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키나와에서 성터 4곳을 돌아보았다. 성 뒤편의 노을이 환상이다.
오키나와에서 유구 왕국을 보다(2) 소운/박목철
오키나와 철판구이집에서 요리하는 분이 서양인을 닮아 실례를 무릅쓰고 혹시 서양인이냐고 물었다.
뜻밖에도 자신은 오키나와 인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오키나와는 일본에 속한 현이니,
당연히 자신은 일본인이라고 해야 하지만, 오키나와의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선입견을 품고 살펴본 오키나와는 일본과는 모든 면에서 차이가 크다.
우선 생김새도 일본인이라기보다는 동남아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옥의 구조, 역사의 흔적 등
일본이라는 느낌은 간판에 쓰여 있는 글씨가 일본어라는 것을 빼면 유사점을 찾기 어려웠다.
오키나와는 우리와 여러 면에서 관계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홍길동이 유구로 건너가서 왕국을 세웠다는 얘기(물론 하구이다)도 있고, 삼별초가 최후로 피신한 곳이
유구였다는 설은 일부 유적에서 사실로 확인되기도 한다. (기왓장에 고려기와공이 제작했다는 명운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 시기적으로 유구 왕국이 왕국의 기반을 세운 시기가 삼별초의 소멸 시기와 비슷하다.
그렇더라도, 이런 설은 고증이 뒷받침되지 않은 그저 얘깃거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책봉 국으로 청일 전쟁에서 중국이 패하므로 일본에 속국이 된 배경은 우리와 같다.
오키나와는 12세기 이전까지는 원시적 생활을 하는 집단에 불과했지만, 12세기경부터 아지(按司)라는
호족 세력이 생겨 남잔(南山) 쥬잔(中山) 호쿠잔(北山) 세 지역에서 각자 세력을 형성하는 시기가 약 50년
정도 지속하였고 이후 15세기 초, 쇼하시(尙巴志)라는 호족에 의해 통일되어 유구 왕국이 형성되었다.
오키나와는 남중국해와 동중국해를 잇는 무역 국가로 무역을 통한 이득과 중국과의 조공을 통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융성한 국가였다. 이런 역사적 흔적이 오키나와 여러 곳에 성터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소운은 역사적 유적이 없는 곳을 일부러 찾지는 않는다. 소운이 특히 관심을 두는 곳은 성터이다.
성은 돌로 축조되어 있어, 성이 불타거나 무너져도 원형이 소멸하지는 않는다. 성터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면
왜 이곳에 성을 축조했는지 성을 쌓은 분들의 생각을 읽게 되기도 하고, 생사를 건 투쟁의 현장에서 옛일을
회상해 보는 것도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공성하는 입장에서 성을 돌아보고, 수성하는 입장에서 성 밖을 살펴
보면 처절했던 전투의 모습이 그려지고, 함성이 들리는 듯도 해서 여행의 보람을 성터에서 찾게 된다.
* 일본의 성은 이처럼 천수각이 있다. 천수각의 규모가 작아 망루 역할을 할 정도지만 천수각이 있다. (마루가메 성)
* 시마네 현 마츠에 성 천수각이다. 원형이 보존된 귀한 성이다. 목조 건물이라 소운은 관심 있게 보았다. (참고 용 옛 사진)
* 이번 여행길에 찾은 오키나와의 나키진 성이다.
* 이렇게 양쪽을 성벽으로 쌓은 것은 중국 성과 유사하다. 일본성은 단을 이뤄 쌓는 형태라 외벽만 성벽이다.
일본을 다녀보면 호전적 국민성답게 성이 없는 곳이 거의 없고, 보존도 잘 되어 있어 부럽기까지 하다.
더구나 많은 전투를 치르며 얻은 경험이 곳곳에 배어있어 감탄하게 된다. -성을 함락하기가 정말 어렵겠다.-
하는 감탄이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의 성은 애교 스럽기 까지 하다. 여기는 넘지 마라! 선언적 수준이라 할까?
하지만, 방어 개념이 우리와 일본이 사뭇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면 있을 수 있는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침공을 받은 성에서 뒤쪽은 다 우군이고, 물러갈 방어선이 곳곳에 쳐 있지만, 일본은 점 형태의 방어로
물러갈 곳이 결국은 성 중심부이고 최후의 거점이 천수각이라는 성안의 성이다.
여기서 패하면 자결만이 유일한 탈출구라 할 수 있다. (그러니 겹겹이 벽으로 성을 두르게 마련)
* 우리는 외침에 대비한 성이라 계속 물러갈 곳이 있지만, 일본은 내전 용이라 성을 뺏기면 물러날 곳이 없다.
오키나와의 성은 일본의 성과는 형태가 달랐다. 아차산에서 보는 우리의 보루와 산성과 비슷한 형태를 보였다.
우선 천수각이 없다는 점이 일본의 성과는 차이가 있었다. 일본의 성은 천수각이 꼭 있게 마련이다.
성벽의 형태도 우리의 산성과 비슷했다. 우리의 성벽보다는 다소 높다는 점과 내성이 있다는 점이 전투를 치른
실전의 현장일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우리도 성은 쌓았지만, 남한산성 정도가 실전의 현장이다.
* 어느 곳이던 성은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다. 적의 동태를 살피고 방어가 유리하도록 높은 곳에 위치한다. (자키미 성)
* 고구려의 성터 흔적인 아차산의 보루이다. 오키나와 성의 형태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 비교하시라고 예전에 찍어 두었던 고창읍성 사진을 올린다. 우리 성은 내부 쪽 성벽이 없다. 더욱 합리적인 성 형태이다.
* 일본성은 천수각이 성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으나, 오키나와의 성은 형태가 달랐다. (자키미 성)
* 우리나라 산성이나 읍성과 흡사한 형태이다. (나키진 성)
* 오키나와의 나카쿠스쿠 성, 우리나라의 낙안 읍성과 비슷하다.
관광을 단체로 가면, 실제로 볼 만한 곳은 가지 않는다.
가기 편한 곳, 현지인과 가이드가 서로 도움을 받을 곳, 선물 사기 좋은 곳, 대충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오키나와에서 돌아본 성터도 일반 관광객은 거의 찾지 않을 것이다. 무슨 파인애플 공장이나 술 공장,
사실 이런 곳을 보려고 오키나와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 소운의 생각이지만, 반대로 성터는 왜 가?
궁상맞게, 일반인들은 거의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관광객이 꼭 찾는 슈리 성을 둘러 본 소운은 실망이 많았다. 성벽까지 완전히 모조 성이었기 때문이다.
톱으로 켜서 쌓은듯한 성벽, 중국 성을 축소한 듯한 성에서 오키나와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콘크리트로 복원해 놓은 오사카 성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콘크리트로 복원한 광화문을 우리는 헐었다.
오키나와 성터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 인구가 150만이 채 안 된다면, 성을 쌓을 당시는 몇십만에
불과했을 터인데, 그것도 셋으로 갈라치기를 해서 성을 쌓고 서로 싸우고, 예나 지금이나 백성은 늘 고달프다.
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착잡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0년 후, 1609년 규슈의 사쓰마 번의 공격을 받아
한 달 만에 유구 왕국의 수도 나하가 점령되어 왕은 일본 에도로 끌려갔다.
공연마당에서 펼쳐 보인 무술이나, 왕국을 지키는 호위 무사가 들고 있는 나무 봉을 보며 생각했다.
저런 어설픈 무기로 악착같은 일본군 총포 대와 맞서 한 달을 버텼다는 건 오키나와 인의 애국심이리라,
* 유구 왕국의 궁성인 슈리 성의 정전 , 중국풍과 일본풍이 뒤섞여 있고 복원성이라 옛 정취를 느낄 수 없었다.
후기,
오키나와를 점령한 사쓰마 번은 오키나와의 경제적 가치를 독점하고자 왕국의 형태를 유지 시키며
뒤에서 부를 거둬가는 형태로 오키나와를 경영했다. 아마 이때 일본에 대한 오키나와 인의 반감이 형성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오키나와 왕국은 이런 환경하에서도 일본에 기울기보다는 청과의 책봉 조공 관계를
유지하며 일본에 편입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청일 전쟁 때도 중국이 이겨 일본의 간섭을 배격하기를 간절히 원했고 노력도 했다.
중국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1879년 일본 오키나와 현으로 일본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20만에 가까운 희생이 있었고, 이 중에는 한국인 징용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전쟁통에 완전 폐허가 된 슈리 성을 복원하여 1992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하였다.
하지만, 소운에게 묻는다면, 복원된 슈리 성보다는 폐허로 남아있는 성터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 한국인 전몰 위령탑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한국인이라면 꼭 돌아봐야 할 곳인데 죄송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