력이 분산된 상태에서 668년(보장왕 27) 김인문의 27만 신라군과 이적·설인귀의 당나라 군사 50만의
협공에 맞서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는 멸망으로 치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