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날씨는 예측이 쉽지 않다.
겨울에는 당연히 눈이 내렸고, 도로위는 늘 흰색이었는데,
세상은 변해서 이제는 겨울에 흔하게 눈이 내린다.
누나 칠순을 기념하여 가족들이 함께 강화도를 여행했다.
과거에도 몇차례 강화도를 여행했는데, 그때 빠진 사진들을 중심으로
같이 추억을 여행하고자 한다.
강화도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말이 섬이지~ 들어가 보면 이것이 섬인가? 할 정도로 넓다.
김포에서 한강 규모의 바다를 건너면 '강화도'가 나오고, 강화도에서
북쪽으로 좁은 폭에 바다를 건너면 '교동도'가 나온다.
그래서 강화도는 유배지로서 많이 활용했고, 외세의 침입이 있을때
들어가서 항전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곳이다.
교동도에 유배되서 온 대표적인 사람이 연산군(1476.12 - 1495.02)이다.
조선10대 왕으로 태어났다. 성종과 폐비윤씨 사이에~
중종반정에 의하여 폐위되었고, 교동도로 와서 몇개월만에
29세로 죽었다. 위 사진은 유배 올 당시를 재현해서 만든 것.
원래 유배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다른 곳에 재현을 해 놓았다.
과거에는 입장료를 안 받았는데, 최근에는 1인당 5천원을 내야 입장이 된다.
유배지 뒷편으로 화개산 방향으로 공원을 조성중에 있었다.
아마 봄이 되면 주차할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올 것 같다.
교동도에서 북한쪽으로 근접한 곳에 '교동망향대'가 있다.
그야말로 한강 규모의 바다가 보이고, 그 너머에는 북한 사람들이
논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망원경으로 뚜렷하게 보이는 곳.
남한 '전망대'에서 볼 때에 북한과 가장 거리가 가까운 곳이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상황에 가시거리가 안 좋아서.. 아쉬움만 남기로 돌아섰다.
강화도 읍내에 있는 '석천돌솥밥'(강화대로 393번길8-1)에서 점심을 먹었다.
1인 식사비: 14,000원.
그리고 식당에서 800미터 거리에 있는 '조양방직' 카페로 향했다.
원래 빵집, 찻집이 주 목적인데, 오는 관광객들을 위하여 이것저것
추억과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고물들을 전시해 놓았다.
차(커피)를 주문하지 않고, 그냥 구경만 하고 나왔다.
평일에는 손님이 많지 않지만 주말에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장 매출이 높을 때는 1일에 1억을 찍은 적도 있다고~!
다이얼 전화기..
지금은 별것도 없지만, 과거에 이것을 사용했던
집은 아마.. 사장이나 회장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집에 전화기도 없앴고, 스마트폰으로 대체하고
있으니, 요즘은 전화기 없는 가정집도 많다.
벽시계...
태옆을 감아서 에너지를 얻어서 아래가 시계추가 움직여서 갔던 시계..
시골집 벽에 한개씩은 있었던 추억에 시계..
요즘은 AA밧데리로 가는 시계 or 전기 에너지를 먹고 가는
디지탈 시계가 나오면서, 고물이 되어 버렸다.
책가방들.
과거에는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이런 가방을 사용했다.
지금 중,고생들은 등에 메는 가방을 사용했다.
이 가방안에 책, 노트, 도시락, 필통 등을 넣고 다녔다.
전기밥솥..
과거에 사용했던 전기밥솥..
밥솥 등치를 보면 대가족 느낌이 난다.
요즘은 식구 숫자가 감소하다보니, 밥솥이 작다.
그리고 요즘 전기밥솥은 말을 할줄 안다.
취사가 시작됩니다. 보온이 됩니다. 등등..
성냥들.
지금은 '라이타'가 흔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는 라이타가 없었다.
오로지 성냥 밖에 없었다. 성냥도 아껴서 사용했다.
아침이면 정지(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면서, 부뚜막에
나무를 모아놓고, 성냥을 그었던 그 모습이 눈에 생생하다.
가장 흔하게 사용했던 '아리랑 성냥'
서서히 성냥이 흔해지면서, 판촉물(홍보물)로 작은 성냥갑을 만들어서
나눠 줬던 시절.
'라이타'가 나오면서 성냥 공장은 망했다.
'신혼예식장'
그러고보면.. 본인이 결혼할 때에 '예식장'에서 하지 못했고,
시골 마을회관에서 거의 무료로 했다.
그래서 그런지... 예식장을 잘 모른다.
1960년대.. 예식장에서는 입장료를 받은 듯 싶다.
60석에 6,000원이라...~
요즘은 예식장 사용료는 무료로 하더라도, 대부분 식비로
장사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대치동에 어느 예식장은 한끼에 15만원짜리 식사도 있다.
그런 예식장에 가서 축의금하려면 최소한 20만원은 내야 할듯~!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흑백사진.
1970년대쯤 찍은 모습..
아마.. 강화도 어느 여고 학생들이 체육복을 입고 찍은 것 같다.
당시만 해도.. 학생들 사이에 스킨쉽이 많았고, 사진을 찍어도
아주 가깝게 붙어서 찍었다.
요즘 중고생들이 사진을 찍는다면 아마.. 널직하게 떨어져서 찍을 것 같다.
한복 저고리를 입은 여고생인지? 여대생인지??
요즘은 여자들이 한복 없는 사람이 많았겠지만, 과거에는 한복을
한벌씩은 있어야 했나보다.
친구 결혼식에 와서 찍었는지.. 표정들이 참 밝다.
강화도에서 그나마 유명하다는 '전등사'
뒷편으로 난 산을 오르면서 약숫물을 한그릇 떠 먹었다.
물맛이 아주 좋았다.
한그릇 퍼 먹었으니, 아마.. 1년은 더 살수 있을듯...
전등사 뒷편으로 올라가 보면, 사찰을 중심으로 둥글게 '산성'이 펼쳐져 있다.
강화 '삼랑성'은 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불확실하다.
단군 할아버지가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했다고 '삼랑성'이라고 '고려사'에 남아 있는데,
잘은 몰라도.. 이것은 거짓말 같다. ㅎㅎ
성 안쪽에는 삼국 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이 있었다.
이곳은 조선 고종3년에 프랑스 군대가 침공한 병인양요때 양현수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 오면 160여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 유명하다.
삼랑성은 강화산성과 더불어 고려-조선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다른 성곽들과 다른 점은 좌측.. 외부쪽은 돌을 쌓아 놓았고,
우측 진지쪽으로는 흙을 채워서 길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무너지지 않은 산성의 모습이 정겹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