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적인 유전자
: Douglas R. Hofstadter, Daniel Dennett 저, 김동광 역, 사이언스 북스, 2001 (원서 : THE MIND'S I : Fantasies and Reflections on Self and Soul , Basics Books, 1981), Page 223~263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
처음에 단순성이 있었다. 그처럼 단순한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기도 여간 힘들지 않다. 더구나 복잡한 질서를 가진 생명, 또는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존재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갖춘 채 갑작스럽게 발생했다는 식의 설명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찰스 다윈 (Charles Darwin) 의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론이 납득할 만한 까닭은 단순성이 복잡성으로 변화하는 방식, 즉 무질서한 원자들이 스스로 모여 점차 복잡한 패턴을 형성해서 종내는 사람을 만드는 데까지 이어지는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라는 심원한 문제에 대해서 다윈은 하나의 해답, 더구나 지금까지 제기된 것 중에서 유일하게 그럴 듯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 나는 이 위대한 이론에 대해, 생물 진화 그 자체가 시작되기 전의 시대부터 보다 일반적인 형태의 설명을 시도할 것이다.
다윈이 이야기하는 <적자 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 은 실은 <정자 생존 (survival of the stable)> 이라는 좀더 일반적인 법칙의 특수한 예이다. 이 우주는 안정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안정된 것이란 고유한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영속성과 공통성을 가진 원자 집합이다. 마터호른 (알프스의 고봉 중 하나 - 옮긴이) 처럼 충분히 오랫동안 존속하는 고유한 원자 집단도 그런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빗방울처럼 하나의 빗방울은 단명하지만, 대단히 높은 빈도로 나타나기 때문에 집합적인 명칭을 부여받을 수 있는 <집합적 (class)> 실체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보는 것들, 그리고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위, 은하, 바다의 물결 등 여러 가지 사물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안정된 원자의 패턴들이다. 비투 거품이 구형을 띠기 쉬운 까닭은 그것이 기체를 둘러싼 박막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정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주선 내에서는 물도 구체가 안정된 상태이지만, 지상에서는 중력의 영향으로 정지 상태의 물의 안정된 표면은 매끄러운 수평이 된다. 소금의 결정은 정육면체가 되기 쉽다.
이것은 나트륨 이온과 염소 이온을 한데 채워 넣는데 그쪽이 안정되기 때문이다. 태양 내부에서는 가장 단순한 원자인 수소 원자가 융합해서 헬륨 원자를 형성시킨다. 이런 조건에서는 헬륨의 상태가 더 안정되기 때문이다. 그보다 복잡한 원자들은 우주 전체에 분포해 있는 행성들에서 생성된다. 만들어지고 있고, 또한 현재 가장 유력한 이론에 따르면 우주를 처음 탄생시킨 <빅뱅 (big bang) (대폭발이라고도 하며, 우리 우주가 소립자보다 작은 크기에서 폭발과도 같은 팽창을 거쳐 탄생했다는 가설. 현재 우주론에서는 표준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옮긴이)> 에 의해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발견되는 원소들의 유래이다.
때로는 원자와 원자가 만나서 화학 반응을 일으켜 어느 정도 안정된 분자를 형성한다. 이러한 분자들 중에는 아주 큰 것도 있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결정은 안정된 단일 분자로 간주될 뿐 아니라 그 내부의 원자 구조가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에 대단히 단순한 분자라고 짐작된다. 그에 비해, 현재의 생물은 대단히 복잡한 그 밖의 거대 분자를 갖고 있고, 그 복잡성에서는 몇 가지 단계를 찾아 볼 수 있다. 우리의 혈액 속에 들어 있는 헤모글로빈은 전형적인 단백질 분자이다. 그것은 아미노산이라는 더 작은 분자의 사슬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아미노산 분자는 정확한 패턴으로 배열되어 있는 수십 개의 원자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의 헤모글로빈 분자에는 574 개의 아미노산 분자가 들어 있다. 이들 아미노산 분자는 네 개의 사슬 형태를 띠며, 이들 사슬이 얽혀서 매우 복잡한 공 모양의 삼차원 구조를 이루고 있다. 헤모글로빈 분자의 모형은 마치 조밀한 가시덤불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 가시덤불처럼 되는 대로 얽힌 패턴이 아니라, 일정 불변한 구조가 인체 내에서는 평균 6 × 1021 번 이상 조금도 흐트러지거나 비틀리지도 않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헤모글로빈과 같은 단백질 분자가 가시덤불과 같은 정확한 모양을 띠고 안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동일한 아미노산 배열을 가진 두 개의 사슬이 마치 두 개의 용수철처럼 완전히 동일한 돌돌 말린 삼차원 패턴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헤모글로빈 덤불은 당신의 몸 속에서도 매초 약 4 × 1014 개의 비율로 그 <마음에드는> 모양으로 태어나고, 또한 같은 비율로 다른 헤모글로빈들이 파괴되고 있다.
헤모글로빈은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분자이며, 원자가 안정된 패턴을 띠려는 경항을 갖는다는 원리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 예이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려는 요점은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하기 이전에 분자의 초보적인 진화가 물리와 화학의 일반적인 과정 (process) 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서는 어떤 계획이나 목적, 또는 방향 지시 등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에너지가 존재하는 조건하에서 어떤 원자 집단이 우연히 안정된 패턴을 갖게 되면 그 집단은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나타낼 것이다. 최초의 자연 선택은 단지 안정된 형태를 골라내고 불안정한 형태를 배제시키는 것이었다. 여기에 신비스러움은 전혀 없다. 그것은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물론 똑같은 원리로 사람과 같은 복잡한 존재까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당한 숫자의 원자를 취해서 그것들이 올바른 패턴을 띠게 될 때까지 얼마간의 외부 에너지와 뒤섞는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아담이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가령 수십 개의 원자로 이루어진 분자라면 그런 식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사람은 1027 개 이상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주 역사의 전 기간이 눈 깜짝하는 순간으로 여겨질 만큼 긴 시간 동안 생화학적인 칵테일 셰이커의 동작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래도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다윈의 이론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구원의 손길을 뻗쳐주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분자들의 완만한 형성 과정의 이야기가 끝난 부분을 다윈의 이론이 이어받는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설명하는 생명의 기원은 사변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생명이 처음 탄생하는 과정을 직접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많은 경쟁 이론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지만, 그 이론들은 모두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지극히 단순화한 설명도 사실과 그리 동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생명 탄생 이전의 지구상에 어떤 화학 원료가 풍부했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는 물, 이산화탄소, 매탄, 암모니아 등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태양계의 최소한 몇 개의 행성에도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단순한 화합물이다. 화학자들은 유년기의 지구의 화학적 상태를 재현하려고 시도해 왔다. 그들은 단순한 화학 물질을 플라스크에 넣고 자외선과 전기 불꽃 즉, 원시시대의 번개를 인공적으로 모방한 것과 같은 에너지의 원천을 넣어주었다. 그 후 몇 주일이 지나자 플라스크 속에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묽은 갈색 수프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처음에 넣은 것보다 더 복잡한 분자를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미노산이 발견되었다. 아미노산은 생물의 2 대 분자 중 하나인 단백질을 구성하는 재료이다. 이런 실험이 있기 전에는 자연계에서 발견되는 아미노산은 생명이 존재하는 증거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어 화성에서 아미노산이 발견되었다면, 그 별에 생명이 존재하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아미노산은 몇 가지 단순한 기체가 대기 중에 존재하고, 화산이나 햇빛 또는 천둥벼락과 같은 기상 조건이 더해지기만 하면 발생할 수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더욱 최근에는 생명 탄생 이전 지구의 화학적 상태를 흉내낸 실내 모의 실험에서 푸린 (purine, 요산 화합물의 원질에 해당하는 물질 - 옮긴이) 과 피리미딘 (pyrimidine, DNA 와 RNA 를 구성하는 물질 - 옮긴이) 이라 불리는 유기 물질이 만들어졌다. 이 물질은 유전 물질인 DNA 를 구성하는 재료이다.
이러한 실험과 흡사한 과정이 생물학자와 화학자들 사이에서 약 30 억 - 40 억 년 전에 바다를 구성하고 있었다고 믿어지는 <원시 수프 (primeval soup)> 를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유기 물질은 해안 주변에서 건조되던 찌꺼기나 부유하는 작은 방울들 속에서 국부적으로 농축되었을 것이다. 그런 유기물들은 태양에서 나오는 자외선과 같은 에너지의 영향으로 한층 더 큰 분자로 결합되었다. 오늘날 거대 유기 분자는 그 존재가 인정될 수 있을 정도로 긴 시간동안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곧 박테리아와 같은 다른 생물에 흡수되어 분해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박테리아를 비롯한 다른 생물은 훨씬 나중에야 출현했고, 당시에는 거대 유기 분자들이 점차 농도가 짙어지는 수프 속을 아무런 장애도 없이 떠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시점에선가 매우 괄목할 만한 분자가 우연히 생성되었다. 그 분자를 복제자 (Replicator) 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 분자가 반드시 주변 분자들 중에서 가장 크거나 가장 복잡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의 복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 우연히 일어날 수 없는 일처럼 생각될 것이다. 사실 그러했다. 그것은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의 생애에서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은 실제로도 일어날 수 없는 일로 간주한다. 축구 도박으로 큰돈을 버는 따위의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있을 법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평가하는 데, 수억 년의 시간 척도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만약 당신이 수억 년 동안 매주 축구 도박을 한다면 그 동안 여러 차례 큰 상금을 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복제를 만든 분자는 처음에 생각한 것처럼 상상하기 힘든 무엇이 아니고, 또한 그것은 한번만 생기면 충분했다. 가령 주형이나 틀로 작용하는 복제자를 생각해 보자. 구성 재료에 해당하는 다양한 분자들이 복잡한 사슬을 이루고 있는 대단히 큰 분자라고 생각하자. 그 작은 구성 재료는 복제자를 둘러싸고 있는 수프 속에 이용 가능한 상태로 풍부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각 구성 재료가 자기와 같은 종류에 대해 친화성을 갖는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주위의 구성 재료들은 수프 속에서 자기에게 친화성을 가진 복제자의 부분과 부딪치면, 그 곳에 달라붙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저절로 달라붙게 된 구성 재료들은 자동적으로 복제자 자체와 동일한 순서로 배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구성 재료들이 복제자가 생성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결합해서 안정된 사슬을 구성하리라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한층 한층 거듭 누적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정이 형성되는 과정이 바로 이런 식이었다. 다른 한편, 두 개의 사슬이 분리되어 두 개의 복제자가 태어나고, 그 각각이 계속 더 많은 복제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좀더 복잡한 가능성으로, 각 구성 재료가 자기와 같은 종류가 아니라 특정한 다른 종류에 대해 친화성을 갖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때 복제자는 동일종의 복제 주형이 아니라 일종의 <음화 (negative)> 주형으로 기능하게 되고, 이 음각이 다음에는 원래의 양화 (positive) 의 정확한 복제를 재생하는 것이다. 최초의 복제 과정이 음화-양화 방식이었는지, 아니면 양화-음화 방식이었는지는 전혀 중요치 않다. 다만 최초의 복제자의 현대판인 DNA 분자가 음화-양화 복제 방식을 채택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중요한 점은 갑작스럽게 새로운 형태의 <안정성> 이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수프 속에 특정 종류의 복잡한 분자가 특히 풍부할 가능성이 없었다. 왜냐하면 각 분자는 우연히 특정한 안정된 구성으로 형성된 구성 재료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제자가 출현하자, 그것은 빠른 속도로 자신의 복제를 바다 전체에 확산시켜 급기야는 구성 재료에 해당하는 작은 분자들이 희귀한 자원이 되었고, 그 결과 다른 거대 분자들이 생성되는 일은 몹시 드물어졌다.
이렇게 해서 동일종 복제물의 거대한 집단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 복제 과정의 중욯나 특성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 과정이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오류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 오류가 없기를 바라지만, 주의 깊게 찾으면 하나나 두 개쯤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런 실수도 문장의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일세대> 오류 'first-generation' error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 복음서와 같은 책을 필사하던 시절을 생각해 보자. 필사자는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어느 정도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고, 그들 중에는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해서 고의적으로 <개량> 을 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하나의 같은 원본을 보고 필사했다면 의미가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본을 필사하고 그 사본을 다른 사람이 또 필사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잘못이 누적되어 심각한 상태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필사를 나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작성한 문서의 경우에는 잘못이 개량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머리에 잘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가령, 70 인역 성서 (Septuagint,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2 세 [BC 309?-247] 의 명형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70 명 [또는 72 명] 의 유대인이 70 일 [또는 72 일] 동안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어 번역 구약성서 및 외전 - 옮긴이) 를 만든 학자들은 헤브루어 단어인 <젊은 여자> 를 그리스어로 <처녀> 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사내 아이를 낳을지니 ……> (이사야, 7 장 14 절) 라는 예언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역 덕분에, 이 예언에 따라 그 후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왔음을 뜻함 - 옮긴이). 어쨌든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생물학적인 복제자에서 나타나는 복제 실수는 진정한 의미에서 개량을 일으킬 수 있으며, 나아가 약간의 잘못은 생명의 점진적인 진화에서 필수적이다. 원래의 복제자 분자가 어느 정도로 정확한 복제를 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그 현존하는 자손인 DNA 분자는 가장 충실도가 높은 인간의 복사 기술에 비교하더라도 놀랄 만큼 신뢰성이 높지만, 그래도 이따금 실수를 범한다. 그리고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이러한 실수이다. 아마도 최초의 복제자는 훨씬 더 많은 실수를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실수는 일어날 것이고, 이런 실수는 누적되어 갈 것이다.
잘못된 복제가 발생하고 그것이 확산되어 감에 따라 원시 수프는 동일종의 복제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라, 같은 조상에서 <유래한> 복제 분자의 여러 변종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어떤 변종은 다른 변종보다 수가 많았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어떤 변종은 원래 다른 변종보다 더 안정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분자는 일단 만들어지면 다른 것보다 분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복제자는 수프 안에서 비교적 많은 수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 까닭은 그 자체의 <장수> 의 직접적인 논리적 귀결일 뿐 아니라, 자신의 복제를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수명이 긴 복제자들이 점점 수를 불려갔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분자 집단 속에서 다른 조건이 같으면 좀더 수명이 길어지려는 <진화 경향 (evolutionary trend)> 이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조건도 같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복제자 변종이 확산되기 위해 훨씬 더 중요한 한 가지 특성은 복제의 속도, 즉 <다산성> 이었다. 만약 A 형의 복제자 분자가 자신의 복제를 평균 1 주일에 한 개꼴로 만드는 데 비해, B 형은 매시간 한 개 비율로 자신의 복제를 만든다면, A 형이 B 형보다 훨씬 오래 <살> 수 있다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B 형의 숫자가 훨씬 많아지리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수프 속에는 분자들이 높은 <다산성> 을 향하는 <진화 경향> 이 생겨났을 것이다. 선택에서 살아남은 복제자 분자의 세번째 특징은 복제의 정확도이다. 만약 X 형과 Y 형의 분자가 수명이나 복제 속도가 같지만, X 는 평균 10 번에 한 번 꼴로 복제 실수를 저지르는 데 비해, Y 는 100 번에 단 한 번밖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분명히 Y 의 수가 많아질 것이다. 이때 집단 속의 X 군은 잘못된 <자손> 자체를 잃을 뿐 아니라, 그 자손의 모든 자손들까지 (실제로 태어난 자손이든 잠재적인 자손이든 모두) 잃게 된다.
만약 당신이 진화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다면, 앞에서 한 마지막 이야기는 조금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복제의 오류가 진화에서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생각과 자연 선택이 높은 복제 충실도를 선호한다는 설명은 모순되지 않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특히 우리 자신이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진화가 막연한 의미에서 <좋은 것> 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무언가가 진화를 <원해서> 진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진화란 복제자가 그리고 오늘날에는 유전자가, 진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막아도 막무가내로 일어나는 무엇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모노가 허버트 스펜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빈정대는 말로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진화론에서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누구나 자신이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다시 원시 수프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하자. 그 수프는 다양한 종류의 안정된 분자를 포함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즉 개개의 분자들이 오랫동안 존속했거나, 급속히 복제되었거나, 복제가 정확하게 이루어졌든 어느 한 가지 측면에서 안정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종류의 안정성을 향한 진화 경향이 발생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즉 만약 그 수프에서 두 차례 견본을 추출한다면, 나중에 추출한 견본이 장수, 다산성, 복제 충실도 측면에서 우수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생물학자들이 생물에 대해 논의할 때 진화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 메커니즘은 자연 선택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최초의 복제자 분자는 <살아 있다> 고 말해야 할까?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예를 들어 내가 <인류 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다윈이다> 라고 하고, 당신이 <아니다, 뉴턴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면, 그런 논의를 아무리 계속해도 해결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논쟁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 간에, 실질적인 결론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것이다. <위대한> 이라는 수식어가 붙든 그렇지 않든 간에, 다윈과 뉴턴의 생애와 업적이라는 사실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복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살아 있는 것> 이라고 부르든 부르지 않든 간에, 복제자 분자의 이야기는 아마도 내가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상황일 것이다.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언어에 대해 오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언어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고, 사전에 <살아 있다> 라는 단어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말이 현실 세계의 무언가 명확한 것을 지칭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초기의 복제자를 <살아 있다> 라고 부르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그것은 생명의 선조이고, 우리의 조상인 것이다.
두번째로 중요한 논점은 경쟁이다. 다윈 자신도 이 점을 강조했다 (다만 그는 동물과 식물에 관해서 이야기했을 뿐 분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원시 수프는 무한한 숫자의 복제자 분자를 부양할 수 없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지구의 크기가 유한하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정 인자 (limiting factor, 생물의 성장이나 개체군 증가를 제한하는 요인 - 옮긴이) 도 중요할 것이다. 복제자를 주형이나 틀로 간주하는 우리들의 상에서, 우리는 그 복제자가 복제를 만들기 위해서 충분한 구성 재료 분자를 포함하고 있는 수프 속에 잠겨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복제자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구성 재료는 빠른 속도로 소비되고, 그에 따라 희귀하고 귀중한 자원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복제자의 다양한 변종과 계통들이 그런 자원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였을 것이다. 유리한 종류의 복제자가 늘어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불리한 변종들이 경쟁에 져서 실제로 수가 감소하고, 급기야는 많은 계통이 전멸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복제자 변종들 사이에서도 생존 경쟁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아무런 우려도 하지 않았다. 그 싸움은 어떤 악한 감정도 없이, 실제로는 어떤 종류의 감정도 없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싸움을 하고 있었다. 즉 새로운 높은 수준의 안정성을 획득하거나 경쟁 상대의 안정성을 저하시키는 새로운 방법 등의 결과를 가져오는 잘못된 복제 (miscopying) 는 자동적으로 보존되어 증가한다는 의미에서의 싸움이었다. 이러한 개량의 과정은 누적적이었다. 자신의 안정성을 높이거나 경쟁 상대의 안정성을 저하시키는 방법은 점점 더 교묘해지고 효율성을 높여갔다. 그중 일부는 경쟁 상대의 변종 분자를 화학적으로 분해하고, 거기에서 방출된 구성 재료를 자신의 복제를 만드는 데 이용하는 방법을 <발견> 했을지도 모른다. 이들 원시 포식자 (protocarnivore) 는 먹이 획득과 경쟁 상대 제거라는 목적을 동시에 달성했다. 또한 화학적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거나 자기 주위에 단백질로 이루어진 물질적인 방벽을 둘러치는 방법을 발견한 종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생물 세포가 출현했을지도 모른다. 복제자는 단지 존재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한 용기 (container), 자신이 계속 존재하기 위한 탈 것 (vehicle) 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살아남은 복제자는 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생존 기계 (survival machine) 를 만들어낸 복제자였다. 최초의 생존 기계는 아마도 보호 코트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효율적인 생존 기계를 가진 경쟁 상대가 등장함에 따라 살아남기가 점점 더 어렵게 되었다. 생존 기계는 더 크고 정밀해졌고, 그 과정은 누적적이고 진보적 (progressive) 이었다.
복제자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기 위해 이용한 기술과 책략에서 점진적 개량에 어떤 목적과 같은 것이 있었을까? 개량을 위한 시간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렇듯 장구한 시간이 어떤 교묘한 자기 보존의 엔진을 만들어낸 것일까? 40 억 년 후에 어떤 운명이 이 오래 된 복제자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들은 죽어 없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존술의 달인들이었으니까. 그러나 바닷속을 유유히 떠도는 복제자의 모습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마치 기사처럼 오만한 자유를 이미 오래 전에 포기해 버린 것이다. 이제 그들은 엄청나게 크고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득 들어찬 로봇 내부에 안전하게 들어 있고, 거대한 집단을 이루어 군집하게 되었다. 이들 복제자는 외부 세계로부터 격리되어 꼬불꼬불 구부러진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 외계와 소통하며 원격 조종으로 외부 세계에 조작을 가하게 되었다. 그들은 당신과 내 속에 있다. 그들이 우리를,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의 보존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유인 것이다. 이들 복제자는 긴 여정을 지나왔다. 이제 그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고, 우리는 그들을 위한 생존 기계이다.
일찍이 자연 선택은 원시 수프 속을 자유롭게 부유하는 복제자들 사이의 생존력 차이에 기초해 성립할 수 있었다. 이제 자연 선택은 생존 기계의 제작에 능숙한 우수한 복제자, 즉 배아 발생을 제어하는 기술이 뛰어난 유전자를 선호한다. 이런 측면에서 복제자는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의식적이지도 않고 의도적이지도 않다. 서로 경쟁하는 분자들 사이에서 장수, 다산성, 복제 충실도에 의해 자동적인 선택이 작동하는 오래 된 과정은 지금도 태고 시절과 똑같이 맹목적으로, 그리고 거역할 수 없이 진행되고 있다. 유전자는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 그들은 미래의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유전자는 그저 <존재> 할 뿐이고, 어떤 유전자가 다른 유전자보다 더 많을 뿐이다. 그게 전부이다. 그러나 유전자의 장수와 다산성을 결정하는 기구는 과거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최근에 (지난 6 억 년 정도의 기간 동안) 복제자는 근육, 심장, 눈 (여러 차례 독립적으로 진화한) 과 같은 기관의 생존 기계 기술 측면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어왔다. 그 이전에, 그들은 복제자로서 생활 양식의 기본적인 특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부분은 논의를 진행시켜가는 도중에 이해될 것이다.
오늘날의 복제자에 대해 이해해야 할 첫번째 사항은 그것이 높은 군거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하나의 생존 기계는 하나의 유전자가 아니라 몇천 개나 되는 유전자를 담고 있는 탈것이다. 몸의 제조는 각각의 유전자 역할이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뒤얽힌 공동의 협력 사업이다. 어떤 한 유전자가 몸의 다양한 부분에 다양한 작용을 미칠 것이고, 몸의 한 부분은 많은 유전자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더구나 모든 유전자의 작용은 다른 많은 유전자와의 상호 작용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몇 개의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 집단을 제어하고 지배하는 마스터 유전자 (master gene) 로 기능한다. 비유를 들자면, 가령 설계도의 어떤 쪽이 건물의 여러 부분에 대한 지시를 담고 있고, 다른 쪽들은 그 밖의 많은 쪽에 대한 전후 참조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이처럼 복잡하게 뒤얽힌 유전자들의 상호 의존성 때문에 여러분은 왜 우리가 <유전자> 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왜 유전자가 아니라 <유전자 복합체 (gene complex)> 와 같은 집합 명사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할 때 그것은 확실히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유전자 복합체가 개별 복제자나 유전자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다. 그 까닭은 성이라는 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유성 생식은 유전자들을 뒤섞고 혼합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 말은 모든 개체의 몸이 단명한 유전자 조합을 위한 일시적인 탈것에 지나지 않다는 뜻이다. 한 개체를 구성하는 유전자 조합은 단명하기는 하지만, 유전자 자체는 그 잠재적 가능성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 그들의 경로는 교차를 되풀이하면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다. 하나의 유전자는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엄청나게 많은 개체들의 몸을 통해 생존해 가는 하나의 단위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자연 선택은 어떤 존재자 (entities) 의 생존의 차이를 뜻한다. 어떤 존재자는 살고, 어떤 존재자는 죽지만, 이러한 선택적인 죽음이 세계에 대해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추가 조건이 만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 각각의 존재자는 다수의 복제 (copy) 라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고, 적어도 그중 몇 개는 진화적으로 의미 있는 기간 동안 다수의 복제라는 형태로 살아남을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유전의 소단위 (small unit) 는 이러한 특성을 갖지만 개체, 집단, 그리고 종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유전 단위 (hereditary unit) 가 나눌 수 없는 독립적인 입자로 취급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레고르 멘델 (Gregor Mendel) 이 거둔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멘델이 수립한 개념이 어느 정도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시스트론 (cistron, 유전자의 기능 단위로 구조 유전자라고도 한다. - 옮긴이) 은 때로 분할이 가능하고, 동일 염색체 상의 모든 두 개의 유전자는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다. 내가 여기에서 내린 유전자의 정의는 불가분의 입자라는 이상에 꽤 <근접하는> 단위를 의미한다. 유전자가 나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나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것은 어떤 개체의 몸 속에서 명확하게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어느 한쪽이다.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와 융합되지 않고 할아버지에서 손자에게 중간 세대를 거치면서 고스란히 전달된다. 만약 유전자가 다른 유전자들과 끊임없이 뒤섞인다면,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자연 선택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이러한 사실은 다윈이 살아 있는 동안 증명되었고, 당시에는 유전이 이러한 뒤섞임 (blending) 의 과정 (process) 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다윈은 상당히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멘델의 발견은 이미 발표되어 있었고, 그것이 다윈을 고심의 늪에서 구해 줄 수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그 사실을 몰랐다. 멘델과 다윈이 세상을 떠난 후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도 멘델이 발표한 논문을 읽은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멘델도 자신의 발견의 중요성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다윈에게 편지로 그 사실을 알렸을 것이 분명하다.
유전자가 가진 입자성 (particulateness) 의 또 다른 측면은 그것이 늙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전자의 나이가 100 만 살이 되었다고 해서 100 살일 때보다 더 죽기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는 세대를 거쳐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건너뛰고, 자신의 고유한 방식과 목적에 따라 그 몸들을 조작하면서 자신이 들어 있는 몸이 늙어서 죽기 전에 연속해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몸을 버리고 계속 살아남는다.
유전자는 불사이다. 아니, 그보다는 불사에 가까운 유전적 존재자 (genetic entities) 로 정의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세계 속의 개별 생존 기계들인 우리는 앞으로 수십 년쯤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들은 수십 년이 아니라 수천 년, 수백만 년 단위로 측정되는 기대 수명을 갖고 있을 것이다.
생존 기계는 원래 유전자를 위한 수동적인 용기로 시작되었고, 경쟁 상대와의 화학적인 싸움과 우연한 분자 충격으로 입을 수 있는 손상으로부터 유전자를 보호하는 장벽에 불과하다. 처음에 그들은 수프 속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유기 분자들을 <먹었다>. 이 편안한 생활은 태양의 빛 에너지 영향으로 오랫동안 느린 속도로 축적된 이러한 유기물 먹이가 모두 떨어지자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오늘날 식물이라 불리는 생존 기계의 큰 지류는 자신이 직접 태양 빛을 이용해서 단순한 분자들로 복잡한 분자를 만들어 원시 수프의 합성 과정을 훨씬 빠른 속도로 재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지류인 현재의 동물은 식물과 다른 동물을 먹어서 식물의 화학적인 노작을 활용하는 방법을 <발견> 했다. 생존 기계의 이러한 두 지류는 그들의 다양한 생활 양식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점점 더 교묘한 장치를 발달시켰고, 그 밖에도 새로운 생활 양식을 잇달아 개발했다. 지류 내의 소지류와 그 소지류의 지류가 발달하고 제각기 특수하게 분화된 생활 양식을 갖게 되었다. 바다 속, 땅위, 땅 속, 나무 위, 그리고 다른 생물의 몸 속에서 제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동물과 식물 모두 다세포체로 진화했고, 모든 유전자의 완전한 복제가 모든 세포에 배분되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언제, 어떻게, 왜 독자적으로 일어났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군집의 비유를 사용해서 생물의 몸을 세포 군집이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나는 생물의 몸을 유전자 군집이라고 생각하고, 세포를 유전자라는 화학기업의 편리한 작업 단위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유전자 군집이기는 하지만 몸이 행동이라는 측면에서 그 나름의 개체성을 획득하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하나의 동물은 조정된 전체, 즉 하나의 단위로서 활동한다. 주관적으로 나는 스스로가 군집이 아니라 하나의 단위로 느낀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택은 다른 유전자와 협동해서 작용하는 유전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해 왔다. 부족한 자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격렬한 경쟁, 그리고 다른 생존 기계를 먹고 다른 것에 먹히지 않기 위한 냉혹한 싸움을 통해 공동체적인 몸의 내부에서는 무정부 상태보다는 중앙 집권적인 조정이 더 높이 평가되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유전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공진화 (coevolution) 는 개별 생존 기계의 공동체적 성격을 실질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정도로까지 진전되어 있다. 실제로 아직도 많은 생물학자들은 그 공동체적인 성격을 인식하지 못했고, 따라서 나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생존 기계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외견상의 목적성 (apparent purposiveness) 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그것이 동물 유전자의 생존에 도움이 되도록 훌륭하게 계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히려 나는 인간의 의도적인 행동에 더 가까운 유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이 먹이, 배우자 또는 잃어버린 새끼를 <찾는> 모습을 관찰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언가를 찾을 때의 주관적 감정 중 일부를 동물들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욕구를 떨치지 못한다. 그런 주관적 감정에는 어떤 대상에 대한 <욕구> 나 욕구된 대상의 <정신적 상 (mental picture)>, 그리고 <목표> 또는 <단기적인 목표> 등이 포함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내성의 증거를 통해, 적어도 현존하는 하나의 생존 기계 (사람을 뜻함 - 옮긴이) 에서는, 이러한 목적성이 <의식> 이라 부르는 특성을 진화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논할 수 있는 철학자가 아니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을 갖는지의 여부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더라도, 어떤 목적이라는 동기에 의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계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계는 기본적으로는 매우 단순하며, 무의식적으로 목적적인 행동 원리는 공학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고전적인 예로는 와트의 증기 조속기를 들 수 있다.
이 장치의 기본 원리는 음 되먹임고리 (negative feedback) 라고 불리는 것으로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일반적으로 그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목적 기계 (purpose machine)>, 즉 의식적인 목적을 가진 것처럼 움직이는 기계나 물체는 현재 상태와 <바람직한> 상태 사이의 차이를 측정하는 일종의 측정기를 갖고 있다. 그 기계는 이러한 차이가 클수록 움직임이 활발해지도록 설계되었다. 따라서 그 기계는 자동적으로 차이를 줄이려는 (음 되먹임고리라고 불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경향을 갖게 될 것이며, <바람직한> 상태에 도달했을 때에는 활동을 정지하게 될 것이다. 와트의 조속기는 증기 기관에 의해 회전하는 한 쌍의 공으로 이루어진다. 각각의 공은 경첩이 달린 팔끝에 붙어 있다. 공이 빠른 속도로 회전할수록 팔을 수평방향으로 밀어 올리는 원심력이 커진다. 이것은 중력을 거스르는 경향이다. 두 개의 팔은 기관에 증기를 보내는 밸브에 연결되어 있으며, 팔이 수평 방향에 접근하면 증기를 차단하게 된다. 따라서 기관이 지나치게 빠르게 움직이면 증기가 어느 정도 차단되어 느려진다. 또한 너무 느려지면 밸브의 작동으로 자동적으로 다량의 증기가 공급되어 다시 속도를 회복한다. 이러한 목적 기계는 종종 과도한 제어 (제어량이 목표값을 넘어서는 현상 - 옮긴이) 와 시간 지연 때문에 진동하기도 하지만, 이 진동을 줄이기 위한 보조 장치를 제작하는 것은 기술자의 수완 가운데 일부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와트의 증기 조속기의 <바람직한> 상태는 특정 회전 속도이다. 분명 그 장치가 의식적으로 그 상태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기계의 <목표> 는 단지 그 기계가 항상 되돌아오려는 경향이 있는 상태로 정의된다. 오늘날의 목적 기계는 음 되먹임고리 같은 기본 원리의 확대 사용을 통해 훨씬 복잡한 <살아 있는 것과 같은> 행동을 실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도 미사일은 능동적으로 표적을 찾는 것처럼 보이고, 일단 사정권 내에 표적이 들어오면 표적의 회피 행동과 선회를 계산에 넣고, 때로는 그것들을 <예상> 하거나 <예측> 하면서 추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자리에서는 이런 작동이 이루어지는 상세한 원리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음 되먹임고리와 <피드 포워드 (feed-forward, 출력 결과를 입력으로 공급하는 되먹임고리와는 달리 출력이 나오기 이전에 미리 예상에 기초한 입력으로 수정을 가하는 방식 - 옮긴이)>, 그리고 기술자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고 오늘날 생물의 몸의 기능에 널리 이용되는 것으로 알려진 그 밖의 여러 가지 원리가 포함된다. 얼핏 보기에 의도적이고 목적적인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을 관찰하는 일반인들로서는 그 미사일이 인간 조종사의 어떤 제어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지 모르지만, 정작 이 과정에는 의식과 비슷한 무엇도 요구되지 않는다. 유도 미사일과 같은 기계가 원래 의식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설계되고 제작되었기 때문에 의식을 가진 인간의 직접적 제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식의 생각이 흔히 빚어지는 오해이다. 또 다른 유형의 오해는 <사람 조작자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기 때문에, 컴퓨터는 진정한 의미에서 체스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유전자가 행동을 <제어한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도 연관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컴퓨터 체스는 이 점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사례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간단히 설명하기로 하자.
컴퓨터는 아직 체스 챔피언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이미 아마추어로는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좀더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체스 <프로그램들이> 높은 아마추어 수준에 도달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체스 프로그램이 기술을 발휘하는 데에는 어떤 컴퓨터를 사용하든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 프로그래머의 역할은 무엇인가? 첫째, 그는 실을 잡아당겨 꼭두각시를 조종하듯이 매순간 컴퓨터를 조작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속임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그것을 컴퓨터에 공급한다. 그런 다음 컴퓨터는 혼자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자신의 수를 타이핑하는 상대 선수 이외에는 어떤 인간의 개입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프로그래머는 체스 경기에서 나타날 수 있는 말들의 모든 위치를 예상하고, 각각의 경우에 대한 명수를 열거한 긴 목록을 컴퓨터에 제공하는 것일까? 거의 확실히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체스에서 가능한 위치의 숫자는 그 목록을 완성하기 전에 세계가 끝날 정도로 엄청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모든 가능한 수와 그에 대한 상대의 응수를 <머리 속에서> 읽어내서 승리 전략을 찾아내도록 컴퓨터를 프로그램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은하계 속에 있는 모든 원자의 수보다도 가능한 체스 게임의 형태가 더 많을 것이다. 컴퓨터가 체스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하는 문제와 같이,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않는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기로 하자. 사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며, 가장 뛰어난 프로그램도 아직 체스 챔피언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프로그래머의 실제 역할은 오히려 아들에게 체스를 가르치는 아버지의 역할과 흡사하다. 그는 컴퓨터에 체스의 기본적인 수를 가능한 모든 위치에 대해 따로따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좀더 경제적으로 표현된 규칙에 의거해서 가르친다. 그는 평이한 말로 <비숍을 대각선 방향으로 움직여라> 라고 문자 그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 상응물의 형태로 이야기해 준다. 예를 들면 (실제로는 더 간단하지만)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비숍의 새로운 좌표는 이전의 x 좌표와 이전의 y 좌표에, 부호는 반드시 같을 필요가 없지만 같은 상수를 더해서 얻어진다.> 그런 다음 그는 같은 종류의 수학적 또는 논리적 언어로 작성된 <조언> 을 프로그램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말로 바꾸면 <왕을 무방비 상태로 놔두면 안 된다> 라든가 기사로 양수걸이를 하는 식의 유효한 전법에 대한 암시에 해당할 것이다. 이와 연관된 상세한 내용은 흥미를 자아내지만, 우리의 주제와는 무관하다. 중요한 점은 실제로 체스 경기를 할 때 컴퓨터는 자력으로 게임을 하는 것이고, 그 주인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프로그래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특정한 지식 목록과 작전, 그리고 전법의 암시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컴퓨터를 가능한 한 가장 바람직한 상태로 <미리> 설정해두는 정도이다.
마찬가지로 유전자도 직접 인형의 실을 조종하는 방식이 아니라 간접적인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방식으로 생존 기계의 행동을 제어한다. 유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미리 생존 기계의 상태를 설정하는 것이며, 그 이후에는 생존 기계가 독자적으로 모든 일을 해 나간다. 유전자는 그저 생존 기계 속에 수동적으로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유전자는 그렇게 수동적일까? 왜 고삐를 쥐고 매순간 제어하지 않을까? 그 답은 타이밍의 문제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사례는 한 SF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레드 호일 (Fred Hoyle) 과 존 엘리엇 (John Elliot) 의 작품 『안드로메다의 A (A for Andromeda)』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뛰어난 SF 가 모두 그렇듯이 이 작품도 흥미로운 과학적 함축을 담고 있다. 기묘하게도 이 책은, 이러한 숨겨진 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지고 있다. 내가 여기에서 그 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더라도, 저자들이 너그럽게 용서하기 바란다.
200 광년 떨어져 있는 안드로메다 자리에 하나의 문명이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먼 세계까지 넓히고 싶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을까? 직접적인 여행은 불가능하다. 빛의 속도가 우주의 두 지점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 속도의 상한을 이론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기술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실제 속도의 한계는 더 낮아진다. 게다가 모든 세계가 방문할 만큼의 가치를 갖지는 않을 텐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전파는 우주의 다른 영역과 교신하는 더 나은 방법이다. 전파를 한 방향으로 보내지 않고 모든 방향으로 신호를 발송할 수 있을 정도의 출력을 갖춘다면 당신은 무척이나 많은 세계 (그 수는 신호가 진행하는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서 늘어난다) 와 교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파는 빛의 속도로 진행한다. 그러나 이것은 안드로메다에서 보낸 신호가 지구에 도착하는 데 200 년이 걸린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 정도의 거리에서는 절대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구에서 보내온 메시지에 대한 응답이 그 메시지를 보냈던 사람들로부터 약 12 세대 후의 자손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그 정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분명 낭비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곧 우리에게도 심각하게 제기될 것이다. 전파가 지구에서 화성까지 가는 데 약 4 분이 걸린다. 따라서 우주 비행사가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습관을 버리고 대화라기보다는 편지에 가까운 긴 독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로저 페인 (Roger Payne) 은 바다가 독특한 음향학적 특성을 가지며, 그 때문에 혹등고래가 특정한 깊이의 바닷속을 헤엄치고 있을 때, 이 고래의 아주 큰 <노래> 는 이론상 전세계의 모든 바닷속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고래들이 실제로 아주 멀리 떨어진 동료들 사이에서 교신을 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들도 화성의 우주 비행사와 거의 비슷한 곤경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물 속에서 전파되는 소리의 속도에 따르면, 그 노래가 대서양을 가로질러 전달되고, 그 노래에 대한 답신이 도착하기까지는 약 2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고래들이 무려 8 분 동안이나 독백을 계속하고, 어떤 부분도 반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것을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노래의 첫머리로 되돌아가 약 8 분 간의 노래를 완전히 되풀이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
앞에서 예로 든 소설 속의 안드로메다인도 고래와 같은 일을 한 것이다. 대답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모아 끊이지 않는 긴 메시지로 만든 다음, 몇 개월을 주기로 그것을 몇 번씩 되풀이해서 우주 공간으로 송신했다. 그러나 그들이 보낸 메시지는 고래의 메시지와 아주 다르다. 그들의 메시지는 거대한 컴퓨터의 제작과 그 프로그래밍에 대한 암호화된 명령으로 구성된다. 물론 이 명령은 사람의 언어로 씌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암호는, 특히 그것이 쉽게 해독되도록 만들어진 것이라면, 대개 숙련된 해독자에 의해 해독될 수 있다. 조드렐 뱅크 전파 망원경에 검출된 이 메시지는 결국 해독되어, 문제의 컴퓨터가 제작되었고, 프로그램이 실행되었다. 그런데 안드로메다인의 의도가 모두 이타적인 것은 아니어서 그 결과는 거의 인류의 파멸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컴퓨터가 전세계를 지배하는 독재자가 되려는 순간, 간신히 한 영웅이 도끼로 그 컴퓨터를 파괴한다.
우리의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서 안드로메다인이 지구에서 일어난 사건을 조종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여부가 흥미로운 문제가 된다. 그들은 컴퓨터가 매순간 하는 일을 직접 제어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정보가 되돌아가는 데 200 년이 걸리기 때문에, 사실 그들로서는 컴퓨터가 제작되었다는 사실조차 알 길이 없다. 컴퓨터가 내린 결정과 그 행위는 전적으로 컴퓨터 자신에 의한 것이고, 그 컴퓨터는 자기의 주인인 안드로메다인에게 문의해서 일반적인 정책 지시를 받을 수도 없었다. 200 년이라는 넘을 수 없는 시간의 장벽 때문에 모든 명령은 미리 짜 넣어져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원칙적으로 그 컴퓨터는 체스 경기 컴퓨터와 흡사한 방식으로 프로그램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국소적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한 유연성과 용량은 훨씬 늘어났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 프로그램이 지구뿐 아니라 선진 기술을 가진 모든 세계, 즉 안드로메다인이 세부조건을 알 수 없는 모든 세계에서 제대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안드로메다인들이 자신들을 대신해서 날마다 결정을 내리기 위한 컴퓨터를 지구상에 가져야 했듯이, 우리의 유전자도 뇌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유전자는 암호화된 명령을 보낸 안드로메다인일 뿐 아니라 명령 그 자체이기도 하다. 또한 유전자가 우리 꼭두각시의 실을 조종할 수 없는 까닭도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간 지연 때문이다. 유전자는 단백질 합성을 제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것은 세계를 조작하는 강력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속도가 느리다. 하나의 배아를 만들기 위해 인내심 깊게 단백질이라는 실들을 잡아당기는 데 몇 달이나 걸리는 것이다. 반면에 전체적인 측면에서의 행동은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그것은 몇 개월이라는 시간 척도가 아니라 몇 초, 또는 몇 분의 1 초에 일어난다. 이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머리 위로 올빼미가 스쳐 날아가고, 키 큰 풀숲에서 나는 바삭거리는 소리가 그 속에 숨은 먹이의 위치를 알려주면 불과 몇 밀리초 사이에 신경계가 작동하고 근육이 수축하면서 한 생명이 구원되거나 사라진다. 유전자에는 이런 식의 반응 시간이 없다. 안드로메다인과 마찬가지로 유전자 역시 스스로를 위해 빠른 처리 능력을 가진 컴퓨터를 제작하고, <예상> 할 수 있는 발생 가능한 모든 사건에 대처하기 위한 규칙과 <충고> 를 미리 프로그램함으로써 사전 대비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상의 일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체스 게임도 그렇듯이 생명에는 너무나 다양한 사건이 많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예상하기란 불가능하다. 체스 프로그래머와 마찬가지로, 유전자 역시 그들의 생존 기계에 구체적인 세부 사항이 아니라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일반적인 전략과 책략을 <지시> 해야 한다.
영 (J. Z. Young) 이 지적하듯이 유전자는 예언과 흡사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존 기계의 배아가 만들어졌을 때, 그 생명의 미래에는 많은 문제와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포식자가 어떤 덤불 뒤쪽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어떤 발빠른 먹이감이 쏜살같이 직선을 그리며 달아날지, 아니면 지그재그로 달아날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어떤 예언자도, 어떤 유전자도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예상이라면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할 것이다. 북극곰의 유전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들의 생존 기계 후손의 미래가 몹시 추울 것이라는 분명한 예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는 그것을 예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다. 북극곰의 유전자들은 단지 두꺼운 모피를 만들 뿐이다. 왜냐하면 그 유전자들은 자신들이 들어 있던 과거의 몸에서도 언제나 그렇게 해왔고, 그 유전자들이 유전자 풀 (gene pool, 번식하는 생물 개체의 집단 [멘델 집단이라고 한다] 속의 전 개체가 갖는 유전자의 총체를 말한다. - 옮긴이) 속을 아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곧 땅이 눈으로 덮일 것을 예견하고, 그 예견은 모피를 흰색으로 만들어 보호색을 갖게 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만약 북극의 기후가 급격히 변화해서 아기 곰이 열대의 사막에 태어나는 식의 사태가 일어난다면, 유전자의 예견은 잘못으로 판명되고 그 대가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린 곰이 죽고 체내의 유전자 역시 소멸하게 된다.
미래를 예견하는 가장 흥미로운 방법 중 하나가 시뮬레이션 (simulation, 모의 실험) 만약 어떤 장군이 특정 작전 계획이 다른 작전보다 뛰어난지 알고 싶다면, 그는 예견이라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기상, 자신의 군대의 사기, 그리고 적이 취할 수 있는 대응책 등에 모두 알려지지 않은 많은 요소가 존재한다. 어떤 작전이 좋은 작전인지 알아내는 한 가지 방법은 실제로 시험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젊은이의 수는 한계가 있고, 시험해야 할 가능한 작전 계획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단순한 사실만 보더라도, 불확실한 모든 계획을 이런 방식으로 시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많은 손실이 따르는 실전 대신, 예행 연습으로 다양한 게획을 시험하는 편이 더 낫다. 가령 공포탄을 이용해서 <동군> 과 <서군> 이 실전과 똑같이 전투를 벌이는 방식도 있지만, 이 방법도 많은 시간과 물자를 낭비한다. 그보다 더 경제적인 방법은 큰 지도 위에서 양철로 만든 군인과 장난감 전차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전쟁 게임을 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군사 작전분 아니라 경제학ㆍ생태학ㆍ사회학 등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에서 컴퓨터가 시뮬레이션 기능의 대부분을 떠맡고 있다. 그 기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세계의 일부 측면에 대한 모형 (model) 이 컴퓨터 속에 설정된다.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 본체의 나사를 풀고 뚜껑을 열면 시뮬레이트된 대상과 똑같은 형태를 갖춘 축소 모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체스 경기 컴퓨터의 경우에도 기사와 졸들이 올려져 있는 체스판으로 인식될 수 있는 일종의 <정신적인 상> 이 기억 장치 속에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체스판과 그 판 위에 놓인 말들의 위치는 전자적으로 부호화된 숫자들의 목록에 의해서 표현될 것이다. 우리들의 경우 지도는 세계의 일부를 이차원으로 압축한 축척 모형이다. 컴퓨터 내부의 지도는 아마도 위도와 경도라는 두 개의 수치로 나타낸 마을과 그 밖의 지점 목록으로 표현될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가 실제로 어떻게 머리 속에 세계의 모형을 간직하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컴퓨터가 그것을 토대로 작업하고, 그것을 조작하고, 실험에 이용하고, 인간 오퍼레이터가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그 내용을 보고할 수 있는 형태로 그 모형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모의 실험 기법을 통해 모의 전투는 승리하거나 패배하고, 시뮬레이트된 비행기는 날거나 추락하고, 경제 정책은 번영을 가져오거나 파탄에 이르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모든 과정은 컴퓨터 내부에서, 그리고 실생활에 비교해서 불과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진행된다. 물론 세계 모형에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으며, 좋은 것이라 해도 단순한 근사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모의 실험을 많이 해도 실제로 일어날 일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좋은 모의 실험은 맹목적인 시행 착오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래 전에 쥐 심리학자들이 사용하여 이미 선취된 용어이긴 하지만, 모의 실험을 대리 시행 착오 (vicarious trial and error, 미로 실험 등에서 쥐와 같은 실험 동물이 선택 지점에서 멈추어 서서 머리와 몸을 좌우로 흔드는 현상이 관찰된다. 이것은 실제 시행 착오 행동을 대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학습심리학에서는 <대리 시행 착오> 라고 불린다. - 옮긴이) 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뮬레이션이 그렇게 훌륭한 개념이라면, 우리는 생존 기계가 먼저 그것을 발견했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인간이 가진 그 밖의 많은 공학 기술 중 상당 부분을 인간이 출현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발명했다. 예를 들어 초점을 맞추는 렌즈와 포물면 거울, 음파의 주파수 분석, 조타 장치를 이용한 조종, 수중음파 탐지기, 입력 정보의 버퍼 기억, 그리고 그밖에 아주 긴 이름을 가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치가 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시뮬레이션은 어떤가? 예를 들어 미래에 당신이 미지량을 포함하는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했을 때 당신은 일종의 시뮬레이션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가능한 선택지의 각각에 대해 만약 그것을 선택했을 때 어떻게 될지 <상상>하게 된다. 당신은 세계 전체가 아니라 유관하다고 여겨지는 제한된 집합에 대해 머리 속에서 모형을 세운다. 당신은 마음의 눈으로 그것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도 있고, 그것의 양식화된 추상적인 모습을 보거나 조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당신의 뇌 속에 전개되는 장소가 당신이 상상하는 사건의 실제적인 공간 모형일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뇌가 어떻게 세계 모형을 표현하는가에 대한 세부 사항은 뇌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예측하기 위해서 그 모형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비하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래를 모의 실험할 수 있는 생존 기계는 진짜 (overt) 시행 착오를 통해서만 학습할 수 있는 생존 기계보다 한 걸음 더 진전된 것이다. 진짜 시행의 문제는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진짜 착오는 종종 생존 기계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다. 그에 비해 모의 실험은 더 안전하고 신속하다.
시뮬레이션 능력의 진화가 점차 누적되어 결국 주관적 의식을 발생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내 생각이지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문제는 현대 생물학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깊은 수수께끼일 것이다. 전자식 컴퓨터가 시뮬레이션을 할 때 의식을 갖고 있다고 상상할 이유는 없다. 물론 미래에 컴퓨터가 의식을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해야겠지만 말이다. 아마도 뇌의 세계 시뮬레이션이 완전하게 되어 뇌 자체의 모형까지 포함시키게 되었을 때 의식이 발생했을 것이다. 생존 기계의 사지와 몸은 시뮬레이트된 세계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에 틀림없다. 같은 이유에서 시뮬레이션 자체도 시뮬레이트되어야 할 세계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표현을 쓰자면 <자의식 (self-awareness)> 이 되겠지만 나는 이것으로 의식의 진화가 충분히 설명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이 설명에 무한 회귀 (infinite regress) 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즉 만약 모형의 모형이 존재한다면 모형의 모형의 모형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의식과 연관해서 어떤 철학적 문제가 제기되든 간에, 우리의 논의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의식은 생존 기계가 결정 수행자가 됨으로써 그 궁극적인 지배자인 유전자로부터의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진화적 경향의 극치라고 생각할 수 있다. 뇌는 생존 기계와 연관된 일상사를 관리할 뿐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고 그에 대응하는 행동을 취하는 능력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뇌는 유전자의 명령을 거역할 힘을 갖게 되었다. 가령, 될 수 있는 한 많은 아이를 낳으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인간은 이 점에서 대단히 특수한 예이다.
이 모든 것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나는 동물의 이타적이거나 이기적인 행동이 간접적이지만 대단히 강력한 의미에서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다는 개념을 수립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생존 기계와 그 신경계가 만들어지는 방법을 명령함으로써 유전자는 최고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매순간 결정하는 것은 신경계이다. 유전자는 최고 정책 결정자이고, 뇌는 집행자이다. 그러나 뇌가 더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학습가 시뮬레이션 등의 방법을 이용해서 뇌는 점차 실제 정책 결정의 많은 부분을 관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논리적 귀결은 아직 어떤 생물종에서도 실현되지 않았지만, 유전자가 생존 기계에 단 하나의 포괄적인 정책 명령을 주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 명령은 무엇이든 우리의 생존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라는 것이다.
물리학의 법칙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전 우주에서 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생물학에도 마찬가지로 보편 타당한 원리가 있을까? 우주 비행사가 먼 행성을 여행해서 생물체를 찾았을 때,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하고 비현실적인 생물을 발견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디에서 발견되든, 어떤 화학적 기반을 갖든 모든 생물체에 대해 참인 무엇이 존재할 수 있을까? 만약 탄소 대신 규소를, 물 대신 암모니아를 화학적 기반으로 삼는 생명 형태가 존재한다면, 만약 섭씨 영하 100℃ 에서 비등해서 죽는 생물이 발견되었다면, 만약 화학적 기반을 전혀 갖지 않고 전자 반향 회로를 기반으로 하는 생명 형태가 발견되었다면? 그런 경우에도 모든 생명에 적용할 수 있는 일반 원리가 있을까? 내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만약 어느 쪽에든 돈을 걸어야만 한다면, 나는 하나의 기본 원리가 있다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이 자기 복제하는 생물의 생존력 차이를 통해 진화한다는 법칙이다. 유전자, 즉 DNA 분자는 자기 복제하는 존재자로서 우연히 우리 행성에서 그 세력을 넓히게 되었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다른 분자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만약 다른 조건들이 만족되었다면 다른복제 분자들이 거역할 수 없는 진화 과정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복제자와 그에 따르는 다른 종류의 진화를 찾아내기 위해 먼 세계까지 가야 할까? 나는 새로운 종류의 복제자가 극히 최근에야 이 행성에 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 복제자는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우리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그것은 아직 유년기에 불과하며, 그 원시 수프 속을 꼴사나운 모습으로 떠돌아 다니고 있지만 오래 된 유전자의 진화 속도를 훨씬 능가하는 빠른 속도로 이미 진화적 변화를 달성하고 있다.
이 새로운 수프는 인간 문화라는 수프이다. 우리는 새로운 복제자의 이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문화 전달의 단위, 즉 <모방 (imitation)> 의 단위라는 생각을 잘 표현할 명사여야 한다. 이런 조건에 맞는 그리스어는 <Mimeme> 이다. 그러나 나는 <유전자 (gene)> 와 비슷한 울림을 갖는 단음절의 단어를 원한다. 여기에서 <mimeme> 을 <meme> 으로 줄여도 내 고전학자 친구들은 너그러이 용서해 주리라고 믿는다. 이 단어가 영어의 <memory> 나 불어의 <meme> 와 연관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약간의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meme> 은 <cream> 과 같은 운으로 <밈> 이라고 읽어야 할 것이다.
밈의 예로는 곡조, 아이디어, 표어, 의복 패션, 항아리나 건축물의 아치를 만드는 방법 등을 들 수 있다. 마치 유전자가 정자와 난자를 통해 몸에서 몸으로 건너뛰면서 유전자 풀 속에서 스스로를 전파시키듯이, 밈도 넓은 의미에서 모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을 통해 뇌에서 뇌로 건너뛰면서 밈 풀 (meme pool) 속에서 자신을 전파시킨다.
만약 어떤 과학자가 좋은 아이디어를 듣거나 읽으면, 그는 그것을 동료나 학생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그는 논문과 강의에서도 그 아이디어를 언급할 것이다. 만약 그 아이디어가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뇌에서 뇌로 전달되면서 스스로를 전파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동료 험프리 (N. K. Humphrey) 는 이 장의 초고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밈은 단지 은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전문적인 의미에서도 살아 있는 구조로 간주되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번식력이 있는 밈을 내 마음 속에 심어주었을 때, 당신은 문자 그대로 내 뇌 속에 알을 낳은 것이고,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의 유전 기구에 기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나의 뇌를 그 밈의 번식을 위한 매체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언어적 수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사후의 삶에 대한 신앙' 이라는 밈은 전세계 사람들의 신경계 속에서 하나의 구조로 수백만 번이나 되풀이해서 실제로 물질적인 형태로 실현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상호 적응된 co-adapted 유전자 복합체와 같은 방식으로 상호 적응된 밈 복합체도 진화하게 될 것이라고 추측한다. 선택은 문화적인 환경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밈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 문화적 환경은 마찬가지로 선택받는 다른 밈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밈 풀은 새로운 밈이 침입하기 어려운, 진화적으로 안정된 집합체의 여러 가지 특성을 갖게 된다.
나는 지금까지 밈에 대해 조금 부정적으로 이야기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측면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죽었을 때 후세에 남길 수 있는 것은 유전자와 밈이라는 두 가지이다. 우리는 유전자 기계로 우리의 유전자를 전달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측면은 3 세대 안에 잊혀질 것이다. 당신의 자식, 아니 손자까지도 가령 용모나 음악적 재능, 머리카락 빛깔 등에서 당신을 닮을 수 있다. 그러나 세대를 거치는 동안 당신의 유전자의 기여도는 반감된다. 무시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기까지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우리의 유전자는 불사일지 모르지만, 우리 개개인을 구성하는 유전자 집단은 산산조각으로 분해될 운명을 갖는다. 엘리자베스 2 세는 윌리엄 1 세의 직계 후손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정복자 윌리엄의 유전자를 단 하나도 물려받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생식에서 불사성을 찾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세계 문화에 기여했다면, 예를 들어 당신이 훌륭한 사상을 가졌거나, 작곡을 하거나, 점화 플러그를 발명하거나, 훌륭한 시를 쓰면, 그것은 당신의 유전자가 공동의 풀 속으로 용해된 훨씬 뒤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스 (G. C. Williams) 가 지적했듯이 소크라테스의 유전자가 오늘날까지 한 개나 두 개 정도 남아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나 소크라테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코페르니쿠스, 마르코니 등의 밈 복합체는 지금도 강력하게 살아 있다.
도킨스는 분자라는 작은 단위가 우연히 형성되어 자기 복제를 위한 자원을 둘러싼 격렬한 경쟁이라는 냉혹한 여과 과정을 수 없이 되풀이하면서 비등하는 분자적 격동 과정에서 생명과 마음이 발생했다는 환원론자의 주장을 설명하는 데 고수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환원론은 이 세계의 삼라만상을 물리학 법칙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무엇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는 이른바 <창발적 (emergent)> 특성, 또는 조금 시대에 뒤떨어졌지만 많은 것을 환기시키는 언어를 사용하자면, <엔텔레케이아 (entelechies)>, 즉 그 부분을 지배하는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차 수준의 구조는 존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자. 당신은 고장난 타자기를 (또는 세탁기나 사진 복사 기계라도 무방하다) 수리하기 위해 공장으로 보낸다. 1 개월 후에 그 기계가 공장에서 당신에게 돌아왔다. 타자기는 (당신이 보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재조립되어 있었지만, 거기에는 <모든 부품에는 아무런 결함도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전체가 움직이지 않는다> 는 내용의 쪽지가 붙어 있었다. 이런 일을 당한다면 정말 어이없는 느낌이 들 것이다. 부품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기계가 작동하지 않다니! 분명 어딘가 잘못된 곳이 있을 것이다! 일상 생활의 거시적인 영역의 상식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원리는 당신이 전체에서 부분으로, 그리고 그 부분의 부분이라는 상태로 점차 단계를 내려갈 때에도 계속 통용되는 것일까? 상식은 여기에서도 <그렇다> 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의 성질에서 물의 성질을 이끌어낼 수 없다> 라거나 <생물은 그 부분의 합 이상의 무엇이다> 라는 이야기를 여전히 믿고 있다. 아무튼 사람들은 원자라는 것을 단순한 당구공과 같은 것으로 상상하고, 단지 화학적인 원자가를 가졌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처럼 진실과 거리가 먼 생각도 없을 것이다. 원자와 같은 매우 작은 크기로 내려가면 <물질> 의 수학은 훨씬 더 어려워진다. 상호 작용하는 소립자에 관해서 리처드 매툭 (Richard Mattuck) 의 교과서를 한 구절 인용해 보자.
다체 문제 (many-body problem) 에 관한 논의의 가장 바람직한 출발점은 우선, 물체의 숫자가 몇이 되면 어려움이 발생하는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브라운 (G. E. Brown)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엄밀해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18 세기 뉴턴 역학으로는 3 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1910 년경에 일반상대성이론, 그리고 1930 년 무렵에 양자전자역학 (quantum electrodynamics) 이 탄생하면서 2 체와 1 체 문제가 해결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의 양자장 이론에서는 0 체 (진공) 가 해결 불가능하다. 따라서 엄밀해를 구하려는 한 어떤 물체도 이미 그 숫자가 지나치게 많은 것이다.
|
여덟 개의 전자를 가진 산소와 같은 원자에 대한 양자역학을 해석적으로 완전히 푸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물 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수소와 산소 원자가 가진 성질도 기술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악하기 힘들다. 물이 가진 붙잡기 힘든 수많은 특성은 바로 거기에서 기인한다. 그러한 특성의 대부분은 원자를 단순화시킨 모형을 사용해서 상호 작용하는 많은 분자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연구할 수 있다. 원자 모형을 개량할수록, 당연한 일이지만 시뮬레이션은 실제로 가까워진다. 사실 컴퓨터 모형은 개별 구성 요소의 특성만 알려졌을 때, 동일한 다수의 구성 요소로 이루어진 집합의 새로운 특성을 발견하기 위해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개별 항성을 이동 가능한 인력 지점 (gravitating point) 으로 모형화함으로써, 은하계의 나선팔이 형성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또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개별 분자를 전자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구조로 모형화해서 고체, 액체, 그리고 기체가 어떻게 진동하고, 유동하고, 상변이를 일으키는지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막대한 수의 개체가, 우리의 시간 척도로 보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정한 법칙에 따라 상호 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잡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사실이다.
도킨스는 자신의 저서를 끝맺으면서 밈 (마음 속에 거주하는 소프트웨어 복제자) 에 대한 자신의 밈을 제안하고 있다. 또한 그 개념의 제출에 앞서는 부분에서는 서로 상대의 생명을 떠받쳐주는 매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언급하지 못한 것은 중성자별 표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곳에서는 원자의 경우보다 수천 배나 빨리 원자핵 입자들의 결합과 분리가 일어날 수 있다. 이론상 원자핵 입자의 <화학> 은 극미한 자기 복제 구조가 존재할 수 있고, 그것은 지구상의 느린 속도의 생명과 동등한 복잡성을 가지며, 그 초고속의 생애는 눈깜짝하는 순간에 지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만약 존재한다면 과연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것은 지구에서의 며칠 동안 한 문명의 흥망성쇠가 모두 일어날 수 있다는 놀라운 착상을 준다. 그야말로 슈퍼 릴리퍼트 (super-Lilliput, 릴리퍼트는 조너선 스위프트 (Jonathan Swift) 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의 이름이다. - 옮긴이) 인 셈이다. 이 책에 실린 렘의 글은 모두 이런 특성을 갖는다. 특히 이야기 열여덟의 「일곱번째 여행」을 참조하라.
이런 기묘한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복잡한 생명 비슷한 (lifelike) 또는 사고 비슷한 (thoughtlike) 활동을 뒷받침하는 매체가 무수하게 다양할 수 있다는 가변성 (variability) 에 대해 독자들이 마음을 열어놓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변성의 개념은, 의식이 개미 군집에 있어서의 각 수준의 상호 작용에서 창발된다는 다음 장의 대화에서 좀더 세밀하게 탐구된다.
D.R.H
http://www.aistudy.co.kr/biology/genetic/selfish_gene.htm