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ius Roman Empire. 41-54 AD. As circa 50-54, Æ
Claudius AD 41-54. Rome. As Æ
Obv: TI CLAVDIVS CAESAR AVG P M TR P IMP - bare head left.
Rev: LIBERTAS AVG VSTA / S C - Libertas, draped, standing facing, head right., holding pileus in right. hand, l. extended.
Diameter: 27.6~29.2mm Weight: 8.96g C 47 RIC 113
2018.4.29 Sixbid- Naville Numismatics Ltd
Claudius AD 41-54. Rome
Claudius AD 41-54. Rome. As Æ
Obv: TI CLAVDIVS CAESAR AVG P M TR P IMP - bare head left.
Rev: S C - across field, Minerva advancing right, brandishing spear in right hand, holding round shield in left.
Diameter: 27.8~29.2mm Weight: 10,93g RIC I 100 Von Kaenel Type 60; BMCRE 149; BN 179.
2018.3.12 biddr - Savoca Coins
TIBERIVS CLAVDIVS CAESAR AVGVSTVS GERMANICVS
클라우디우스(Claudius)는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기원전 10년 8월 1일~54년 10월 13일)이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손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이기도 하며, 티베리우스의 조카이기도 하다. 전임 칼리굴라 황제의 친삼촌이기도 하다.
로마의 장군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소(小)안토니아 사이에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드루수스나 형 게르마니쿠스와는 달리
그는 원래부터 병약하고, 말을 더듬고 한쪽 발을 질질 끄는 버릇 때문에 황실 안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형인 게르마니쿠스
가 그를 배려해 주었고, 클라우디우스의 역사에 대한 재능과 흥미를 찾아낸 역사가 리비우스의 영향으로 에트루리아나 카르타고의 역
사를 저술하여 역사가로서의 측면을 갖게 되었다.
칼리굴라가 황제로 즉위한 후, 원로원에 의해 칼리굴라와 함께 집정관으로 취임하는 명예를 안게 되었다.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가
암살되자 1월 25일 황제가 되었다. 즉위에 임하기 전에 로마 원로원의 승인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근위군단의 군사력에 의해 즉
위한 것인지라, 이후 군사력이 로마 황제를 결정하는 군인황제 시대의 최초의 예가 되었다.
교양을 갖춘 역사가였던 그는 지혜로운 정책으로 로마에 대한 저항이 극렬했던 유대의 통치 문제 등을 해결하였지만,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는 낮았다.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아인이나 아니우니족 출신의 해방 노예 등을 등용하여 다양한 행정 분야를 감독할 권한을 부여했
다. 이것은 비(非)원로원 의원의 정치 참여를 증대하여, 황제에게의 권력 집중이나 관료제의 발달로 이어졌다.
45년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을 강제 추방하는 반유대주의정책을 실시하여 약 2만 5천 명의 유대인들이 그리스의 코린토스로 이주하였
다. 54년 독버섯에 중독되어 사망했다고 하지만, 4번째 아내이자 다음 황제인 네로의 어머니인 소(小) 아그리피나에게 암살되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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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41년 칼리굴라가 사비누스와 카이레아 등에 의해 암살당한 직후 친위대는 황제 적임자를 찾아 돌아다녔다. 황제의 혈통 중 가장
가까운 자로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자 많은 사서를 남긴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고려되었다. 클라우디우스는 당시에 공포
에 질려 커튼 뒤에 숨어 있었으나 결국 발견되었고, 신변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서야 친위대 병영으로 향하는 것을 수
락하였다. 그리고 친위대는 병영에서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에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에게 황제에 취임할지 여부를 물어보았다.
승낙이 떨어지자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에게 통수권을 부여하였다.
이로써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칼리굴라를 살해한 카이레아와 카이소니아에게 사형을 명했고, 또 다른 암살 주
도자 사비누스는 자결했다. 그리고 그는 연설을 했는데, 연설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는 말을 더듬어 의원들의 냉소를 샀고, 이 냉소는
그의 통치기간 동안 내내 지속되었다.
칼리굴라의 치세기에 너무 많은 것들이 잘못되었고, 클라우디우스는 이것들을 뒤처리해야만 했다. 우선 마우레타니아의 반란이 2년
만에 진정되었고, 마우레타니아는 각각 카이사레아를 중심으로 하는 카이사리엔시스와 팅기스를 중심으로 하는 팅기타나의 두 속주
로 분할되었다. 또, 그는 재정 파탄을 야기한 매상세의 폐지를 무효화하고 전임자가 만든 여러 자질구레한 세금들을 폐지했다. 여기에
서 나아가 불필요한 지출을 감소시키고 공직 선출지를 원로원으로 복귀시키자 재정은 서서히 회복되었다. 칼리굴라의 경솔한 처신으
로 인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던 유다이아에는 헤로데스 대왕의 후손인 헤로데스 아그리파를 파견해 해결했다. 하지만 아그리파는 3
년만에 병사했고, 유다이아는 결국 다시 시리아에 편입되었다.
이처럼 제국 전체는 다시 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나 황후 메살리나의 흉포성과 아내에 휘둘리는 황제의 심약한 성격이 반역을
불러 일으켰다. 메살리나가 사심에서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죽이게 하자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와 달마티아 총독 푸리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가 황제에 대한 반란을 계획한 것이었다. 달마티아의 군단들은 처음에는 카밀루스의 뜻에 따라 충성 서약을 파기했
으나, 곧 부활시켰고, 이로 인해 음모는 결국 붕괴되었다. 카밀루스는 살해되었고, 비니키아누스는 자결했다. 그리고 많은 의원들이
반역죄로 처벌받았다
그 다음 해 가장 큰 사건은 브리타니아 원정의 시작이었다. 강력한 왕 크노벨리누스 사후 브리타니아에 혼란이 찾아왔고, 그 영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